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뱀은 우리 곁에 항상 존재하는 가깝고 친근한 동물
불사·재생·영생의 상징으로 의미 되새기는 새해맞이
민족 최대 명절인 설날이 찾아왔습니다. 이제 정식으로 갑진(甲辰)년에 이어 2025년 을사(乙巳)년이 시작된 것입니다. 갑진년이 푸른 용의 해였듯, 을사년은 푸른 뱀의 해입니다. 이는 천간(天干) 갑을(甲乙)은 오방색(五方色) 가운데 청색이기 때문입니다.
뱀이 허물을 벗고 새로운 재생의식을 치루듯, 대한민국이 을사년을 맞아 진통을 거듭하면서 새로운 시대적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불교적으로는 뱀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성도를 외호하는 상서로운 동물로 여겨지고 있어, 새해에는 지혜가 증장하고 번영과 평화, 발전과 교화를 이끄는 보살의 화신으로 을사년 푸른 뱀의 외호(外護)가 충만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뱀과 불교’에 얽힌 이야기를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 편집자
십이지신 뱀(통도사 성보박물관 소장)
지구상의 모든 생명들처럼 사실 뱀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 그렇지만, 각 문화권에 따라 뱀은 간교하고 사악한 악의 화신으로 배척되거나, 가늘고 긴 혀와 독을 품고 있어 이간질 하거나 해로운 동물로 징그럽다고 여긴다.
뱀은 극지를 제외하고 전 세계에 분포하고 있는데 한대지방에는 종류가 적고 온대에서 열대로 갈수록 종류가 늘어난다. 전 세계에는 13과 3천여 종이, 우리나라에는 3과 16종이 서식하고 있다. 뱀은 보편적인 느낌에서 드러나듯, 우리 설화 속에서도 인간을 해치려는 사악한 존재로 등장한다. 치악산 상원사(上院寺)의 연기설화(緣起說話)도 뱀이 인간을 해치려다 실패하고 만다는 내용이다. 뱀이 꿩 두 마리를 잡아먹으려는 걸 보고 뱀을 죽이고 꿩을 살려준 나무꾼 이야기가 유명하다.
그날 밤 나무꾼은 산속의 어느 집에서 젊은 여인을 만나 대접을 받으며 자게 되었다. 한밤중에 눈을 떠보니 큰 뱀이 자기의 몸을 친친 감고 잡아먹으려 하고 있었다. 여인은 뱀의 화신으로 죽은 남편 뱀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었다. 그때 어디선지 종소리가 울려왔고 뱀은 도망을 가버렸다. 이튿날 종소리가 난 곳을 찾아가 보니 퇴락한 종루에 꿩 두 마리가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있었다. 이 자리에 절을 세우니 그것이 오늘날의 상원사이다. 산의 이름이 꿩 ‘치(雉)’ 자를 붙인 치악산이 된 이유다.
뱀이 제주도에선 토속신앙의 대상으로 신성시되었다. 제주의 신당(神堂) 가운데 ‘여드렛당’은 매 8일이 제일로 이 당은 주로 뱀을 모시는 당이다. 제주는 주로 밭농사가 행해지는데 곡식을 갉아 먹는 쥐는 퇴치해야 할 주 대상이었다. 쥐의 천적은 뱀이고 그러니 뱀은 제주 사람들에게 곡식을 지켜주는 고마운 존재가 생각된 것이다. 그래서 제주에서는 뱀을 부(富)을 가져다주는 존재, 즉 ‘부군칠성(富君七星)’이라 하여 사찰에서도 ‘칠성기도’를 많이 올린다.
조선후기부터 민간에 크게 유행한 당사주책에는 뱀띠를 가리켜 ‘용모가 단정하고 학업과 예능에 능하며 문무를 겸비’하였다고 적고 있다. 십이지 동물로서 뱀은 다른 동물에 뒤지지 않는 대접을 받고 있었으며 인간이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운명을 같이하는 친숙한 존재였다.
아담과 이브의 타락 뱀의 모양을 한 릴리트가 아담과 이브를 거짓말로 유혹하고 있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벽화.
서양에서 뱀은 악의 화신
뱀을 가장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기독교의 ‘성경’이다. 서양의 인식은 얼마나 확고한지 뱀은 악한 정도가 아니라 ‘악’ 그 자체로 인식된다. 뱀은 인간의 영원한 적으로, 우주 질서 속에서 뱀의 유일한 기능은 ‘파괴’라고 간주한다. 성경의 요한계시록에는 “뱀은 땅으로 내쫓겼다. 그 큰 용은 악마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데 온 세계를 미혹하던 자이다. 그 용의 부하들도 그와 함께 땅으로 내쫓겼다. 뱀을 없애라. 마침내 영원한 행복이 뒤따를 것이니”라고 마침내 최후를 맞이하는 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선악과를 뱀의 꼬임으로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는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한 서양의 부정적 뱀의 모습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뱀의 의미가 전혀 다르게 인식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뱀이 자주 등장하고, 숫타니파타에선 허물을 벗는 뱀의 모습이 수행에 비유되기도 하고, 은혜 갚는 뱀도 자주 등장한다.
숫타니파타 첫 장에서는 수행자가 고행을 통해 새로운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뱀의 허물을 벗는 것에 비유했다.
뱀의 독이 몸에 퍼지는 것을 약으로 다스리듯,
치미는 화를 삭이는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뱀이 허물을 벗어버리듯이
연못에 핀 연꽃을 물속에 들어가 꺾듯이
애욕을 말끔히 끊어버린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뱀이 허물을 벗어버리듯이
이처럼 뱀은 기존의 습을 허물처럼 벗어버리고 수행자가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것으로 비유되고 있다. 그래서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리고 일체의 세계로 들어서는 수행자는 뱀이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과 같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숫타니파타의 구절에 ‘히말라야에 흐르는 물을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된다’는 경구도 나온다. 여기서 소가 먹는 물은 젖이라는 긍정적인 것을 낳고 뱀이 먹는 물은 독이라는 부정적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맛지마니까야 ‘뱀의 비유의 경’에서는 이전에 독수리 사냥꾼이었던 아릿타 비구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릿타 비구는 “내가 세존께서 설하신 법을 알기로는, 장애가 되는 법들이라고 설하신 것을 수용해도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비구들은 아릿타 비구에게 나쁜 견해를 고쳐주려고 질문하고 반문하고 추궁하며 그를 설득한다.
“도반 아릿타여,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세존을 비방하지 마십시오, 세존을 비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존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반 아릿타여, 세존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장애가 되는 법들을 설하셨고, 그것을 수용하면 반드시 장애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뱀 머리의 비유로 감각적 욕망은 많은 괴로움과 많은 절망을 주고 거기에는 재난이 더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런 설득에도 불구하고 아릿타 비구는 그의 견해를 완강하게 고수하고 고집했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비구들을 불러 법을 잘못 파악한 예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준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어 땅군이 뱀을 원하고 뱀을 탐색하고 뱀을 찾아다니다가 큰 뱀을 보았다고 하자, 그 사람이 그 뱀의 몸통이나 꼬리를 잡는다면 그 뱀은 되돌아서 그 사람의 손이나 팔이나 몸의 다른 부분을 물어버릴 것이다. 그 때문에 그 사람은 죽음에 이르기도 하고 죽음에 버금가는 고통을 당할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뱀을 잘못 잡았기 때문이다. 법을 배우지만 그 법을 배워 통찰자로서 그 법들의 뜻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는다. 그럴 때 그들에게 그 법들은 확립되지 못한다. 그들은 오직 다른 이들을 논박하고 자기 교리를 주장하기 위해 법을 배우므로 법을 배우는 그 궁극의 의미를 체득하지 못한다. 그들이 잘못 파악한 법들은 그들을 긴 세월 불이익과 고통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법을 잘못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처님은 땅군을 수행자에 뱀을 법에 비유해 비구들에게 설명하셨다. 결국 법이라는 것은 제대로 살펴야 그 진정한 뜻을 궁극적으로 체득할 수 있는 것이다. 혹여나 잘못 파악하면 뱀의 독에 물리는 격이 된다는 것을 당부하고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죽은 이의 재생과 영생을 돕고 풍요와 재물(財物), 가복(家福)의 신으로 숭상
생명 탄생과 치유의 힘, 지혜와 예언의 능력, 끈질긴 생명력의 화신으로 인식
불교에서는 뱀을 가르침의 비유대상으로 인용, ‘은혜 갚는 뱀’이야기도 많아
나가 무짤란다. 기원전 2세기 무렵. 마하라슈트라 파우니출토(인도 뉴델리박물관 소장)
부처님을 외호하는 무짤란다 뱀
무엇보다도 불교에서 뱀을 신성시하는 것은 무짤란다 때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 성도 후 다섯 번째 7일 날이었다. 부처님은 무짤린다나무 아래에서 선정에 들었다. 그 때, 갑자기 폭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무에 의지해 살던 무짤린다 용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짤린다는 코브라뱀이었다. 무짤린다는 자신의 몸으로 부처님의 온몸을 감싸고 부채처럼 넓게 펼친 자신의 머리로 부처님의 머리 위를 받쳤다. 선정에 든 부처님에게 비바람과 추위가 의미는 없는 것이지만 무짤린다는 선정에 든 부처님의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로 인해 비 한 방울, 바람 한 점 부처님을 지나가지 못했다. 또한 부처님을 살피는 무짤린다의 매서운 눈매에 온갖 짐승과 벌레들이 부처님 곁에 얼씬도 할 수 없었다. 7일 동안 몰아쳤던 폭풍우가 그치자 무짤린다는 부처님을 감쌌던 자신의 몸을 조심스럽게 풀기 시작했다. 무짤린다는 7일 동안 꼼짝하지 않고 부처님을 지켰다.
여전히 염려와 경계의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는 무짤린다의 모습을 본 부처님이 따뜻한 목소리로 무짤린다에게 말했다. “법을 깨달아 마음이 기쁜 자는 홀로 있어도 행복하다. 이 세상 어떤 생명에게도 적의를 품지 않고 자비로운 마음을 갖는 자는 행복하다. 모든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 ‘나’라는 교만한 마음을 던져 버릴 때,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 부처님의 법을 받게 된 무짤린다 용왕은 부처님께 귀의했다.
이렇게 부처님의 존재 의미는 모든 유·무정에게 차별이 없었다. 그 위대함에 귀의한 모든 존재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부처님을 섬기고 공덕을 지었다.
불경 속에는 무짤린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뱀왕들이 부처님께 귀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스와트 지역의 뱀왕 아파랄라, 우루벨라의 찬다 등이 있다. 이 뱀왕들과 이를 숭배했던 토착신앙의 세력은 매우 단단했기 때문에 뱀왕들은 불법에 귀의할 생각이 없었다.
부처님은 금강역사를 시켜 동굴 속의 아파랄라를 밖으로 나오게 하여 조복시켰다. 아파랄라는 과거부터 현생까지 폭우를 이용해 사람들을 괴롭혔던 뱀이었다. 뱀의 몸을 받기 이전 생에서도 그는 비를 관장했던 바라문의 마법사였다. 뱀은 코끼리와 함께 인도에서 대표적인 물의 수호자로 불려왔다. 부처님을 폭풍우로부터 지켰던 무짤린다와 더불어 아파랄라도 물을 관장하는 신이었다. 물의 신으로 불렸던 뱀은 부처님께 귀의하면서 새로운 소임을 받게 된다. 물은 생명의 번식을 포함해 자연을 풍요롭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자 ‘공간’이다. 그 물속은 뱀의 왕, 즉 용왕이 사는 곳이며, 불법을 간직하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자연을 풍요롭게 하는 것처럼 불법을 지키는 공간으로 변한 것이다. 이후 다른 지역에서의 경전 속에서도 뱀의 용궁이 등장한다.이렇듯 경전 속의 뱀은 일찍이 부처님을 알아보고 부처님을 따랐던 선지식처럼 등장한다.
십이지신의 뱀(통도사 성보박물관)
동양에서 뱀은 신비한 에너지
그렇다면 현실속의 뱀은 어떤 존재이며 인류에게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태어나면서 누구나 십이지신 중 하나의 지신과 연결된다. 또 한국인들은 모두 선택의 여지없이 부여받는 것이 ‘띠’라는 것이다.
열두 띠를 결정하는 것은 12년에 태양을 한바퀴 도는 목성의 공전주기다. 지구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을사(乙巳)년 뱀의 해는 동남쪽 방향에 있다. 왜냐하면 하루 중에서 뱀의 시, 즉 사시(巳時)는 9시에서 11시 방향에 있기 때문이다. 목성이 띠를 결정하는 이유는 그만큼 목성의 크기가 커서 지구에 미치는 중력의 힘이 강하기 때문이다.
목성이 인류사에서 중요하게 인식된 것은 약 1만년 전 바빌로니아의 점성술에서 시작됐다고 보고 있다. 60갑자를 따지는 60진법도 바빌로니아에서 시작되었고, 고대 로마에서도 목성은 특별한 숭배의 대상이었다.
목성의 12년 주기에다가 각기 동물을 배정한 건 그 해에 태어난 사람들의 운명을 예측하기 위해서였다. 예측은 규칙적인 반복과 순환의 원리에 기초해 있다. 동양에서는 이 12년 순환의 원리를 손바닥 열두 마디에 압축해 ‘당사주(唐四柱)’를 봤다. 당사주에서 뱀은 ‘천문(天文)’에 해당한다. ‘뱀(巳)’은 차가운 지성을 상징하고 ‘문(文)’은 지성을 뜻한다. 십이지에 ‘뱀’을 포함시킨 고대인들의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뱀이 지니고 있는 상징이 너무 심오하고 신비한 상징이기 때문이다.
신화에 고대 역사서에 등장하는 뱀은 근원적인 생명 에너지로 비유됐다. 요가에서는 그 에너지를 ‘쿤달리니(Kundalini)’라고 표현해, 우리 몸의 아랫배 부위에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고 여겼다. 그 에너지의 형상이 뱀처럼 생겼다고 본 것이다. 뱀이 세바퀴 반을 똬리 틀고 있으면서 뱀의 대가리는 잠이 들어서 숙이고 있는 데, 잠 든 뱀을 깨우는 것이 도를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수행이고 명상이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부처님의 성도를 위해 외호를 하던 코브라도 하단전의 쿤달리니 에너지가 부처님의 머리 위로 올라가서 7개의 차크라를 모두 뚫었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요가에서는 인체에서 7개 차크라를 뚫는 것이 수행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곱번째 차크라를 뚫으면 신통력이 생기고,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력과 천상천하 모든 일에 도통하게 된다.
이렇듯 전 세계적으로 보이는 생물이니 만큼, 뱀에 대한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주로 다산과 풍요의 상징이기에 뱀 모습을 한 여신이 흔하고, 몇 시간, 혹은 며칠 동안 뒤엉켜 교미를 하는 습성 때문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음행의 상징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뱀은 탈피를 하는 생물이고 이 탈피는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나오듯 부활과 재생의 상징으로 널리 쓰였다. 죽는 생물이 아니라 불사조처럼 계속 자라나고 커지는 생물로 여겨지기에 장수, 무한, 영원 등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정착-농경사회에서는 뱀을 긍정적으로 보거나 숭배하는 문화가 많으며, 반면에 유목 생활을 하는 건조 지대, 사막 지역 민족은 매우 부정적인 동물로 터부하며 악의 상징으로 간주하는 문화가 흔하다. 이렇듯 뱀을 보는 관점은 생활기반과 밀접하게 연계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뱀은 문명권을 막론하고 이로움과 해로움, 성스러움과 사악함을 두루 가진 복잡한 특성으로 상징되는 특징이 있다.
의학의 신 아스클레오피스
그러나 뱀이 가장 긍정적으로 상징되는 것은 ‘의술’의 신이라는 영예일 것이다. 독을 품은 뱀이 사람을 살리는 학문과 기술의 상징이라는 게 모순되어 보이지만 사실 독과 약은 정도에 따라 효과가 다를 뿐 근본적으로 한 몸이다.
그리스신화에서 아폴로의 아들 아스클레오피스는 뱀이 다른 뱀에게 치유의 약초를 가져다 주어 그 뱀을 살리는 것을 보게 된다. 제우스는 아스클레오피스가 생명을 살리는 지혜를 인간에게 주기 전에 벼락을 던져 그를 죽인다. 인간이 영생을 얻어 신과 겨루는 것은 신들의 세계에서 금기사항이기 때문이다. 아스클레오피스의 도구인 뱀을 휘감은 지팡이는 오늘날에도 세계보건기구(WHO), 한국의학협회 등등의 심볼로 사용되고 있다.
수많은 뱀설화는 다양한 인간세상의 모습 반추하는것
그러나 뱀에 대한 긍정적 관점이 더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북유럽 신화의 요르문간드는 아예 온 세상을 감싸는 세계를 상징하는 신적 존재이다. 인도 신화의 나가도 풍요와 생사를 관장하며 세계를 창조한 젖의 바다 젓기 전설에서 활약하는 위대한 존재이다. 우로보로스와 같은 불사의 상징이나, 용으로 승화된 뱀은 세상의 이치와 영원, 윤회를 상징하는 강력한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태국 농카이 왓 캑 조각공원의 코브라와 붓다
심지어 성경에서도 마태복음 10장 16절에는 “뱀과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결하라”고 말하기도 한다. 예수의 발언 중에도 제주들을 향해 “너희는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라고 설교하기도 했다. 물론 반대로 예수의 성전 정화에서는 “이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외치기도 하지만, 이사야서 11장 8절에는 “젖먹이가 독사 곁에서 놀며 어린 아이들이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라는 구절도 있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뱀이 헤르메스의 지팡이 등 치유의 상징인 동시에 이중적으로 메두사, 히드라 등의 괴물처럼 사악한 존재이기도 했으며, 이집트나 중앙아시아, 아메리카의 문명에서는 신성시되었다. 그렇지만 서양문명에서도 뱀은 지혜와 부활, 생명의 탄생, 치유를 상징한다. 대표적으로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에 비비 꼬인 뱀의 의미가 위의 것. 부활이라 하는 건 뱀이 표피를 벗을 때가 부활하는 모습처럼 보여서 의학의 상징이 되었다.
현실 속에서의 뱀은 부정적인 인상에도 불구하고 상상 세계의 뱀은 매우 다양한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십이지 동물 가운데 뱀처럼 상상의 세계에서 많은 이야기를 가진 동물이 없다.
불교의 십이지신 사상은 그 각자의 ‘띠’가 바로 보살이 의인화된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모두 보살의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이다. 보살로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새해에는 뱀의 긍정적인 면, 인내하고 지혜롭고 의리 있는 모습으로 말이다. 그리고 올해는 을사년 푸른 뱀의 해이다. 60갑자 중에서 우리 역사에 등장했던 을사년은 1905년의 일본과의 ‘을사늑약’으로 강제 병합의 안좋은 기억이 있다. 120년 전의 을사년은 치욕의 해였지만, 2025년 을사년은 한국이 묵은 껍질을 벗고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는 전환기가 되어야 한다. 뱀이 허물을 벗듯이 지금 한국은 치열한 변화가 진행중이다. 생명질서의 존중과 같은 재생의 시간이 상처를 아물게 해주기를 기대해 보는 을사년 새해아침이다.
저작권자 © 제주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