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년 전 아직 겨울 냉기가 남아있는 바람이 불던 봄날이었다.
곤지암 기도원에서 사흘을 묵으면서 앞으로의 삶을 생각했었다.
돌아오는 날 그곳으로 나를 찾아온
목사가 있었다.
교도소를 돌아다니면서
전도하는 목사였다.
내가 그 목사가 운전하는
찝차를 얻어 타고 산길을 내려올 때였다.
핸들을 잡고 있던 목사가 입을 열었다.
“청송교도소에 한 죄수가 있는데 지난
십 오년 동안 한평짜리 감방에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받고 있다고 들었어요.
자살하거나 미치지 않은 게 이상하답니다.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게
철창을 막아버렸답니다.
그리고 두꺼운 아크릴 판으로 안쪽 문도 봉쇄해서 바깥의 공기라고는 변기 밑에 뚫려있는 작은 통풍구를 통해
들어오는 게 전부랍니다.
이십사시간을 감시당하면서 조금이라도 반항을 하면 손발이 꺽이도록 등 뒤로 단단히 묶어 버립니다.
그렇게 하면 밥도 엎드린 채 먹고 대소변도 대충 그 자리에서 싸야 한답니다.”
그런 지독한 경우는 처음 들어봤다.
영화 빠삐용의 빛을 차단한 독방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단테의 ‘신곡’에 묘사한 지옥도
그보다 훨씬 편한 것 같았다.
그 목사는 과장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역시 전과 오범 출신이라 감옥의 내부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죄를 저질렀으면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개도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 얼마 후 나는 목사가 말한
그를 찾아가 만났다.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바랜 남자였다.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교도소 안에서
그는 홋 겹의 얇은 죄수복을 입고 있었다.
그가 나를 보자마자 미친사람 같이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대양에서 싸운다 함께 뭉쳐라.
우리를 구원하신 김춘삼 원장,
우리의 원장”
그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노래를 마친 그가 입을 열었다.
“거지왕 김춘삼이라고 아시죠?
그 사람이 하는 고아원에서 살았어요. 거기서 여러 명이 맞아 죽었죠.
그 고아원 노래를 부르면서
무지하게 얻어터졌었죠.
그래도 꺽이지 않았어요.
갑자기 그때 생각이 나네요.
이 교도소도 어떤 방법으로도
저를 꺽을 수 없어요.
저를 죽이지 않는 한 저를
이길 수 있는 형벌은 없을 겁니다.”
극한의 고통으로 가면 오히려
그런 오기가 발동하는 것일까.
갑자기 그가 말을 끊고 뭔가 생각하는 표정이더니 내게 엉뚱한 말을 던졌다.
“변호사 윤리규정을 보면 변호사는 인권옹호와 사회정의를 위해 일한다고 나와있던데 인권옹호는 변론을 하는 거니까 알겠어요.
그런데 그 다음에 나와 있는 ‘사회정의’라는게 구체적으로
뭘 하는 겁니까?”
구체적으로 예를 들라니까
머리가 먹먹해졌다.
“특별히 깊게 생각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는 이미 뭔가 생각을 준비해 두고
내게 나온 표정이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저 같은 도둑놈은 어떤 말을 하든
세상은 믿지 않습니다.
도둑이니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죄인의 말이라도 변호사가 듣고 그걸 세상에 발표하면 얘기가
달라지는 거 아닐까요?
저는 그런 걸 변호사의 구체적인 사회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감옥의 제 옆방 사람이 맞아 죽고
은밀히 매장되는 걸 봤습니다.
어떻게 국가가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 나 같은 죄인이 그걸 말하면
세상은 듣지 않아요.
내가 나쁜 놈이니까요.
그런데 변호사가 그런 걸 폭로하거나
글로 쓰면 차원이 달라진단 말입니다.
저는 변호사의 사회정의임무는
그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재심을 신청해 주기를
원하는 게 아닙니까?”
“어차피 제 인생은 평생 도둑질을 하다가 감옥에서 비참하게 죽을지도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보고 저렇게 살아서는 안되겠구나 하고 생각 하게 하는 게 하나님이 저한테 준 소명같은데요.”
하나님은 입이 없다.
사람을 통해 메시지를 전할 수도 있다.
토스토엡스키는 변호사를
‘고용된 양심’이라고 했다.
나는 벽장 속에서 잠자던
나의 양심이 깨어나는 걸 느꼈다.
고정관념에서 눈에 비늘이
떨어지는 순간이라고 할까.
그를 통해 나는 ‘인권의 붓으로 정의를 쓴다’는 변호사의 멋진 길을 알았다고 할까.
엄상익 변호사의 블로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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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교도소의 한 죄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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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9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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