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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5월 25일.,조총련 설립. 1945년 이전부터 일본에 살았던 재일동포는 1945년 해방과 함께 전국적인 규모 조직을 결성했다. 1958년 5월조총련 제4회 전체회의는 한덕수 1인 의장 체제로 이행한 대회. 이후 조총련도 활동가가 3명 이상 있는 각급 기관·직장·지역에 비공식의 중핵적 지도 조직으로 ‘학습조’가 조직되었다. 이 학습조는 김일성 혁명사상의 조총련 내 침투와 민대파 추락에 따른 한덕수 지도체제 강화 촉진을 위한.,수단 북한 교육원조 지원송금과 북한 귀환이 고양되기 시작. '1959~1984' 93,340명이 북한으로 갔다.. 조총련에게 1960년대 초는 조직의 확립기. 유치원, 조선대학 150개 민족학교 기틀 마련 1960년대 초기에 조총련 산하 재일동포는 20만 명이 되었다. 1970년 전후 재일동포 사회 급변. 김일성 주체사상을 유일한 지도사상으로 하는 조직체제 이 과정에서 김병식이 급부상. 1972년 한덕수와 대립하여 실각. 이후부터 조총련 조직은 하향곡선,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재일동포 성묘단의 모국 방문 사업이 추진되어 조총련 구성원이 민단 전향 수가 증가. 1980년대 한덕수 체제 재건 이후 김정일의 지도가 조총련 조직 내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김정일 지도사상으로 조총련 급변 198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 성장과 조총련계 상공인들에 대한 헌금 강요.
‘86년 서울아시안게임’ ‘88년 서울올림픽’ 개최. 조총련 세력이 점점 약화. 1990년대 이후 북한 식량 위기 탈북자 문제, 그리고 조긴(朝銀) 파산과 납치 문제 등이 이를 선도. 2001년 총련 한덕수 사망. 이후 조총련은 서만술(徐萬術)의장, 허종만 책임부의장 체제. 2000년대 후반 조총련 조직은 약화되어 4만명으로 줄었다. 조총련은 『조선신보』 발행 월요일과 목요일을 제외하고 조선신보사가 매일 발행한다. 2003년 공식 확인된 조총련계의 북한 송금액 23억 엔(약 230억 원). 하지만,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북한에 넘어간 돈은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분석. ...............한덕수................. 경북출생 1927년 성악가가 되려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 대학 중퇴후 1934년 조선인 노동자 파업 주도 체포 1945년 10월 15일 결성된 재일본조선인련맹(조련)에 참가해 총무부 담당위원에 선출 1955년 5월 25일 조총련 결성 1958년 5월 제4회 의장에 선출. 2001년 사망까지 중앙위원회 의장 1967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됐다. 1972년에는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1994년 김일성 사망 당시 북한 서열 4위. ..................................................... |
삼청각은 1974년 이후 국빈접대 정치회담장
‘밀실 정치’ 고급 요정으로 활용된 것으로 유명
당시, 삼청각 청운각, 대원각은 우리나라 3대요정.
.
1970/80년대 성행했던 서울 관광요정 기생관광.
기생(妓生) 혹은 기녀(妓女)는 춤·노래·풍류 등으로
주연석이나 유흥장의 흥을 돋우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관기,·민기(民妓) ·약방기생 ·상방기생 예기(藝妓)의 총칭.
춤, 노래, 시 등에 능한 예인(藝人)
대표적인 기녀로는 16세기 황진이.
기생제도는 조선시대 자리를 굳혔기에
일반적으로는.,조선시대의 기생을 지칭.
당대 사회계급상으로는 천민에 속했으나
지식인으로서 대접받는 특이한 계층이었다.
일제강점기 기녀 중에는 노동조합을 결성
권번의 착취와 일제에 항쟁한 기녀도 있다.
'조선해어화사'- '원화 제도가 기생의 본류'.
고구려와 백제의 고분벽화 등에도 기생과 비슷한
여성은 발견되고 있으나, 기록으로 남은 것은 없다.
고려 초에 팔관회와 연등회 등 행사에
여성을 공급하기 위해 고려여악이 제정.
가와무라 미나토 등의 기생 연구가들은
고려여악이 기생의 원조라 주장하고 있다.
고려 시대 초기에 삼국 통일 과정에서
발생한 포로를 관리하기 위해 고려 정권은
남자 포로를 '노', 여자 포로를 '비'로 관리했다.
'비' 중 가무와 예악에 뛰어난 여성들은
따로 골라내어 국가가 직접 관리하였다.
후백제의 후예로 고려에 반항적이던 양수척
중 예악이 뛰어난 여성을 뽑아 '기'로 삼았다.
왕실 주요 행사인 팔관회와 연등회에는
'여악'이 뒤따랐는데, 위의 여성들이 동원.
관기 제도는 1894년 갑오개혁 당시
신분제 폐지로 함께 폐지되었지만,
기생들은 생계를 위해 지속적인 활동.
1908년 일제는 '기생 단속령'
및 '창기단속령'을 공포하였다.
'춤과 노래' 공연 여성은 '기생'
성매매는 '창기'로 구분지었다.
기생은 경찰청에 신고하여 허가증을 받아야 했고
경찰청 지시에 따라 조합을 설립해야 한다고 규정.
이러한 배경 속에서 기생조합은 유명 요릿집과 계약
기생 수수료를 받는 상업적 조직의 성격을 띄기 시작.
기생들은 기생조합 중개로 도시 요리관과 같은
상업적 공간에서 영업을 하고 시간당 화대를 받는
형식으로 노동에 대한 물질적 보상을 받게 되었다.
경성에 생긴 최초의 기생조합은
1913년 지방출신 향기로 남편 없는
기생을 모아 설립한 다동조합 (茶洞組合)
경성 출신의 경기로 남편이 있는 기생을
모아 설립한 광교조합 (廣橋組合)이었다.
기생조합은 1915년 일본식 표현인
'권번' (券番)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다동조합은 '조선권번'으로,
광교조합은 '한성권번'으로
낙원동에 종로권번이 신설되면서
세 권번이 경쟁하며 명창들을 배출.
1942년에는 세 권번의 주주가 병합해
삼화권번이라는 이름으로 발족하였다.
경성 외에도 광주, 남원, 달성, 경주, 개성,
함흥 등의 지방에서도 권번이 설립되었고,
특히 평양에 설립된 기성권번이 잘 알려졌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은
'사라져가는 낭만의 나라' 조선.
전통문화'로서 기생을 바라보았다.
많은 일본인들이 유명기생들의 화보집,
관광 엽서를 발행해 많은 수입을 올렸으며,
잡지에서 기생의 하루를 사진으로 찍어 판매.
실례로 드라마 경성스캔들에서는 잡지사 사진 기자와
편집자가 잡지에 실을 기생 사진을 찍는 이야기가 나온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민족말살정책으로 권번도 강압적 폐지
전통예악 기생제도는 점차 사라지고 성매매 유녀만 남게되었다.
1945년 이후 조선시대 '기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몇몇 명기 만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전통 예술을 계승.
그러나, 기생학교와 권번제도를 통해 기생을 유지하던
일제가 한반도에서 물러간 후 요정(고급 음식점)에서
특권층을 상대로 기생과 비슷한 식의 성매매를 하였다.
1970년대 일본인들이 서울에
단체 기생관광이 성행하였다.
황진이 등이 지었다는 시조가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외에도 김홍도, 신윤복 등의 화가들이
기생을 대상으로 한 그림들을 그린 바 있다.
춘화는 조선시대 후기 민속화의 일종으로,
남녀 간의 정사를 가감없이 표현하고 있다.
춘화에 등장하는 여성의 대부분이 기생으로
춘화를 통해 당시 기생의 생활상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유명화가 신윤복과 김홍도
기생과 관련된 그림을 많이 그렸으며,
이들이 그린 춘화도 지금까지 전해온다.
‘성북동 산에 새번지가 생기며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 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김광섭 시인
그가 ‘성북동 비둘기’를 쓴 1968년.
북악스카이웨이가 개통되던 해이다.
성북동 비둘기로 상징되는 북악스카이웨이.
자동차만 달렸을 뿐,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은
보안 상의 이유로 수십 년간 출입이 금지되었다.
그러던 이 길이 2007년 개방
산책 명소가 태어나게 되었다.
팔각정 ‘하늘전망대’에 올라가면
북악산 일대를 볼 수 있는.,전망대.
북악산(백악산)
............북악산............
북방 수호신., 현무(玄武).
경복궁 북문 신무문(神武門)은
신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북쪽 주산인 북악산(北岳山)은
조선의 사상과 정기가 서린 곳으로서
'면악(面岳)' '백악(白岳)' '공극산(拱極山)'.
북한산 줄기가 남쪽으로 이어진.,북악.
북한산 주봉인 백운대(白雲臺)와 함께
만경대(萬鏡臺), 인수봉(仁壽峯).,삼각산.
세 봉우리가 큰 삼각형으로 솟아 있기 때문.
만경대는 무학대사가 조선의 도읍지를 찾아
순례할 때 백운대에서 맥을 찾아 만경대에 올라
서남쪽을 내려다보고 도읍을 정했다 하여 국망봉.
만경대는 남쪽으로
북악산과 연결된다.
"백악이 도성 북쪽에 있는데 평지에 우뚝 솟아났고,
경복궁이 그 아래 기슭에 있다. 서울 도성을 에워싼
여러 산 중에 이 산이 북쪽에 우뚝 뛰어나니 조선왕조
국초에 이 산으로 주산을 삼고 궁궐을 세운 것은
잘된 일" 이라.,북악산 덕을 칭송한.,<한경지략>
................................................................
2006.02.12. 연합뉴스
38년 만에 시민 개방..
"가치 돈으로 환산 안돼"
노무현 대통령이 시민들과 함께
38년만에 다시 열린 북악산을 올랐다.
노 대통령은 4월 북악산 1차 개방을 앞두고
12일 오전 부인 권양숙(權良淑) 여사, 서울토박이
가족들과 인터넷 공모에 참여를 신청해 뽑힌 시민
등 40여명과 함께 개방로 사전답사를 했다.
이날 사전답사는 홍련사 출발,
숙정문, 촛대바위, 북악산 정상에
이르는 1.1㎞ 구간에 걸쳐 이뤄졌다.
답사에는 유홍준 문화재청장을 비롯,
문화재, 도시건축 전문가들도 동행했다.
시민들이 북악산에 오른 것은
1968년 1월 21일 북한 공비들이
청와대 기습을 위해 서울에 침투.
북악산 민간출입통제 38년만에 처음.
노 대통령은 이날 오전 10시30분
북악산 동쪽 길 끝자락의 홍련사에서
서울토박이 고완기(70)씨 가족 3대 영접을
받으며 이들과 환담을 나누며.,북악산을 등산.
노 대통령은 한양 북문 숙정문 앞에서
농악패의 길놀이 공연을 잠시 관람한 뒤
3번의 북소리와 나각(螺角.소라껍데기로
만든 국악기)이 울리는 조선시대 개문(開門)
의식이 거행되는 가운데 숙정문을 통과했다.
촛대바위에서 남산 쪽 서울시내
경관을 바라본뒤 산중턱쉼터 도착.
노 대통령은 이날 정월 대보름을 맞아
차려진 부럼, 귀밝이술 등을 시민들과 함께
들며 북악산 개방의 의미에 대해 환담을 나눴다.
"대통령이 봉사하는 자리인데,
되고 보니 누리는 것이 참 많더라"
"해외나갈 때 전용기를 타기도 하고,
공식적 나들이때는 도로교통을 적절히
통제해 신호대기하지 않고 가기도 하는
등 누리는 것이 있다"며 운을 뗐다.
"처음 대통령이 되고 제일 기분이
좋았던 것이 북악산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혼자 누리는게 은근히
기분도 좋고 특권을 누리는 것 같아 기분
좋았는데 나중 몇번 더 와보니 미안한 생각
'(시민들에게) 돌려주자'고 마음먹었다"
북악산 개방 결심 과정을 설명했다.
북악산 개방시 군 부대의 청와대 외곽
경비 등의 문제점으로 다소 지연되던
개방시행 논의가 유홍준 청장의 강력한
건의로 속도가 빨라졌다고 부연한 대통령.
"문만 여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역사를
느낄 수 있게 다듬어서 열게 돼 훨씬 가치가
높아졌다"며 북악산의 역사적 가치도 강조했다.
"북악산에 올라 북한산을 쳐다보면서
산이 없는 외국대도시에 팔면 얼마에
팔 수 있을까 생각하니 가늠이 안되더라"
"북악산은 북한산보다 값이 더 나갈
것이라는 공상도 해봤다"고 아름다운
경관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
"서울 시민들이 북악산 꼭대기에 올라와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면 마음이 넓어지고
여유가 생겨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는 안목도
커지고 넉넉해 질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용산 미군기지터의 녹지공원화를 통해
남산, 용산, 한강으로 이어지는 서울 남북
벨트의 녹지.문화 공간 복원 구상을 피력한
노 대통령은 "서울은 역사와 문화, 숲이 한데
어우러진 공간으로 태어나 지금보다 좋아질 것".
"서울은 시민 누구나 지하철 표한장 사들고
가볍게 나가서 즐길 수 있고, 가난한 연인들이
하루를 보낼 공간으로 만들어질 것"이라 말했다.
서울 성곽 복원을 지휘한 건축가 정기용씨
"성곽 복원은 서울을 정치.경제적 중심으로
역사.문화 새도시로 태어나는 계기가 될 것"
문화재위원인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
"북악산 개방은 우리의 문화 수준이
높아졌다는 문화 역량의 징표".
오전 11시40분 정상에 오른 노 대통령은
연날리기 전문가인 부산동의과학대 이선우
교수와 함께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365개의
방패연을 엮은 대형 줄연을 하늘로 띄우고
전통 연 제작 및 연날리기 설명도 들었다.
.
문화재청은 오는 3월까지 북악산 개방에 따른
훼손 방지책과 전용 탐방로 등을 마련한 뒤 4월부터
개방 구간과 인원을 단계적으로 확대해 나가 내년 10월
와룡공원∼숙정문∼북악산∼창의문으로 이어지는
2.8㎞ 등반 구간을 완전 개방할 방침이다.
겸제 정선 그림.,백악산.
백악산(白岳山)은 고조선 도읍지.,지명.
고려시대 행궁(行宮)이 있었던 남경.,백악.
조선시대 백악은 한양 북악산의 또 다른 이름.
오늘날, 백악산은 서울 청와대.,뒷산.
'고조선 도읍지 평양의 백악산과 같은 이름.
BC2333~BC108년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조선.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고(古)조선.
태조5년(1396) 음력 1월 9일부터 2월 28일까지 49일간,
이어, '8월 6일~ 9월 24일' 49일간, 충 98일 간 축성공사.
19만7천4백명을 동원해 평지는 토성, 산지는 석성으로 축성.
북 : 백악산~ 동 : 낙산 ~남 : 남산 ~ 서: 인왕산,
능선을 따라 축성한 공사 전체구간.,5만 9.500여척을
600척씩 97구간 각 구간을 천자문 순서에 따라 명명했다.
.
'조선왕조의 법궁' 경복궁을 품은.,백악(북악)산.
조선 초, 한성 97구간 중 1구간은 天에 해당하는 곳.
백운동천, 청운동천, 삼청동천 등 지명을 天으로 마감.
정도전이 '천자문 첫글자' 天을 따.,명명.
한양 사대문 안.,"하늘 아래 첫동네." 북악.
백운동천.,백사실계곡.
.
天에 해당하는 1구역에는 잠저(潛
잠저(潛
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 또는 그 기간을 일컫는 말.
조선시대 이들의 잠저는 보통 뒤에 별궁(別宮)으로 지정.
원묘(原廟)나 진전(眞殿 : 초상화를 모신 사당)으로 관리.
태조, 중종, 인조, 선조, 철종, 고종 등 왕족이나
왕자가 아니었던 자로서 혁명·반정·추대 등의 방법으로
왕이 되었거나, 세조, 효종, 영조 등 당초 세자에 책봉되지 않은
왕자로서 궐에서 나가살다가 왕이 되어 입궐한 자들의 즉위 전 사저.
예를 들면, '철종의 잠저' 용흥궁(龍興宮)
흥선대원군의 운현궁(雲峴宮 :고종의 잠저)
<주역>의 '잠룡(潛龍)'에서 비롯된 것으로,
용이 못에 숨어 있다가 승천한 것을 비유해
왕이 즉위하기 이전 신분을 지칭하기도 한다.
"잠룡(潛龍)은 쓰지 말라." - 주역(周易).
'덕을 닦으며 숨어 사는 성인 혹은 영웅.'.,잠룡.
'아직 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물속에 숨어 있는.,용.
조선시대 잠룡(潛龍) 명당터로 추정되는 .,백석동천.
백사실계곡 잠룡 명당터.
백석동천(白石洞天)은 백사실계곡에 위치
한양도성 사대문 밖과 북한산성 사이에 위치.
..............북악산 촛대바위.........................
조선시대 북악산 기슭은 왕궁 및 관청과 가깝고,
왕족 및 사대부들이 많이 살았고, 별서가 많았다
당시 문인 화가들이 그림과 시문으로 남긴.,북악산.
숙정문 북서쪽 400m
지점에 있는.,촛대바위
이곳에 민족정기를 말살하려
바위에 쇠말뚝을 박았던 일제.
8.15 광복 후 쇠말뚝을 제거.
우리 민족의 발전을 기원하는
촛대를 세워 ‘촛대바위’라고 명명.
현재는 쇠말뚝을 제거한 부분이
콘크리트 기중으로 마감되어 있다.
.............................................
.
북악산 남동쪽에 삼청공원(三淸公園)
동쪽 산기슭에 숙정문(肅靖門)이 있다.
숙정문은 도성 4대문 가운데 정북에 위치.
북문(北門)은 1396년(태조 5)
백악산 동쪽 고갯마루에 세웠는데,
도성 북쪽 방향을 출입할 때 이용하였다.
.............숙청문(肅淸門).................
본래, 북대문(北大門)이라고도 하였으며
오늘날은 숙정문(肅靖門)이라고 불리운다.
경복궁 主山 백악산(白岳山) 동쪽 고개에 위치.
1395년(태조 4)에 숙청문(肅淸門)이 건립되었으나
1413년(태종 13) 풍수학생(風水學生) 최양선이 왕에게
백악산 동쪽 고개와 서쪽 고개는 경복궁 양팔에 해당하므로
여기 문을 내면 안된다고 주장하고 두 문을 막을 것을 청하였다.
이를 계기로 창의문(彰義門, 자하문 : 紫霞門)과 함께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들 통행을 금하였다.
원래, 이 문은 높은 산 중턱에 있기에 길이 매우 험했다.
.
문을 나서면 북한산이 앞을 가로 막아 동쪽으로 성북동
골짜기로 내려와 동소문(東小門) 밖 경원가도로 나오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그런데 서울에 들어오는 데에는
동소문을 거치는게 빠르고 편해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하여, 이 문을 폐쇄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었기에
조선시대 거의 닫아 두었다.
다만 한재(旱災: 가뭄으로 인한 재해)가 심할 때에
이 문을 열고 숭례문(南大門)을 닫는 풍속이 있었다.
이것은 북은 음(陰)이며 남은 양(陽)인 까닭에 한재 때
양을 누르고 음을 키우는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
에서 나온 것으로 1416년(태종 16)에 처음 시작하였다.
숙청문을 열어 놓으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지므로
문을 닫았다는 속설(俗說)도 전한다.
그것은 이 문이 음방(陰方: 여자의 방위)에
있는 까닭에 이런 말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1504년(연산군 10) 동쪽으로 약간 옮겼는데
이 때 석문(石門)만 세우고 문루(門樓)는
건축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1976년 대통령 특명으로 서울시에서
백악산 일대 성곽복원 때 태조 창건
당시의 제도에 의해 문루를 건축하고
‘肅靖門(숙정문)’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어느 때부터
무슨 이유로
숙정문으로
개칭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1523년(중종 18) '중종실록' 기사 이후
역대 각 실록에 모두 숙정문으로 기록되고 있어
그때부터 숙정문이라 호칭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531년(중종 26) 북정문(北靖門)으로 표기,
1587년(선조 20) 숙정문(肅靜門)으로도 표기된 것,
이는 ‘정숙하고 고요한 기운을 일으킨다’는 의미에서
그후 ‘숙정문(肅靖門)’으로 명명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다락 없는 암문(暗門)인 것이 특색.
항상 닫혀 있었기 때문에 창의문을
이에 대신해 흔히 북문이라고 하였다.
..................................................
기록에 의하면 태종때 北門이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가 올라와 폐쇄했다고 하나 비공식적으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곳에 부녀자들 사이에서 이 북문을 세번
다녀오면 그해의 액운이 없어진다는 속설이 퍼졌기 때문.
그후로 이곳에 부녀자 출입이 빈번해 여자 꽃밭이 형성.
여기에 사내 건달들이 따라와 풍기문란 행위가 많았단다.
건달기 있는 사내들과 알게 모르게 수작이 오갔을 것이요
도의, 규범 소외지대 깊은 산중에서 벌어졌을 도색(桃色).
가히 짐작이 가기에 공식적인 풍수지리적 폐쇄이유 보다는
항간에 구전된 풍기문란을 이유로 폐쇄 속설이 맞는 것 같다
.
"사내 못난 것, 北門에서 호강 받는다."
당시 한양 속담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도
북문 일대에서의 별천지 풍경이 짐작 간다.
아마도 성적인 욕구불만이 있는 여인들이
액운 축출을 핑계로 이곳에 진을 친듯 하다.
.
'北門을 열어 놓으면 陰風이 분다.'
이 말은 곧, 부녀자 자유분방에 대한
윤리적 억압이었고, 그 음풍을 막고자
북문을 폐쇄한 것은 엄격한 유교를 국교로
채택한 조선시대 조정에서는 당연한 조치였다.
이곳이 조선시대 풍기문란 본거지가 된 것은
이 일대가 뽕밭이었던 것도 원인이 되었던듯.
당시 중국에서도 뽕밭은 음탕한 장소로 통했다.
조선시대 이와 다를 바 없었을 것이고
북문 일대 뽕밭은 풍기문란을 조장한듯.
일제때 개방되었으나
워낙 이곳을 찾는 사람이
없다가 1968년 1.21 사태때
다시 폐쇄되었다가 최근 개방.
현재 숙정문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1976년에 복원되었다.
.
1968년 1·21사태 이후 북악산 지역이
군사보호구역 지정, 일반인 출입 제한.
......................1.21사태..........................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124군부대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 습격을 위해 서울에 침투한 사건.
게릴라전 특수훈련을 받은 남파 무장간첩 31명은
1968년 1월 13일 북한군 정찰국장 '김정태'로부터
청와대 습격의 지시를 받고, 우리 국군의 복장으로
18일 자정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은뒤 야간을 이용.
20일 10시경 서울 세검정 고개의 자하문 초소까지 잠입.
초소에서 검문을 받은 그들은 정체가 탄로나자
검문경찰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난사
지나가던 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많은 시민을 살상.
이날 밤 현장지휘 최규식(崔圭植) 총경 전사.
경찰관 2명이 중상, 민간인 5명이 살해되었다.
사건 후 곧바로 출동한 군경합동수색진에 의해
31일까지 28명 사살, 김신조 생포, 2명은 도주했다.
이 사건은 북한이 대남적화공작을 위한
유격전활동을 전개하기에 앞서 시도한
탐색행위로서 국민들에게 커다란 충격
향토예비군 창설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
.
1972년 숙청문 아래 건립된 삼청각 (三淸閣)은
현재,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전통 문화공연장
1970년대~1980년대 우리나라 3대 요정정치의 산실.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한일회담 막후 협상장소.
제4공화국 유신시절의 상징
1980년대에는 손님이 줄어들어
1990년대 중반 ‘예향’으로 바꾸고
삼청각은 일반음식점으로 전환 후
경영난으로 1999년 12월 문을 닫았다.
.
2006년 4월 1일숙정문과 함께 삼청터널
북쪽 홍련사(紅蓮寺)에서 도성(서울 성곽)
촛대바위까지 1.1㎞가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북악산·남산·낙산·인왕산.,한양 내4산(內四山)
그 중 가장 높은 것은 북쪽의 북악산(北岳山)으로
북한산 만경대(국사봉) 남쪽 지맥의 한 봉우리이다.
성벽이 능선을 따라 보존되어 있고
4소문의 하나인 창의문(일명 : 자하문)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 안부(鞍部)에 위치.
'창의문~정릉 아리랑고개' 북악스카이웨이는
창의문, 팔각정, 풀장 등을 연결하는 관광도로.
남동쪽 산기슭 삼청공원은 좋은 휴식공간을 제공.
북악산 서쪽에 있는 인왕산(仁王山)은
동쪽 낙산과 같이 좌우용호(左右龍虎)로
백호(白虎)인 인왕산은 화강암이 노출된 산
조선 건국때.,인왕산 호랑이
호환(虎患)이 자주 일어났다.
그래서, 인왕산 호랑이를 퇴치.
그당시 새끼를 가진 암호랑이를
압록강 밖 먼 길을 보낼 수 없어
남겨 두었더니 그 암호랑이가 낳은
새끼들이 번식하여., 그후에도 여전히
인왕산에는 호랑이가 들끓었다는 전설.
북악산 동쪽 산허리에
'북악~인왕'스카이웨이.
인왕산 동사면은 고급주택가로 변했고
1920년대에 남산에 있던 국사당(國師堂)이
인왕산 서쪽 중턱으로 옮겨와 오늘날까지도
무당들이 굿을 하고 산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인왕산 서쪽에 있는 안산(鞍山, 209m)
무악재 건너 연결되어 일명 무악(毋岳).
안산을 등지고 그 전면에 연희·신촌동 일대가
조선 건국 초 도읍지로 물망에 올랐던 곳이다.
북서쪽에 백련사가 있는 백련산(白蓮山)이 있다.
북악 스카이 웨이
인근.,성북동 길상사.
예전에.,요정 대원각 터.
.............길상사(吉祥寺)................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소속 송광사의 말사이다.
본래는 '대원각' 이라는 이름의 고급 요정.
故 김영한(1916 ~ 1999, 법명 길상화)
법정 스님에게 시주하여 사찰로 탈바꿈.
김영한 보살은 일제시대 시인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실존 여주인공.
애인 그녀에게 자야(子夜)
애칭을 붙여준.,시인 백석.
.
1985년 김영한 여인이 자신의 재산을
희사해 절을 짓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법정은 이를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김영한은
10년 가까이 법정을 찾아와 끈질기게 부탁했다.
이에 법정 또한 이를 받아들여,
1995년 6월 13일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말사인 '대법사'로 등록하며
사찰이 되었고, 초대주지 현문이 취임.
1997년 '맑고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
같은해 2월 14일 초대주지로 청학이 취임.
김영한은 평생 백석 생일 7월 1일에는
식사를 하지 않았고, 길상사에 기부된
대원각 재산은 그당시 시가가 천억 원.
기자 "그 많은 재산이 아깝지 않느냐"
"천억은 그(백석)의 시 한줄만 못하다"
대답할 정도로 백석을 그리워했다 한다.
1999년 11월 14일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유해를 눈오는 날에 길상사
경내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길상사 경내
길상헌 뒤쪽 언덕에는
김영한 공덕비가 세워졌다.
사찰의 창건주였던 법정은
불문에 귀의한 김영한에게
길상화라는 법명을 주었다.
법정스님은 김영한 사후에도
길상사에서 정기법회를 열었고
2010년 3월 11일 법정은 길상사에서
향년 78세(법랍 54세) 로 입적하였다.
길상사 개원법회가 열리던 1997년 12월 14일
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법회에 참석해
법정과 함께 나란히 축사를 했고 법정 또한 이에
답하여 1998년 2월 24일 명동성당에서 법문을 설법.
길상사 경내에는
공덕주 김영한의
공덕비와 함께,
법정의 영정과
그 생전 유품들을
전시한 기념관도
함께 마련되어 있다.
경내에는 극락전, 지장전,
설법전 등 전각이 있으며
행지실, 청향당, 길상헌
등의 요사가 존재한다.
2011년 이후 덕운이 주지로 취임했다.
불교 자선재단 맑고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는 여러 사회사업을 펼치고 있다.
또한 경내에 관음보살 석상은
천주교 신자이자 가톨릭예술가
최종태가 건립한 것으로, 같은
조각가가 혜화동성당에 건립한
성모 마리아 석상과 닮아 있다.
.........................................
성북동., 대원각 1951년 개장
성북동., 삼청각 1972년 개장
우이동., 선운각 1967년 개장.
대원각 - 1960~80년대 권력자 요정정치 근거지 & 밤정치 무대,
삼청각 - 7.4 남북공동성명 만찬장, 1970년대 남북적십자회담장소
선운각 -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 내연의 처' 장정이 운영 최고급 요정.
1972년 문을 연 삼청각은 1970~80년대 군사정권 시절
정치인, 재벌, 고위장성 등 실세들 간에 비밀 화합장소.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뒷거래를 하기 위한 장소로 사용.
삼청각은 1980년대 룸살롱 성행으로 타격,
기생 파티장. 밀실 요정 한정식집으로 쇄퇴.
1998년 중소건축업체인 화엄건설에 넘겨졌고
1999년 12월 30일에는 공식적으로 문을 닫았다.
1970/80 년대 3대 요정.,대원각 삼청각. 선운각.
통행금지 제도 하에서 통금이 없던 관광특구지역.
3대요정 종업원에게도 야간 통행증이 발급되었다.
당시 3대요정은 국가경제발전를 위한.,주요 외화수입원.
3대요정 종사자들은 국가경제발전을 위한.,관광산업 전사.
1960/70/80년대 3대요정 종사자들은 특권의식을 가질 정도.
국가 외화획득을 위한., '굴뚝 없는 공장'들.
국가 경제를 위해 황금알을 낳는.,산업 전사들.
외국어에 능통한 미모의 명문 여대생들도 많았다.
.................야간 통행금지 제도.........................
1945년 실시후 1954.7/5 오후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4시까지
1시간이 단축되었다가 그후 12~4시로 4시간 동안 실시되었다.
단, 신정 연휴, 광복절, 크리스마스, 제야의 밤.,일시적으로 해제.
통행금지시간에 통행하려면 통행증을 발급받아야 했으며,
위반하면 즉결심판, 경찰서 보호소에서 밤을 보내야 했다.
통금 해제는 1964년 제주도, 충북 관광지·도서지방에서 해제.
전방 휴전선 부근지역과 일부 해안 취약지구 등
안보치안상 특수한 지역인 총 52개군의 292개 읍·면
지역을 제외하고 1982년 1월 5일부터 일제히 해제되었다.
...........................................................................
우이동 선운각
우이동 부침바위.
^ 현재, 길상사 극락전 v
성북동은 분명 서울에 있는 곳이지만,
서울이 아닌 곳 같다는 느낌이 드는 곳.
북악스카이웨이는 미시령도로처럼
좁고 꼬부라진데다, 첩첩산중 같다.
강원도 못잖게 녹음(綠陰) 또한 풍부.
..................북악 스카이웨이...............
1968년 9월에 개통되었으며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의동 창의문(자하문)~성북구 정릉동 입구' 도로.
경복궁의 진산을 이루는 북악산의 북쪽 능선을 따라
북동쪽으로 이어져 있고 11.8㎞, 폭 10~16m 2차선 도로.
높이 342m인 도로 정상에는 북악팔각정휴게소.
북악산과 서울 경관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자하문 ~ 정릉 아리랑고개' 10km는 관광도로.
자동차로는 30분 이내에 관람 가능한 코스이다.
창의문 옆길을 통해 창의문쉼터라는 곳에서 표찰을 받고 시작
북악산길은 성북구민회관 앞까지 코스이며 총 6.8km의 산책로.
팔각정은 북악스카이웨이 중간쯤에 서울의 전망대이자 휴식처.
북악스카이웨이 산책길 쉼터에는 다양한 운동기구와 정자.
약 10km 길이 산책로 및 관광도로는 자동차로 약 30분 거리.
...............................................................................
주변에는 세검정·정릉·삼청공원·경복궁·국립중앙박물관 등
이 도로는 '자하문~인왕산길', '정릉~성북동길'과 이어진다.
1968년 이 도로 개통 후, 대원각은 국내 3대요정으로 부상한다.
이어, 삼청각은 1972년 건립되어 1970/80년대 요정정치의 산실.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한일회담의 막후 협상장소로 이용된다.
북한산 우이동에 위치한 ‘선운각’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후처 '장정이'
1967년에 문을 열었던 고급 요정이었다.
1968년 북악스카이웨이 개통된 이후
우리나라 3대요정으로 부상된 선운각.
북악 스카이 웨이
성북동.,삼청각
삼청각은 성북동 안에서도 미지의 영역과도 같은 곳.
종로구 삼청동 쪽에서 어둠 짙은 삼청터널을 통과 후
삼청각 입구로 들어서면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 같다.
삼청각 언덕 위에 자리 잡은 6채의 한옥은 이채롭고,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은 어느 샌가부터 들리지 않는다.
이내 도심에서 산중으로 순간 이동을 한 듯 착각에 빠진다.
성북구 대사관로 3에 있는 삼청각.
사람들은 소나무숲으로 둘러 싸인
고요함을 삼청각의 매력으로 꼽는다.
7·4 남북공동성명 남북적십자대표단
만찬 장소로 1972년 지어졌던.,삼청각.
대지면적은 2만115㎡, 연면적은 4399㎡.
일화당과 유하정, 청천당,
천추당, 취한당, 동백헌 등
6개 한옥으로 이뤄진.,삼청각.
삼청각은 근현대사 사건들을 담은 공간.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체결되면서
남북적십자대표단 만찬 장소가 필요하자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공병대까지 투입해
석달 만에 뚝딱 짓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건축가 고(故) 정재원씨 설계 현대건설 시공.
삼청각을 대표하는 건물은 일화당(一和當)이다.
하나로 조화를 이룬 공간이란 의미의 삼청각 한옥.
남북 대표단 만찬
그당시 남측 대표였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 부장
북측과 축배를 들었던 공간이다.
'봄의 맑은 물소리'.,청천당
청천당(聽泉當)은 고 박정희 대통령 전용.
삼청각 전체로 보면, 별채 쯤에 해당된다.
유하정(幽霞亭)은 북한의 옥류관을 본뜬 곳.
특이한 점은 보통 한옥 단청에 연꽃을 쓰는데
유하정은 대통령을 상징하는 무궁화가 쓰였다.
삼청각은 1974년 이후 국빈접대 정치회담장으로 운영.
사실은 ‘밀실정치’가 이뤄졌던 고급 요정으로 활용된 것.
청운각, 대원각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요정으로 꼽히었다.
1990년대 들어 삼청각은 일본 관광객이
기생들과 노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1996년 ‘예향’이라는 음식점으로도.,개명.
그러나, 경영난으로 1999년에 문을 닫았고,
민간 건설사가 고급빌라를 지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서울시가 2000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
삼청각이 복합문화공간으로 바뀐 건 2000년부터다.
서울시가 삼청각을 인수해 시민 문화공간으로 조성.
2001년 세종문화회관이 운영, 프라자호텔에 부분위탁.
2005년 다시 파라다이스가 민간위탁사로 이곳을 운영.
2009년부터 현재까지 세종문화회관 삼청각이 위탁운영.
삼청각 청천당. 이 한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즐겨찾던 곳
삼청각., 유하정.
보통 한옥의 경우 단청에 연꽃을 쓰는데
유하정은 대통령을 상징하는 무궁화가 특징.
유하정
현재, 삼청각은 식당과 공연장으로 주로 이용.
특히 특색있는 결혼식과 돌잔치를 원하는 시민이
삼청각을 찾는데, 봄가을엔 예약이 힘들만큼 붐빈다.
일화당 앞마당에서 열리는 전통혼례는
예비부부들이 한 번쯤은 결혼식 장소로
생각해보는 ‘로맨스’장소로 꼽히기도 한다.
삼청각은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지 16년째.
서울시는 한식 집대성 공간으로 만들 계획.
당장 내년에 진입로 앞 주차장 자리에
한식 연구·전시·체험 교육과 쇼핑을 할
복합문화체험공간이 들어설 계획이다.
일화당은 한식당 기능을 유지하는 동시에
전통 혼례 등을 열 개방형 다목적홀로 계획
나머지 한옥들은 반가음식, 궁중음식, 사찰음식
등을 체험할 수 있는 테마 한식관으로 운영된다.
“삼청각이 한식을 집대성하는 공간으로
새로 태어나게 되면 시민과 외국인 관광객들이
더 즐겨찾는 문화공간이 될 것” -삼청각 홍보담당-.
1950∼1970년대 '밀실정치의 무대' 오진암 대원각 삼청각.
3곳은 '걸어오는 사람은 있어도 소형차 출입자는 없던 요정.
마당에 큰 오동나무가 있다 하여 오진암은 서울 1호 등록식당.
1900년대 초반에 지어졌지만
식당으로 문을 연 시기는 1953년.
그무렵 야인시대 협객 김두한의 단골집으로 유명세를 탔고,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 박성철 부수상이 만나서
7·4 남북공동성명을 사전 논의하며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
오진암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은
문을 연지 57년 째가 되던., 2010년 8월.
당시 소유주인 건설업체가 비즈니스호텔을
짓겠다며 오진암을 철거했기에 종로 구청은
종로구 익선동에 있던 오진암 한옥 건물 중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대문, 화장실 등을 부암동으로 옮겨 이축.
지난 1970~80년대 '요정 정치' 무대였던
오진암(梧珍庵)이 자리를 옮겨 보존된 것.
.
종로구(구청장 김영종)는 철거 공사가 진행 중이던 오진암을
구청 소유 땅으로 옮겨 복원해, 문화시설로 활용하기로 한 것.
이전ㆍ복원 비용 10억원은 오진암을 사들여
그 자리에 호텔을 지으려는 ㈜이솔티에서 부담.
종로구 관계자는 "오진암은 20C 초 한옥이면서
주거용이 아니라 상업용 한옥이라서 의미가 있다.
요정 정치 산실로 손꼽혔던 만큼 얽힌 이야기가 많고
장소의 역사성도 있어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제3공화국 시절에 요정정치는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된다.
요정정치가 안고 있는 비밀거래, 공직기강의 해이. 풍기문란,
일부 지도자 계층 축첩문제 등이 국민들의 반감을 살 정도였다.
그러던 중 정인숙 여인 살해사건을 계기로
'요정정치'는 국가적으로 논란거리가 되었고,
이후 요정은 쇠퇴기를 맞아 전통음식점으로 변모.
'요정정치 산실' 대원각· 삼청각도
1990년대 말에 이르러 폐쇄되었고
대원각은 1990년대 길상사로 재탄생.
'요정이 사찰로
탈바꿈을 한 것.'
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알려진.,자야 김영한.
법정스님 저서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요정 대원각을 통째로 송광사에 기증했던 것.
법정스님이 여주인의 법명인 '길상화'를 따서
대원각터 사찰에 '길상사' 이름을 명명했던 것.
대한민국 최초 근대 요정 오진암은
2010년 부동산개발회사에 매각되어
전통문화공간 무계원'으로., 탈바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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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폐허가 된 서울에서는
명동의 술과 종삼(鐘三) 여자들 만이
문인(文人)들의 고향이었다.” - 고은.
문인들은 기생을 사랑했고,
‘말을 알아듣는 꽃’ 해어화는
시인(詩人)들에게 빠져들었다.
종로에는 시인 백석과 기생 자야의 밀애와
시인 이상과 기생 금홍이와의 떠들썩한 사랑.
파고다극장에는 시집 출간을 앞두고 요절한 기형도.
익선동에는 <임꺽정> 소설을 쓴 홍명희의 의기가,
돈의동에는 풍과 흥취가 넘쳐흐르던 요정 ‘명월’.
종로를 들었다 놨다 한 기녀들,
그리고 그녀들을 사랑한 문인들.
이제 100년 전의 요정은 사라지고,
예인들의 노래는 축음기 속에 남았다.
백석과 이상, 기형도가 사랑한 종로 해어화,
그 풍류의 길은 종로 뒷골목 도시속 한옥거리.
익선동 중심으로 낙원동, 돈의동 등 오래된 동네.
조선의 화려한 시절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지나온
종로는 시대의 상처와 아픔을 고스란히 견뎌낸 흔적들.
종로3가에서 낙원상가 방향으로 걷다 보면 나오는 익선동.
1920년대 지어진 ‘도시형 한옥’ 100여 채.
비좁게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있는 곳이다.
‘국내 최초 부동산개발업자’ 정세권이
주택개발사 ‘건양사’를 지어 분양하고
그 돈으로 독립열사를 후원했던 곳이다.
북촌 부지를 대부분 양반이나 부자들에게 분양했다면
도시형 개량한옥이 많은 익선동은 중산층이 타깃이었다.
1920년대에 조성된 익선동 도시형 한옥 마을에는 예인들과
돈벌이를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대거 모여 살았다.
△오진암은 1970/80년대 3대 요정정치의 산실.
1953년 한국 최초의 한옥상업시설이자 요정1호.
▶익선동은 100년 전부터 관광요정 '풍류의 거리'
익선동에 위치한 ‘국내 1호 관광요정’ 오진암은
제3공화국의 실력자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단골집.
손님들이 화투를 치며 자리가 나길 기다렸던.,요정.
‘오진암’과 ‘대하’는 전통의 강호로
1950년대부터 요정으로 운영돼왔고
1973년생 ‘명월’과 ‘청풍’은 신진 세력.
1970년대 말 관광요정으로 지정된 ‘명월’은 1980년대 전성기.
1960년대 청풍(익선동 99번지)은 2012년까지 번성(요정 ‘도원’).
“많은 음독사건이 일어났지요.
다른 기생과 외도를 한 남자를 기다리다
목숨을 끊는 처녀들”(북촌문화연구소 은정태 소장)
1970년대 관광요정 문화가 창궐하며 다시 살아난다 .
1971~1973년 기생이 하루에 공무원 월급을 벌 정도.
1990년대 해외 관광수요 증가로 완전히 사라진 요정.
오진암터 그랜드 앰배서더 호텔 인사동 외벽에는
대문과 안채, 안채로 들어가는 길, 부암동 이전을
하기 위해 해체하는 과정 등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정인숙 사건과 선운각, 한일회담과 청운장,
남북회담의 삼청각과 오진암에 대한 기록은
그당시 요정과 정치의 밀월관계를 대변해준다
‘서울형 도시재생 선도지역’으로 지정된 익선동에는
작가이자 독립운동가 <임꺽정>의 홍명희를 시작으로,
조선 최초로 레코드를 취입했던 '동편제 명창' 송만갑.
당시 대부분의 기생들은 송만갑의 창법을 따랐다
내시 서예가 관광요정 ‘오진암’ 주인 이병직 등 거주.
관광요정 ‘대하’, ‘명월’(현재 비즈웰오피스텔), ‘오진암’
익선동 골목길에는 한복집, 점집, 악기점 3가지가 많았다
.
3대 요정(삼청각, 오진암, 대원각)이 주변에 있어
지방에서 올라온 기생들이 사글세로 많이 살던 탓.
▶‘종삼’ 돈의동 & 낙원동 텍사스촌
1921년 문을 연 명월(돈의동 145)이 있던
돈의동은 한때 약 80개의 요정이 즐비했다.
일제강점기 신탄 시장이 1930년대 없어지면서
술집들이 들어섰고 전쟁을 거치며 사창가가 형성.
돈의동 유곽 ‘종삼’은 탑골공원에서 종로5가까지
동서로 1km, 남북으로 100m 여성은 한때 1500 명.
서울에서 가장 밑바닥 주거형태 8000원짜리 ‘꼬방동네’
1970년대 후반 가출 청소년숙소 ‘동광엄마네집’(하루 300원)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예능보유자' 임춘앵 집(돈의동 75-1).
1950년대 중반 극장으로 사람들이 몰리면서
판소리 국악의 인기는 꺾이고 집을 담보로 해서
재기공연을 준비했던 임춘앵은 좌절감에 빠져든다.
1968년에 생긴 낙원상가는 종로에 생긴 가장 큰 변화.
해방 후 소개지 낙원자유시장에 ‘텍사스촌’이 형성됐고,
유흥업소 활황, 악사 인력시장이 생기며 낙원상가 형성.
1982년 야간통행금지가 없어지며 낙원상가는 타격.
낙원동 파고다 극장에서 숨진 기형도(1960~1989) 시인.
1970년대 후반부터 파고다극장 중심으로 수많은 게이바 형성.
1990년대 이태원으로 신세대 이전하자
구세대 게이바 만이 낙원동에 남게 된다.
............................
............................
'문단의 꽃미남' 백석 & 기생 자야(김영한)의 사랑.
백석이 시를 쏟아내면 어떤 여자도 감당 못할 정도.
백석은 이국적인 생김새로 여자들에게 인기 높았다.
1936년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 시절,
교사 회식 자리에서 '함흥권번'의 기녀
‘자야(子夜, 김영한)’와 사랑에 빠진 백석.
그는 종로3가 단성사 극장에서 둘이 본
<전쟁과 평화> 영화 속 여주인공 나타샤를
자야에 빗대 쓴 시.,'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두 사람이 종로 청진동에 살림을 차린 비슷한 시기에
종로 우미관 뒤편에서는 천재 시인 이상이
기생 금홍과 함께 살림을 차린다.
자야와 함께 살 방법을 찾아 만주로 떠난 백석.
그리고 해방과 전쟁, 분단과 함께 헤어진 두 사람.
26살에 떠나 보낸 그를 평생 기다린 김영한은
평생 모은 1000억원 상당의 요정 대원각 부지를
10년 삼고초려 끝에 법정스님에게 시주하고 운명.
삼청각, 오진암과 함께 1960~80년대 최고급 요정
현재 성북동의 사찰 길상사가 바로 그 대원각이다.
백석이 84세로 북한에서 사망한 4년 뒤인
1999년 겨울 그녀도 영면, 그녀의 유언대로
흰눈이 내리는 날에 길상사 마당에 뿌려진 유골.
사랑이 아무것도 아니게 된 시대에,
"사랑했던 백석 시인의 시(詩) 한 줄이
시주한 1000억 재산보다 값지다." - 자야.
스물 둘의 기생 자야가
백석 시인과 헤어진 이후
김영한 보살이 되어 남긴 말.
백석 & 자야
16살 나이로 조선권번에 들어간 자야(김영한)는
가곡과 궁중무를 배우며 삼천리문학에 수필 발표.
일본 유학을 다녀올 정도로 기예가 출중했던 예인.
최초 재즈가수이자 여배우 1세대 복혜숙.
300편 이상의 영화, 연극, TV극에 출연했고
콜럼비아 사의 제의로 음반을 취입하기도 했다.
영화감독 나운규의 연인 류신방은
영화 <벙어리 삼룡>에 출연했으며
‘꽃중의 꽃’ ‘화중선’을 기명으로 한
여류명창 이화중선은 일제강점기 때
임방울과 함께 당대 최고의 예인이었다.
종로구 부암동.,무계정(옛 오진암)
.
오진암이 옮겨간 부암동도
역사적으로 의미가 많은 곳.
오진암의 신축지 인근에는 형님인 수양대군에게 밀려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고 비명횡사한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 집터인 무계정사가 있고, 구한 말 유명했던 소설가
현진건(1900∼1943)도 오진암 인근의 무계정사 터에 머물렀다.
.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부암동에는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살던 무계정사 터가 아직도 남아있다.
무계정사 주변에는 현진건 집터와 무계원,
'청계동천(靑溪洞天)' 각자도 볼 수가 있는데
윤동주 문학관이나 창의문에 가게되면 이곳에
잠깐 들러서 모두 다 감상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1951년 성북동에 문을 열었던 대원각은 여주인이자
월북한 천재시인 백석의 연인이었 故 김영한 여사가
법정 스님에게 요정 터를 시주하면서 길상사로 변신.
처음에는 사양하는 법정 스님을 10년에 걸쳐
설득하여 뜻을 이룬 것으로 알려져.,화제였다.
1997년 12월 14일 길상사가 개원하던 날에
김영한 여사는 법정 스님으로부터 염주 하나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았고 2년 후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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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화당(花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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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얼굴이요, 달 같은 태도로다.
정신(精神)은 추수(秋水) 같거늘 성정(性情)은 춘풍(春風)이라.
두어라 월태화용(月態花容)은 너를 본가 하노라” - 안민영,《금옥총부》
안민영(安玟英)은 조선 철종 때의 가인.
자는 성무, 호는 주옹으로 서얼 출신이다.
1876년(고종 13) 스승 박효관과 가곡원류 간행.
조선의 풍류객들은
꽃처럼 아름다운 기생을 품기 위해
무수히도 많은 시조와 노래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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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선 홍등가, 일본에선 유곽,
우리나라에서 집창촌으로 불리는 공간.
조선 말, 선조들은 화당(花堂)이라 일렀다.
꽃이 모여 사는 집이란 뜻 ‘화당’은
몸파는 삼패 기생들이 모여 사는 곳.
조선의 화당은 주로 어디에 밀집해 있었고,
그곳에 머무는 여인들은 어떤 신분이었을까?
법으로 성을 사고파는 행위가 불법 임은
조선시대 또한 대한민국과 다르지 않았으되,
법이 금할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 음지(陰地)에서
더욱 성행했던 풍경 또한 오늘날과 매우 유사(類似).
삼패들이 사는 화당은 주로
한양 남부 시궁골과 갓우물골
(현재 중구 입정동, 을지로3가).
즉, 남상화당(南賞花堂)과 조선 말 새로 생겨
종전의 상화당보다 북쪽인 한양 북부 농포안
(종로구 권농동, 종로3가).,북상화당(北賞花堂).
그후, 일제 강점기에 지금 명동 인근에는
일본인들이 운영했던 '명치정'이란 요정 거리.
여기에서 개화기에는 주로 매음(賣淫)이 이뤄졌다
조선 후기 화당(집장촌) 밀집 지역은
주로 청계천 남부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후, 농포안 (현재 종로구 권농동, 종로3가)에
새로운 상화당이 생기면서 두 지역의 구분을 위해
북상화당, 남상화당이라 했고, 오늘날 명동 인근에는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명치정 요정거리 유곽에서 매매춘.
명치정 유곽
일본에서는 유곽,
한국에서는 집창촌
조선시대에는 화당(花堂)
중국에서는 홍등가로 불리는 공간을
조선후기 선비들은 참 점잖게 일렀다.
'꽃이 사는 집'이란 의미로 ‘화당(花堂)’은
몸 파는 삼패 기생들이 모여 사는 공간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기생의 능력과 역할에 따라 등급을
일패(一牌), 이패(二牌), 삼패(三牌) 기생으로 분류.
일패는 시서화 가무에 능한.,'예기',
이패는 가무를 주로 하되 매음을 해 ‘은근짜’
삼패는 외양으로는 기생이나 매음을 주로 하며
일패와 이패에게 깍듯하게 예를 갖추어 행동했다.
이 삼패들이 사는 화당은 주로 한양 남부 시궁골과
갓우물골(중구 입정동, 을지로3가).,남상화당(南賞花堂)과
조선 말 새로 생겨나 종전의 상화당보다 북쪽인 한양 북부 농포안
(종로구 권농동, 종로3가)에 자리 잡은 북상화당(北賞花堂)이 있었다.
기생을 찾는 사내들이 모여드는 청루에서는
사소한 시비로 일어나는 주먹다짐이 빈번했다.
젊은 사내와 중년 남성의 싸움이 무엇을 위해선지
혜원 신윤복 그림을 통해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유곽쟁웅>, 신윤복, 지본채색,
18세기 말, 28.2*35.6cm, 간송미술관
조선시대 매춘은 법으로 금지된 행위였다.
그러나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망을
조선시대 법으로 만 막을 수 있었으랴.
매음 기생들이 사는 청루를 제외하고
화당(花堂)에 적을 두지 않은 매춘부들은
화랑유녀, 여사당패 등으로 전국을 떠돌았다.
한양 기생은 어려서부터 교방
또는 장악원에서 기예를 익혀
한 명의 예인으로 성장했으나,
멀리 지방의 관아에 속한 관기는
고을 현감이나 관리의 명에 의거
기예보다 수청 드는 일이 주 업무.
법으로는 매춘을 금했으나
현실에서 근절하기 어려우니
조정에서 일종의 편법을 취한 셈.
예를 들면, 함양 관기 연화의 사례
역시 여기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황성신문 1904년 4월 27일 자
3면 '娼女定區 창녀정구' 기사.
사진 = 한국언론진흥재단
창녀들 수가 증가함에 따라 조정에서
이들의 거주지를 지정한다는 내용이다.
조선 말 개항 이전까지는
관기를 통한 합법적 매춘,
사기를 통한 매춘 만 가능.
이러던 것이 갑오개혁 이후
어려운 생활에 매춘에 뛰어든
여성이 증가하며 정부 차원에서
매춘여성 거주지 제한 조치가 시급.
매춘 여성 증가로 주거지역에서도 암암리에
매음이 이뤄지자 황당한 사건이 자주 벌어졌다.
“요즈음 여항에 매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악습이 심한 까닭으로,
외국인이 때때로 시골집으로 가서
창녀 유무를 묻고 하여 거주민이 놀라
근심하기에 이르니...”
1904년 4월 27일 황성신문은
그 중 한 사건을 옮겨 적으며
이들의 거주지 이전 공고를 보도.
이 기사에 따르면 경무청은
“대소룡동과 종현 저동 근처로”
이들의 거주지를 제한했다.
대소룡동과 종현 저동은
지금의 명동2가 지역으로
일제강점기 지명이.,명치정.
종각 덕에 '종로'라 이름 붙은 보신각종 근처는
100년 전, 옛 서울에서도 상업 가옥이 즐비하고
전차와 우마차가 북적거리는., 조선 최대 번화가.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경제 중심지였던.,종로.
밤이면 조선인 노점상 야시장 & 창경원 벚꽃놀이.
일본인들과 상류계층의 번화가는 명치정과 본정통
충무로 본정통에는 미쓰코시 백화점(현 한국은행) 등.
북촌., 종로와
남촌.,본정통~명치정 일대는
일본 대자본 투입으로 점차 공간 분리.
일제강점기 해가 거듭될수록 격차가 벌어졌다.
오늘날, 명동이.,그당시 명치정.
일본식 과자를 판매하는 왜각시(게이샤)들을
구경하는 손님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던 곳.,명치정.
일본 상인들은 이 인기를 바탕으로 과자나 요리와 함께
각시를 파는 요정을 세워 일본식 유곽문화를 도입했던 곳.
대한제국 궁중연회를 마치고
기념촬영한 관기(官妓)들의 모습.
종전 기생은 학식 높은 사대부를 손님으로 상대
그러므로, 상당한 지식과 교양을 겸비해야 했다.
지역의 특색에 따라 읽고 읊는 책도 달라졌는데
유교적 학풍이 발달한 안동 기생은 대학을 암송하고,
관동 기생은 관동별곡을 읊었으며, 호방한 기풍이 강한
함흥 기생은 제갈량의 출사표를 노래하는 등 수준이 높았다.
개항 이후 갑오농민전쟁, 청일전쟁,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의 사회, 경제 기반이 흔들리자 고고했던 기생의 지위도
함께 흔들렸음은 물론 생계수단 잃은 여성들이 매춘에 나섰다.
종전에야 기생이 아닌 매춘여성(화랑유녀, 여사당패)은
사대문 안 출입이 금지되어 도성 안에서의 매춘은 어려운 일
국가의 근간이 무너지면서 매춘에 나선 일반 여성도 늘어나자
정부는 이들을 한 지역으로 모아 '거주제한구역'인 홍등가 형성.
삼패들이 모여 살던 남상화당(시동 : 중구 입정동, 을지로 3가)
인근 대소룡동과 종현 저동(명동2가)에 모여 살게 한 경무청은
이주기간을 40일로 한정해 인근 초가집 값이 마구 급등하는 촌극.
높은 집값으로 인해 이곳에 이주한 여성들은
한 집에 5~7명이 함께 기거하면서 대문에
‘상화당’이란 문패를 써 붙이고 생활했다.
1890년 관기제도가 없어지면서 일자리가 없어진 기생들은
일본식 요정을 본 딴 명월관과 같은 요릿집으로 모여들었다.
이후 비슷한 시기 형성된 일본식 유곽을 관리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는 조선의 기생문화를 싸잡아 공창으로 간주
교방의 명칭 또한 1914년엔 일본식인 권번으로 바뀌었다.
성매매 관점에서 조선시대 창기의 매음은
개인이 성을 파는 프리랜서의 개념이었다.
이들이 모여 있는 도성 안 청루나
음방에서도 그 접촉이 매우 은밀했고,
색주가(色酒家, 술과 함께 몸을 제공하는 작부)를
만나려면 남대문 밖 잰배(현재 중구 순화동)나 홍제원
현재, 서대문구 홍제동과 같은 도성 바깥을 직접 찾아야 했다.
본격적인 집창의 개념은
고종 갑오년 이후 늘어난 매춘인구에 따라
남상화당과 같은 특정 공간을 점유하는 형태가
나타나면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이에 1902년 관립의학교 교장 지석영은
이 같은 집창촌의 등장에 부쳐 “성병이 무서우니
각국의 법에 따라 기적(기생명부)를 편성하여
검미(檢微)할 것을 제창한다”고 제언했다.
집창촌의 등장과 함께 필연적으로 대두된 성병 문제는
이후 일제가 공창제로 기생을 관리하는 좋은 구실로 작용.
이는 조선시대 당대의 예술인이자 지식인으로
선망의 대상이었던 기생의 몰락이자 추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