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15일, 특별한 하루의 평범한 기록
2학기2주차(220620)_송혜영
6월 15일. 야경이 멋진 호텔에서 고기를 썰며 장점 50가지가 적힌 편지와 큰 맘 먹고 산 취향저격 선물을 주고 받아야 할 것만 같은 날. 아니면 아이들은 어쨌든 누구에게 맡기고 둘이서 석파정이나 환기미술관 데이트를 갔다가 삼청각에서 우아하게 식사를 하고픈!- 바로 결혼기념일이다. 그러나 특별한 이벤트도 시간과 수고를 들여야 누릴 수 있다. 현실은 이렇다. 남편은 주중 한가운데를 지나느라 지쳐있고 나는 아이들 챙기고 나름 바쁜 시간을 보냈지 않은가. 결국 남편은 나에게 옷 한 벌 사 줄 카드를 챙겼을 거고, 나는 최고의 선물인 아이들을 양 손 가득 잡아들고 그렇게 동대문 H아울렛 지하 식당가에서 만났다.
스테이크와 파스타, 치킨샐러드까지 일단 식사 메뉴는 그럴싸하고 모두가 맛있게 먹었으니 합격. 이제 수순에 따라 옷을 살 차례다. 남편의 픽으로 원피스 두어 벌 입어봤으나 아무리 힘 줘도 표시나는 똥배가 감당안돼 내려놓고 생각보다 비싸서 내려놓았다. 내게 쇼핑은 설레임보다는 피곤함에 가깝다. 다음엔 뭐하나 호기심 가득한 아이들의 빛나는 눈동자 네 개를 무시하고 지친 기색 역력한 주인공 두 분은 말한다. "집에 가자." 쉬는 게 최고다.
152번 버스를 타려고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로 향했다. 눈 앞에는 평소 아이들이 타고 싶다 노래부르던 노란색 2층 버스가 서 있고, 매표소에는 한 남자가 시티투어 티켓을 사고 있다. 이를 지나 정류장에 섰는데 남편이 말한다. "얘들아, 2층버스 탈까?" 아이들의 반응을 말해 뭐하겠는가. 바로 우리는 버스 2층에 자리를 잡았고, 3분 뒤에 버스는 전통문화 야간운행코스를 출발했다.
7시 반, 해가 긴 때라 밝은 거리에 야경까지 볼 수 있다니 시간 좋고, 중간에 내리는 것 없이 70분 운행한다니 그저 쉬면서 눈과 입만 움직이면 된다. 서울에 관광객이 늘었다 해도 평일의 2층버스는 널널하고 아이들은 뜻밖의 횡재에 최근 들어 기분이 가장 좋아 보인다. 신호등이 너무 가까워 머리에 닿을 것 같다느니 버스에 탄 아저씨가 우릴 쳐다본다느니 나뭇가지가 스쳐 소리가 났다느니 헤헤히히 호들갑이다. 2층에 앉았다는 게 크다. 그것 빼고는 지금 지나는 곳이 어디인지 설명 하나 없어 사실 시내의 여느 버스 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래도 그 덕에 거리의 쌩소리가 딱 귀에 거슬리지 않을만큼 차분하게 와닿는다. 초여름 저녁의 시원한 바람은 하루동안의 노고를 날려버리기에 충분한지 옆에 앉은 남편의 입꼬리도 올라가 있다.
방산시장, 경복궁, 통인시장, 세종문화회관, 한국은행, 서울역, 남산과 명동, 광장시장... 서울에 몇 년 살았다고 궂이 지도앱 안 켜도 왠만한 건 알아보겠다. 언제 우리가 갔던 곳이라며 거기서 무엇을 봤고 어떤 일이 있었지, 들뜬 아이들 귀에 하는 말의 반쯤은 귓등을 스치고 날아가는데도 엄마는 계속 말하고 있다. 어쩌면 서울에 온 이후 다채로운 여행 같았던 삶을 스스로 곱씹어 보는 말하기다. 아니, 그 전부터 삶은 여행과 같았지. 결혼 전에는 원가족 속에 살며 미숙한 자신을 보며 오르막길을 꾸준히 올라갔다면, 결혼 이후에는 좀 더 안정적이고 평탄한 길로 들어선 느낌이다. 그리고 서울에 온 이후 아이들이 크면서 여유가 생겼다. 또 클수록 다니기도 좋아지면서 재미지고 풍성한 여행을 즐기고 있다. 어찌 보면 내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는 듯하다.
여행의 동반자로 남편은 꽤 훌륭하다. 우리 둘 다 박물관이나 고궁, 오래된 거리를 걷는 것을 좋아한다. 맑은 공기 깊이 들이마쉬며 자연 속에서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 물론 가기 전과 다녀온 후는 소파에서 충분히 안식하셔야 하고, 짐싸고 아이들 챙기고 뒷정리까지 99% 아내의 몫이긴 하지만. 일터에서는 하나님 주신 지혜로 자부심을 갖고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하고 있으며, 후배들을 아끼고 기회를 주는 멋진 선배이다. 살가운 사위는 아니지만 매달 친정에 용돈을 보내 물질 있는 곳에 마음 있다는 명제를 증명하는 고마운 남편이다. 직장상사에게 받는 스트레스를 나에게 쏟아내며 위로받기를 원할만큼 이야기상대로 여겨주고, 내가 하는 활동들을 존중하고 내 결정을 신뢰해주는 든든한 지원자다. 교회에 대한 불평을 하고 사람들이 왜이리 차갑냐 해도 한 구석에서 자신의 할 일을 하며 새벽 성경읽기반을 자원하는 것을 보면 교회를 사랑하고 예수님 닮고자 하는 열망을 지닌 사람이다.
이 정도 생각이 흘러가다 보니 낭만적이 되어선가 오늘 믿음의 고백이 스스럼없이 나온다. 앞의 표현을 살짝 바꿔야 할 것 같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100퍼센트 완벽한' 동반자이다. 지난 9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덕분에 흔들림 없이 함께 이 길을 걸어왔다. 앞으로의 여정이 기대와 함께 긴장도 조금 되지만, 어떤 일이 펼쳐지든 하나님께서 그 분을 닮은 인격으로 다듬어 가시며 우리를 통해 하나님나라를 이뤄가실 것이다.
어느덧 시티투어버스는 한 바퀴를 돌아 출발점인 DDP에 도착했다. 그리고 바로 이어 이번엔 진짜 152번에 몸을 싣고 우리 몸을 누일 집으로 향한다. 도시의 불빛과 흥분에 싸여 미처 인식 못했던 어둠이 이불처럼 몸을 덮는지 가은이는 엄마 무릎 위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 이렇게 우리의 아홉번째 결혼기념일이 저물어간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 했던가. 이벤트를 위해 아무 준비도 않았는데, 남편 좋고 아이들 이쁘고 이 도시와 밤이 사랑스러우니 생각할수록 너무나 만족스럽고 감사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