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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立軍 義民團의 再發見
李榮浩 벨라도
序論
한국천주교회사 안에서 간도는 대단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곳은 지리적으로 볼 때 대륙 진출의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교회사적으로 보면 간도는 한국천주교회의 태동을 가능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회 성장 과정에도 많은 영향력을 주었다. 한국천주교회 초기, 간도는 선교사들이 입국하는 길목으로써 방인 사제 양성과 더불어 한국천주교회 성장의 요람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근대사의 경우, 간도의 변화 속도는 더욱 빨랐다. 일본의 강점기 중 간도는 한국인의 신천지로 급부상 되었기 때문이다. 간도는 한국인의 대량 이주로 이미 한국인의 도시로 변화되어 갔다. 이에 대하여 한중천주교회는 합리적인 차원에서 재치권이 시행되기도 하였다. 재치권이란 교회의 사목권(司牧權) 즉 교회를 다스리는 권한을 의미한다. 그 당시 간도의 상황은 거주민의 분포로 보아 80% 이상 한국인이었고 실제로 중국 언어가 통하지 않는 지역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재치권의 시기는 길지 않았다. 1904년에서 1920년, 즉 16년이란 짧은 기간이었다. 그러나 재치권의 이유가 충족 되기 이전의 시기를 감안하면 한국인의 간도 거주는 16년보다 훨씬 길다. 재치권 시기내에 간도는 일본의 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속에서 교회의 사회 참여라는 중대한 현실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교회는 평신도의 현실 참여, 즉 독립군 의민단이란 이름으로 시대적 소명에 당당히 응답하였다. 그러나 의민단 출현의 후유증은 대단했다. 의민단은 간도 지역내 개인뿐만 아니라 지역교회 전체를 파산 직전에 까지 이르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천주교회는 상처 투성이 간도를 통체로 받아 드렸다. 이유는 간단하였다. 이미 언급 한바와 같이 그곳의 주민 대부분이 한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원산교구의 간도 진출, 즉 한국천주교회의 연길교구 창설이 바로 그것이다.
역사는 멈추지 않았다. 살아 있는 생명처럼 새로운 역사를 끊임없이 만들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의민단으로 이미 초토화 된 간도교회는 이념 문제로 또다시 광풍속에 휘말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념 문제, 그것은 원산교구의 간도 진출을 강제로 퇴출 시켜 버린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1920년에서 시작된 한국천주교회내 연길교구는 1946년에 이르러 중국천주교회로 넘어 갔다. 26년의 짧은 시간속에 머무는 동안의 수 많은 상처들, 우리는 그것을 박해라고 한다. 비록 짧은 시간속의 고통이었지만, 한국천주교회 초기 순교와 비교될 만큼 크고 깊었다. 한국천주교회는 즉시 이념 갈등으로 인하여 희생된 이들을 위한 시성시복을 준비중이다. 시성시복, 그것은 신앙의 확실한 표현이며 진정한 용서와 화해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출발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은 오늘 우리가 함께 고민할 문제들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의민단의 출현, 그리고 이념 갈등으로 인하여 이어지는 시성시복이 바로 그것이다. 근대사에 나타난 이러한 사건들은 순수 한국천주교회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동북아 인권 문제 해결의 첫 출발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동북아 인권 문제, 그것은 월등한 민족의 강력한 힘, 또는 월등한 이념의 주장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가톨릭적인 문제 해결 방식, 즉 시성시복의 방법으로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동북아 인권 문제, 그것은 모든 인연들이 한꺼번에 뭉쳐진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수 백 년 동안 동북아 흥망성쇠에 따라 형성된 지역 특유의 감정, 아직도 진행중인 이념 갈등, 그리고 각 민족의 대 이동으로 복잡하게 엉겨 붙은 혈연관계, 현재에도 진행중인 강대국들의 이권 문제등이 첩첩히 쌓인 곳이 바로 이곳이다.
예를 들어 보자. 큰 삼촌은 독립군 투사, 막내 삼촌은 일본 경찰, 공산당 당원으로 권력을 잡은 작은 아들, 평양으로 이주한 둘째 삼촌, 이제 막 서울에서 자리 잡은 조카, 명동에서 성직자 가정으로 자리잡은 외촌들... 이들이 90이 훨씬 넘은 집안 어르신을 보려고 만주의 연길 본가로 모여 들었습니다. 이들은 무엇을 중심으로 마음을 모을까? 가슴에서 울어 나오는 말..., 만수무강 하세요? 편안하세요? 그러나 누구도....,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방 한구석에서 신부가 미사 가방을 펼치고 있다. 갑자기 창문의 두꺼운 커텐이 내려진다. 커다란 상이 펼쳐지고 제대포가 씌어진다. 보물처럼 모셔진 촛대를 꺼내고 이어서 어두운 방을 밝게 비춘다. 절대 침묵중에 미사가 진행된다. 미사중 간간히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온다....., 그것은 연로하신 어르신의 눈물이었다. 수 많은 후손들...., 누구를 위로해야 하는가? 특별한 이념도, 고품격적인 애국심도, 풍부한 경제력도 연로한 어르신에게는 소용이 없다. 오로지 미사중 하느님 품안에서만 가족 모두를 따듯하게 품을 수 있는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들이 뿌리 깊은 신앙을 갖고 있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 이런 상황은 소설속에서만 등장하는 특별한 이야기일까? 그것은 아니다. 실제 상황이다. 다만 많은 이들이 신앙인이 아닐 수 있다. 정말 그렇다. 우리가 그렇게도 어렵게 생각하는 북한 방문, 그들은 연길 시청을 찾아가 북한 가족 방문을 신청하면 즉시 허가증이 나온다. 연길의 인구중 60% 이상 이런 가정의 모습을 갖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 평양 가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 보다 어렵다. 이산 가족의 아품은 오로지 한반도 남쪽 한국인의 몫일뿐이다.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동북아 인권 문제, 그것은 분명히 한국천주교회의 사회 참여 몫으로 남겨진 것이다. 사회 참여는 쉽지 않다. 의민단에서처럼 보상이 없는 고통과 희생이 따를 수 있다. 그래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앙인이기 때문이다. 신앙인은 지상 천국 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고통과 희생은 무한한 가치를 갖는다.
本論
1. 동북아 인권 문제를 열어가는 첫 번째 열쇠, 그것은 독립군 의민단에 있었다. 왜냐하면 독립군 의민단의 기본 정신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40년 앞서간 사회 참여였기 때문이다.
일본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마츠우라 주교는 교회의 사회 참여 이유를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교회의 정치참여 비판은 공의회 이전 신앙이다”일본 정평위 마츠우라 주교,
"세상 속에서 흔들리면서 하느님 나라 향해 여행하는 교회"
한상봉 기자 | isu@catholicnews.co.kr)
1)-요한 23세 교황은 교회를 세상에 개방하고, 현실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인 <사목헌장>이라는 것이다.---“이제 신앙인들은 세상의 고통을 보았을 때 관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의무’임을 일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2)-1962년 12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리고 4일 뒤에 발생한 쿠바사태를 예로 들며, 당시 쿠바에 설치된 소련 미사일 배치로 미소간 전쟁 위기에 있었으나, 케네디 미 대통령이 “세계 어느 국가나 이념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존경받는다”는 이유로 교황에게 중재를 요청했다고 전했다. 결국 요한 23세 교황이 후르시초프와 케네디 대통령 사이에 중재에 나서서 미사일 철거로 전쟁위기가 사라졌다. 마츠우라 주교는 “교회는 정략에 따라서 정치활동을 하지 않는다”며 “복음적 입장에서 평화를 중재하고, 화해와 일치를 가져다 줄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3)-엘살바도르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역시 처음에는 빈민들을 위해 지원하는 선량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어서 부유층과 군사지도자들의 칭찬을 가장 많이 받던 인물이었는데, 그가 빈민들을 지켜보면서 “왜 가난한가?” 묻기 시작하면서, 빈민을 착취하는 부유층과 이를 옹호하는 군사정권과 갈라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빨갱이 주교’라는 말을 듣던 로메로 대주교는 “자기 신변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현실문제에 눈감지 않고 발언하다가 결국 미사 중에 암살당했다”며 “지금도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물품지원 등은 많이 하지만, 인권침해나 억압적 현실, 정치적 문제에는 관여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다”고 지적했다.
한국천주교 독립군 의민단의 경우,
1)-세상의 고통을 보았을 때 즉시 사회 참여를 실행하였으며
2)-사회 참여 목표는 특정 정치 참여가 아닌 보편적인 정의로운 사회건설을 지향하고 있었다.
3)-사회 참여 결과로 재산과 생명의 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신앙의 기본 정신을 충실히 따랐다
한국천주교회내 평신도들의 사회 참여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독립군 의민단이다. 많은 이들은 독립군 의민단 존재에 대하여 화들짝 놀라고 있다. 혹시 십자군은 아니야? 이런 질문들에 대하여 우리는 분명히 인식하여야 한다. 독립군 의민단은 1962년에 실시된 바티칸 공의회에서 말하는 교회의 현실 참여에 대하여 40년 앞서간 교회정신이라는 점을 다시한번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2. 독립군 의민단의 청산리 전투대한 교회의 반응(1919년-1921년)은 대단히 긍정적이었다.
독립군 의민단에 대한 한국천주교회의 공식적인 논평은 없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독립군 의민단에 대하여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논평 역시 없었다는 이야기다. 한국천주교회는 독립군 의민단에 대하여 처음부터 침묵으로 일관한 것이다. 간접적으로 교회 반응을 추적해 보면 독립군 의민단에 대한 교회의 반응은 대단히 긍적적이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문건은 주교 서품식(1921년 5월1일)에서 발견된다.
....드브레 주교(명동 부주교) 및 보니파시오 사우아 아빠스 주교(원산지목구장) 서품식 날(1921년 5월1일), 주변국가의 파리외방전교회 지목구장 대부분은 서울에서의 서품 행사에 참석하였다. 서울의 뮈델주교, 대구의 드망 주교, 오사카의 카스타니어 주교, 나가사끼의 콤바츠 주교, 심양의 슐레 주교 그리고 길림의 랄루이에 주교등이었다. 그 시기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강점기 중 이었다. 순수 천주교회 행사임에도 불구히고 일본 정부의 요직 인사들 역시 모두 참석하였다. 그날은 노골적으로 일본과 한국천주교회가 힘겨루기 하는 날이었다. 일본은 만주 청산리 전투에서 조직과 화력에서 월등함에도 불구하고 대패(1919년)를 하면서 3,000명에 이르는 정규군을 잃었다. 일본은 청산리 전투 참패이후 경신년의 마적단 토벌(1920-21년)이란 이름으로 민간인 3,500명 대학살을 끝내가는 시점이 바로 서울의 부주교 및 원산 지목구장 주교 서품식 날 이었던 것이다. 일본이 말하는 청산리 전투 마적단에는 천주교 신자들로 구성된 의민단이 분명 있었다. 경신년(1920년) 대토벌이후에도 유독 의민단의 중심지로 의심받는 팔도구 성당이 20여 차례 집중적으로 마적단의 습격을 받아 초토화 되었다는 점은 청산리 전투에서 천주교회 신자들의 역할이 대단히 컷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뮈델주교는 방금 만주에서 이런 끔찍한 일을 막 끝내면서 주교 서품식장에 들어서는 일본 관리들의 속셈을 전혀 몰랐을까? 청산리 전투후, 경신년 대토벌 당시, 전투장이 아닌 팔도구 성당 마당, 수많은 신자들과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되는 독립군 의민단 단원들을 정말 몰랐을까?
주교 서품식에 참석한 정부 요직 인사를 보면, 사이토 총독, 정무총감 마주노 박사, 마츠나까 외무국장, 총사령관 오바장군, 마에타 장군, 서울 주재 각국 영사, 러시아 영사등이었다. 일단 그들의 독설을 들어보자.
주교 서품식 날 사이토 총독의 건배 제의는 아래와 같았다.
......여러분의 한국내 포교 활동에 대한 저의 존경심을 표현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가지게 되어 대단히 기쁩니다. 여러분은 이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선교사들입니다. 90년전 여러분은 미약하게 시작했지만, 갖은 난관과 고통을 이겨 낸 그 노고가 점차 열매를 맺어, 이제는 명실 공히 한국 내 그리스도교 선교의 가장 중요한 대표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가르치는 종교와 그 종교가 주는 지혜로운 교훈은 국민들을 독실하고 경건하며 예의 바르게 만드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국민의 도덕적.신체적 안녕을 위해 여러분과 우리사이에 항구적이고 긴밀한 협력이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겸손과 용기를 위하여 건배!!!---(친일 외교에 협조 요청)
-여기서 사이토가 말하는 국민이란 일본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한국인이란 단어는 그의 머릿속에서 살아진지 오래된 일이 아닌가....? 또한 순명은 무조건 머리를 숙이는 맹종과 다르다. 옳은 것은 그렇다라고 대답하며, 아닌 것은 그르다라고 말하는 것이 진짜 순명인 것이다. 용기 역시 맹종과 확실히 구별된다.
뮈델 주교 건배 답사는 직설적이었다.
...저는 파리외방전교회와 가톨릭 선교사들을 대표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용감하다는 사실을 총독님처럼 인정해도 저를 교만하다고 생각하지 마사기 바랍니다. 용감한 분들은 신앙을 위해 피까지 흘리신 우리 선배들이셨습니다. 저는 또한 선교사들과 한국인 신부들이 모두 용감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들은 오로지 소중한 제2의조국, 한국의 번영과 구원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영예로 알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는 성교회의 영광과 원만한 선교를 위하여, 그리고 여러 파견국 중에서 특히 우리가 사랑하는 한국을 위하여 건배!!!---제2의 조국 한국을 위하여.....(늘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
뮈델 주교는 분명히 한국인이라고 지칭하고 있었다. 한국의 번영과 구원을 위해...
자료를 확인해 보면, 민대주교의 청산리 전투 전몰 신자들의 예우는 준 순교자 수준이었다, 일본과의 담판에서 뮈델 주교는 판정승으로 평가된다. 왜냐하면 성직자 모두는 죽을 각오로 한국을 사랑한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간도의 신자들이 지도자(민대주교) 뜻을 반대할 이유가 있겠는가. 나라를 사랑하는 것, 그 자체가 죄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3. 시성시복, 그것은 인권회복의 정점이다
역사는 돌고 돈다. 1946년 중국의 교계 제도가 설정되면서 큰 변화가 예고되고 있었다. 만주에서는 봉천이 대교구로 승격되었고, 동시에 무순, 열하, 길림, 사평가, 연길 대목구가 정식 교구로 승격되면서 봉천 관구의 소속 교구가 됨으로써 그때까지 조선 교회에 속하였던 연길교구는 중국 교회에 속하게 되었다. (1920-1946)
조선지목구(1831.9.9.)는 중국 교회보다 늦은 1962년에 교계 제도가 설정되었다. 조선지목구에서 넘겨준 유산 중 아주 귀한 선물은 당연히 103위 성인들일 것이다. 요동지목구(1838.12.12.)에서 중국 교회로 넘겨 줄 보물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 역시 시성시복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기에 한국에서처럼 요동지목구 시성시복하는 날, 로마 교황을 평양과 북경(만주)에 초대하고자 하는 것이다. 시성시복, 그것은 인권회복의 정점이기 때문이다. 핵 문제가 강자의 몫이라면, 인권회복의 완성, 즉 시성시복은 분명 한국천주교회의 몫이다.
우리는 여기서 의민단의 현실 참여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반복하여 고민해 보아야 한다. 그때 그 시절, 요동 대목구는 많은 이유등으로 점진적으로 쇠퇴해 갔다. 그러나 조선 지목구는 성장을 거듭해 갔다. 때가 되었다. 간도의 작은 부분 재치권으로 시작된 한국과 중국 교회와의 새로운 관계, 그리고 이어지는 연길지목구 창립은 오늘과 같은 우리의 모습을 예견함이었다. 교구와 교구의 관계는 절대로 독립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천주교회가 연길교구의 과거사를 논하는 것은 그곳이 한때는 한국천주교회 품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 시절 순교자 일로 시성시복을 진행하는 것입니다. 가까운 이웃이 아니라 당당한 당사자의 자격으로 시성시복을 진행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러한 모습은 역사속에서 하느님이 자신의 모습을 들어내는 섭리로 받아 드릴 수도 있다. 동북아 인권 문제에 있어서 오늘날 한국천주교회의 사회 참여의 몫은 분명히 있다.
비록 50년이란 짧은 기간(1904-1953) 이었지만, 많은 순교자가 발생하였다. 의민단에 이어 이념, 즉 공산주의 출현으로 인한 희생은 한국교회 초기 대원군 시대와 비교될 만큼 대형 사고가 분명했다. 남북한에서 출발하여 이웃나라 중국도 이 문제에 깊숙이 관계되어 있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출발점인 한국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시성시복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종점은 중국이다. 북경과 평양이 로마와 화해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손해 볼일은 없다. 그들은 수많은 친구들을 한꺼번에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중국과 로마는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시작된 시성시복 운동은 상당히 구체적인 내용과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요동지목구가 중국교회에 주는 귀중한 선물이 바로 이것이다. 한국에서 처럼 로마 교황이 중국 연길에 오실 때 주는 선물이 바로 이것이다. 2007년. 5월.10일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 김치호 베네딕도 신부.동료 순교자에 대한 시복 소송 착수하여 교령까지 발표한 것은 순수 가톨릭적인 행사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극동 아시아를 바꾸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시성시복, 그것은 전 세계인이 공인하는 객관적 가치가 있으며, 그로 인하여 인권 문제 해결의 정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권 문제, 그것은 우리의 몫이라고 감히 주장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의 첫 번째 출발, 즉 상호 신뢰는 엉뚱한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시성시복 운동의 적극적인 참여는 바로 상호 신뢰의 모습으로 보여 지는 첫 번째 구체적인 행동들인 것이다. 이 일의 시작과 진행은 분명 한국천주교회의 몫이지만, 적극적인 협조는 각자의 몫으로 상호 신뢰의 객관적인 표지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중국과 북한이 그동안의 로마교회와의 단절을 종식하고 정식 외교를 시작한다면 그것 자체가 인권 문제 해결의 첫 출발이 될 수 있다는 논리다. 한국천주교회는 이미 10년전부터 이 일을 준비해 왔다. 시성시복, 그것은 인권회복의 최고 정점으로 여겨진다. 한국은 이미 시성시복의 결과로 이어지는 영광을 맛보았다. 로마 교황이 평양과 북경을 방문하는 날, 세계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들도 광화문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복잡하고 어렵게 여겨지는 동북아 인권 문제도 당사자들 간에 적극적인 참여 의사가 있다면, 의외로 쉽게 풀려갈 것이다. 로마와 정식 외교 선언이 바로 그것이다. 정식 외교후 인권 문제, 그것을 한국천주교회에 맡겨진다면 극동아시아 천주교회에 이미 조직되고 훈련된 카리타스등과 협조하여 후생사업 마무리 작업까지 원만하게 풀어갈 것이다. 이어서 서울에서 평양, 그리고 북경을 거처 로마까지 대륙횡단 철도가 이어지길 다시 한 번 간절히 바란다
結論
東北亞의 人權 問題, 그것은 우리의 몫이다. 사실 그렇다. 이 글의 마무리는 어떻게 할까? 모두가 간절히 바라는 것, 그것은 동북아 평화일 것이다. 그러기에 한 편의 소설로 필자의 뜻을 전하고자 한다. 시성시복의 절차와 내용은 아래 소설 내용과 비슷하다. 참고 바란다. 필자의 부족한 점, 많은 이해 바란다. 더불어 귀중한 자료 소개하고자 한다. 필자는 북한선교후원회와 수원교구중국성소후원회 및 수원교구중국선교위원회에서 25년간 봉사한 일이 있다. 그 기간 중 모아 온 자료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1991년 기준)
북한은 평양교구와 함흥교구등 두 교구로 출발한다. 몇 년 후 평양교구는 이럴 것이다. 현재 6道, 120개 市郡, 94개 區, 491개 洞, 1967개 里, 103개 공업단지, 총인구 13,899,015명이다. 예비신자 20% 잡아보면 2,782,500명이다, 본당은 예비신자 5,000명을 기준으로 하면 561개 본당이다. 공소는 준 본당으로 리에 하나씩으로 하면 2084개소 이다. (지역행정에서 군에 이어 면을 삭제하고 바로 리가 존재한다. 북한의 리는 남한의 면과 비슷하다) 평양교구는 도 또는 직활시에 하나씩 즉 6개 교구로 분활 되어도 작지 않다.
함흥교구는 이렇다. 현재 4道, 63개 市郡, 68개 區, 288개 洞, 1290개 里 131개 공업단지, 총인구 7,906,769명이다. 예비신자 20% 잡아보면 1,378,500명이다. 본당 5000명 기준으로 하면 본당 272 이다. 공소는 준 본당으로 리에 하나씩으로 하면 1499개소 이다. (리는 남한의 면과 같다) 함흥교구도 도 또는 직활시에 하나씩 즉 4교구가 분활되어도 작지 않다 교구 또는 본당 설립에는 인력과 재력이 많이 든다. 북한선교는 평양교구와 함흥교구등 2개 교구의 일이 결코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미래 10개 교구 설립에 관한 한국 천주교회의 숙원 사업이야기다. 성직자는 물론하고 평신도들이 온 힘을 다해 풀어 갈 숙원 사업이다.
이쯤에서 생각해 보자. 성당 833개소, 준성당 3583개소에 대한 재력과 인력은 얼마나 필요할까? 1992년 11월7일 중국 요령성은 50년 동안 몰수한 교회의 재산을 반환하였다. 그때 그들은 단서를 달았다. 지역 개발에 호응하여 교회를 개발할 것을..., 만일 자금 부족으로 포기하면 국가에 다시 환수 된다는 조건이다. 중국 교회는 가난하였다. 그 결과 교회의 많은 재산들이 또다시 몰수되는 수난을 격게 되었다. 우리 모두가 북한 교회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면 중국천주교회와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단편 소설,
신나는 安圖县 本堂 巡禮,
이영호 벨라도
유럽까지 뻗어 갈 TR[大陸橫斷鐵道=transcontinental railroad]는 부산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한반도를 지나 광활한 중국 대륙을 관통할 TR는 각 플래트 홈의 엇갈린 이해(利害) 관계 속에서 신중론자들에 의해 한동안 억류되었다. 우려(憂慮)가 확신(確信)으로 기우러 가자 대범한 친구들은 TR를 무조건 출발시켰다. TR는 자신을 알리는 기적 소리와 함께 로마를 향하여 전력 질주(疾走)해 갔다. TR는 출발과 함께 점차 괴물화 되어갔다. 식성(食性)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TR가 머무는 풀랫트 홈이라면 어김없이 TR의 불랙홀로 변화되어 갔기 때문이다. TR는 정치(政治), 경제(經濟), 문화(文化) 뿐만아니라 극비밀로 감추어진 군사(軍事) 비밀까지 거침없이 집어 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랙홀, 그 곳은 크고 작은 다툼이 없는 고요함과 평화만 흐르고 있었다.
태여 난지 얼마 안되는 TR이지만, 무엇이든지 먹어 치우는 식욕으로 인하여 급성장하면서 때 이른 꽃망울을 터 트리고 있었다. 꽃 중에 꽃, 그것은 바로 능금화[能金花]였다. 오고가는 물량 만큼 살찐 과수나무의 열매[黃金]는 아름답고 풍요롭다. 그뿐이랴. 열매에서 풍기는 향기 역시 유별났다. 그것은 많은 이들의 이성 뿐만아니라 예민한 오관을 마비 시켜갔다. 만일 누가 자신의 몫을 빼앗으려고 한다면 폭동(暴動)도 불사할 모양세이다.
TR는 말 그대로 철길이다. 정해진 대로 가야만 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TR를 멋대로 진화 시켜 버렸다. 탈선 시켜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기차를 전복 시켰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TR를 따라 자동차 문화가 급속도로 발전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서민들에게 오토캠핑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벨라도와 동료 일행은 의민단(義民團) 깃발을 앞세우고 용인(龍仁)의 은이 성지(聖地)로 모여 들었다. 安圖县 聖堂을 목적지로 오토 캠핑를 하기 위해서였다. 1,000Km의 대장정이었다. 쉽지 않은 여행이 분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리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행사는 차질없이 진행되어갔다. 출발을 알리는 요란한 폭죽 소리와 함께 캠프카는 안도현을 향하여 출발했다. 의민단(義民團) 오토캠프카 일행은 어느듯 서울과 개성을 벗어나자 북간도 특급열차 노선을 따라 온성을 향하여 전력 질주해 갔다. 온성에 도착한 의민단(義民團)은 곧바로 경신 성당을 향하여 두만강을 건너 갔다. 간도에 처음으로 입성(入城)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여행길을 가로 막는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곳은 한중(韓中) 자유 여행 지역으로 선포된 곳이기 때문이었다. 마치 유럽에 들어 온 기분이다. 1,000Km의 긴 여정 끝에 의민단(義民團)은 안도현(安圖县)에 도착하였다. 그들이 지나 온 길은 아래와 같다
용인(은이 성지) ➟ 서울 ➟ 개성 ➟ 평양 ➟ 평성 ➟ 순천 ➟ 고원 ➟ 함흥 ➟ 북청 ➟ 단천 ➟ 길주 ➟ 청진 ➟ 라진 ➟ 온성 ➟ 敬信镇 ➟ 板石镇 ➟ 珲春市 ➟ 英安镇 ➟ 密江乡➟ 凉水镇 ➟ 图们市 ➟ 長安镇 ➟ 延吉市 ➟ 朝阳镇 ➟ 銅佛寺镇 ➟ 头沟老 ➟ 石門镇 ➟ 安圖县
安圖县 本堂 주임 박신부가 의민단(義民團)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박신부는 수 차례 안도현을 방문해 왔던 의민단(義民團)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이 배를 타고 올 때이면 단동 - 장하 - 개주 - 심양 - 장춘 - 길림 - 교하 - 돈화 - 안도를 택하였다. 항공기인 경우는 장춘(또는 연길)으로 와서 기차로 오곤 하였다. 그러나 이 번 만은 달랐다. 자가용으로 대륙을 횡단(橫斷)한 것이다. 한탄강을 따라 가다가 임진강을 넘은 곳이다. 그 곳은 수 십 년 금단의 땅이었다. 연길로 가는 길 역시 막힘이 없었다. 그들은 평양을 지나자 원산으로 방향을 틀었다. 함흥을 지나 청진에 도착했을 때 잠시 머뭇거렸다. 나진, 선봉 지역으로 가는 길은 험하고 미개척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어느듯 안도현 성당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도현 본당 주임, 박신부 옆에 정씨가 보인다. 그들은 지금 둘도 없는 친구이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는 견원지간(犬猿之間) 이었다. 이미 지나간 세월일 뿐이다.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만은 지금도 또렷하였다.
朴神父, 汽车用一下吧(박신부, 차 좀쓰자!)
很忙(몹시 바뻐.)
啊,你刚才说什么?(니, 지금 뭐라고 했나?)
很忙, 我去, 靠那边! (바쁘다고 했다. 갈란다. 비켜라!)
你什么?(뭐라고?)
....,!?(.....,!?)
박신부와 정씨의 인연은 특별했다. 주종(主從) 관계(關係)는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묵인(黙認)되어 왔다. 중국 정부는 지난 수 십 년 간......, 법률적으로 완전한 종교자유를 보장한다고 하였지만, 그것은 명문(名文)상 일뿐이었다. 실제적으로는 극도로 종교의 자유를 제한시켜 왔다. 그런 이유로 박신부는 늘 범법자로써 사회로부터 소외되었고, 정씨는 집행자로써 막강한 국가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정씨는 수시로 권력 남용하여 범법자들을 사유화, 또는 노예화 하였으나, 그런 사실을 비난하거나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많은 종교인들이 정씨의 횡포에 굴복할 뿐만 아니라, 흔적없이 사라져 갔다. 정씨는 지방 행정부의 일급 전범자가 분명했다. 그는 늘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그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다만 박신부는 달랐다. 슬기롭게 정씨와 맞섰다. 위의 대화 내용은 자세히 살펴보면 극도로 예민한 양면성을 품고 있는 것이다. 따져보자. 정씨가 박신부의 승용차를 쓰자고 하였다. 그때 박신부는 정씨에게 중국어로 정중히 거절하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어에는 존칭이 없다. 사실은 분명 둘 다 조선 사람이었다. 조선말로 정중히 대화를 하려면 존칭을 사용하여야만 했다. 그런데 박신부는 의도적으로 중국어로 쏘아 붙혔는데 그것은 박신부 심기가 몹시 불편하여 정씨에게 막말을 퍼 붙기 위함이었다. 이것을 알아 차린 정씨는 박신부의 앞을 가로 막으면서 덤벼 들었다. 그러나 박신부는 조금도 기가 꺽이지 않고 끝까지 중국어로 정씨를 몰아 붙이고 있었다.
박신부와 정씨는 평상시에도 늘 팽팽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박신부의 경우, 정씨의 권력 남용은 한 점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정씨는 늘 불쾌하였지만 박신부와의 대결에서는 어쩔 수 없이 참패(慘敗)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이 바뀌었다. 중국 정부가 로마 천주교회와 정식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 로마 교황 방문을 요청한 일로 정씨가 실직되고 만 것이다. 정씨는 실직과 함께 일급 전범자로 몰려가고 있었다. 정씨는 갑자기 떠 밀려 온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박신부가 정씨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사제관으로 불러 들였다.
“정분도씨, 직장은 잡으셨나요?”
“신부님, 어떻게 제 본명을 아셨지요?”
“분도씨, 어머님께서 일러 주셨습니다. 고백성사를 보시겠어요?”
“신부님, 고맙습니다.”
정씨는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있었다. 정씨의 거친 성격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후천적으로 진화된 것이었다. 그는 편하게 살고자 함 때문이었다. 그는 지난 날 들을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정씨는 박신부 권유에 따라 그동안 부정축재로 모아 온 재산을 포기하고 전액 사회에 기부하기로 결심하였다. 교회는 정씨를 정중히 받아 드렸다. 그의 진정한 회개(悔改)와 고백(告白), 그리고 보속(補贖)행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로부터 깊은 사랑을 받는 정씨는 폭권을 누리던 때보다 주름살이 펴지고 생기가 돌더니, 본래 나이보다 훨씬 젊게 보였다. 60대가 넘은 중년이었지만 40대 정도의 장년처럼 힘과 패기가 넘쳐 보였다. -끝--
첫댓글 가족미사, 독립군 의민단, 시성시복등은 모두 교회의 사회 참여를 의미한다. 이들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상호 긴밀한 연관성 을 갖고 있다.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에서 가족 미사는 수신과 제가, 독립군 의민단은 치국, 시성시복은 평천하로 비유될 수 있다. 그러나 모두 교회의 사회 참여 모습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