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형의 데뷔작 [망하거나 죽지않고 살 수 있겠니]를 무척 신선하고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영화 판권이 팔렸다는 말을 듣고 과연 1930년대 경성을 제대로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의심이 들었다. 영화적인 재미있는 요소를 갖춘 원작이었지만, 셋트 몇 개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일제강점기라는 당대의 무게감이 살아나야 하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정지우 감독의 [모던 보이]는 원작을 상당 부분 각색해서 원작과는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소설에서 영화로 하나의 콘텐츠가 매체 이동할 때의 통과제의를 거치는 과정에서 많이 상업화되었고 대중화되었지만 더 큰 문제는, [해피엔드][사랑니] 등에서 보여준 정지우 감독의 특징이 제대로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1937년의 경성, 조선총독부 1급 서기관 이해명(박해일 분)의 관심은, 경성의 뒷골목을 돌아다니며 화려한 클럽에서 최신 유행하는 춤을 추고 멋진 여자들을 유혹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역시 총독부에 근무하는 그의 단짝 친구 신스케(김남길 분)는 일본인지만 둘도없는 친구 사이다. 그들은 함께 경성의 비밀구락부를 찾아갔다가 가수이자 댄서인 조난실(김혜수 분)의 공연을 보게 된다. 그녀의 춤과 노래를 보는 순간, 모던보이 이해명은 그 자리에 얼어붙는다. 이렇게 매혹적인 여자를 만나본 적이 없는 것이다. [모던보이]는 잘 나가는 이해명이 베일에 쌓여진 여자 조난실을 만나 죽도록 고생하면서 인생이 변화되는 이야기이다.
2008년 상반기에 [원스 어폰 어 타임]이나 [라디오 데이즈] 등 193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이미 두 편이나 개봉했지만 [모던보이]는 스케일이나 완성도 면에서 그런 영화들과 다르다. 촬영, 조명, 셋트나 의상 등 모든 부분에서 공들여 찍은 흔적이 드러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흐름이다. 원작소설이 각색되는 과정에서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에 지나치게 초점이 맞춰졌고, 대중화되는 단계에서 무리수를 두고 있다. 웰메이드 영화인 것은 분명하지만 보는 사람의 마음이 편치 않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고 셋트 촬영 연출 다 괜찮은데 전체적으로 빡빡하다는 느낌이 들고 연결 이음새가 인위적이다.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지 못하다는 것, 음, 열심히 잘하는군. 이라고 이야기 밖에서 이야기를 들여다 보게 하는 것, 이것이 정지우 감독의 잘못이다. 관객들의 정서가 유입될 수 있는 틈을 주었어야만 했다. 잘 만들려고 노력하다 보니까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가서 오히려 보는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모던보이]는 그러나 1930년대라는 일제강점기의 경성을 영화적으로 매혹적인 공간으로 바꿔놓았다. 사회현실에는 무관심한 채 오로지 개인적인 쾌락을 탐하는 남자와, 역사변혁의 소용돌이 한 복판에서 온몸으로 변화를 실천하는 여자가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가 우리를 사로잡는다.
이해명과 조난실의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1930년대라는 무거운 시대적 공기가 서서히 펼쳐진다. 영화의 도입부에서는 흰 양복 백구두 멋진 오차림의 이해명같은 모던보이들이 활개치고 비밀구락부에서는 재즈와 스윙이 연주되며 화려한 춤이 사람들을 사로잡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배경이 서서히 드러난다. 낮에는 의상실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밤에는 클럽의 가수로 노래하는 조난실에게 푹 빠진 이해명이 노골적인 작업끝에 그녀와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영화적 재미를 주지만, 가벼움과 무거움의 저울추가 경쾌하게 이동되지 못하고 있다.
총독부로 출근하는 이해명을 위해 조난실이 만들어준 도시락이 사실은 사제 폭탄이었고 그것이 총독부 내에서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나면서 이야기는 개인적 차원에서 조선독립이라는 집단적 과제로 확대된다. 개인적 사랑과 역사적 과제 사이의 줄다리기가 매끄럽지 못하다는 것, 그 과정에서 인위적 설정이 너무 두드러지게 강조되어 있다는 것, 그것이 [모던보이]에게 무조건 지지를 보낼 수 없게 만든다. 대의명분은 있지만 그것보다 우선해야만 하는 것이, 허구로서의 스토리텔링이 갖는 자연스러움이다. [모던보이]의 문제는 두 남녀의 캐릭터에 너무 많은 것을 의지한 각색과정에서의 지나친 욕심과, 자연스러움보다는 열심히 땀 흘리며 노력하는 모습이 더 노출된 연출과정에서의 힘 들어간 흔적이 역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옛 경복궁 부지였으며 해방 후에는 오랫동안 중앙청 건물로 사용되었다가 지금은 사라진 조선총독부 건물과 광화문, 역시 지금은 불타 없어진 숭례문 그리고 서울역과 미쓰비시 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이 있던 명동 일대 등 1930년대 경성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화면은 우리의 마음을 뒤흔든다. 포스트 프러덕션 과정에서 꼼꼼한 컴퓨터그래픽 작업이 첨가되면서 만들어낸 일제강점기의 경성의 모습은 지금까지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 중에서 최고의 완성도를 자랑한다.
그러나 개인의 행복과 역사적 변화가 무관한 것은 아니라는 감독의 메시지가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래야만 컴퓨터그래픽도, 사실적인 셋트도, 매혹적인 의상도 살아나는 것이다. 1930년대의 절망적이면서도 화려했던 경성의 분위기는 분명히 매혹적인 그 무엇이 있다. 나라 잃은 민족이 갖는 염세주의적 성향과 퇴폐적인 환락은 역설적으로 나라를 찾고자 하는 능동적 의지와도 연결되는 좁은 통로가 있다. [모던보이]의 과제는 그 통로를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아쉽게도 통로가 있다는 것만 확인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