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단상 68/미풍양속]정월 대보름이라는 명절
정월 대보름, 누가 이 날을 명절이라고 챙길까. 아마도 방송에서 멘트 한 줄 하는 날로 넘어갈 듯하다. 아내는 일어나자마자 현관문을 열고, 주문한 ‘오곡밥’(쿠팡 로켓발송)이 오지 않았다고 툴툴대면서 나물반찬 몇 가지로 조촐한 아침밥상을 차렸다. 같이 대보름날을 한 집엣 맞이하니 이런 호사가 없다.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오곡밥과 아홉 가지 나물반찬, 이런 세시풍속은 언제까지라도 미풍양속으로 이어져 내려가면 좋으련만. 우리 자녀들이 예전 엄마들의 이런 정성을 기억하거나 흉내라고 낼 수 있을까. 어림없는 일일 터. 아내는 엊그제 애들 가족 만났을 때 ‘부럼(호도나 밤,잣 등 견과류)’을 사주지 못한 것을 애돌아한다. 아침 방송 프로에서 오늘 아침에 처음 만나는 친구에게 “00를 사가라고 하는 날인 줄 아느냐”는 문제를 냈다. 정답은 ‘더위’다. 도회지에서는 “내 더위 사가라”고 한 모양이나, 우리는 “니 더위, 내 더위, 맡더위”라고 했다. 문득 2014년 대보름날 쓴 졸문이 생각나 전재하는 것으로 대보름날 단상을 가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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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대보름-오곡밥과 아홉 가지 나물반찬
음력 1월 15일, 정월 대보름이다. 예전엔 한가위 버금가는 민족의 명절이었다. ‘내 더위 네 더위 맡더위’(눈을 뜨자마자 골목을 쏘다니며 맨먼저 만난 사람에게 하는 구호) 더위를 팔고, 줄다리기를 하며, 다리를 밟고, 쥐불놀이를 하고(깡통에 장작 쪼가리를 넣고 불붙인 후 저녁내내 빙글빙글 돌린다), 연을 날리며(마지막 날리는 날로, 모두 부엌이나 달집에 넣어 태워야 한다), 농악패가 어우렁더우렁 지신을 밟고(동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부엌과 마당를 휘어젓는다), 일년 중 가장 크고 밝고 둥근 보름달이 떠오르면 망월(望月), 달을 바라보며 각자 소원을 빌고 달집을 태웠다. 그런가하면 땅콩이나 호도, 은행, 밤, 잣 등 견과류를 먹어야 했으며(부럼 : 톡톡 깨물어 먹는 소리에 잡귀가 앗, 뜨거라 달아나는 통에 머리에 부스럼이 생기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 오곡밥에 아홉 가지 나물을 조물조물 묻혀 먹었다. 귀밝이술도 사실은 정월 대보름날 아침에 마시는 술로, 아침에 데우지 않고 찬 술을 마시면 귀가 밝아지고 귓병이 생기지 않으며 일년 내내 좋은 소식만 듣게 될 것이라는 미신이 있다. 믿거나 말거나(believe or not).
하여간, 오늘이 그 정월 대보름이다. 대보름날만 되면 최명희님이 쓴 불후의 대하예술소설 ‘혼불’의 한 장면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하곤 한다. 바로 거멍골의 춘복이가 달집을 태우는데 매안마을 강실이를 품에 안아 씨를 남기려는 간절한 꿈을 꾸며 “망월(望月. 우리는 망우리라고 했다)이야” 하며 산비탈을 내처 달려가는 장면 말이다. 나에게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다. 깐수메(통조림) 빈 깡통을 구해 송곳으로 사방군데 구멍을 뻥뻥 뚫은 후, 철도 침목(레일을 받치는 나무) 쪼가리를 떼내 차곡차곡 채운다. 기름기가 있어 한번 불이 붙으면 얼마나 잘 타던지. 밤새 지칠 줄 모르고 깡통을 돌리며 논두렁의 풀들을 태우며 이웃집 아이들과 밀고 땡기는 전쟁놀이를 했다. 달집 만드는 것은 또 얼마나 재미졌던가. 동산에 달이 떠오름과 동시에 불을 붙여야 했다. 동네사람 모두 나와 마을 앞 논에 만들어놓은 달집을 태우며 식구들의 건강과 풍년과 행운을 빌고 빌었다. 그렇게 공동체 마을의 밤은 깊어갔건만, 이제는 어디를 둘러봐도 이런 세시풍속 아무 데도 없다.
이제 정월 대보름은 우리의 어머니 음식으로만 남았다. 아홉 가지 나물을 꼭 그렇게 정성들여 만들어야 하는가. 어머니는 단연코 그렇다고 하신다. 이것이 바로 조선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한다. 취, 호박, 고사리, 시레기, 무, 시금치, 도라지, 콩나물 등의 나물을 참기름 넣고 조물조물 주물러 깨 푸짐히 뿌리고 나면 보기 좋고 맛있는 반찬이 한 상이다. 밍밍하지만 그런대로 맛있다. 아니, 강그럽다(입에 차악 달아붙을 정도로 고소하고 부드럽다는 전라도 방언). 거기에다 오곡밥이다. 이 날을 위하여 여름부터 가을까지 그렇게 호박을 삐져 말려 ‘꼬지’를 만들었나 보다. 기신기신 뒷산에 올라 자연산 고사리를 캐어 말렸나 보다. 처마 밑에 매달아 놓은 시레기는 물에만 풀어놓으면 그만이지 않던가. 참, 대단히 현명한 조선 여인네들의 고단한 삶이었다. 그렇게 평생을 일관했던 그 어머니, 이제 무릎관절 닳아질 대로 닳아져 걷기조차 못하신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절로 흐른다.
역시 보고 배운 것은 무서운 것인가. 일요일 오후, 아내가 아픈 몸을 이끌고 농협 하나로클럽을 가잔다. 좀 쉬면 좋으련만, 왜냐니까, 내일이 정월 대보름이라며 어떻게 가만히 있느냐고 한다. 아하, 식구들에게 오곡밥과 나물반찬을 만들어 주려고 하는구나. 햇땅콩도 한 봉지 사들고 왔다. 부엌에서 두어 시간 동당동당거리니, 어느새 여섯 가지 반찬이 식탁 앞에 놓여 있다. 신기할 손! 마술사가 따로 없다. 나도 그 비법을 배웠으면 좋겠다. 나중, 나중에 홀로 살 것을 생각해서다. 옆지기는 아홉 가지가 아니어서 미안한 표정이다. 천만에, 이만한 것이 어디랴. 홍복(洪福)이 따로 없다. 다 큰 두 아들에게 대보름의 유래와 세시풍속을 알려준다. 부럼도 권한다. 비벼 먹기에 안성맞춤이다. 현모양처(賢母良妻)의 표상이라고 한껏 치켜주다. 팔불출! 귀밝이술만 있었다면 그 아니 좋을손가. 행복한 일요일 만찬. 한국드라마 ‘오작교 형제들’을 보며 젊은 아이들의 사랑에 눈시울이 붉어지다.
첫댓글 미풍양속!
의미를 재새겨 보면서, 우천의 감격을 살짝 훔쳐봅니다.
수경당 형수님이 보여주는 두아들에대한 정성을 보면서, 2아들이 훌륭한 자녀로 자라는 것이 당연지사라 생각이 두는군요.
우천,막내 아들 해병수색대 훈련중 잠시 나온 그 막내에게, 그 비싼 돔을 회로 안치고 회전을 일일이 부쳐서 가져고 왔던 그 정성!
그 당시 속으로는 왜 회전?
했는데...
이 글을 보니 이해가 되는군요.
우리의 미풍양식속에 숨어있는 울 엄마의 정성도 떠올려보니, 그 시절이 그립군요.
내 감성에 방아쇠를 항상 당겨주는 글에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