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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통지(續通志, 1,785年)로 본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제국(諸國)
2024년 04월 21일
○ 속통지(續通志)는,
➨ 欽定續通志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欽定續通志,又稱續通志,清嵇璜、劉墉等於乾隆三十二年奉敕撰,紀昀等校訂,成書於五十年[1,785年],十通之一。與欽定續通典、欽定續文獻通考,合稱為續三通 : 續通志,全書六百四十卷,體例仿《通志》,惟缺世家及年譜。書中紀傳自唐初至元末止,二十略自五代至明末止,補充了《通志》諸略於唐事的缺漏。本書(傳)部分具特別的,較《通志》增列孔氏後裔傳、貳臣傳、姦臣傳、叛臣傳、逆臣傳,而少了游俠傳.》
「AD 1,785년(年)에 성서(成書)하였다」하였으니, 이때는 「조선왕조(朝鮮王朝)로 보면 : 정조(正祖) 9년(年)」의 일로 무척 흥미(興味)로운 내용(內容)을 담고 있을 것으로 추측(推測)이 되어 “속통지(續通志)”를 고른 것이다.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성시전도(城市全圖)는, AD 1,792년(年)이요, 속통지(續通志)는, AD 1,785년(年)이므로 아주 비슷한 시기(時期)」라고 할 수 있다.
이때쯤이면 당시(當時)의 “청(淸)”나라 형편(形便)으로 보면 : 「반도(半島) 땅의 조선왕조(朝鮮王朝)에 대해서나, 영토(領土)의 크기나 지세(地勢)나 하는 것들에 대해 그 어떤 나라(國家)보다도 확실(確實)하게 꿰뚫고 있었다」라고 볼 수 있다.
속통지(續通志)에서 설명(說明)하는 삼국(三國) 곧 고구려(高駒驪), 백제(百濟), 신라(新羅) 등(等)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과연(果然), 한반도(韓半島) 땅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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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속통지(續通志) 635 : 고구려(高駒驪) ∼ 고려(高麗)
〈髙麗本曰髙句驪漢時扶餘别種常居之其地東至新羅南至百濟皆跨大海西北渡遼水接營州而靺鞨在其北. : 고려(高麗)는 본래(本來) 고구려(高句驪)인데, 한(漢)때 부여(夫餘)의 별종(別種)으로 그 땅에서 항상 살았는데, 동(東)쪽으로는 신라(新羅)에 닿고, 남(南)쪽은 백제(百濟)에 다다르며, 모두 큰 바다를 걸터앉아 있다. 서북(西北)의 요수(遼水)를 건너 영주(營州)와 접하는데, 그 북(北)쪽에는 말갈(靺鞨)이 있다. 其都平壤城即漢樂浪郡依鴨緑江為險. : 그 나라의 서울은 평양성(平壤城)인데, 곧 한(漢)의 낙랑군(樂浪郡)으로 압록강(鴨綠江) 요해(要害)의 땅에 의지하였다. 中略. 後唐長興中王建代髙氏遂并新羅百濟高句麗為一徙居松岳號東京平壤為西京 : 후당(後唐) 장흥(長興)중에 왕건(王建)이 고씨(高氏)의 대를 이어 신라(新羅)와 백제(百濟)를 병합하였는데, 고구려(高駒驪)의 하나가 송악(松岳)으로 옮겨 살았는데 이름을 동경(東京)이라 하고, 평양(平壤)은 서경(西京)이라 하였다〉라고 기록(記錄)하여 설명(說明)하였다.
➊ 「고구려(高駒驪)의 도읍지(都邑地)는 평양성(平壤城)」인데, 「압록강(鴨綠江)의 요해처(要害處)에 의지(依支)하고 있어 매우 견고(堅固)한 나라였다」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으며, 당시(當時)에 「신라(新羅)는 그 동(東)쪽에 있다」라고 하였으니,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 땅이 아니었음을 확인(確認)시켜준다. 곧 고구려(高駒驪)와 신라(新羅)는 남북(南北)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동서(東西) 횡축(橫軸) 선상(線上)에서 존재(存在)해 있었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지형지세(地形地勢)는, 한반도(韓半島)라는 땅에서는 불가능(不可能)하다.
➋ 〈서북(西北)의 요수(遼水)를 건너 영주(營州)와 접하였다 : 西 北 渡 遼 水 接 營 州〉라는 말은, 「고구려(高駒驪)의 영토(領土)는, 요동(遼東) 땅을 넘어 요서(遼西)까지였다」라는 것이며, 또 고구려(高駒驪) 태왕(太王)은, 영주자사(營州刺史)를 겸임(兼任)하였으니,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땅, 요서(遼西)까지도 영토(領土)로 했다는 설명(說明)이다.
연행록(燕行錄)의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이 기록(記錄)한 “요동(遼東) 요서(遼西)”의 지형지세(地形地勢)를 보면 : 특이지형(特異地形)인 막막(漠漠)한 사막지대(沙漠地帶)였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사실(史實)【역사(歷史)에 실제(實際)로 있었던 사실(事實)】은 숨긴다고 해서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➌ ‘후당(後唐) 장흥(長興)’ 때에 “고구려(高駒驪)”의 후인(後人)이었던 “왕건(王建)”이 신라(新羅)와 백제(百濟)를 병합(倂合)하고는 송악(松岳)에 살면서 :“송악(松岳)을 동경(東京)”이라고 하고서는 “평양(平壤)은 서경(西京)”이라고 불렀다는 얘기다.
곧 「구도(舊都)인 평양(平壤)은 서(西)쪽에 있으니 “서경(西京)”」이고, 새로운 「신도(新都)인 송악(松岳)은 동(東)쪽에 자리 잡고 있으니 곧 “동경(東京)”이라고 했다」라는 것이다.
➨ 틀린 말인가? 속통지(續通志)에서 말하는 것은, 천지간(天地間)의 이치(理致)와 정확(正確)하게 일치(一致)하는 지세(地勢)를 말해 주고 있다.
(2) 속통지(續通志) 635 : 백제(百濟)
〈百濟扶餘别種也濵海之陽南倭北高麗皆逾海乃至其東新羅也.俗與高麗同. : 백제(百濟)는, 부여(扶餘)의 별종(別種)이다. 바다의 북(北)쪽으로 남(南)쪽으로 왜(倭), 북(北)쪽으로는 고려(高麗)이다. 모두 바다를 건너 이른다. 그 동(東)쪽은 신라(新羅)이다. 풍속은 고려(高麗)와 같다. 武后以其孫敬襲王而其地已為新羅渤海諸國所分百濟遂絶 : 무후(武后)가 그 후손인 경(敬)에게 왕(王)을 세습토록 하였으나, 이미 그 땅은 신라(新羅), 발해(渤海) 여러 나라(諸國)가 그곳을 나누었기 때문에 백제(百濟)는 드디어 끊어졌다〉라고 하였다.
➊ 「백제(百濟)의 남(南)쪽에 왜(倭)가 있었다.」라고 하였는데, 이런 구도(構圖)는 한반도(韓半島)라는 곳에서는 불가능(不可能)한 구조(構造)다.
➋ 「백제(百濟) 땅은, 신라(新羅)와 발해(渤海) 등의 여러 나라(諸國)가 쪼개 분할(分割)되었기 때문에 백제(百濟)는 드디어 끊어졌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記錄)을 보면서도 “조선왕조(朝鮮王朝)”가 한반도(韓半島)에 있었다고 하는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은 사기꾼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도대체 백제(百濟) 땅이 어디에 있었길레 “신라(新羅)와 발해(渤海)”가 땅을 쪼게 분할(分割)했다는 것일까? 다른 사서(史書)에서는 “말갈(靺鞨)”을 추가하기도 하는데, 속통지(續通志)에서도 “신라(新羅)와 발해(渤海)와 여러 나라(諸國)들이 그 땅을 쪼개 분할(分割)하였다”라고 하였다.
(3) 신라(新羅) :
〈新羅弁韓苖裔也地横千里縱三千里東距長人東南日本西百濟南瀕海北高麗.朝服尚白其王姓金貴人姓朴民無氏. : 신라(新羅)는 변한(弁韓)의 묘예(苗裔) 곧 먼 후손(後孫)이다. 땅(地)은 동서(東西 : 橫) 천리(千里), 세로(縱 : 南北)는 3 천리(千里)인데, 동(東)쪽으로는 장인국(長人國), 동남(東南)쪽에는 일본(日本), 서(西)쪽으로는 백제(百濟), 남(南)쪽으로는 바다에 가깝고, 북(北)쪽은 고려(高麗)이다. 宋以後入于高麗以其地為東州樂浪府號東京而以百濟地為金州金馬郡號南京云 : 송(宋) 이후(以後)에 고려(高麗)는 이 땅에 동주(東州) 낙랑부(樂浪府)를 두고 동경(東京)이라고 하고, 백제(百濟) 땅의 금주(金州) 금마군(金馬郡)을 두고 남경(南京)이라고 하였다. 조복(朝服)은 흰 것을 숭상하였으며, 그 나라 왕(王)의 성(姓)은 금(金)이며, 귀인(貴人)의 성(姓)은 박(朴)인데, 백성(百姓)들은 성(姓)이 없다(無氏)〉라고 하였다.
➊ 변한(弁韓)의 묘예(苗裔)인 “신라(新羅)”는 : 「땅(地)은 동서(東西 : 橫) 천리(千里), 세로(縱 : 南北)는 3 천리(千里)」라고 하였는데 :
동서(東西)가 ‘1 천리(千里)요, 남북(南北)이 3 천리(千里)’라는 말은,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 경상도(慶尙道) 땅보다 10배(倍) 이상(以上) 큰 땅이기 때문에 「변한(弁韓)이나 신라(新羅)는 한반도(韓半島) 땅에 없었다」라는 것이고,
➋ 「동(東)쪽으로는 장인국(長人國)」 :
「동(東)쪽으로 “장인(長人)”들이 사는 나라가 있었다」라고 하였으니, 「신라(新羅) 땅의 동서(東西) 길이가 1 천리(千里) + 수백(數百) 리를 넘었다」라는 이야기이니 “한반도(韓半島)” 땅이 아니었다는 확실한 증거(證據)다.
➌ 「동남(東南)쪽에는 일본(日本)」 :
「동남(東南)쪽에는 일본(日本)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동서(東西)는 1 천리(千里)【본시(本是) 신라(新羅) 땅】 + 수백(數百) 리(里)【동(東)쪽 장인국(長人國)】+ 수백(數百) 또는 수천(數千) 리(里)【왜(倭), 일본(日本) 땅】가 되어야 하고, ➠ 「남북(南北) 길이 또한 3 천리(千里) + 수백(數百) 리(里) 이상(以上) 더 연장(延長)되어야 하니 한반도(韓半島) 땅이 아니었다는 명백(明白)한 증거(證據)다」라는 것이고,
➍ 「서(西)쪽으로는 백제(百濟)」 :
「서(西)쪽으로 백제(百濟)가 있다」라고 하였으니, ➠ 「한반도(韓半島) 동서(東西) 거리(距離)는 1 천리(千里)【신라(新羅) 땅】+ 수백(數百) 리【장인국(長人國)】 + 또는 수백(數百) 또는 수천(數千) 리【왜(倭)】 + 5 백리(百里)∼1 천리(千里) 이상(以上)【백제(百濟) 땅】= 「삼천(數千) 리(里) 이상(以上)」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한반도(韓半島) 땅에 “신라(新羅)는 없었다”라는 확실(確實)한 것이 된다.
➎ 「북(北)쪽은 고려(高麗)이다.」라고 하였으니,
「남북(南北) 3 천리(千里)는, 고려(高麗)까지 포함(包含)시키면 “5 천리(千里)∼1 만리(萬里)”가 되는 알 수 없는 땅이니, “한반도(韓半島)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땅이다”」라는 뜻이다.
➏ 「남(南)쪽으로는 바다에 가깝고」 :
한반도(韓半島)의 신라(新羅) 땅은, “남(南)쪽과 동(東)쪽” 모두가 바다(海)에 임하기 때문에 「남(南)쪽만 바다」라는 것은, 「한반도(韓半島)와는 전혀 관계없는 땅을 말하는 것이다」
➠➠➠ 신라(新羅)가 있었던 땅【삼국(三國)이 있었던 땅】은, 「동서(東西) 5 천리(千里) 이상(以上)∼1 만리(萬里) 이상(以上), 남북(南北) 또한 7 천리(千里)∼1 만리(萬里) 이상(以上) 되는 땅에 자리 잡고 있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➐ 「당시(當時) 신라(新羅)에는 “금(金), 박(朴)” 성(姓)만이 있었고, 일반 백성(百姓)들은 아예 성(姓)이 없었다」라는 이야기다.
더불어 “성씨(姓氏)”에서, 신라(新羅)인 스스로 “소호금천(少昊金天)씨”의 후손(後孫) 또는 후예(後裔)라고 했다면, “금씨(金氏)”여야 맞는 말이다. “김씨(金氏)”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런 기록(記錄)으로 보면 : 오늘날 한반도(韓半島)의 경상도(慶尙道) 일부(一部) 보수우파(保守右派)들이 말하는 ‘신라(新羅) 직계(直系)’라는 말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말인지를 실감(實感)케 하는 기록(記錄)이다. “성씨(姓氏)는 없었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아는가? 「누가 누구의 혈족(血族)인지도 모른다」라는 말과 같은 것이고, 「노예(奴隸), 노비(奴婢), 하인(下人)들이었다」라는 뜻과 같은 것이다.
「신라(新羅) 때 대신(大臣)의 집(家)에는, 3천(數千) 여(餘)의 노비(奴婢)가 있었다」라는 기록(記錄)으로 이를 증거(證據)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例)는 반도(半島)가 아닌 “대륙(大陸)의 신라(新羅) 땅에서 있었던 사실(史實)이다”
➨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총칭(總稱)】를 이루고 있었던 여러 왕조(王朝)는, 한반도(韓半島)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대륙(大陸)의 땅에 있었다」라는 것을 고증(考證)해주는 자료(資料)다.
(4) 탐라(耽羅) :
〈耽羅高麗與國也宋以前無考 : 탐라(耽羅)는 고려(高麗)의 여국(與國)【속국(屬國), 동맹국(同盟國)】인데, 송(宋)나라 이전(以前)은 상고(詳考)할 수 없다(없다). 【按唐書載有儋羅國居新羅武州南島上龍朔麟徳間嘗來朝儋耽音近疑即其地 : 당서(唐書)에 기재된 것이 있는데, 담라국(儋羅國)은, 신라(新羅) 무주(武州) 남(南)쪽의 섬(島)에서 산다. 용삭(龍朔) 인덕(麟德) 중에 래조(來朝)한 담(儋)과 탐(耽)의 음(音)이 가깝다. 곧 그 땅이 아닐까 한다.】元世祖臣服高麗以耽羅為南宋日本衝要亦注意焉 : 원(元) 세조(世祖)의 신하(臣下)로써 복종한 고려(高麗)의 탐라(耽羅)는, 남송(南宋)과 일본(日本)의 충요(衝要)【매우 중요한 지점 또는 곧, 장소】한 곳에 있어, 또한 주의(主意)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담라국(儋羅國)【탐라(耽羅)】은 : 「일본(日本)과 남송(南宋)의 사이에 끼어 있어 아주 중요(重要)한 길목에 자리 잡고 있었다」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➊ 「남송(南宋)」이란 : 「“북송(北宋)”이 여진족(女眞族) 금(金)나라에게 패(敗)하고 밀려, 고종(高宗)【휘종(徽宗)의 아들(子)】이 남(南)쪽으로 천도(遷都), 항주(杭州)에 도읍(都邑)하였는데, 이때를 “남송(南宋)”이라고 부른다. 9대(代)에 걸쳐, 152년(年)【1,127년(年)~1,279년(年)】만에 몽고(蒙古)【원(元)】의 세 차례의 정복전쟁(征服戰爭)으로 인하여 아주 비참(悲慘)하고 처절(悽絶)하게 망(亡)했다」라고 전해진다.
➋ 「일본(日本)」은 : 당시(當時)에 일본(日本)【왜(倭)】은, 오늘날의 열도(列島)에 존재(存在)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위에서 말하고 있듯이 “남송(南宋)과 일본(日本) 사이의 충요(衝要)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➌ 「속통지(續通志)」에서 “원사(元史)” 기록(記錄)을 인용(引用)하고 있으니, “원사(元史)”를 살펴볼 필요(必要)가 있을 것 같다. 「“탐라(耽羅)”는, 곧 오늘날의 “해남도(海南島)”를 말하는 것이다」
원사(元史) / 耽羅 :〈耽羅,高麗與國也。世祖既臣服高麗,以耽羅為南宋、日本衝要,亦注意焉。: 탐라(耽羅)는, 고려(高麗)의 여국(與國 : 屬國)이다. 고려(高麗)는 원(元) 세조(世祖)의 신하(臣下)로 복종(服從)하였는데, 탐라(耽羅)는, 남송(南宋), 일본(日本)의 충요(衝要)【매우 중요한 지점 또는 곧, 장소】한 곳에 있어, 역시(또한) 주의(主意)를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남송(南宋)”은 “장강(長江) 이남(以南)”의 “항주(杭州)”에 도읍했다가 원(元)나라의 토벌로 양광(兩廣) 땅으로 쫓겨났다가 해중(海中)의 “물귀신”이 된 나라다.
이러한 “남송(南宋)과 일본(日本) 사이의 요충지(要衝地)에 있었다”라고 하였다면 당시(當時)의 탐라(耽羅)는 어디에 있었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요지(要地), 「해남도(海南島)를 말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원사(元史) 일본(日本) 편에서 말하는 내용(內容)으로 : 〈二 十 三 年, 帝 曰 : 日 本 未 嘗 相 侵, 今 交 趾 犯 邊, 宜 置 日 本, 專 事 交 趾〉
이 구절(句節)의 번역(飜譯)은 이론(異論)이 있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 “당시(當時)의 일본(日本)을 열도(列島)에 있었다”라고 말하는 자(者)와 ⓑ “일본(日本)은 대륙(大陸)의 남해(南海) 해중(海中) 또는 인도차이나반도[Indo china, 半島] 및 주변(周邊) 해상(海上) 있었다고 말하는 자(者)와의 엄청난 차이(差異)가 존재(存在)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 〈지원(至元) 23년(年)【AD 1,286年】일본(日本)은 일찍이 서로 침략(侵略)하지 않았는데, 지금 ➨ 「교지(交趾)가」 변경(邊境)을 범하였다. 마땅히 일본(日本)을 제쳐두고, 오로지 교지(交趾)의 일에 전념(專念)하여야 한다〉라고 번역(飜譯)할 경우(境遇),
위 ⓐ와 같이 번역(飜譯)하면 : “옛 기록(記錄)은 모두 헛소리가 된다.” 즉(卽) 이미 지원(至元) 18년(年)【고려사(高麗史) : 至元 19년【충렬왕 7년, AD 1,281】3,500∼4,500척(隻)의 전함(戰艦)과 15만여 병사(兵士)로 일본(日本)을 쳤으나, 태풍(颱風)으로 궤멸(潰滅)되었다】에 약 15만 대군(大軍)을 동원(動員), 대대적(大大的)으로 일본(日本)을 쳤는데, 무슨 얼어 죽을 “서로 침략(侵略)하지 않았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가?
또 “일본(日本)은 일찍이 서로 침략(侵略)하지 않았는데”라는 말과 “교지(交趾)가 변경(邊境)을 침략(侵略)”한 것과 뭔 상관(相關)이 있는가? 이는 전혀 이해(理解)될 수 없는 이야기다.
“일본(日本)과 교지(交趾)”는 전혀 다른 주체(主體)요, 아무런 연고관계(緣故關係)가 없기 때문이다. 원(元) 측에서 보아도 ‘서로 침략(侵略)하지 않은 사이’라는 것을 강조(强調)할 필요는 전혀 없다. 「교지(交趾)가 변경(邊境)을 범(犯)했다」라면 알아서 처리(處理)하면 될 일이지, “일본(日本)과는 일찍이 서로 침략(侵略)하지 않았다”라는 기록(記錄)은, 「뚱딴지같은 말일 뿐이다.」왜냐하면 이미 몇 년(年) 전(前)에 “원(元)”나라는 15만 대군(大軍)을 동원(動員)해 일본(日本)을 쳤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깊이 숨은 뜻이 있다.」
이런 이야기를 “귀신(鬼神)이 씨 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하는 것이다.
➠ ⓑ 〈지원(至元) 23년(年)【AD 1,286年】일본(日本)은 일찍이 서로 침략(侵略)하지 않았는데, 지금 ➨ 「교지(交趾)」 변경(邊境)을 범하였다. 마땅히 일본(日本)은 이를 조치해야 함에도, 오로지 교지(交趾)의 일에 전념하였다〉라고 한다면 : 원사(元史) 본기(本紀) 기록(記錄)을 이해(理解)할 수 있게 된다.
곧「일본(日本)은 일찍이 서로 침략(侵略)하지 않았는데」라면서 「지금 교지(交趾)의 변경(邊境)을 침략(侵略)했다」라는 것은 : 〈일본(日本)은 일찍이 서로 침략(侵略)하지 않았는데, 지금(今)에 와서 교지(交趾)의 변경(邊境)을 쳐들어왔다〉라는 이야기가 된다면 백번(百番) 이해(理解)될 수 있는 이야기가 된다.
‘원사(元史) 본기(本紀)’를 보면 : 당시(當時)에 수만(數萬)의 병사(兵士)들을 교지(交趾) 변경(邊境)에 주둔(駐屯)시켰다는 기록(記錄)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조선사(朝鮮史)를 보면 탐라(耽羅)와 교지(交趾)의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에 대해 콕 찍어 낼 수 있는 기록(記錄)이 있다. 즉(卽),
➨➨➨ 高麗史 30卷, 世家 30, 忠烈王3, 19年【AD 1,293年】 : 《乙丑元流耽羅達魯花赤於交趾以右丞阿撒代之. : 을축(乙丑), 탐라(耽羅)의 달로화적(達魯花赤)을 원(元)나라로 유배시키고, 교지(交趾)의 우승(右丞) 아살(阿撒)로 대신(代身)하게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
당시(當時)의 「탐라(耽羅)와 교지(交趾)는 가깝게 이웃하고 있었다」라는 것을 알려주는 대목이자, 「탐라(耽羅)는 남송(南宋)과 일본(日本) 사이 요충지(要衝地)에 자리 잡고 있었다」라는 것을 증거(證據)해 준다.
➨➨➨ 중요(重要)한 점은, ‘일본(日本)과 교지(交趾)’는 뭐냐 하는 것이다. 원사(元史)에서 말하는 “일찍이 일본(日本)과는 서로 침략(侵略)한 적이 없다”라는 기록(記錄)을 믿는다면 :
⒞ 「원(元)과 고려(高麗)가 15만 대군(大軍)을 출정(出征)시킨 일본토벌작전(日本討伐作戰)은 없었다」라는 말이 된다.
⒟ 「일본(日本) 곧 교지(交趾)다」라는 말과 같다. 이때의 본기(本紀)를 보아도 교지(交趾) 변경(邊境)에 수만(數萬) 병사(兵士)를 주둔(駐屯)시켰다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이어지기를 : 원사(元史) 본기(本紀) : 〈成 宗 大 德 二 年 , 江 浙 省 平 章 政 事 也 速 答 兒 乞 用 兵 日 本 。 帝 曰 : 今 非 其 時 , 朕 徐 思 之 : 성종(成宗) 대덕(大德) 2년【AD 1,298년(年)】, 강절성(江浙省) 평장정사(平章政事) 야속답아(也速答兒)가 일본(日本)을 정벌(征伐)하기를 청하였다. 황제(皇帝)가 말하기를 “지금은 그 시기가 아니니, 짐이 천천히 그것을 생각해보겠다”라고 하였다.〉
➨➨➨ 「당시(當時)의 교지(交趾)와 일본(日本)의 관계(關係)는 뭐냐?」 하는 것이다. 원사(元史)에서 말하는 바에 따르면 : 당시(當時)의 “일본(日本)=왜(倭)”는 분명(分明) “남해(南海)의 해중(海中)의 섬(島)에 있었다”라는 것은 확실(確實)하다.
대륙(大陸)의 남방지대(南方地帶)에 있었던 “남송(南宋)”과 “일본(日本)” 사이 충요(衝要)【매우 중요한 지점 또는 곧, 장소】한 곳에 “탐라(耽羅)”가 있었다는 것이 그 증거(證據)다.
➠ ➊ 대륙(大陸)의 남방(南方) 곧 “해남도(海南島)와 베트남[Vietnam]과 필리핀[呂宋 : Philippines]” 사이에 “탐라(耽羅)”가 있었고【제주(濟州)와 탐라(耽羅)는 같은 땅일 수 없다】 ➋ 일본(日本) 즉(卽) 왜(倭)는 인도네시아[Indonesia]제도의 여러 섬에서 살다가 필리핀[呂宋 : Philippines]으로, 유구[琉球=臺灣]로, 오키나와를 거쳐, 오늘날의 열도(列島)로 이동(移動)하게 되는 해상종족(海上種族)이다.
그렇다면 “왜(倭)”편을 보자. 과연(果然), 왜(倭)는… …?
(5) 왜(倭) :
〈日本者本倭國直新羅東南在海中島而居小島五十餘皆自名國而臣附之其境東西行五月南北行三月西南至海東北隅隔以大山山外即毛人國 : 일본(日本)은 본래(本來) 왜국(倭國)으로, 신라(新羅) 동남(東南) 바다 가운데 섬(島)에 있는데 50여 개의 작은 섬(島)에 살며 나라(國)에 신하(臣下)로 의지하는데, 그 지경은, 동서(東西)는 5월, 남북(南北)은 3월을 간다. 서(西)쪽과 남(南)쪽은 바다에 닿고, 동(東)쪽과 북(北)쪽 모퉁이 사이에 큰 산이 있다. 산(山) 밖으로는 곧 모인국(毛人國)이다〉라고 하였으니,
당시(當時)의 ‘일본(日本)=왜국(倭國)’ 땅은,
➊ 「동서(東西)는 길고[5월 行], 남북(南北)은 짧다[4월 行]」라고 하였으며,
➋ 「서(西)쪽, 남(南)쪽은 바다(海)에 다다르고, 동(東)쪽과 북(北)쪽은 큰 산(大山)에 한계(限界)하고, 산 밖(山 外)으로는 모인국(毛人國)이 있었다」라는 것이다.
➌ 이러한 엣 기록(記錄)으로 보면 : 「당시(當時)의 ‘일본(日本)=왜(倭)’는 결단코 오늘날의 열도(列島)에 없었다.」라는 것은 확실(確實)한 것이다.
(6) 流求國 :
〈流求國亦曰瑠求在南海之東與漳泉諸州相對西南北岸皆水至彭湖漸低近其國 : 유구국(流求國)은 또한 류구(瑠求)라고 한다. 남해(南海)의 동(東)쪽에 있는데, 장주(漳州)와 천주(泉州)와 여러 주(州)와 서로 마주 대하고 있다(相對). 서(西), 남(南), 북(北) 기슭은 모두 물(水)에 다다르는데, 팽호(澎湖)에 점점 낮아져 가까이 그 나라가 있다〉라고 하였다.
오늘날의 「타이완(Taiwan)=대만(臺灣)」【면적(面積) 35,195㎢】을 일컫는다.
➠ 「복건성(福建省) 장주(漳州)와 천주(泉州), 그리고 대만(臺灣)」 : 곧 당시(當時)의 「유구국(流求國)」이었음이 확실(確實)하다.
즉(卽) 「流求國亦曰瑠求在南海之東與漳泉諸州相對西南北岸皆水至彭湖漸低近其國 : 유구국(流求國)은 또한 류구(瑠求)라고 한다. 남해(南海)의 동(東)쪽에 있는데, 장주(漳州)와 천주(泉州)와 여러 주(州)와 서로 마주 대하고 있다(相對)」라고 하였으니 말이다. 【사진, 이미지 출처(出處) : 위키백과 / Naver 배낭속 크루즈】
장주(漳州) : 漳州市(閩南語:Tsiang-tsiu-tshī),簡稱漳,是中華人民共和國福建省下轄的地級市,位於福建省南部,地處閩東南山地與沿海丘陵平原區,西北有博平嶺橫亙,北部有戴雲山余脈綿延,沿海為漳州平原,是福建省最大平原。九龍江斜貫北部,往東流出廈門港,還有鹿溪、漳江、東溪等沿海諸河。【출처(出處)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천주(泉州) :泉州市(閩南語:泉州市,白話字:Choân-chiu-chhǐ,臺羅:Tsuân-tsiu-tshǐ,閩拼:Zuánziū-cî,國際音標:/ ʦuan˨˩ ʦiu˧˧ ʦʰi˨˨/),簡稱泉、鯉,泉州府城又稱刺桐(城)(阿拉伯語:زيتون,羅馬化:Zaytun,意為橄欖;蒙古語:ᠴᠢᠳᠤᠨ,轉寫:Chidun)、溫陵、清源,是中華人民共和國福建省下轄的地級市,位於福建省中南部沿海。地處閩東南沿海丘陵平原區,地勢西北高,東南低,西北部為戴雲山。晉江東溪和西溪於南安市雙溪口匯合,往東流貫市區,注入泉州灣。市人民政府駐豐澤區東海街道。泉州是福建南部地區的政治、經濟、文化和交通中心,首批國家歷史文化名城,古代海上絲綢之路的起點,聯合國教科文組織設立的世界多元文化展示中心,世界宗教博物館,中國首屆東亞文化之都,全國文明城市,國家衛生城市。五代十國中後期,晉江王留從效建立的清源軍(平海軍)政權定都於此,故被譽為「千年古都」和「閩南古都」。宋元時期,泉州海外貿易發達,被義大利旅行家馬可·波羅稱為「世界上最大的兩個商業天堂之一」和「東方的亞歷山大港」,被摩洛哥旅行家伊本·白圖泰稱為「世界上最大的港口」,被元朝學者吳澄稱為「七閩之都會」。【출처(出處)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조선왕조(朝鮮王朝)를 한반도(韓半島)로 몰아넣기 위해 광범위(廣範圍)한 역사왜곡(歷史歪曲)과 조작(造作)이 이루어졌음을 위의 원전(原典)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며칠 전, TV에서 방영(放映)한 “세계테마기행” 한 편을 보았다. 적벽대전(赤壁大戰)의 영웅(英雄)이자 오(吳)나라 최고(最古)의 미남(美男)이었다는 “주유(周瑜)”에 관한 이야기로, 그의 아내(妻)였다는 교공(橋公)의 둘째 딸 소교(小橋)는 “공후(箜篌)” 연주(演奏)를 아주 잘했고, 지금도 ‘고향(故鄕)인 주유성(周瑜城)’에 생생(生生)한 모습으로 조각(彫刻)되어 있다고 전한다.
「공후(箜篌)」하면 떠오르는 것이 ‘하수(河水) 변(邊)’에 살던 조선인(朝鮮人) “여옥(麗玉)”이요, 그가 연주(演奏)했다는 ‘공후인(箜篌引)’이라는 노래다.
공후인(箜篌引)【公無渡河歌】
公無渡河 / 님이여 강을 건너지 마셔요
公更渡河 / 님은 가어이 강을 건너는구려
墮河而死 / 강에 빠져 죽으니
當乃公何 / 님을 어찌 하리오
공후인(箜篌引) : 〈조선(朝鮮) 때의 노래. 백수(白首) 광부(狂夫)가 강(江)을 건너다가 빠져 죽자, 그의 아내가 이를 한탄(恨歎ㆍ恨嘆)하면서 불렀는데, 이를 곽리자고(霍里子高)가 듣고 그의 아내 여옥(麗玉)에게 들려주자, 여옥(麗玉)이 공후(箜篌)를 연주(演奏)하면서 곡조(曲調)를 만들어 불렀다는 기록(記錄)이 중국(中國) 진나라(晉--) 최표(崔豹)의 ‘고금주(古今注)’에 전(傳)한다. 작자(作者)를 여옥(麗玉)으로 보는 설(說)도 있다. 【출처 : 네이버, 한자사전】
이러한 설명(說明)이 정말 올바른 것일까? 서진(西晉)【AD 265~316年】최표(崔豹)【崔豹(?—?), 字正雄,漁陽人,西晉大臣】의 「고금주(古今注)」를 찾아보자.
➨➨➨ 古今注 [崔豹 : 西晋] 卷中, 音樂 第三 : 《箜篌引,朝鮮津卒霍里子高妻麗玉所作也。: 공후인(箜篌引)은, 조선(朝鮮) 진졸(津卒) 곽리자고(霍里子高)의 처(妻) 여옥(麗玉)의 작품(所作)이다. 子高晨起,刺船而棹。有一白首狂夫,被髮提壺,亂流而渡。: 자고(子高)가 일어나 새벽에 일어나 배를 손보고 있었는데, 머리가 흰 미치광이(白首狂人)가 머리를 풀어 헤치고 술병을 끌어안고 강을 거슬러 건너려 하였다. 其妻隨呼止之,不及,: 그의 처(妻)가 소리치며 건너지 말라고 하였으나, 그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遂墮河水死。於是援箜篌而鼓之,作公無渡河之歌。聲甚淒愴,: 드디어 하수(河水)에 빠져 죽으니, 공후(箜篌)를 끌어다 두드리며 ‘님이여 강을 건너지 마시오’라고 노래를 불렀으나, 그 소리가 심히 처량하였다. 曲終, 自投河而死。: 노래를 마치고는 스스로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霍里子高還,以其聲語妻麗玉,玉傷之,乃引箜篌而寫其聲,聞者莫不墮淚飲泣焉。: ‘곽리자고(霍里子高)’가 돌아와서, 그 사실을 처(妻) 여옥(麗玉)에게 말하니, ‘여옥(麗玉)’이 이를 가슴 아파하며 이에 공후(箜篌)를 가져다가 그 소리를 내니, 듣는 사람이 울지 않은 이가 없었다. 麗玉以其聲傳鄰女麗容,名曰箜篌引焉。: 여옥(麗玉)이 이 노래를 이웃 여(女) 여용(麗容)에게 전하니, 이름을 지어 공후인(箜篌引)이라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하(河)=황하(黃河)」가 제멋대로 옮겨 다니는 생물체(生物體)가 아닌 다음에야! : 당시(當時)의 조선(朝鮮) 땅에 “하(河)”가 흘렀다는 사실(史實)은, 그 땅은 “한반도(韓半島) 땅이 아니었다”라는 명쾌(明快)한 설명(說明)이다.
➨ 東溟集(동명집) 1 樂府 公無渡河 二首
황하에 해 떨어진 뒤 강물에는 물결 일어 / 黃河日落水揚波
분분하게 떨어져서 죽는 거를 어이할꼬 / 墜死紛紛當奈何
공무도하 노래 한 번 읊조리고 난 이후로 / 一自公無渡河後
몇 차례나 사람들이 이 황하를 건넜을까 / 幾回人渡此黃河
백수광부 강 건너다 물에 빠져 죽은 뒤로 / 白首狂夫溺水死
공후 뜯는 한 곡조의 노랫소리 처량하네 / 箜篌一彈聲凄凄
내 묻노니 누가 능히 이 노래를 불렀던가 / 借問誰能爲此曲
조선(朝鮮)의 진졸(津卒)였던 곽리자고 아내라네 / 朝鮮津卒子高妻
➨➨➨ ⒜ 「동명(東溟)」은, ‘하(河)’를 황하(黃河)라고 하였고,
⒝ 「당(唐)의 이백(李白), 왕건(王建)」 등 역시(亦是) “황하(黃河)”라고 하였다.
⒞ 그러나 대한민국(大韓民國)의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 친일사학자(親日史學者) 이병도(李丙燾)”는, 조선진(朝鮮津)에 대해 “조선진은 아마 조선현(朝鮮縣) 치소(治所)의 유지(遺址)인 토성리 북쪽에서 대동강(大洞江)을 건너가는 도진(渡津)인 지금의 구두진(狗頭津)인 듯하다.”라고 하였으며,
많은 대한민국(大韓民國) 학자(學者)들 역시(亦是) “이병도(李丙燾)”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거들먹거리는 것을 보면 역겹다.
➨ 한반도(韓半島) 땅에도 “하(河)”가 흘렀을까? ‘대동강(大同江)’이 “하(河)”냐? 답(答)은, 이글을 보시는 독자(讀者) 여러분들의 몫이다.
○ 오늘의 대한민국(大韓民國)! 「국정농단(國政壟斷)…국기문란(國紀紊亂)」사태(事態)가 또 벌어진다면 이건 정말 악몽(惡夢) 중의 악몽(惡夢)일 것이요, 「전(前) 대통령(大統領) ‘박근혜’의 국정농단(國政壟斷) 시즌 2」가 되는 것이다.
이제 어쩔 건가? 하루라도 빨리 수습(收拾)하지 못한다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事態)가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두가 한 번의 잘못된 선택(選擇)으로 벌어진 일이다. 국민(國民)들이 수습(收拾)하지 못하면 누가 이 사태(事態)를… …결국 그 피해(被害)는 오로지 국민(國民)들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
2024년 04월 21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 다음 게재 내용은,
‘군왕만세(君王萬歲)와 천하태평(天下泰平)’를 노래한 것에 대해 과연 이런한 史實(사실)이 있었을까?
만약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사실이라면 이를 어떻게 바로봐야하는 걸까?
이에대해 논해 보기로 합니다.
물론 이것은 '예정'이기 때문에 혹시나 '다른 내용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점을 양해바립니다.
문제는 '논리의 근거'가 되는 논거를 충분히 찾아, 고증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관심과 성원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