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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운이 좋아, 선택 할 수 있어
출처 :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napolitan&no=10059
눈을 뜨자 보이는 건 하얀 방이였다.
"뭐... 뭐야 여긴...?"
정신을 차린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한다.
온통 새하얀 정사각형의 방, 시선 정면에는 두 개의 문이 보인다.
파란색과 초록색의 문
내가 누군가한테 원한 살 짓이라도 했던가?
아니면 누가 나를 납치하기라도 한 걸까?
혹시 장기 밀매?
수많은 물음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살려달라고 소리치고는 싶지만, 문 너머 뭐가 있을지 모르기에 입을 닫았다.
몸을 뒤져보지만 휴대폰이나 외부로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해 보려 할 때
갑자기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꽤 신중한데, 소리부터 지르거나 날뛰지 않고>
목소리의 근원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지만 이 방안에는 나 혼자뿐이다.
천장을 살펴봐도 스피커 같은 건 없다.
<아, 놀랄 것 없어. 나도 너랑 같아, 이곳에 갇혀있어>
<너처럼 이곳으로 끌려온 사람이란 소리야>
어디를 둘러봐도 소리가 나오는 곳은 찾을 수 없었다.
아니 그보다 소리는 머릿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림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말도 안 된다 생각할 수 있는데 여기가 그래>
<적어도 너랑 나는 시각과 사고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감각으로 이어져있어>
<한마디로 네가 말하고 듣고 피부로 느끼는 건 나 또한 느낄 수 있다는 말이야.>
<물론 네 생각까지 읽지는 못하니까 안심하고>
<그러니까 나한테 할 말 있으면 소리 내서 말해, 네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리면 알 수 없다고>
"대체 내가 왜 여기에 오게 된 건데?!"
<그건 나도 몰라, 나도 너처럼 억울하게 이곳에 왔어>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침착한 거야?"
<나는 너보다 더 일찍 깨어났으니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있었지>
"누가 이랬는지 짐작 가는 사람 없어?"
<어... 나도 딱히 짐작 가는 사람은 없어, 그보다 여기서 탈출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야 해>
"탈출?"
그 순간, 벽에 걸린 문 두 개가 시야에 들어온다.
<일단 내 역할은 길잡이야, 네 역할은 탈출자고>
"잠깐, 잠깐, 길잡이? 탈출자?"
<응, 나는 너랑 달리 사방이 다 막힌 방 안에 있거든>
<너를 탈출 시켜야 나도 밖으로 나갈 수 있어>
"..."
<내가 지시하는 대로 따라서 네가 탈출하면 우린 돌아갈 수 있어>
<참 악질적인 게임이지?>
"네가 하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어?"
<뭐, 정 싫으면 네 마음대로 하면 돼, 너도 나도 함께 망하는 거지>
<하지만 네 말대로 내가 너를 해치려는 인간이면 굳이 이런 일할 필요까진 없지 않겠어?>
<그냥 너를 납치해온 순간 뭘 해도 했을 거야>
<판단은 너에게 맡길게>
맞는 말이긴 하다. 뭐가 됐든 녀석이 이 일을 꾸몄다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놈이 나를 갖고 놀려고 일부러 이러는 걸 수도 있지 않은가?
<네 앞에는 파란색과 초록색 문이 있지? 정답은 파란색이야>
문으로 내 시선이 향한다.
...녀석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에 빠진다.
<뭐, 이해한다. 말로는 받아들이기 힘들겠지. 네가 나를 못 믿겠다면 증거를 조금 보여줄게>
그러자 갑자기 몸에 몸에 간지러움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어...?"
그 뒤에는 꼬집거나, 바닥을 뒹구는 듯한 감촉
"야... 야...! 잠깐...! 그래 알겠어, 알겠다고!"
"이거 기분 나쁘니까 그만해...!"
놈의 말대로 감각이 공유되듯 내 몸에는 갑작스럽게 여러 감각들이 들이닥친다.
하긴, 애초에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인 일이다.
나는 자연스레 이 상황을 납득하고야 말았다.
<어때, 이제는 믿을 맘이 조금은 생겼어?>
<어떤 악질적인 놈이 여기에 우리를 가둬뒀건, 초자연적인 무언가에 휘말렸건...>
<지금은 일단 이곳을 탈출하는 거에 중점을 둬야 하지 않겠어?>
"후우..."
한숨을 길게 쉰 나는 정말로 터무니없는 일에 휘말렸단 것을 깨달았다.
"네가 해석한 암호, 정확한 거 맞지?"
<물론이야, 적어도 암호는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범위 내에서 해석 가능하더라고>
<그리고 네가 잘못되면 나도 잘못돼, 그러니까 나도 필사적으로 노력할 거야>
"좋아, 믿는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문고리를 힘껏 잡아당겼다.
문이 열리자 하얀 방과 마찬가지로 일자형의 새하얀 복도가 보였다.
"엄청 긴 통로가 나왔는데?"
<응, 그럼 계속 걸어가도록 해>
놈의 말을 따라 나는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아! 혹시라도 네 눈에 뭐가 보이거나 혹은 문이 아니더라도 갈림길이 나오면 꼭 나한테 말해줘>
<네가 뭔가 꺼림칙하거나 한 게 있으면 다 소리 내서 말해달란 말이야>
<적어도 그러한 것에 대한 대처법들도 내가 가지고 있거든>
"그래, 알겠어. 알겠다고..."
<조급해 할 건 없어, 내가 너보다 하루 먼저 왔는데 이 공간은 특별해>
<배가 고프거나, 지치거나, 딱히 그런 것들의 제약을 받지는 않아>
<중요한 건 신중하게 앞으로 발을 내딛는 거야>
<열심히 해서 둘이 함께 꼭 빠져나가자>
"응, 그래, 꼭 탈출하자"
"야, 계속 걷고 있는데 벽에서 문이 보이는데? 문은 두개야"
<그러면 문의 색깔을 확인해 봐>
"둘 다 흰색이야"
<문에 귀를 갖다 대고 소리를 들어봐, 열리지 않게 조심하고>
"이렇게?"
<방금 파도 소리가 들린 방 있지? 그 방 문을 열어>
문을 열자 폭포수와 같은 물줄기가 쏟아져 나왔다.
"우왓! 야?! 물이 쏟아져 내리는데?!"
<그 물은 곧 네가 지나온 통로로 다 빠져나갈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
녀석의 말대로 물은 10분 정도 쏟아내리다 다 빠져나간다.
"내가 지나온 길에 배수구는 없을 텐데..."
<궁금증은 좋지 않아, 그게 어디로 사라젔는지 알아내면 별로 유쾌한 경험은 못할 거야>
<계속 걷도록 해>
"야, 네가 보고 있는 종이에 대해 나한테도 좀 알려줄 순 없어?"
"말만 따라 들으려니 답답하다고"
<미안해, 이건 이 공간이 정한 규칙 같은 거거든>
<내가 구체적인 걸 너한테 알려주는 순간 둘 다 게임오버야>
"그럼 뭐 어쩔 수 없네..."
이쯤 오니까 나도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어느 정돈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래도 심심하지 않게 계속 말동무는 해줄게>
<단, 나랑 이야기하느라 주변 상황에 신경 못 쓰는 상황은 없길 바란다.>
"물론이지, 그 정도 멍청이는 아니니까"
생각보다 긴장감이 많이 풀렸다.
이야기 나눌 사람도 있었고, 무엇보다 여기서 나한테 위해가 될만한 건 보이질 않았으니까
물론 무엇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조마조마한 마음은 있었지만
어느덧, 퍼즐 게임을 푸는듯한 마음으로 임하고 있었다.
"구름과 달이 있어, 분명히 문을 열고 나왔을 뿐인데"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마, 그 구름은 밟고 건널 수 있어>
"정말 이 문을 열고 들어가도 돼?"
<어, 하지만 네가 방금 귀를 대고 들은 괴물 소리는 안에서도 들려올 거야>
<그런 경우 귀를 막고 30초 정도 엎드려서 숨을 참아>
<그러면 무사히 지나갈 수 있어>
"이번엔 네 갈림길이야"
<걱정할 것 없어, 정답지는 항상 있으니까>
<해와 달이 그려진 곳으로 향하도록 해>
"한쪽은 영혼처럼 반투명한 다리가 있고, 한쪽은 돌로 된 다리가 있어"
"가운데는 녹색 나무가 있고"
<그 경우에는 반투명한... 잠깐...?>
"...?"
<아니, 아니, 잠깐 멈춰봐>
<돌로 된 다리 쪽... 아니 이건 검을 찬 기사가 있는 조각상이었던가...?>
<분명 알고 있었는데...>
"뭔가 문제라도 있어?"
처음으로 녀석이 머뭇거렸다.
<아냐, 아냐, 내가 답을 잘못 구한 거 같아>
<생각할 시간을 좀 줄래? 문제가 좀 어렵네...>
"어... 그래"
뭐... 하다 보면 막힐 수도 있지
유달리 긴 침묵의 시간이 이어진다
<아, 아아, 아아아아-! 으아아아아---!!>
녀석이 갑작스레 탄식과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하... 아핫.. 아하하하... 하핫..! 하하하하....!>
이윽고 탄식은 웃음으로 바뀌어 미친 듯이 웃기 시작한다.
"뭐야, 왜 그러는데?"
"너 괜찮아? 무슨 일 있어?"
<이거였구나... 이거였어...>
<아... 아하하... 이제야 이해가 다 가네...>
<그랬구나, 그런 뜻이었구나, 아하하하하하...!!>
"뭐라는 거야?! 알아들을 수 있게 좀 말해봐!"
연신 혼잣말을 내뱉다가 웃어대기를 반복하는 녀석에게 큰 소리를 친다.
뭐지? 대체 무슨 일이지?
알아낼 방법이 없으니 답답함이 옥죄여온다.
녀석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아, 너는 운이 좋아. 선택할 수 있을 거거든>
<하지만 그렇기에 운이 나빠, 네 선택은 항상 정답이 아닐 거거든>
"?"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이 녀석 뭐지?
지금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갔다.
"아니, 대체 무슨 상황인지 말이라도 해보라니까!"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모두 진실이야>
"뭐?"
<사실 너한테 했던 말 거의 다 거짓말이었어>
"야...?"
<어, 나도 너랑 똑같아, 이 방에 갇힌 사람, 그건 맞아>
<근데 나는 길잡이가 아냐, 너랑 똑같은 탈출자지>
<내가 있는 이곳은 미궁이야, 너랑 완전히 똑같은 미궁>
<서로 완전히 똑같은 미궁 안에 두 명의 사람이 있어>
<우린 서로 만날 순 없지만 통각을 공유하고 서로 말하고 들을 수 있어>
<그래, 이제 이해가가?>
"무슨 소리야... 그럼 네가 여태 알려준 건 뭔데...?"
"여태껏 네가 알려준 것들은 다 뭐였냐고!"
<그야 멍청이들을 속여서 알아낸 길이지>
<너처럼, 내가 안내자 역할이란 말을 철석같이 믿고는 나를 따랐던 놈들>
<그 멍청한 놈들을 먼저 보내서 어느 길이 정답인지 알아내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고, 그걸 반복해서 알아낸>
<수백수천 명을 속여서 얻어낸 정답지였지>
<너도 내가 길을 알아내는 장기짝 중 하나였고>
<네가 앞으로 살아나간다 해도 모든 길을 다 기억하진 못할 거야>
<어차피 너도 나랑 같은 것을 깨달을 테니, 차라리 죽는 걸 추천할게>
<왜냐하면, --- --- --- --- --- --- --->
순간,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한다.
아,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처음에 했던 말....
마치 이곳의 룰을 모두 알고 있다는 듯했던 말들....
나는 단순히 녀석만이 받은 어떤 정보가 있어서라 생각했다.
<--- --- --- --- --- --- --->
녀석이 말해주는 진실들, 파도와도 같이 몰려드는 정보 속에서 나는 극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뭐, 내가 있는 곳은 네가 있는 곳과 달라, 이곳은 황금 사자 조각상이 있는 곳이거든>
<아무튼 네게 말했지? 선택할 기회를 준다고>
<네가 앞으로 나아가겠다면,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정보를 말해서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노력해 줄게>
"지랄하지 마... 이제 네 말은 더 이상 듣지 않을 거야"
<하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든 너는 듣지 않겠지>
<하지만 말이야, 다시 말하는 건데 차라리 죽는 게 편할 수 있어>
<나도 수천 명을 희생시키며 여기까지 왔는데 아직도 출구는 없었으니까>
<뭐, 그냥 편히 내려놓고 죽는 걸 추천할게>
"닥치라고 이 씨발새끼야!"
"안 죽을 거야, 난 살 거라고, 살아서 여기서 나갈 거야."
<그래, 네 선택을 존중할게>
<어차피 둘 중 누군가 죽지 않으면 새로운 인간은 들어오지 않아, 10년이 지나도, 100년이 지나도>
<네가 싫은 것 같으니 내가 양보하도록 할게>
<나는 황금 사자 동상이 있는 세 갈래 길에서 가운데로 갈 거야>
<지금은 어떤 말도 들리지 않겠지만 언젠가 너도 나를 이해하게 될 거야>
발소리가 들린다. 녀석이 걸어가는 발소리가...
곧이어 섬뜩한 감각이 몸에 들이닥쳤다.
마치 예리한 칼로 피부를 긁듯이 온몸을 오싹하게 하는 감각이 느껴졌다.
"어..?"
놈이 내지르는 단말마와 같은 비명이
그 뒤에 몰려드는 극심한 통증이
"아아아악...!!---- ----"
고통은 녀석의 비명 소리와 비례하지 않았다.
놈의 비명은 금세 그쳤지만 나의 비명은 계속되었다.
온몸이 무언가에 서걱서걱 씹히는 감각
살이 찢어지고 뜨거운 것이 몸을 불사르는 감각
배를 창으로 꿰뚫듯 찢어지게 아프며 위장부터 시작해서 모든 장기가 뒤틀리고 꼬여버리는 감각
거의 한 시간 동안 녀석의 육신이 겪는 구체적인 감각이 온몸을 강타한다.
"헉... 허억... 헉..."
--
고통은 나에게 삶에 대한 강한 열망을 안겨주었다.
죽고 싶지 않다. 반드시 살아 나갈 거다.
한참 동안 혼란스러운 머리를 움켜쥐고 있다가 들려온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저기 누구 없어요...?>
<제가 왜 여기에 있는 거죠...?>
다행히도 먼저 번 그 녀석이 스스로 무너져내린 탓에 내게 기회가 왔다.
놈이... 어떻게 했더라? 그래, 길잡이
나는 녀석의 말을 그대로 흉내 내며 똑같이 말하기 시작했다.
"음... 저기 정신이 들어?"
<당신은 누구죠...? 지금 어디에 계신 거죠?>
<저를 왜 여기에 데려온 건가요?>
"아아, 잠시만... 진정해 봐요. 저도 그쪽이랑 입장이 같아요."
놈이 했던 것처럼 나도 할 수 있다.
내가 걸어왔던 발자취를 더듬으며
녀석을 따라서 친절한 길잡이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때론 위기도 있었고, 이상한 놈들도 만났지만
놈들을 구슬리고 희생시켜가며 나는 한 발씩 전진했다.
비록 온몸을 지져놓는 뜨거운 작열통을
송곳 같은 예리한 것이 몸을 씹는듯한 섬뜩한 통증을
발끝부터 몸이 썩어문드러지는 끔찍한 감각을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고통의 형태를 수천 번은 겪어내었지만
나는 무너 질 수 없었다.
여태 버텨온게 있다.
수백 번을 버텼으니, 이다음이 출구일지도 모른다.
수천 번을 버텼으니, 이제 곧 나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 실낱같은 희망과, 내가 겪어온 과정들이 아까워서라도 포기할 수 없었다.
고통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죽기 전 절규에 가득 찬 단말마를
나를 원망하는 저주를
살려달라는 간절한 외침을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수백 번씩 들었다.
그러한 말들 따위는 이제 감흥도 없이 흘려들을 수 있건만
이놈의 고통은 사라지지가 않았다.
익숙해지지도 적응할 수도 없었다.
포기할 수 없다.
놈이 지나왔다던 황금 사자 조각상은 이미 한참 전에 지났다.
이제 곧 끝일 거다. 이제...
그러나 나의 기대와 달리 또 갈림길이 나왔다.
황금 칼과 방패 문양이 그려진 네 갈래의 갈림길에서 나는 멈췄다.
네 갈래라... 최소 세명은 여기까지 데려와야 한다는 뜻이다.
마침, 정신을 차리고 난리 브루스를 치고 있는 한 녀석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긴 어디야 씨발...! 어떤 놈이 날 가둔 거야?! 당장 뛰어나와!>
하는 행동을 보니 꽤나 입이 험하고 다혈질적인 놈이 들어온 거 같다.
뭐... 익숙하다. 이런 놈들 한두 번 겪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구슬리는 것 따윈 일도 아니다.
"저기, 잠시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줄래?"
.
.
.
.
.
<지금 있는 곳은, 흠... 커다란 나무 두 개가 있고 >
<세 개의 갈림길이 있어, 길은 각각 흙길, 아스팔트, 자갈길이고>
"음, 그래 거기선 말이지, 거기선 흙..."
<흙길?>
"아니 잠시만, 생각해 보니..."
잠깐, 전에 흙으로 갔다가 죽는 길이 있지 않았나?
여기가 아니었나? 아, 그건 붉은 나무가 있던 길이였나?
뭐였지...? 잠깐... 어...? 이럴 리가 없는데...?
"어...?"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 내가 지나온 곳이다.
다른 녀석들을 수백 번도 더 안내했을 길이다.
이곳에서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이 나야만 했다.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왜, 무슨 문제 있어?>
"아냐,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봐"
"좀 어려운 문제가 나왔어, 생각할 시간을 줘"
<그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기억을 되새겨 봐도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내가 안내했던 길들을 하나씩 점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까먹었다. 길들 중 몇 개를 까먹었다.
어제 느꼈던 통증이 너무 강렬해서였을까
이곳에 지나치게 오래 있어서 내 머리가 이상해져서 였을까
아니, 어쩌면 내 뇌가 인간의 한계에 도달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대체 얼마나 더 이 짓거리를 해야 하는 거지?
앞으로 길이 더 늘어난다면, 더 기억할게 많아질수록
나는 더 많은 것을 까먹을 것이다.
이 문 앞에 출구가 있을지, 또 이어진 미궁이 있을지 나는 모른다.
여태껏, 해온 게 아까워서, 이 앞만 가면 출구가 있을 거라 믿고 버텨온 횟수만 수백 번이다.
그 실낱 같은 바람으로 여기까지 버텨왔건만
반드시 탈출하겠다던 각오는 굉음을 내며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죽음의 고통을 수천 번 더 체험하면 되나?
수만? 수십만? 어쩌면 그 이상?
대체 왜 그렇게 해서까지 탈출하려 했지?
나는 뭘 위해서, 이렇게 아등바등 힘들게 발버둥 치는 거지?
살려고?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살아나가야 할 필요가 있나?
어차피 사람의 삶은 늦든 빠르든 죽는 것이 아닌가?
밖으로 나가서 잠깐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해도 나는 다시 죽어야만 하는 거 아닌가?
모든 것에는 끝이 있지 않은가?
남들도 언젠가 맞이할 죽음을 여기서 맞이한다 생각하면 그리 억울할 일도 아니지 않은가?
왜 그 끝을 받아들이지 못해 고통뿐인 삶을 연명하는가?
차라리 내가 함정으로 인도해서 죽게 만들었던 녀석들이 부럽다고 생각했다.
내가 해온 모든 과정이 허망하게만 느껴진다.
모든 삶은 죽어서 무로 돌아간다.
내 노력과 무관하다.
어차피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나는 그걸 받아들이지 못해서 아둥바둥거리며 고통 속에 있었구나
나는 지옥에 있었고 다른 놈들은 지옥을 벗어났구나
처음 그 녀석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던 내가...
그 녀석...
내가 처음 만난 그 녀석...
나는 마침내 녀석을 떠올렸다.
내가 이곳에 떨어져서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눴던 인간
내게 선택할 기회를 줬던 그 녀석이
머릿속에 천둥이 치기 시작한다.
살고자 하는 열망으로 흘려버렸던 놈의 말들이 뇌리를 강타한다.
"아-- 아아... 아아아아--! 아아아아아-----!"
아, 네가 이랬구나.
아, 네가 했던 말이 이거였구나
네가 느꼈던 게 이거였구나
이 감정을, 이 상황을, 너도 느꼈구나, 너도 겪었구나
그때 그 탄식과 비명, 웃음소리를 이제야 이해하리라
이제서야 모든 걸 알겠다.
녀석이 했던 말도, 녀석이 했던 행동들도
너도 똑같은 걸 깨달았구나
너도 똑같은 걸 생각했구나
다른 녀석들을 장기짝처럼 이용했던 나야말로 멍청했구나
속아 움직이던 그 바보들이 차라리 더 좋은 결말을 맞이했구나
네가 나에게 그랬듯, 너도 누군가에게 똑같은 말을 들었구나
네가 나한테 그랬듯, 나도 지금 저 녀석에게 똑같이 말할 거구나
너 이전에도 몇 명이고 너와 같은 녀석들이 있었을 거고
나 이후에도 몇 명이고 나와 같은 녀석들이 있을 거구나
<뭐 하는 거야, 이 새끼야! 왜 갑자기 지랄하는 거야?!>
아, 나는 이제야 너를 완전히 이해한다.
그 순간, 실소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핫... 아하핫... 으하하하하핫....!"
녀석과 같은 웃음을, 녀석과 같은 말을 나는 입 밖으로 내기 시작한다.
온몸을 찢어발기던 고통 속에서도 꽉 붙들어잡던 이성의 끈을 망설임 없이 놓아버렸다.
<야 이 새끼야,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왜 쳐 웃는 건데!>
방금의 깨달음으로, 장기짝에서 자유를 얻고 인간으로 승격한 녀석에게
자신의 의지와 생각으로 모든 걸 선택할 수 있는 자격과 권리를 얻은 한 명의 사람에게
내 말을 일절 듣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며 살려고 발버둥 칠 하나의 생명체에게
그렇기에 불행할 수밖에 없는 저 녀석에게
"아... 너는 운이 좋아, 선택할 수 있어"
"하지만 그렇기에 운이 나빠, 네 선택은 항상 정답이 아닐 거거든"
"오직 너에게만 사실대로 다 말해줄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모두 진실이야"
첫댓글 그냥 첫번째에 곱게 갈게요 먼저간다
첫번째 길잡이랑 똑같이 반응하네 ㅠㅠㅠㅠㅠ
우앙
죽음의 고통을 수백번 느끼는 것보다 한번 죽는 게 낫겠어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