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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우정
- 이영구 선생님을 추억하며
첫 사람이 되다
어제 그분의 부음을 듣고 믿기 힘든 마음에 그분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정말이냐고, 어디 가신 거냐고. 그리고 오늘 아침 그분이 발신자로 된 전화번호에서 당신의 부음을 알리는 구체적인 문자를 받았다. 사실이라고, 믿으라고. 내가 믿든 안 믿든 사실관계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쉽게 믿을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돌아가시기 전날에도 안부 통화를 하고 안녕 문자를 남겼다. 팔순 어르신이 막내딸뻘인 나의 건강을 염려하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잠시 민망했지만 부쩍 힘이 나는 교신이었다. 설 전날 응급실행까지 치를 정도로 몸이 상했던 그분이 기껏 감기로 집에서 뒹굴고 있는 내 마음을 부축했다. 그 에너지 만땅의 교신이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아 두 사람 관계 축의 한쪽이 완전히 붕괴된 것이다. 심신미약 상태에서 얻어맞은 부음, 우황청심환의 효과를 주던 망년우의 죽음은 결코 쉽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게 아직까지의 생각이다.
몇 년 전이다. 친구 추천으로 희망제작소 후원 산행모임에 나간 것이. 그리고 그분과 처음 만났다. 팔순의 자태, 완연한 어르신의
풍모임에도 표정과 제스처가 사뭇 생기발랄한 그분은 나와 처음 눈이 마주치자 “넌 누구냐” 하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반갑게 말을 건네셨다. 아주 좋은 곳에 왔다고 하시며. 근데 본시 말 모양새가 거침이 없던 나는 그 말 품새를 폼나게 내지르기 어려운 어르신들과의 대화가 불편했다. 그래서 슬금슬금 가능하면 말을 섞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 돋보이는 다정함에 알 수 없는 묘한 활기를 상대에게 레이저처럼 쏘아대는 그분을 처음에는 그렇게 방어했다.
그다음 달 그 산행모임에 다시 나갔다. 모임 이름은 강산애. ‘강과 산과 사랑’이 있는 곳이라지만 강도 산도 사랑도 모두 어설프기 짝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내가 그런 순한 어설픔과 완전직하의 어정쩡함을 좋아하는 성정인지라 다시 나간 것이다. 역시나 그분은 돋보이는 다정함으로 일행을 다독이고 있었는데 시야에 나와 내 친구가 함께 잡혀 들어오자 “어~” 하며 약간 놀라는 척하시더니 대뜸 “당신들, 첫 사람이야.” 하시는 게 아닌가. 첫 사람? 이상한 조합의 단어다. 이게 무슨 말이람? 친구와 내가 쌍으로 두 눈을 끔뻑, 고개를 갸우뚱대자 그분은 이내 빙글거리며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생각해보라 하셨다.
산행 내내 심중에 남은 ‘첫 사람’의 뜻은 잘 해부되지 않았고 결국 하산길에 여쭙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은 암호 해독자의 쾌감 같은 미소를 뿌리며 장쾌한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아, 지난번 처음 왔을 때 내가 다음 달에도 꼭 오라고 했잖아? 근데 내 말대로 두 사람이 손 붙들고 다시 나온 게 나한테는 처음 있는 일이라서 당신들이 첫 사람이란 거지.”
아, 첫 사람의 의미는 그렇게 심심했다. 그러니까 지난번 그분의 당부를 예의바르게 지킨 첫 사람이란 말이었다. 아무튼 ‘첫 사람’이란 뉘앙스가 좀 싱숭하니 싱그러웠다. 그렇게 나는 그리고 내 친구는 그분의 첫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한동안 말뿐인 그 첫 사람과의 관계는 소원했다. 일방적인 내 탓이다. 다정이 병인 듯 넘치는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열렬히 당신을 드러내며 매번 장광설을 늘어놓으셨는데 왠지 귀 기울여지지 않았다. 마음의 통로가 생기지 않았고 내심 그 통로가 만들어지기는 어려우리라 생각했다. 할 말이, 공감의 여지가 적어 보였다. 그래도 그분은 그 모임의 가장 큰 어른이시고 공식적인 찬사의 대상이고 좌중의 모범이시니 나름의 예의는 필요하다고만 생각했다.
마음의 소로
그분과의 사이에 마음의 소로가 생기기까지 햇수로 2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형식상의 공손이 허례가 아닌 진심이 된 것은 그분의 일편단심 덕분이었다. 마주치는 내내 변함이 없으셨다. 복날 장터 같은 변덕쟁이 내 마음과 달리 늘 넘치게 다정했고 언제나 기운차게 따뜻했으며 항상 적절한 염려와 격려를 담뿍 건네셨다.
드문드문한 산행 출석률을 보이는 나와는 달리 100퍼센트 출석률을 깃발처럼 어깨에 얹으신 그분은 ‘강산애’가 관련한 모든 모임에 빠짐이 없으셨다. 모임의 최고 연장자가 더불어 최고의 열정이란 스펙을 갖춘 셈이었다.
거역할 수 없는 명백한 팩트로서 그분에겐 매달 오르는 산마다 육체적 힘겨움을 넘어서려는 심리적 고난이 있었지만 그 고난은 완주 후의 쾌감으로 충분히 보상되는 것, 오늘도 여럿과 함께 희망의 행군을 마쳤다는 뿌듯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였다.
2014년 봄에는 드디어 지리산 종주도 감행하셨다. 여섯 살 최연소자와 함께 최연장자로서의 위엄과 겸손을 함께 드러내는 자리였다.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한 나름의 힘찬 전진, 사회적 어른의 늠름한 기상이었으니. 종주 후, 그분의 모습은 사뭇 달라 보였다. 불쑥 치솟은 자신감에 어깨가 한 뼘은 넓어진 듯했다. 지금 이곳에서 더 높고 좋은 목소리를 낼 수 있고, 내어야 한다는 그 어떤 결연함이 느껴졌다. 내 기억으로는 그때부터 부쩍 크고 작은 모의가 잦아졌다. 계기는 당연하게도 세월호였다. 그분에게 남은 삶은 세월호 사고의 상처를 봉합하고 진혼하고 넘어서는 데 바쳐져야 하는 거룩한 시간이 되어갔다.
그분의 거룩한 시간 안에서 모임의 방향이 조준되었다. 그분의 요청으로 8월에는 버스 한가득의 강산애 인원이 함께 팽목항을 방문했다. 예상 외로 한산하고 적막한 그곳에서 먼 바다의 사고 지점을 헤아리던 뒷모습, 바람결에 흔들리던 그분의 가냘픈 백발이 힘없는 유가족의 서러움처럼 애잔했다.
9월에는 그분이 한겨레출판국에 기획을 제안하고 제작비를 찬조한 책 《0416》이 출간되었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이후 한국 사회가 나아갈 길을 묻는 글에 대한 대답을 묶어낸 것이다. 이로써 당신이 해야 하는 일, 그 사회적 몫에 대해 엄청난 숙고가 진행 중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그분과 연결된 내 마음의 소로에도 차츰 꽃이 피고 봄바람이 불고 있었다. 더 이상 그분을 피하지 않고 내가 앞서 다가서기까지 했다. 내 마음속에서 진짜 사람이 느껴진 것이다. 희뿌연 색이 아닌 선명한 코발트블루의 진정성이 그분으로부터 넘쳐오르는 것이 착란증세 심한 내 눈으로도 확인 가능해졌다. 그분은 그 무엇도 허투루 하시는 게 없었다. 겉으로 심상하게 혹은 설렁하게 보이는 모든 행동은 백조의 날갯짓처럼 수면 아래서의 엄청난 노력이 담보된 것들이었다. 그분 또한 내게 그렇게 그런 의미로 ‘첫 사람’이 되었다.
네 번의 데이트
바야흐로 본격적인 교우관계가 정립되었다. 미디어로 교신하며 서로의 생각 속으로 구체적인 속내가 들락거렸다. 의기투합되는 바가 많았다. 한마디로 마음이 잘 통했다. 쿵짝이 잘 맞는 게 은근한 즐거움을 주었다. 그분이야 여러 인물과 이런 즐거움을 나누리란 짐작이 들었지만 내게는 모처럼의 유쾌함이었다.
그분이 첫 데이트를 신청하셨다. 팽목항을 다녀온 후 ‘프라이스를 상관 않는’ 점심을 하기로 했다. 왠지 엄청 신나는 일이 생길 것
만 같은 질 좋은 예감. 조계사 탑돌이 후 평소 ‘프라이스’ 때문에 가기 힘들었던 사찰음식점에서 가장 비싼 코스 정식을 ‘프라이스’에 신경 쓰지 않고 먹는 행운을 누렸다. 강산애 내의 인문학 소모임을 논의하다 내가 부정적 의견을 표명하자 이후 ‘프라이스’가 좀 고려된 점심회합을 정례화하는 것만 잠정합의하는 것으로 첫 데이트는 끝났다. 그날 그분이 선물한 ‘호박’ 두 덩이가 전리품처럼 한동안 집안을 장식했다.
두 번째 데이트는 푸른 하늘 은하수가 곱게 펼쳐진 가을날, 그분의 선산이 있는 곳, 남양주시 일패동에서 이루어졌다. 매주 선산 묘소 다듬는 일을 일상으로 하고 계신데 가는 날이 그 해의 마지막 벌초 날인 셈이었다. 내 몫의 벌초도구까지 준비해오신 것을 보고 순간 아연했으나 담담히 받아들고 생전처음 무덤가 풀 뽑는 일에 도전. 일머리 없음을 진즉에 눈치 채셨지만 낫 하나를 어쩌지 못해 허우적대는 꼴을 나름 재미있어하시는 듯해 열심히 삽질을 해 보이며 싱긋댔다.
노동이라고 해봐야 30분이나 했을까. 알량한 노동에 대한 대가치고 과분한 접대, 그 동네 유지만 다닌다는 고깃집에서 엄선된 재료의 고기 맛을 보게 되었다. 원래 발 달린 것을 먹지 않으나 발뺌할 수 없는 상황인지라 과감히 발 달린 것의 육질을 포식했다.
그리고 그분이 임대해준 과수원에서 배 두 박스를 얻어 차에 싣고, 근처 고종황제 능이 있다는 홍릉으로 직진, 짐짓 다정한 연인처럼 팔짱을 끼고 가을 정취를 느끼며 사뿐히 행진하자니 마음이 아련해왔다. 오늘은 암만해도 그냥 본질에 충실한 데이트가 아닌가 말이다.
세 번째 데이트는 2015년 ‘레아’에서다. 여기서는 그분의 또 하나의 첫 사람인 나의 친구 채순의 동참으로 삼각관계를 구축했다. 레아는 용산 강제철거로 생계 터를 잃은 철거민 가족이 새롭게 운영하는 수제맥주 전문점. 한겨레 기사를 보고 꼭 가보고 싶다고 하셔서 벼르고 벼르다 가게 되었다. 그분과 나는 처음 맛보는 쌉싸름한 맥주 맛에 어린애처럼 흥분하며 오늘의 은밀한 회합의 뜻을 새기기에 분주했다. 세월호 유가족 유민아빠의 책이 화두였지만 화두는 처음부터 접혀졌고 접혀진 화두 위에서 자유분방한 말놀이의 즐거움이 있었다.
철거민 주인장에게 굳이 이곳에 온 뜻을 알리고 나서는 길, 불콰해진 볼의 팔순 소년은 그다음 데이트 날짜를 꼽고 계셨다.
네 번째 데이트는 1월 중순, 찬바람이 쌩하던 날의 예술의 전당. 오늘은 공연관람이다. 공연명은 <천원짜리 콘서트>. 오늘의 약속 또한 그 발원지는 한겨레의 기사다. 한겨레의 열혈독자인 그분은 가끔 신문에서 찐하게 가슴을 휘돌아치는 기사를 만나면 그 개안의 환희를 나누는 일을 일상에서의 소중한 행사로 여기셨다. 얼마 전에는 학비조달에 어려움을 느끼는 건실한 탈북청년 인터뷰 글을 읽고 그의 학비를 전담하기로 결정하기도 했던 터다.
아무튼 이번에 꽂힌 기사는 함신익이 지휘자로 있는 오케스트라 심포니송의 ‘천원짜리 콘서트’다. 문화소외 계층 및 청소년 대상의 클래식 투어의 신호탄 격인 이번 공연 기사를 보더디 대뜸 내게 그곳에 후원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셨다. 그래서 우선 천원짜리 콘서트를 만원내고 보는 것으로 후원의 시작을 모의한 것이었다.
남부터미널 역에서 만난 그분은 내 손을 잡더니 제 집 찾아드는 강아지처럼 콘서트홀까지 지름길을 찾아 휘르륵 나를 몰고 가셨다. 아니, 어째 이리도 지리를 잘 아시냐는 물음에 6개월여를 이곳에서 클래식 강연을 들으신 바 있으시다고. 아하, 나이를 날려버린 듯한 그분의 격조와 혈기가 심히 든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연은 무척 재미있었다. 클래식에 낯선 청중들을 배려하는 단원들의 고군분투가 대견하고 아름다웠다. 역시나 흥겨웠던 그분은 이제부터 함신익 공연을 모두 따라다니자며 짓궂은 팬의 미소를 지으셨다.
그리고 그 많던 데이트 약속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사실 한겨레로부터 추출된 약속과 다짐은 너무 많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 생기곤 한 것이다. 퇴직 교수가 사비로 만들었다는 여주의 인문학 도서관 기사를 보시고는 시간 날 때마다 그곳에 가서 한 나절 책을 읽자 하셨고, 사찰음식으로 유명한 봉녕사에서의 소박한 밥상이 소개된 기사를 보시고는 당장 봉녕사를 가자 하셨으며, 비슷한 연배의 교황님이 가난한 지구인을 향해 내리는 따뜻한 말씀을 접할 때면 매번 그 말씀을 전하시며 함께 교황님을 추앙하곤 했다. 요사이 문화적 대세가 된 휴먼라이브러리를 강산애에서 새롭게 추진하자는 제안에서는 내심 그분을 첫 사람책으로 모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최근 급박하게 부상된 둘 사이의 안건은 ‘정의를 지향하는 분노’에 관한 것이었다. 몇 년 전 프랑스의 노지성이 발간해서 세계적인 관심을 획득한 책 《분노하라》와 같은 책의 한국어 버전이 필요하다는 강력한 제안을 하신 터다. 세월호에 천착해 있는 그분의 삶은 극심한 무력감에 빠져 있는 부정의한 현실에 미력이나마 균열의 종을 치는 일을 궁리중이셨다.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책을 발간할 수 있을지 머리를 맞댔다. 저자를 물색하던 중 아예 그분이 저자가 되는 것이 가장 효율성 있겠다는 판단을 했고 나 혼자 그분을 저자로 추대했다. 더불어 할 일이 많아지겠기에 나로서도 고민이 되는 일이었지만, 이미 올 한 해는 그분과 함께 많은 것을 나누기로 한 터라 개의치 않기로 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시작되어야 할 일이 태산인 오늘, 여기까지가 끝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설레는 온갖 가지의 데이트와 엄중한 약속들, 모두 이제 어디로 사라져갈 것인가.
어느 둘레길을 걸으며 그분과 처음 긴 대화를 나누었던 시간이 떠오른다. 배낭 속에서 꾸깃한 작은 영문 책자를 꺼내시더니 수줍게 요즘 읽고 있는 것이라 하셨다. 가끔씩 기차를 타고 목적 없는 종착지까지 달려가 그곳에서 두어 시간 책을 읽다 오시는 것이 큰 열락이라 하셨다. 언젠가는 그렇듯 세상사 의미 없는 장소에서 당신 혼자의 의미를 만끽하시다 불현듯 돌아가시는 것을 꿈꾼다고도 하셨다.
그렇다면 그분은 이제 ‘불현듯’의 꿈을 이루신 걸까? 마지막 접촉의 기억, 지난 연날리기 행사에서 그분은 내 손 위에 당신 손을 얹고 능숙하게 하늘 높이 저 높이 뭉게뭉게 연을 띄워올렸다. 그 따뜻한 기운이 아직 남아 있기에 내겐 아직 그분의 죽음이 믿을 수 없는 ‘사건’이지만, 그래서 내 나름의 진상규명을 위한 통곡의 밤을 또 한 번 흘려보내고 있지만, 그분은 아마도 그 불현듯 치러진 ‘사고’의 책임을 누구에게도 묻지 않으실 것 같다. 다만 살아 있는 자들에게 당신 몫의 ‘정의’를 당부하는 일에 충실하시겠지. 언제까지나.
생생한 삶의 선물
내겐 그분의 마지막 선물이 된 책 《눈먼 자들의 국가》에는 그분의 생각이 토해진 검은색 밑줄이 빼곡하다. ‘삶의 생생함’이란 활자에도 크게 동그라미가 쳐져 있다. 죽음 앞에 선 삶의 생생함. 여기에 동그라미를 칠 때 그분은 어떤 생각을 하신 걸까. 아무려나, 며칠 전까지 그분은 당신의 생생함으로 죽은 아이들을 보듬는 일을 하셨는데, 이제 내가 그분의 죽음 앞에서 나의 생생함을 꾸려야만 한다.
앞으로 나와 우리들의 생생함이 누구를 위한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일깨우는 그분의 절절한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더듬더듬, 그분의 미소를 두르는 삶을 위한 노력을 약속드린다.
내겐 축복 같았던 우정을 나눈 나의 사랑하는 벗,
영구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아마도…… 아주 오래오래…… 손 모으고 있게 될 것 같다.
[출처] <이영구선생님 추모글> 어떤 우정 (희망제작소 강산애) |작성자 자인
첫댓글 그간 뜸하시기에 무슨 일이 있으시나 했더니요. 소중하신 길벗 님을 떠나 보내 상실감이 참으로 크시겠어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