권지은_선(禪)을 긋다전
불화의 보편성과 창작에 관한 시론(時論)
권지은의 불교회화는 조선불화의 초본(草本)을 따르지만
고려불화의 색이나 문양과 같은 양식을 따르는 부분적인 창의성도 드러난다.
그러나 자유로운 필선과 내용으로 구사하는 500나한도와 같은 작품에서는 작가 스스로가
고전의 엄격함 속에서 탈피하고 작가적 시각이 투영된 인간적이고
개성이 넘치는 작품을 완성하는 것도 볼 수 있다.
글 : 박옥생(미술평론, 한원미술관 큐레이터)
[2010. 12. 15 - 12. 21 인사아트센터 1층]
[인사아트센터]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02-736-1020
홈페이지로 가기 http://www.insaartcenter.com
1. 보편성 & 성계(聖界)의 구현
불교회화는 성스러운 부처의 세계(聖界)를 구현한 그림이다. 이는 엄격한 도상의 법칙과 구성의 규범을 갖고, 경험적인 현상계를 뛰어넘는 초월적인 세계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형상화 한다. 정신적이고 관념적인 이러한 불계(佛界)의 구현을 위하여 불보살도상집(佛菩薩圖像集)과 같은 조형의 형식을 기록한 서적들이 일찍부터 완성되었다. 이것은 불교의 전파 경로를 따라 전해짐으로써 불교미술이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는 인식의 ‘보편적인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사실, 현대의 불교미술이 그 본래적인 기원(起源)과 원형(原型)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도, 불교미술이 갖는 보편적인 조형의 규범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불교미술이라 함은 도상의 전통성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또한 도상의 정확성은 성스러운 예배상을 가시적으로 드러내게 하는 방편이었음을 알게 한다.
2. 권지은의 불교회화
권지은의 불교회화는 삼신도 후불화(비로자나 노사나 석가), 신중도, 천수천안관음보살도, 12지신, 금강역사상, 미륵하생경변상도, 500나한도 등 불교회화에서 신앙되는 영역들을 폭넓게 망라하고 있다. 작가는 이러한 고려불화의 비단과 석채와 같은 재료에서 오는 깊고 아득하고 선명한 색의 세계와, 인간의 호흡을 닮은 길고 섬세한 선, 원문(圓紋)과 같은 갖가지 정교한 금으로 호화롭게 치장한 문양에서 깊은 감동을 받고 있는 것이다.
미륵하생경변상도_184×105_견본채색_2010
귀의삼보하옵고_중_100×64_견본채색_2010
삼신불도-비로나자불_231×173_견본채색_2010
신중도_521×73_견본채색_2010
3. 불교회화와 작가(artist)
불화의 조성 과정의 마지막으로서, 부처님의 상호는 예배 상으로써의 생명과 작가의 혼을 불어넣는 작업이자 부처의 원력(願力)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조선시대 불화의 상호는 전체적으로 오밀조밀한 형상을 갖고 있는데, 조선시대 뚜렷한 활약상을 보인 의겸(義謙), 신겸(信謙)과 같은 화사들은 개인적인 양식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의겸이 그린 상호는 전체적으로 원만하나 눈썹이 짧고 아래로 처지며, 입이 상대적으로 작은 것을 볼 수 있다. 신겸은 얼굴의 크기에 비해 비율적으로 큰 코와 작은 눈을 갖고 있는데 여타의 화사들이 그린 상호에 비하여 개성적이다. 특히 권지은의 부처님 상호에서 드러나는 둥글고 온화하며 이상화된 얼굴은 고려불화에서 보이는 붓다의 상호와 근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권지은의 불교회화는 조선불화의 초본(草本)을 따르지만 고려불화의 색이나 문양과 같은 양식을 따르는 부분적인 창의성도 드러난다. 그러나 자유로운 필선과 내용으로 구사하는 500나한도와 같은 작품에서는 작가 스스로가 고전의 엄격함 속에서 탈피하고 작가적 시각이 투영된 인간적이고 개성이 넘치는 작품을 완성하는 것도 볼 수 있다. 실제로 불, 보살, 신중과 같은 봉안(奉安)을 위한 존상(尊像)을 제외한 나한(羅漢)과 같은 불제자를 포함한 고사속의 인물들은 보다 더 적극적이고 자유로운 창작의 문을 열어놓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작가는 아마도 나한을 통하여 창작 인으로서의 자유를 만끽하고 그 면모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권지은의 불화는 신체의 연결이 유기적이고 논리적이며 자연스러운 곡선을 구사하고 있다. 조선불화가 갖고 있는 즉물성을 작가는 배채(背彩)와 비단, 오리나무 염색과 같은 재료와 기법으로 깊고 중화된 색의 세계로 변모시켰다. 작가는 불교미술도 현대인의 미감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또한 현대인의 미의식에 맞게 변형되고 창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화면의 불보살, 신장상들은 균형이 잘 잡힌 8등신의 시원한 비율과 세련된 선을 갖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작가가 현대화에 관한 모색을 통하여 창의적인 조형을 창출함으로써, 불교회화가 갖는 낯선 시간의 간극을 매우고 친근하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완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귀의삼보 하옵고>와 같은 백제 불화를 고증한 작품은 화불(化佛)이 들어간 화염문 광배나 봉보주(捧寶珠) 보살상, 나무대좌와 여래상의 풍성하게 떨어지는 가사의 주름은, 현재 남아 있는 백제 조각상과의 연관성 안에서 그려졌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작가의 고증(考證)은 백제 불화가 남아 있지 않은 현 시점에서 사료로서의 가치도 함께 지니고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불교회화는 선(線)을 만들어 내는 것에 수행과 같은 지극한 시간을 필요로 하며, 선이 불교회화의 아름다움과 미적 목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래서 선을 그어내는 과정 속에서 몰입과 같은 완전한 자유를 얻는 작가적 수행의 한 방편이 승려 화사들을 통해 오랜 시간 계승되어 온 것도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불화 그리기를 통해 자신의 성찰과 기도의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즉, 불교회화는 그리는 이에게는 고전적 의미의 수행과 작가적 창작의 고민이, 관자에게는 신심(信心)을 발현시키는 교화로써의 의미와 지극한 미의 세계에 관한 관조(觀照)와 기쁨이 내재되어 있음을 알게 한다. 무엇보다 권지은의 불화는 불교회화의 현대적 해석과 표현에 그 방법적 모색을 시도하고, 보편적 통일성을 오랜 시간 확보해 온 전통 안에서 창작에 관한 고민하는 작가(artist)로서의 표현양식과 대안점을 제시하고 있다는데 그 가치와 의미가 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