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 김미령
교외로 한참을 걸어 나갔다.
겨울의 빈 들이 있고 그 앞에 마른 개울이 있었는데 왠지 낯설다고 했더니
여긴 처음부터 이랬어, 라고 옆 사람이 말했다.
가다가 빈 축사를 보았다.
지붕이 무너지고 사방이 뚫려 있었는데 여기도 원래부터 이랬어, 라고 말했고
원래 그런 것은 과거가 아닌 내가 몰랐던 쪽으로부터 계속 생겨날 것 같았다.
무거운 자루를 끌고 야산에 들어가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을 땐 금방
잊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조금 더 들어가니 외딴 집이 나왔고 집 앞에 낡은 의자가 있었다.
의자에 앉았던 사람은 집안에 누워 나오지 않았는데 원래는
내가 부르면 나오기로 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담벼락 옆 빨랫줄에 속옷과 양말 한 켤레가 널려 있었고
그 빨래는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았고
우리가 떠나고 한참 뒤에야 느릿느릿 빨래 걷으러 나올 그를 생각하느라
돌아와서는 아무 일도 못했다.
현대시 2022.7월호https://youtu.be/FurbinfJTno
*우리=나의 여러 자아들. 교외=자주 떠 올리지 않았던 기억의 공간, 자연, 본원적 세계. 속옷과 양말=가장 기본적이고 은밀한 것만 있는 무소유의 상관물
흑백사진 / 최경민(최치언)
* 1999 동아일보 신춘문예당선작
그가 문을 열었을 때
새들은
슬퍼하지 않고 울지 않고 노래하지 않고
석양 쪽으로 날아가고 있었지
붉게 꽃핀 담장 너머
멀리 공장의 굴뚝 다섯, 하늘을 이고 있었네
그는 손을 들어
잘린 손가락을 들여다보네
짧게 잘린 마디는 마치 촛농으로 덮어씌운 듯 했지
상처만이 고통을 기억하고 있네
더 이상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도
남아 있는 손가락을 천천히 세어보네
사진 속 친구들의 얼굴도 들여다 보네
붉은 철근 더미 위에 앉아
한순간 웃던 얼굴들이 사진 속에선 영원히 웃고 있네
또한 영원히 울고도 있네
눈을 들었을 때
키 큰 순서부터 공장의 굴뚝들은
어둠에 허리를 짤리우고 있었지
이제 그는 창문을 닫네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고
빈 새장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네
누군가 와서
그를 잊지 않았다고
모이를 주고 물을 주면,
슬퍼하지 않고 울지 않고 노래하지 않고
석양의 집으로 날아갈 수 있을 텐데
부리를 다친 새처럼 그는
가슴에 얼굴을 묻네
문은 밖으로 잠겨 있네.
최경민 시인 1965년 경북 상주출생.
1988년 서울예전 문창과졸
흑백의 무성영화로 보는 아침/이솔
수리산 자락에 안겨 기도하는 성당
첨탑이 조용히 높다
빛바랜 벽돌벽에 눈발이 붙는다
눈이 뭉쳐 덩어리로 떨어지는 소리
눈꽃으로 기도하는 벽
눈이 빗금으로 내린다
건널목을 건너는 엄마와 아이의 흰 스카프가
화면 가득 눈발 속으로 들어온다
빈 택시가 아스팔트 눈빛을 밟고 미끄러지는
느티나무 가로수 잎에 빗금으로 감겨붙는
하얀 눈덩이 제 꽃봉오리인 양 곱다
눈발이 발끝을 들고 퇴장하는
침묵하는 아침
버스정류장이 그리는 흑백화면의 숨결
수리산 성당이 있는
동네 어느 아침
시집 『새는 날개로 완성된다』 2021. 시문학사
흑백사진 / 조연호
구멍 좁은 단추의 안쪽이 너에게 마음을 달아준다 그해 국광의 붉은 빛깔,자기 무릎에 머리를 대던 어미소의 평화로운 열병, 물옥잠의 구멍난 부레가 모두 바둑돌의 黑과 白이었다. 지천의 꽃들이 허공을 향해 시작되던 하혈도, 네가 빨아들던 담배 끝 새빨간 불꽃도 다만 개의 눈이 바라보던 흑빛 세상. 굴뚝 청소를 하고 나온 오빠, 몇 해 동안 분갈이 해보지 못한 오빠, 이삿짐 속 허름한 이삿짐이던 오빠, 방바닥을 걸레로 훔치면 네가 흘린 얼룩들이 고분고분 닦여나왔다. 대야에 담긴 빨래처럼 누군가 헹궈주기를 바라며 마음이 세제거품 몇 알갱이에 의지해 둥실 떠있다. 골목마다 칸칸이 놓여있던 쓰레기통들이 모두 네 고향이던 때, 남루한 밤이 네게 마음을 매달아 준다. 한밤 뒷간에서 거울로 자기 얼굴을 비춰보면 훗날 애인 얼굴이 나타난대, 기억이 포도알처럼 자주색 피를 쏟으며 달게 터졌다. 아무래도 나는 나를 사랑할 운명인가 봐, 수은칠이 반쯤 벗겨진 거울 안에서 나는 너를 흉내내며 비스듬히 잘린 채 반쯤 웃었다.
시집 「죽음에 이르는 계절」 2004년 천년의시작
흑백의 주인 / 김석영
당신과 나는 주로 낮에 있다
낮에 하는 것들 좋아했다
두 시간 낮잠
천천히 몸속을 도는 햇빛
나른한 커튼
잠깐 눈을 떴을 때
여전히 하오의 졸린 빛깔
방 안에 스며들었다
일렁이는 당신의 손
석양의 온기 닮았다
만지다 쓰다듬다, 라는 말 배웠다
당신에게
영혼이 시끄러울 때마다
오래도록 낮잠 잤다
당신의 언어 해독하기 위해
나를 끌어당길 때
나도 당신을 끌어당겼다
걸어갔다
당신과 숲의 끝까지
내가 바라보는 것
똑같이 보는지 궁금했다
당신에게 돌아가는 연습
제일 많이 했다
미친 질주와 복화술, 거울 보는 방법
배웠다
당신이 만지지 않으면
나는 머리 가져다 댔다
밝거나 조금 어두운
그림자 베고 잠이 들었다
흑백의 프레스토 / 권이화
잠들지 못하는 한여름 밤의 축제를 연다
넥타르를 마시며 흘려보낸 악기를 조율하면
내 흑백의 프레스토 돌아갈 수 있을까
죽음에서 살아나온 샤먼처럼 하얗게 빛나는
솔잎 같은 눈썹 새털 같은 머리카락을 넘어갈 수 있을까
당신은 손가락마다 불을 켜 흑백의 군무를 시작한다
호출 된 밤하늘이 문을 엽니다
나는 어디서 무엇이 될까? 잠들지 못하고 별에게 물어봐
별이 말하지 않아도 대답을 들을 수 있네
푸른 잉크 속으로 다음 발자국을 내밀면
아주 먼 거리가 시작되는 다락방
거기 어디쯤의 내 어린 모모 만날 수 있을까
손끝에서 손끝으로 날아가는 흑백의 프레스토
먼 끝에서 끝으로 별의 등고점을 찍으며
당신의 환한 손가락은 별이 된다
아무도 잠들지 못하는 한 여름 밤
우리의 교향곡을 실은 보이저 1호가
우리를 지나간다
흑백필름 /정다연
–
그때 너와 나는 영화의 전조를 알아차리지 못했지/
반복되는 여진과 정전, 부서질 듯 떨리는 유리컵은/
주인공의 불안이나 재난 이후 더 어두워진 삶에 대한 은유가 아니었고/
다만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이/
부르르 떨며 날아가고 있다는 것
–
순서대로 입장을 마감합니다/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는 서울식물원에서/
왜 돈만 있으면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늦길 잘했어/
반성했지/
리아트리스 알로카시아 루테아/
유리 온실에서 자라는 온화한 식물들의 이름을 불러주며
–
너와 나는 법 없이 살 수 있는 어른이 되자/
다짐했었는데/
요즘은 이곳보다 편안한 곳은 없다는 생각이 들어/
밥과 약을 잘 챙겨 먹고 어느 때보다도 건강해
–
선량한 어른이 되었어/
눈을 마주치지 않고 사람을 비껴가는 것이 예의라는 것을 알고/
이제 어디서든 고함을 지르지 않아/
해치도록 허락된 것만 해치고/
가끔은 넘치게 기부를 하지
–
그때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어/
중요한 것은 보지 못했던 식물의 이름이나 마땅히 지켜야만 하는 질서, 어른들의 말이 아니었고/
때로는 비명에 가깝게 소리를 질렀어야 했다는 것/
길을 막아서고/
잠깐만 시간을 내주세요 들어주세요 말했어야 했다는 것/
한걸음도 포기해서는 안 됐다는 것
–
이제 나는 너와 찍은 사진을 열어보지 않아/
봐도 아프지 않기 때문이지/
가끔은 곤두박질, 세상이 다 사라져버린 건 아닐까 해/
너무 오랫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지
–
지진이 아무런 피해도 남기지 않고 이곳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어
–
그때 나는 왜 추위에 떨던 네 모습만 떠올렸는지
시집『서로에게 기대어 끝까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