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치르치르 미치르
만약 당신이 술을 마시고 집에 가는 중이라면
안녕.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당신이 술을 마시고 집에 가는 중에 이 글을 읽는다면 부디, 헛소리라 생각하지 말고 집중해서 읽어줘.
그래. 나도 알아. 이런 글이 갑자기 올라온다면 이건 뭐, 피싱인가 싶겠지. 하지만 난 진지해. 최소한 이 상황에서 당신을 걱정하는 건 나밖에 없어.
그리고 부탁하건대, 나의 문체나 목소리나 말투 같은 쓸데없는 것에 신경 쓰지 말도록 하자. 지금 이러고 있는 시간도 아까우니까.
자, 우리 되짚어 보자. 일단 글을 읽고 있으니 핸드폰은 가지고 있겠지. 집엔 어떻게 가고 있어? 걸어서? 버스? 지하철? 택시?
사실 수단은 중요치 않아. 주변이, 너무 조용하지 않아?
그래. 당신의 숨소리가 당신에게 들릴 만큼.
당신이 스크롤을 내리는 그 희미한 소리가 들릴 만큼.
아, 아니야? 주변이 충분히 시끄러워?
그럼 잘 들어봐. 그 소리가 당신이 알아들을 만한 말들이야? 혹시 그 말들이 이해가 가? 그렇다면 미안해. 당신은 늦었어. 즐거운 밤을 보내도록 해.
귀를 기울였는데도 그 말들이 무슨 의미인지 인지하기 어렵다면 다시 집중해. 아직 집에 갈 수 있으니까. 무언가를 타고 있다면 일단 내려. 그리고 우리 의식적으로 걸어보자.
같은 팔과 다리를 뻗어. 어색할 거 알아. 하지만 이곳에서 이질적으로 보이는 것보단 기분이 어색한 게 백번 나을걸. 내 말을 믿어. 최소한 물구나무서서 걸어가라고는 하지 않잖아?
그래...그렇게 걷다 보면 슬슬 광원이 사라질 거야. 눈앞에 보이는 건 어둠뿐이겠지. 당신이 흡연자라면 라이터가 충분한 빛이 되어 줄 거야.
...전자담배? 그건 어쩔 수 없지. 세상엔 비흡연자도 많고, 당신이 전자담배를 피거나 비흡연자인 건 그저 운일 뿐이니 여기선 논하지 말도록 하자. 애초에 흡연자일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당신이 빛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미안해. 당신의 앞을 비출 건 지금 당신이 읽고 있을 이 화면의 빛이거나 혹은 핸드폰 손전등 기능일 뿐일 거야. 하지만 손전등 기능을 사용하는 걸 추천하지는 않을게. 왜냐하면 이곳에서는 비정상적으로 배터리가 빨리 닳고 있을 거거든. 당신의 핸드폰이 제 기능을 다 하도록 빌 수밖에.
...뭐? 보조배터리? 저기, 아직도 심각성을 모르는 모양인데. 이곳에서 저편과 똑같은 편의성을 기대하면 곤란해. 의심이 간다면 연결해 봐. 충전 중이라는 표시가 뜰 테지. 충전은 당연히 안 되겠지만.
글을 읽는다고 멈춰 서 있는 건 아니지? 아무튼 일단 걸어. 같은 팔과 다리를 뻗는 거 잊지 말고.
...아. 이미 자연스럽게 걷고 있었어?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평생의 밤을 즐기도록 해.
당부를 잊지 않고 의식적으로 걷고 있었다면 그대로 삼십 분만 걷자. 시간의 흐름이 이상하게 느껴질 거야. 십 분으로 느껴질 수도, 한 시간으로 느껴질 수도, 하루로 느껴질 수도 있어. 하지만 당신이 걷는 시간은 딱 삼십 분이야. 아무리 힘들어도, 몇 날 며칠처럼 느껴지더라도 걱정하지 마. 당신이 실제 걷는 시간은 그렇지 않으니까.
삼십 분을 걸으면 빛이 보이기 시작해. 그럼 대충 고비는 넘겼다고 봐야지.
빛이 있는 쪽으로 쭉 걷다 보면 당신이 처음 보는 거리가 나타날 거야. 보통은 우리가 어렸을 때 봤을 법한 골목길이지만, 가끔은 잘 닦인 대로변일 때도 있어. 거리의 상태가 중요한 게 아니야. 당신이 처음 봤을 법한 거리인 게 중요한 거지.
아니, 어쩌면 익숙할 수도 있겠다. 당신이 직접 보지 못했을 법한 과거의 거리거나 상상이나 기타 미디어로 접했을 법한 거리일 수도 있으니까. 아무튼 명심해. 중요한 건 당신이 ‘겪어보지 못했을’ 거리라는 거야.
아, 여전히 집 근처 거리야? 응, 그럼 뭐. 아무 가게에나 들어가서 술을 한 잔 시켜. 그리고 그 밤을 즐기는 거지. 그게 당신에게도 좋을걸. 아무튼 무언가 정신이 팔릴만한 게 필요할 테니까.
...그래, 다시 돌아가서. 처음 본 거리가 나왔다면 주변을 신경 쓰지 마. 주변은 당신의 주의를 끌 만한 것들로 가득 할 거야. 예컨대 헤어졌지만 미련이 남은 옛 연인, 하고 싶은 말을 끝내 건네지 못했던 가족, 마지막 가는 길을 보지 못했던 반려동물 같은 거 말이야.
정신 팔리지 마. 집에 가야지.
그것들은 당신이 알던 모습 그대로일 테지만, 당신이 알던 이들이 아니야. 그들은 당신에게 말을 걸테고, 당신이 듣고 싶어하던 말을 해줄 거야. 당신이 마주한 게 반려동물이라도 마찬가지야. 그들은 당신을 언니 혹은 누나 혹은 엄마라고 부르며 당신과의 삶이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이야기할 테지.
눈물이 난다면 우는 건 괜찮아. 하지만 대답하지는 마. 돌아보지도 말고. 당신이 견디지 못하고 그들에게 주의를 돌린다면 .....당신에게는 행복한 일일 수도 있긴 하겠다. 그래도 평생 함께 있을 순 있을 테니까.
당신이 그것들을 무시하는 데 성공했다면 다시 주변이 어두워지기 시작할 거야. 거의 다 왔어. 걷다 보면 꺼지기 직전인 것 같은 가로등이 거리를 좀 두고 세워져 있는 게 보일 거야. 당신이 가로등 아래를 지나갈 때에 맞춰 가로등은 차례로 꺼질 거고. 무서워하지 마. 이제 어둠은 뒤에 있고 당신은 빛을 향해서 걷기만 하면 되니까.
마지막 가로등을 지나쳐서 가로등들이 완전히 다 꺼지면 그때부턴 숨을 참아. 얼마 걸리지 않을 거야. 숨을 참고 약 100보 정도를 걸으면 당신의 집이 보이겠지.
고생했어. 이제 오늘 일은 잊고 어서 씻고 자도록 해.
당신이 이걸 읽는 동안 부디, 손발을 맞춰 걸었길.
술먹고 집오다가 생각나서
첫댓글 나도 모르게 집중해서 읽었다... 반려동물 나올 때 난 가망 없을 듯...
으아아....
숨참고 100보에서 글렀다
반려동물 나오면 나 그냥 그게 어디가됐든 우리애기랑 평생 살게....
반려동물은 진짜 반칙이다 이 나쁜놈들아ㅜㅜㅜㅜ 난.. 우리애기 보러 그냥 뛰어갈거야
우리 애 있으면 거기가 내 집이야
같이 살면 안되나요 ㅠ
와......나도 우리 애기 나오면.....그냥 포기할 것 같아.....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어...
진짜 우리 애기가 아니더라도 나는 혼자 두고 나올수가 없어....
진짜 내새끼가 아니라도 내가 그 애들을 두고 어떻게 가……. 나는 못 가 거기 혼자 두고 나올 수가 없어….
이미 읽느라 멈추거나 손발 안맞췄을듯
우리 아이가 나오면 내가 사는게 중요합니까..
울 애기들이랑 같이 살수있어요? 그럼 거기 있을래 ㅠ ㅏㅠ
숨참고해봤는데 50보도 못걸음 마지막이 심술보네
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곳에서 사는거지 뭐. 이사 했다치고
오늘부터 연습할게ㅠ
이미 읽느라 손발 안맞았어요ㅠㅠㅠ 아니 걸었다 해도 100보에서 이거 뛰어야하나..?했어ㅋㅋㅋㅋㅋㅋㅋㄱㅋ흡연자라 라이터있어서 좋지만 폐활량...웁스라고요ㅠㅋㅋㅋㅋ
근데 뭔가 빛을향해 가기만 하면되고 무서워하지말라며 어둠은 뒤에있다는게 왜이렇게 따듯할까...암튼 이제 술먹으러 갈땐 후레쉬 들고 다녀야겠어 건전지는 괜찮겠지?ㅠ 아닌가ㅠ
100보동안
숨어케참아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