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강찬호 논설위원이 간다] 사전투표지 공무원 도장 못받고, ‘바지사장’ 위원장 그대로
중앙일보
입력 2024.02.14 00:32
총선 56일 앞두고도 현안 못 푸는 선관위
강찬호 논설위원
법률상 ‘현장 날인’ 10년째 안해
‘공무원 반발’ 이유로 인쇄 날인
판사 겸직 위원장, 들러리 전락
‘국회 대응’ 내세워 여의도 지원
4·10 총선을 앞두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사람의 손을 거치는 수(手) 개표와 사전투표 용지 일련번호 바코드화를 도입키로 했다. 부정 의혹이 끊이지 않는 사전투표와 개표의 신뢰성을 높여 시비를 원천봉쇄하려는 조치인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또 다른 블랙홀인 사전투표 용지의 보안성 강화는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를 비롯해 고위간부들의 자녀 특혜 채용과 북한 해킹 사태 등으로 드러난 선관위 병폐의 구조적 문제점을 전·현직 선관위 고위 관계자들의 전언을 통해 짚어본다.
선관위 “날인할 공무원 없다”
과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청사에 설치된 4·10 총선 종합상황실에 예비후보자 등록 현황이 표시돼있다. [뉴스1]
총선을 56일 앞둔 현재 최대 쟁점은 사전 투표용지 날인 문제다. 선거법은 사전투표 관리관이 자신의 도장을 찍어 정당성이 입증된 투표지를 교부하도록 규정했다. 하지만 선관위는 “투표소가 혼잡해진다”는 이유로 사전투표가 도입된 2014년 이래 10년째 관인이 미리 인쇄된 투표지를 교부해왔다. “사전투표지 인쇄 날인은 선거권 침해가 아니다”는 지난해 10월 헌법재판소 결정과 대법원 판례를 볼 때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 10월 국정원 점검 결과 해킹 세력이 선관위 관인 파일을 도용해 사전투표용지를 무단 인쇄·유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게 드러났다. 이에 따라 행정안전부는 법대로 관리관이 현장 날인한 투표용지를 배부케 하라고 선관위에 요구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도 8일 “본 투표와 달리 사전투표는 (현장 날인) 않겠다고 고집하면 선관위가 의심을 살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선관위는 “공무원들 반발이 심해 어렵다”는 입장을 반복하고 있다.
행안부 고위 관계자는 “총선에 필요한 공무원이 6만명인데 현장 날인시 1만명을 늘리고 예산을 110억원 증액하면 된다. 투입될 공무원은 수당을 올리고 휴가도 주기로 했다. 그런데도 선관위는 반대부터 한다. 행안부·법무부 장관이 공동 담화문을 내 압박을 이어갈 것”이라며 “한 위원장도 법무부 장관 시절부터 이 문제를 알아 목소리를 낸 것이며 앞으로도 (압박을)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선관위 관계자는 반박했다. “현장 날인 시 추가 투입될 공무원은 수만 명에 달한다. 행안부에 미리 그들의 명단을 달라고 요구했으나 주지 않았다. 수당 올려준다고? 정당 참관인 수당이 9만원 인상된 만큼 공무원도 8만원은 올려줘야 한다고 국회에 요청했는데 겨우 3만원 올려줬다. 현장 날인은 불가능하다.”
전직 선관위 고위 관계자는 “사전투표가 워낙 논란이 많다 보니 자신의 도장을 찍었다가 무슨 책임을 지게 될지 몰라 공무원들이 기피하는 게 문제의 핵심”이라고 했다. 투개표 관리는 지자체 공무원들이 하는데, 법적 의무가 아니어서 행안부가 현장 날인 근무를 요청해도 거부하면 그만이고 선관위도 강제력이 없어 동원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인도처럼 선거업무를 공무원의 ‘의무’로 못 박고 거부시 처벌하도록 지자체법을 개정해야 한다”며 “사전투표는 투표 이후 상황을 선거에 반영할 수 없는 데다 부정 논란과 불복의 화약고가 됐으므로 폐지해야 한다는 게 선관위 자체 의견”이라고 했다.
선관위는 현재 중앙위원장은 대법관, 시·도 위원장은 지방법원장, 시·군·구 위원장은 지방법원 부장판사가 겸임한다. 비상근인 이들은 한 달에 한 번 회의만 참석하고 업무는 선관위 공무원 수장인 사무총장이 장악하니 들러리가 될 수밖에 없다. 노태악 중앙선관위원장도 “비상임의 한계를 너무 많이 느꼈다. 선관위원장은 상임이어야 한다”고 국회에서 말했다.
한 달에 30분 근무하는 선관위원장
5일 오후 과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청사에서 열린 총선 허위사실·비방 유관기관 대책회의 모습. 대검찰청과 경찰청, 방송통신위원회 등 13개 유관기관이 참석했다. [뉴스1]
시·군·구 선관위원장을 지낸 전직 부장판사의 고백이다.
“한 달에 한 번 하는 회의부터 형식적이었다. 선관위 공무원들은 회의 시각을 오후 5시 반에 잡더라. 현안 보고 30분 만에 회의는 끝난다. 한 달 내내 법원 업무만 한 내가 그 짧은 시간에 무슨 사정을 파악하겠나. 결재만 줄줄 해준다. 그러면 곧장 술을 곁들인 회식으로 이어진다. 회의 불참하고 회식만 한 선관위원들도 50만원 수당을 받더라. ‘이러면 되냐’고 했더니 ‘관행인데 뭘 따지시냐’고 하더라. 지방선거 앞두고 선관위 직원이 ‘수사 의뢰감’ 이라며 결재를 청한 건이 있었다. 범죄 수준이 못돼 거절했더니 ‘처벌된 유사 사례가 있다’며 반발해 ‘신중히 검토하라’는 선에서 매듭지었다. 그러자 직원은 결재된 것으로 치부해 윗선에 올려버리더라. 선거 당일도 가관이다. 내가 ‘중요한 날이니 선관위로 출근하겠다’고 하니까 선관위 공무원들은 ‘오셔봤자 하실 일 없다. 투표 마감 즈음인 오후 5시 반쯤 오시면 된다’고 막더라. 2년 전 대선 때 ‘소쿠리 투표’ 등 대혼란이 터진 사전투표일에 노정희 당시 중앙선관위원장이 출근하지 않아 욕을 먹었는데 실은 선관위 직원들이 ‘나오실 일 없다’고 막아 안 나왔을 뿐일 것이다. 내 경우는 위원장 인사말까지 직원들이 써주더라. 내용이 선관위 자화자찬 일색이라 수정하려 했더니 직원이 ‘(사무처) 국장님 아시면 큰일 난다’고 울먹이더라. 그래서 문안은 그대로 두고 현장에서 내용을 고쳐 말했다. 난 한마디로 ‘바지사장’이었다. 사무처가 선관위원장 상임화를 결사 반대하는 건 인사·재정 등 업무는 자신들이 장악하고, 문제가 터지면 책임은 위원장에 전가하기 딱 좋은 게 비상임 위원장제라서다.”
선관위 출신, 1급 상임위원 ‘독점’
신우용 제주 선관위 전 상임위원은 2021년 자녀에게 서울시 선관위 채용 정보를 미리 알려줬고, 자녀는 아버지의 동료에게 면접 본 끝에 채용된 것으로 선관위 감사 결과 드러났다. 신 전 위원은 기조실장 등 요직을 두루 지낸 ‘선관위맨’이었다. 이에서 보듯 제주를 비롯해 전국 17개 시도 선관위 상임위원(1급)은 선관위 출신들이 독점해왔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선관위법은 시도 상임위원을 ▶5년 이상 경력 법조인이나 ▶부교수 이상 학자 ▶2년 이상 근무한 3급 이상 공무원 가운데 지명토록 하고 있다. 그런데 선관위는 ‘7년 이상 선거·정당 사무에 종사한 4급 이상 공무원’을 시도 상임위원에 지명할 수 있다는 규칙을 만들었다. 전 중앙선관위 위원은 “선관위 사무처는 이를 근거로 전국 시도 상임위원직에 내부 출신을 채워왔다. 외부 개방형 위촉을 원칙으로 한 선관위법 취지를 어긴 것”이라 지적했다. 한 전직 선관위원은 “사무처가 퇴직 간부들을 지방 선관위 수뇌부에 꽂아 17개 시도, 251개 구시군, 3505개 읍면동 선관위를 장악했으니 특혜채용 등 비리가 판치는데도 선관위원장은 들러리만 서는 것”이라고 했다.
다른 전직 선관위원은 “선관위 간부들이 선거 관리 등 본연의 업무 외에 정당들의 법령 자문이나 활동 지원에 역량의 상당 부분을 쏟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국회 대응’이란 이름 아래 행해지는 이런 활동은 선관위의 대 정치권 인사·예산 로비로 봐도 무리가 없다”며 “중앙선관위에 배치된 우수 인력 수백명이 이런 로비에 동원되며 일선 시군구 선관위의 역량은 하락해, 선거 때 부실 관리 논란 우려가 커진다”고 했다.
1963년 직원 348명으로 출범한 선관위는 61년 만에 직원 3000명에 예산 8700억원의 공룡조직이 됐다. 연간 4000건씩 사건을 처리하는 대법관이 비상임 수장을 맡아 지휘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게 중론이다. 최근 국민권익위원회는 선관위법을 개정해 각급 선관위에 상임 위원장 1인을 두는 조항을 마련할 것을 제언했다. 또 한 중앙선관위원은 대통령과 대법원장, 국회가 임명한 선관위원 1명씩 2년마다 돌아가며 상임 위원장을 맡는 방안을 제안했다.
전직 선관위원은 “헌법은 중앙선관위원 9명 중 ‘호선’을 통해 선관위원장을 정하게 했을 뿐인데 대법원장이 지명한 대법관이 자동적으로 위원장이 돼왔다. 말이 안 된다. 퇴직한 법관이나 교수 등 선관위 업무만 전념할 수 있는 인사로 상임위원장을 지명해야 한다”고 했다.
강찬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