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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상해, 물건이 두 개로 보여...”
갑자기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어 휴대폰을 꺼내 눈 앞에서 흔들어보였다.
“이거 보여?”
“응 두 개로 보여, 하나는 제자리에, 그 위로 대각선으로 3센치쯤 위에 또 하나..”
부랴 국립암센터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자리에 안계셔서 전달을 부탁했더니 바로 전화가 왔다.
직접! 전화를 주셨다.
이것 저것 물어보시고 다음날 병원으로 오라고하셨다.
마침 방송을 위해 나와계시던 CBS 기독교방송 ‘수호천사’ 프로그램의
피디님이랑 같이 동행해서 병원을 갔다.
그러나 자고 나서 복시현상(두개로 보이는 것)이 줄었는지 검사에서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안심하고 방송용 인터뷰랑 모두마치고 다시 재활병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눈이 보이지 않고 눈동자가 돌아가지 않는다.
끈이라도 끊어진 것처럼 가운데서 풀려서 움직이지 않는다.
한쪽 눈만 위아래 돌아가고 오른쪽 눈동자는 정지해버렸다.
그러니 사물이나 사람이 하나는 수직 하나는 대각선, 사선으로 보인단다.
바로 앰브런스로 응급실로 출발했다.
어지러워 견딜수 없어 한쪽 눈을 거즈로 덮고 종이 반창고로 봉해버렸다.
응급실로 와서 보신 선생님도 난감해하시고 당황스러워 하신다.
다시 검사들이 줄을 이었다.
몇시간을 기다려 MRI, 엑스레이에서는 폐렴이 보인다고
호흡기내과 선생님을 데리고 와서 살피더니 조영제를 넣고 다시 CT촬영,
그리고 각종 검사를 위해 동맥에서 채혈 정맥에서 채혈, 그러기를 무려 여섯 번
방광염증이 보인다고 소변을 세 번 받아가고, 가래를 채취하라고 김나오는 피스를 입에 물리고 통을 8개나 주고간다, 산소포화도가 80대라 코에 산소호스를 끼우고...
정신이 없다.
선생님 말씀은 시신경으로 가는 혈관이 터지거나 막혔을 가능성이 있다 하신다.
뇌경색이나 뇌출혈 같은 현상이 뇌속 시신경 혈관에 생긴듯 하다는거다.
다시 척수액을 등에서 뽑는 작업을 시작했다.
척수액 속 단백질 수치가 두자리, 40대이하라야 정상인데
지난달 응급실 왔을 때 299 세자리를 기록해서 선생님이 쇼크를 받으셨다.
세자리는 지금까지 거쳐간 환자중에서 보기도 처음이라면서...
퇴원할 때 또 뽑은 척수액 단백질 수치도 조금 내려간 220정도!
그래서 다시 검사가 필요하단다.
이 모든 것들이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지도
편안해지지도 않는데 새로운 장기에 새로운 증상들이 또 나오다니...
난 그래도 이곳 김호진 선생님을 믿는다.
의술이나 경력은 두말할 것도 없고 환자를 한 명 한 명 모두 다른 경우로
아예 받아들이고 각자에게 맞는 치료법을 적용하시는 방법도 마음이 놓인다.
그리고 가장 신뢰하며 마음 편한 부분은 병의 증세만 살피는 것이 아니라
환자나 보호자의 마음상태, 의욕까지 기억하시고 배려를 해주신다.
병원비로 힘들어하는 형편을 감안해서 치료 일정을 조정해 주시는 거나
꼭 필요한 운동을 위해 바짝 다잡고 운동해야한다고 볼 때마다 말씀하시는 것도!
전에 있던 병원에서는 들어보지도 받아보지도 못하던 대접이다.
얼마나 냉랭하고 사무적이며 최종선고처럼 회복 가능성이 없다! 는 말을 들었는지...
이곳에서는 마음이 편안해지고 힘도 나고 감동을 느끼니 어떤 때는 미안하기도하다.
자꾸만 재발해서 예상 효과가 안나오고 머리 아프게 해드리는 것들이...
또 어떻게 되겠지
나보고 단번에 죽는 길과 야금야금 죽는 길 중에 선택하라면 어떤 길을 선택할까?
당연히 어느 쪽도 아니고 안 죽는 길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에겐 그런 선택의 기회도, 선택의 대상도 없다.
그러니 자살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없이 그냥 가는 수밖에...
5월5일 오후1시40분인가 기독교방송 ‘수호천사’ 프로그램에 집사람과
나의 소망들이 방송된다.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와 바램들이...
그때까지 집사람이 눈이 더 안나빠지져서 그 방송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집사람을 치료해 주시는 국립암센터 김호진 선생님의 마음과 시각을 소개하고 싶다.
아울러 선생님이 치료한 환자의 사례도 함께!
이 글을 보고 치료법과 병원을 찾는 분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잃어버린 희망과 의욕도 찾을 수 있으면 더욱 좋겠고,
우리가 놓쳐버린 치료시기로 얼마나 힘들게 되었는가를 돌아보면 답답하고
또 극진한 관심을 받지못하면서 치료받은 시간들을 떠올리면 또 아쉬기만 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 글을 집사람에게 읽어라고 복사를 해와서 주었다.
김호진 선생님이 같이 촬영 온 ‘수호천사’ 피디님에게 준 소식지에 있는 글이었다.
한쪽 눈이 말을 듣지 않고 왜그러는지,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돌아올 지 안 돌아올 지는 아무도 모르는 채 참담한 입원실에서 누워있는 아내에게...)
<The Window of Mutiple Sclerosis Vol3 No1에서 발췌>
‘다발성경화증 환자 수기: 다발성경화증과 함께 살아 간다는 것’
-국립암센터 김호진 선생님의 소개 글
임상의로서 의학을 연구하고 환자 진료를 시작한 지 벌써 십 수년이 지났고,
내 선배와 앞서간 많은 의학자들이 수많은 환자들의 삶을 놓고 고군분투해왔지만,
다발성경화증과 여러 탈수초질환들은 우리에게 여전히 많은 질문과 번민을 주는 질환으로 남아있다. 아직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지 못했고, 환자의 질병 진행과정에 따른 명확한 진단이 어려우며, 그에 따라 치료도 여전히 충분하지 못한 임상결과들에 의존해 있다.
평소의 건강한 일상을 갑자기 잃어버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으로 의사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찾아온 환자에게 희망을 주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척수염, 시신경염, 다발성경화증, 그리고 시신경척수염 등 환자들은 이미 한 개 이상의 진료과를 거쳐 혼란스러운 진단명을 듣고 말을 듣지 않는 몸 이상으로 많은 혼란 속에 지푸라기 같은 희망을 찾으러 다른 의사를 찾아 가는 일이 잦다.
이번 수기를 보내 준 환자는 한국으로 돌아온 나를 처음으로 찾아온 환자이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의미가 남다를 것이다. 하지만 나의 첫 환자는 그리 만만치가 않았다.
예쁜 눈을 가진 이 소녀는 그 예쁜 눈으로 나를 온전하게 볼 수도 혼자 힘으로 나에게 다가올 수도 없었다. 아직 미처 준비도 되지 않았던 내게 이 환자는 컴컴한 동굴 속에서 빛을 찾아 주고 싶게 하는 절박한 몸과 마음을 보여주던 환자였다.
승인된 치료제로 반응하지 않고 쓰러져가는 그녀에게 나는 의사의 책임으로 시행할 수 밖에 없는 2차, 3차의 치료제를 시도할 수 밖에 없었고, 다행히 환자는 조금씩 차도를 보였다.
우리 의사의 입장에서 과학의 언어로 환자를 이야기하지만 다발성경화증 환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질환은 신이 내려준 숙명일 수도 있고, 자신의 의지와 정신력으로 감당해야하는 모든 것일게다. 어려움 속에서도 늘 희망을 잃지 않고 마침내 굳은 의지로 그 희망을 이루어 낸 한 소녀의, 아니 이제는 어엿한 숙녀가 된 그녀의 가슴 뭉클한 이야기를 여기에 소개하고자한다.
[환자 글]
노스트라다무스가 종말을 예견하였던 1999년 그 해 봄.
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과 만나게 되었다. 중학교 3학년 학기 초, 아침자습시간에 올려다 본 칠판은 캄캄한 밬처럼 온통 어둠 뿐이었다. 친구의 도음으로 공중전화를 찾아 엄마에게 전화를 했고 내 인생의 시련이 될 첫마디를 전하게 되었다.
“엄마, 나 칠판이 안보여......”
학교를 조퇴하고 엄마와 함께 가까운 안과에서 진찰을 받았다. 하지만 좀 더 큰 병원으로 가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다시 동네 종합병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병원에서는 검사를 위해 입원을 해야 한다고 해 난 갑작스레 입원까지 하게 되었다. 병명도 모르는 상태에서 스테로이드 치료를 받았고 여러 가지 검사도 했다. 의사선생님께서 검사 결과를 보시며 원인이 백가지도 넘으며 병명 또한 알수 없다고 하셨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2주 정도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나의 눈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퇴원 후 일상으로 돌아가 학교도 다시 다니게 되었다. 그런데 두 달 정도 지나자 다시 눈앞이 캄캄해지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번엔 대학병원 안과에 찾아가게 되었다. 담당선생님께서는 눈의 문제가 아니라며 신경과로 가보라고 하셨다. 그제서야 난 단순히 눈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찾아간 신경과, 북적거리는 응급실안의 너무나도 고요한 수술실에서 난 담당 선생님으로부터 내 운명을 바꾸어놓을 병명을 듣게 되었다.
다.발.성.경.화.증. 첫 재발 후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어 기능이 100%로 돌아오지만 또 재발하면 90%까지만 회복되고, 이렇게 재발과 회복이 반복되면서 점차 기능이 떨어지고 결국엔 장애가 남는다고 하셨다. 정확한 진단을 받던 그날 숨을 쉴때마다 느껴지는 소름끼치게 찬 공기를 마시며 엄마와 난 그 냉혹한 수술실 안에서 한참을 부등켜 안고 죽음의 소식을 전해 들은 듯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그 후 두달에 한번 꼴로 재발하였고 입,퇴원을 반복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어릴적 나의 꿈은 멋진 군인이 되는 것이었다. 누구보다 건강하고 활동적이었던 나는 조용히 앉아서 공부하는 것보다는 교실밖의 활동을 좋아했고 체육이나 체력장 같은 데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반복되는 재발 앞에서는 나의 건강도 오래 버텨내지 못했고 어느새 난 시력을 거의 잃고 말았다. 그로 인해 학생 신분임에도 학교보다는 병원에 있는 날이 많았고 출석일수가 모자라 졸업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지만 선생님의 선처로 가까스로 고등학교는 졸업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린다는 말이 있다. 장애를 장애로만 가지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도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 나는 새로운 꿈을 안고 일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맹학교에 입학하여 다시 고등학생이 되었다.
유일한 다발성경화증 치료제 ‘인터페론’
보험도 되지 않아 경제적인 부담까지 감수하며 1개월에 200만원이나 하는 그 주사를 발병했던 때부터 맞기 시작했다. 맹학교 생활을 할때는 이틀에 한번 부모님께서 직접 찾아와 차 안 뒷좌석에 앉아 주사하셨다. 처음해보는 기숙사생활, 다섯 살이나 어린 친구들과의 학교 수업, 그리고 난생 처음 해보는 빨래까지 힘들긴 했지만 모든 것이 즐겁고 감사하기만 했다. 비록 시력은 많이 나빠졌지만 그렇다고 내 삶 자체가 나빠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난 여전히 꿈이 있었고 그 꿈을 위해 작은 보폭이지만 한걸음씩 나가고 있었다. 맹학교 입학 후 첫 중간고사를 치르게 되었다. 일반학교에서 배우는 과목뿐만 아니라 안마와 침술을 위한 ‘해부생리’와 ‘실기실습’까지, 의욕이 너무 앞서 무리하게 공부를 한 탓이었을까? 중간고사를 무사히 마치고 며칠 후 아침에 일어나려는데 내 다리가 다 시들어버린 배추처럼 축 쳐저있었다. 그 동안은 번갈아 가며 힘이 빠졌었는데 이번처럼 두 다리 모두가 힘이 빠진건 처음이었다. 결국 그 날 수업을 들으러 학교로 가는 대신 나는 병원 응급실로 향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회복이 되어 다시 학교로 돌아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절뚝거리면서라도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을거라고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상황은 내 마음과 같지 않았다. 휴학계를 내고 회복되어 걸을만 하면 다시 주저 앉고 또다시 회복되어 설 수 있을 만하면 다시금 바닥에 고꾸라져 버리는 일을 수차례 반복하면서 난 휠체어 신세를 져야만 했고, 결국 나의 휴학계는 자퇴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후 내 몸은 끝없이 추락했다. 하루 종일 누워지내며 엄마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다 커버린 아기가 되어버렸다. 온 몸이 재발로 뒤덮혀 있어 더 이상 틈이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에도 재발은 나도 모르는 틈까지 놓치지 않고 날 덮치고 있었다. 내 안에 존재하는 병으로 인해 나만 고통 받는 것은 아니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저층 아파트에 살 때 엄마는 자신보다 더 큰 딸을 등에 업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병원을 오가야했고, 매 끼니 땐 일일이 쟁반에 밥을 차려주어야만 했다. 나를 씻기는 일 또한 전쟁이나 다름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엄마의 모든 것을 필요로 했던 난 결국 엄마를 ‘나’라는 감옥 안에 가두어 놓고 말았다. 5년 이상 엄청난 비용을 들여가며 맞았던 주사도 그 비용과는 반비례하는지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고 난 두 달이 멀다하고 재발만 꾸준히 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맞았던 스테로이드 또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그 무렵 환우회 세미나에서 김호진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되었다. 다발성경화증 환자들을 많이 경험해보시고 한국에 오신 선생님은 내게 새로운 희망이었다. 벼랑 끝에 몰린 나에게 김호진 선생님께서 새로운 치료약을 알려주셨다. 하지만 그 약의 부작용을 듣고 나서 선뜻 결정하기가 쉽진 않았고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더 이상 물러 날 곳이 없었기에 피할수 없는 마지막 선택이 되었다. 항암제로도 사용되었다고 하던 그 약물은 치료 받는 내내 날 꽤나 힘들게 했다. 잦은 재발과 장애로 기초 체력이 없는데다 독한 주사 치료는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내 몸과 마음을 앙상하게 만들어버렸다.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던 힘겨운 치료를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그렇게도 두렵고 싫었던 재발을 막을 수 있을거라는 희망때문이었다. 다행히도 나의 믿음은 헛되지 않았고 그렇게 잦았던 재발이 일년에 두 번으로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그 정도도 훨씬 약했다. 새로운 치료를 받았던 일년 반 동안 재발이 줄어 들자 앉아서 생활하는 시간도 점차 길어졌다. 몇 번의 치료가 남아 있었지만 힘들어하는 내 모습이 안쓰러우신 엄마는 삶의 질을 위해 과감하게 다른 약으로 치료를 바꾸자고 하셨다. 그것이 지금 치료 받고 있는 표적치료제이다. 보험이 전혀 되지 않고 처음 시작할 때는 일주일 간격으로 한 달에 네 차례를 맞아야하기 때문에 큰 비용 부담이 있었지만 이번 도한 나에겐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표적치료제 치료를 시작한지 올해로 4년이 되었다. 4년 전 겨울 난 내 생애 마지막 재발을 마쳤고 이젠 재발이라는 단어에서 한없이 자유로워졌다.
물론 나에겐 여전히 장애가 남아 있다. 눈보다는 귀에 더 의존하고 나의 두 다리는 휠체어 두바퀴에 몸을 맡겨야 한다. 하지만 매일 누워서 누군가의 손을 빌려야만 했던 예전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것, 혼자서 화장실을 가는 것,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하는 소소한 변화들, 발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던 내가, 지금은 워커를 잡고 한 걸음씩 다리를 델 수 있다는 것에 기쁨과 감사함을 느낀다. 비록 회복 속도가 아주 미미해 지금 당장 보이진 않지만 언젠가는 이 미미함들이 차곡차곡 쌓여 평범한 일상을 선물해주리라 믿는다.
혼자 할 수 있는 일들이 하나씩 늘면서 그동안 잠시 밀어두었던 꿈도 다시 꺼내 볼 용기가 생겼다. 평범한 길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속도에 비하면 난 너무나 뒤쳐져 있지만 조급해 하진 않을 것이다. 새로운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에 가려고 공부도 하고 있다. 내가 가진 장애들로 인해 꿈으로 가는 길이 평탄치만은 않을 것이다. 필연적으로 부딪힐 수 밖에 없는 장벽들이 많다 해도 난 결코 쉽게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겐 힘겨운 병마와 싸워 얻어낸 용기가 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불행한 경험이라고 해서 무조건 나쁜 것 만은 아닌 것 같다. 그 속에서도 뭔가 배우고 얻는 게 있으니 말이다. 모진 비바람 덕분에 나의 뿌리는 땅속 깊숙이 더욱 강해질 수 있었고 나를 보며 미소 짓는 삶의 태양이 아직도 따스하게 비추기에 나의 미래가 더욱 기대되고 기다려진다. 나의 멋진 내일을 위해 지금부터 시작이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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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산넘어 산...안타깝습니다..힘 내시라는 말도 이제 하기가 그렇고..혼자 있을때 기도하겠습니다. 희망으로님 전말 안타깝네요 ..
아름다운 글에 마음이 저려 옵니다.희망과 사랑으로 살아가요.감사합니다.
안타깝고 마음만 아픕니다. 세실리아님 기도에 함께 하겠읍니다.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견딜 수 있는 만큼 고통을 주신다고 했던가요..
그만큼 희망으로님의 마음터가 단단하고 뿌리가 깊은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힘내시고..닉처럼 희망으로 잘 견디어내시라는 말씀만 드립니다..힘내세요..
김호진 선생님을 만나신 것이 참으로 힘이 많이되시겠습니다..
용기와 희망을 주시는 분...어둠의 터널 끝에 빛이 비추인다고
누군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힘 내세요.^*^
조카아이도 님과 같은 병명을 가지고 있는데 아직어린아인데 방법이 있는건지 진행을 막는건지 속시원한 답은 없으시던데......소식 감사합니다...
많은 병들이그렇지만 이병은특히나 빠른 치료를 필요로합니다.
그것도 제데로 알고 있고 몸사리기만 하는 의사보다 책임을 감수하고라도 치료를 해보려는 희생적인 의사의 치료가 더욱! ... 환우회에 접속하시면 더 많은 정보도 받을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