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의열단 독립투사' 남정각, 총독부 폭파 작전
'한일합병 불평불만 품었소, 사형도 좋소' 법정진술
죽기를 각오한 독립투쟁, 남정각의 애국투혼
'동창이 밝았느냐' 남구만과 남나비의 후손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출신 남정각(1897~1967)은 그 치열한 활동에 비해 비교적 덜 알려진 무장투쟁 독립가다.
그는 용인의 거족이라할 수 있는 의령남씨이며 '동장이 밝았느냐'의 님구만과 남나비'라 불렸던 화가 남계우의 직계 후손이다.
남정각은 약산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는 무장독립투쟁단체인 의열단에서 두각을 드러낸 독립투사다.
의열단이란 명칭은 '정의의 사(거사)를 맹렬이 실행한다'는 뜻을 담았다.
의열단서 김원봉과 함께 활약한 투사
의열단은 삼일운동이 있던 해인 1919년 11월 19일에 중국을 거점으로 설립되어 10년간 치열하게 활동했던 단체다.
이 단체는 일제에 대한 평화적 저항의 한계를 절감하고 반성하면서 투쟁적인 노선으로 갈아탄 청년그룹이었다.
창단시기 약산 김원봉은 21살이었고 오산 남정각(남영득)은 22살이었다.
3.1운동이 계기가 됐다.
비폭력투쟁으로 전국민이 떨쳐 일어났던 만세운동이 일본의 무지비한 폭력으로 좌절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해 복수를 겨냥했다.
오직 무력만을 수단으로 삼고 암살만을 정의로 삼아 일제의 기관파괴와 요인 암살을 위해 목숨을 건 활동을 펼친다.
파괴 대상은 총독부의 수탈기업, 언론사, 경찰서
파괴 대상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경찰서, 기타 중요기관이었다.
암살대상으로 꼽은 존재는 총독부 고문과 군 수뇌, 친일파 거물, 밀정, 반민족 토호 등이었다.
의열단은 '조선혁명선언' 4조항을 내걸었다.
1조는 '민중은 우리 혁명운동의 대본영이다'
2조는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다'
3조는 '천만년이 지날지라도 강도 일본의 세력을 파괴하기 위해 폭력에 의한 암살-파괴-폭동을 멈추지 않는다'
4조는 '인류가 인류를 압박하고 권력이 인류를 압박하는 일이 없는 이상적 조선을 세운다'였다.
이 선언은 1923년 베이징 망명중이던 신재호가더욱 정교하게 다듬기도 했다.
죽기를 각오하고 대담한 습격을 벌이는 의열단의 활약을 일제에겐 오랫동안 공포의 대상이었다.
사서오경 공부하던 선비, 3.1운동 이후 인생 대전환
남정각은 집안의 분위기를 따라 16세까지 사서오경을 공부하던 어린 선비였다.
1013년 서울기독교청년회 공업과에 입학했으나 이듭해인 1914년 에 중퇴했다.
그의 생에 닥쳐온 전환기는 1919년 삼일운동이었다.
22세인 그는 고향 용인을 비롯해 수원과 안성을 돌아다니며 독립신문을 배포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남정각은 민족의식에 눈뜨게 된다.
세상에 관해 뭔가 더 제대로 알아야 하겠다는 의식이 생겼고 1920년 3월에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한다.
베이징에서 중국 청년회 어학과에서 중국어를 습득했고, 장춘, 텐진, 상하이를 돌아다니며 그곳에서 활동하는 독립지사들을 만난다.
결정적인 만남은 1921년 겨울 베이징에서 의열단장 김원봉과 만난 것이다.
1922년 6월, 25세의 남정각은 죽기를 서약하고 의열단원이 된다.
김원봉은 남정각에게 국내로 돌아가 김한(임시정부 사법부장 출신)에게 조선의 주요 일제 건물들을 파괴할 의지가 있는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남정각도 장춘에서 김원봉과 함께 김한을 만난 적이 있었다.
6월말 국내에 잠입한 남정각은 김한과 접선해 의견을 나눴다.
남정각, 총독부 폭파 작전에 가담
'폭탄을 중국 안동까지만 운반해주시오.
그러면 내가 부하들을 동원헤 폭탄을 국내에 반입하겠소.
그 폭탄으로 조선총독부를 파괴하겠습니다.'
님장각은 김한의 이 말을 김원봉에게 전했다.
김원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거사 자금 2천원을 마련할테니 다시 조선으로 가서 김한에게 전하도록 하시오'
남정각은 8월에 다시 국내로 들어갔고 돈을 전했다.
김한은 그 돈으로 폭탄을 마련하는 방법과 총독부에 투척하는 계획에 관해 간결하게 설명했다.
남정각이 중국에 들어온 지 두 달이 되었을 때(10월20일), 김원봉이 다시 글 찾아왔다.
'폭탄 마련 건은 내가 해결했소.동지가 국내로 다시 들어가, 직접 폭탄을 투척하는 건 어떻겠소?'
남정각 동지, 국내 잠입해 직접 총독부 폭파하시오.
남정각에게는 일생일대의 투쟁 기회였다.
그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원봉은 남정각에게 폭탄 투척방법을 기르쳐주고 연습하게 한다.
12월28일 입국한 그는 폭탄이 도착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이 먼저 일어났다.
1923년 1월12일 의열단원 김상옥이 종로경찰서를 폭파한 것이다.
이후 10여 일간 도피를 하며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고 상당수의 일반무장경찰을 사살한 뒤 김상옥은 자결했다.
이후 일제는 바싹 긴장했다.
감시와 경계가 강화됐다.
이 무렵 김한이 체포되는 일이 일어났다.
이후 김시현이 조선 내 기간 파괴를 맡기로 했다.
남정각은 거사 자금을 마련하는 일에 투입됐다.
활동자금 요청했던 부자 조선인 이인회의 배신
2월21일 그는 상해를 떠나 서울로 가서 내자동에 사는 거부 이인희를 찾아갔다.
그는 상하이에서 온 임시정부 군무총장 정모라고 자칭하고 활동자금 5천원을 요구한다.
이인희는 협조하겠다고 밝히면서 당장 거금을 마련하는 일은 어려우니 며칠만 기다려달라고 간청했다.
약속한 3월3일 남정각이 이인희 집으로 갔을 때 10여 명의 잠복경찰이 덮쳤다.
매일신보 3월8일자에는 '권총강도 공범자 남정각과 그의 누이동생을 체포해 엄밀히 취조'라는 기사가 실렸다.
1923년 8월7일 경성지방법원에서는 의열단원 12명의 공판이 있었다.
남정걱은 이렇게 최후진술을 했다.
동아일보 '남정각의 초후진술, 말끝마다 피가 돋았다'
'나는 항일합병에 불평과 불만을 품고 의열단에 가입했다.
이후 오직 조선만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조산민족에게 각성을 주기 위해 오늘까지 살아왔다.
나의 형벌에 대해서 아무래도 좋다.
사형도 좋소이다.'
'남정각의 법정 최후진술은 언론에 크게 실렸다.
동아일보 기사에는 '말끝마다 피가 돋는 남영득(정각)의 진술'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1923년 8월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을 구형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6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8년 출옥한 뒤 이등해에 다시 중국 텐진으로 망명한 남정각은 텐진교민회를 조직해 동포들의 권익을 지키는 일에 매진했다.
반민특위에서 이인희 고나련해 증언 '이완용 같은 자'
1845년 헤ㅐ방 이후, 남정각은 교민회를 통해 동포들의 귀국을 도왔다.
배ㅔ편을 마련하고 일본인의 재산을 몰수해 동포들의 귀국여비로 제ㅐ공하기도 했다.
1946년 그는 500여 명의 조선인들로 고려동지회를 결성하여 농촌지역의 의식개혁과 계몽운동에 매진했다.
1948년 반민특위가 출범한 뒤 이인희가 친일파로 체포됐다.
그의 고발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한 남정각이 반민특위 증언대에 선다.
'이인희는 이완용에 못지 않습니다.
당시 의열단의 거사가 실현되었더라면 우리 민족의 역사에 그 쾌거가 남았을 것입니다.
내가 체포됨으로써 폭탄을 받을 이가 없어서 의거 전부가 수포로 돌아가고 동지들이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반민족주의자로 처벌함아 마땅합니다.' 이렇게 역사는 돌고 도는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1963년 정부는 남정각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967년 별세 이후,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모셨다.
고향인 용인 모현읍 파담에는 용인향토사학회와 후손들이 세운 '남정각 의사 유허비'가 있다.
용인의 의열단 남정각은, 죽기를 각오하고 옳음과 자존을 위해 무지막지한 일제 권력과 싸웠다.
시대가 달라지고 상황 바뀌어도, 지켜야 할 가치를 위해 인생을 걸었던 그의 빛나는 선택들은 지금도 울림이 있으며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남정각은 영득이란 이름으로도 불렀다.
호는 오산이다.
오산은 '뜨거운 산'이란 의미가 있다.
그의 삶이 그랬다.
김원봉의 호가 약산이니 산처럼 굳세게 싸우기로 맹액한 그뜻이 둘의 아호에도 담겨 있다.
겨울을 지나며 바싹 마른 풀들 사이에 보랏빛 제비꽃이 피었다.
벌써 더위가느껴질 만큼 푹한 날, 마을은 인적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의열단원으로 목숨을 걸고 독립투쟁에 나섰던 투사의 행적이 우허비 하나로 쓸쓸히 남은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일었다.
약천사당 부근서 발견한 재비꽃 먗 송이에 눈길이 머물러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울 아버지 산소에 제비꽃이 피었다'던 나훈아의 노래 구절이 떠오르기도 했다.
남정각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고 국가보훈부 공훈 전자사료관에서 1997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수원보훈지청)로 선정되기도 했다. 용인소식 편집팀
취재수첩
2025. 3. 26 수요일 오후
오산 남정각(1897.12.22~1967.1.29)의 자취를 찾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일대를 뒤졌다.
남정걱이 살았던 길담리 피담마을에는 약천 남구만 선생의 사당이 조성되어 있었다.
인근에는 의령남씨 조상의 묘소 몇 기도 보였다.
남정각의 자취는 그의 사진을 새긴 '우허비, 여갓적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을 기념하는 비)' 하나가 전부였다.
비석에 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이곳(모현면 갈담리 523 파담마을)은 독립운동가 오산 남정각 지사의 생가 터이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수원 등지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이듬해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해 장춘-텐진 등지를 순력하였다.
장춘에서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난 뒤 1922년 6월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의열단에서는 국내의 일제기관 파괴와 요인을 암살하고자, 서울에 있던 감한과 김원봉 사이를 오가면서 폭탄 수입을 준비하던 중
김한이 검거되어 폭탄을 구하지 못하였다.
그해 텐진으로 가 독립운동 비용을 보충하기 위해서 동지 권정필, 유시태, 유병하와 협의한 뒤 권총을 휴대하고
서울 이인희 집에 찾아갔다.가 잠복한 경찰에 붙잡혔다.
출감 후 다시 텐진으로 망명하여 텐진교민회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생가 터의 위치에 대해서는 서울 종로라는 설이 있었지만 지사의 종형제인 고 남병렬 씨와 동생 남정휴 씨의 증언으로
이곳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23년 3월 남정각이 일본 경찰에 체포된 뒤 이 사건을 보도한 신문기사가 남아 있다.
'권총강도공범자/남정각과 누이동생까지/공범자로 잡아 엄밀히 취조
며칠 전 밤 종로경찰서에서는 시 내무교평리 이인희라는 부호를 협박한 권총강도 유병하 외 다섯명을 채포하였다.
또 같은 서의 고등계에서는 계속하여 공평동 대서소 남명칠의 넷째동생 남정각을 채포하는 동시에 다시 그의 누이동생되는
경운동 100번지 조돛러의 처 남정자를 검거하고 목하 엄중히 취조하는 중인데, 남정각은 본시 구쓰 직공으로서 수년전에
중국 천진에 들어가 작년 음력 12월경에 집에 들어왔는바 자동 권총 한 자루를 사가지고 나와 유병하 등과 공모하고자
자기는 그 단체의 참모가 되어 권총과 탄약을 공급한 수괴라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