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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하느님께서 들어 주신다."
<요한 1서의 말씀 5,14-21>
사랑하는 여러분,
14 우리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15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
16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이는 죽을죄가 아닌 죄를 짓는 이들에게 해당됩니다.
죽을죄가 있는데, 그러한 죄 때문에 간구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17 모든 불의는 죄입니다.
그러나 죽을죄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
18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분께서 그를 지켜 주시어,
악마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19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
20 또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참되신 분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신 것도 압니다.
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분께서 참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21 자녀 여러분,
우상을 조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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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
"신랑 친구는 신랑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3,22-30>
그때에
2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다 땅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시며 세례를 주셨다.
23 요한도 살림에 가까운 애논에 물이 많아, 거기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가서 세례를 받았다.
24 그때는 요한이 감옥에 갇히기 전이었다.
25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정결례를 두고 말다툼이 벌어졌다.
26 그래서 그 제자들이 요한에게 가서 말하였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27 그러자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28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29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30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
<주어진 몫이 크던지 작던지>
등산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자주 맞닥트리게 되는 난감한 상황이 있습니다.
하산 길 끝에는 늘 수많은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습니다.
걸어 내려오다 보면 이집 저집에서 달려 나와
반갑고 환한 얼굴로 ‘따뜻한 방에서 요기 좀 하고 가시라’며 초대합니다.
간판들도 경쟁이 대단합니다.
‘전국 맛 자랑 방영된 집’ ‘KBS, MBC, SBS 방영된 집’
어떤 식당은 반대로 나갑니다.
‘KBS, MBC, SBS 아무데도 방영 안 된 집’
한 식당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 기억납니다.
그 식당은 이상하게 그날따라 파리만 날리고 있었습니다.
우리 밖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큰 식당이 썰렁했습니다.
주인이나 종업원들도 맥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버스에서 내린 백여 명이나 되는 단체 손님들이
바로 옆 식당으로 꾸역꾸역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식당 주인이나 종업원들의 얼굴에 갑자기 생기가 돌면서
갑자기 분위기가 사람 사는 것처럼 바뀌었습니다.
이웃 식당의 잘 나가는 모습을 본 주인아저씨의 얼굴은 그야말로 참혹하게 일그러졌습니다.
우리 집은 파리 날리고 있는데, 옆집은 사람들로 북적대니 마음이 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지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 심정이 똑같았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세례자 요한의 시대가 가고 예수님의 때가 도래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가고 있던 반면
예수님께서는 서서히 구원사 무대의 전면으로 나서기 시작합니다.
이런 최근의 상황 앞에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은근히 심기가 불편해지다 못해 속이 뒤집히기 시작했습니다.
한 때 그렇게 잘 나가던 스승 세례자 요한이었지만 요즘은 거의 손님이 떨어져 파리만 날리고 있는 반면,
예수님 가게 쪽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질투심과 분노로 가득 찬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이런 상황 앞에서 그저 묵묵부답인 스승의 태도가 못마땅해서 볼멘 목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그 때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에게 이런 아리송하고 묘한 말을 건넵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한때 잘 나가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세례자 요한과 그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안드레아를 비롯한 중요인사들이
속속 ‘세례자 요한 당’에 탈당계를 제출하고 ‘예수당’으로 입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은 완전히 찬밥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존재 의의가 급격히 쇠락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여기에 대해서 속수무책인 스승의 태도를 보고 크게 실망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스승 세례자 요한을 향해 “모든 사람이 그분에게 몰려가고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냥 보고만 계실 것입니까?”라고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순간 세례자 요한은 결정적인 말 한마디를 던집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
세례자 요한의 이 말은
자신의 쇠락도 예수님의 흥성함도 모두 다 하느님의 뜻이란 것입니다.
그간 자신이 주인공이었지만 이제 자신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무대의 새로운 주인공인 예수님께로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인류 구원사의 현장에서 사라지면서 남긴 ‘고별사’의 핵심은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좋은 것을 지녔다면
그 모든 것은 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달란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각자 자신의 몫을 지니고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어떤 사람은 100을 지니고 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50을, 어떤 사람은 20을, 어떤 사람은 0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애초부터 그렇게 주셨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남과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10밖에 안가지고 온 사람은 어쩔 수 없습니다.
지지든지 볶든지 하느님이 부여하신 그 10으로 겸손하게, 자족하며 한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100을 지니고 온 사람 역시 하느님이 주신 그 풍요로움에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겸손하게 그 100을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되돌릴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우리 각자 그릇의 크기는 제각각 다릅니다.
자신이 타고 난 그릇의 크기가 근본적으로 작은데
큰 그릇을 보면서 ‘왜 내 그릇은 이렇게 작나?’하고 한탄하면서 지낸다면
그 인생은 얼마나 고통스런 가시밭길이겠습니까?
자신이 타고난 그릇의 형태가 세모인데,
한평생 ‘왜 나는 네모가 아니고 세모인가?’하며 지낸다면 그 삶이 또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몫이 크던지 작던지 늘 감사하면서 기뻐하면서
그 몫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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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진시황릉의 병마용갱 박물관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것은
무릎을 꿇고 활을 쏘는 용사의 조각상이라고 합니다.
이 병마용은 왼쪽 다리를 꿇고 있고, 오른쪽 무릎은 땅에 닿아 있으며,
상반신은 왼쪽으로 약간 기울었는데, 형형한 눈빛은 왼쪽 전방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손은 오른쪽에서 화살을 당기고 있지요.
지금까지 출토된 병마용들은 대부분이 약간씩 훼손되었기 때문에 인공적인 복원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이 병마용은 완벽하게 보존되었으므로 전혀 손을 보지 않았다고 해요.
심지어 옷의 문양이나 머리카락의 결까지도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을 정도이니까요.
전문가들은 무릎을 꿇은 병마용이 원래의 모습을 완벽하게 지켜온 이유가
낮은 자세 덕분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이 병마용의 높이는 1.2미터로,
기립하고 있는 병마용들이 1.8~1.97미터에 이르는 것에 비하면 상당히 낮지요.
지하에 건설된 병마용갱은 천장이 무너지면
건장한 병마용들이 머리로 받치기 때문에 낮은 자세의 병마용은 덜 손상되었던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꿇은 자세의 병마용은 오른쪽 무릎과 두 발이 삼각형을 이루면서 몸을 지탱하고,
그 중심이 아래에 있기 때문에 상당히 안정적입니다.
당연히 두 발로 서 있는 병마용들에 비해 넘어지거나 깨질 확률이 아주 낮은 것입니다.
이렇게 무릎 꿇은 궁사 병마용의 모습은 우리의 삶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경쟁에서 이기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겸손한 마음가짐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이 어떤 나약함이나 위축된 모습처럼 평가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를 낮추는 것이 오히려 자기 자신을 살리는 현명함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도 이렇게 자기를 한없이 낮추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이 성경 말씀을 아마도 평생토록 자신의 삶 안에서 지키셨던 분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 누구도 세례자 요한을 못난 사람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일들이 헛일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겸손함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 실천하는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한 젊은 여인이 미술관에 그림을 감상하러 왔습니다.
미술관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여인은 꿇어앉은 채로 그림을 감상했습니다.
미술관 직원이 그토록 힘들게 그림을 감상하는 까닭을 물었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교사입니다.
내일 학생들을 데리고 미술품을 감상하러 올 텐데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이 미술품들이 어떻게 보일지 미리 알아두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눈높이를 낮추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눈높이를 낮추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죠.
우리들과 하나를 이루시기 위해서
하느님이신 분께서 인간의 육체를 취하시어 이 땅에 오셨고
이로써 우리와 눈높이를 맞추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도 이러한 겸손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그 겸손만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며,
자기를 살리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용기는 대단히 중요하다.
용기는 근육처럼 쓰면 쓸수록 강해진다."
(루스 고든)
- 인천교구 간석4동 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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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어제는 교수 신부님과 신학 세미나 하는데 다녀왔습니다.
특별히 스페인에서 시작된 한 공동체의 체험담을 듣고 왔습니다.
스페인어로 설명을 해 주어 자세히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제가 알아들은 바로는 이렇습니다.
한 사제가 있었는데 어떤 자매와 사랑에 빠졌답니다.
둘은 수도회와 같은 공동체를 창설하였습니다.
그 공동체는 남녀의 사랑을 죄악시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건전한 사랑을 할 수 있도록 놓아두는 분위기입니다.
사실 그 사랑 안에서 둘은 정화되고 성숙되어 간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서는 온전한 그리스도와 성모님처럼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각각의 숙소가 따로 있지만 기도와 식사 같은 것을 함께하며 지낸다고 합니다.
혹시 맘이 맞아 둘이 한 가정을 이루고 싶다면 집을 따로 마련해 주어서 살게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정결을 지키며 삽니다.
낮에는 각자가 학교, 은행, 병원 등에서 일을 하고
번 돈은 공동으로 모아 필요할 때마다 나누어 씁니다.
지금 그 창설자 사제는 돌아가셨고 공동 창설자 자매는 아직 살아계신데
나이가 드셨어도 매우 여성스럽게 꾸미고 다니신다고 했습니다.
만약 이런 공동체를 우리나라에서 설립하려면 어떤 반응이 일어날까요?
아무리 영적이라고 하지만 사제가 한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면 신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러면서 동시에 작년까지 우리를 가르치시던 한 교수신부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올해부터 몸이 안 좋아 가르치시지 않는데
알고 보니 가정을 꾸렸고 벌써 애가 둘씩이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겉보기에는 정통 교리를 매우 중시하고 매우 친절했던 사제다운 사제였습니다.
또 주위에도 적지 않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이런 문제로 옷을 벗고는 합니다.
옛날에는 신학생이 길가에서 여자와 단 둘이 이야기만 하더라도 퇴학을 당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신부님은 어머니가 밥상을 들고 들어오면
뒤돌아 앉아 있다가 나가시면 돌아 앉아 식사를 하셨다고 합니다.
어머니를 보는 것까지 정결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도 성교육 시간이 있었는데
시작 전에 신부님이 교실에 성수를 뿌리고 그런 이야기들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성이 그렇게 죄악시 되었던 것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이후였습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성적인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서로를 가리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창조 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모상을 본 따 만드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관계인 것처럼
사람도 남자와 여자가 성령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사랑을 할 수 있어야 참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께로 몰려가는 것을 보고 요한에게 그것을 알려줍니다.
요한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교회는 신부이고 그리스도는 신랑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은
신랑이 사랑하는 신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랑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하신 것은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바로 남녀 간의 구체적이고 온전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하시는 것입니다.
현 교황님의 첫 번째 교서인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에서 베네딕도 교황께서는
“세상에는 많은 사랑이 존재하지만 사랑의 원형은 바로 남녀의 사랑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신학교에서 그런 사랑 자체를 죄악시 하고 있기에
온전히 사랑할 수 있도록 성숙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사제가 되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갑자기 좋아지는 사람이 생기게 되면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게 되어 많은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결혼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목숨을 바치신 것처럼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단 한 사람도 그렇게 사랑하고 있지 못하다면
다른 사람과 또 하느님은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꼭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바로 주님의 사랑을 깨닫는 분들도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더라도 가장 원초적인 그 관계 안에서 참 사랑을 할 수 없다면 그것이 더 큰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자신 있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요한 4,7)
이런 열린 사랑의 마음이 자신을 숨기며 정결한 척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정결한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도 구체적인 사랑 안에서 정화되고 성숙되어져 나가야 할 것입니다.
- 로마 유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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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
슬기로운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를 여러 기준에서 얘기할 수 있지만
슬기로운 사람 중의 슬기로운 사람은 아마 자기 주제를 정확히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슬기로운 사람은 가장 겸손한 사람이고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은 가장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무엇보다도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은
자기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일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래로 인간은 끊임없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해왔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처럼 모든 선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 하고 자기 것인 양 착각하였고
모든 것을 자기 좋을 대로 하려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요한은 이 점에 있어서 아주 명확하게 선언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가 당시 누렸던 명성을 생각할 때, 아무 것도 아닌 우리도 신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과 비교할 때,
요한의 이런 태도는 대단히 훌륭한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요한은 그에 따라 처신을 잘 할 수 있었는데
이것을 우리는 세 가지 복음적 권고의 차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 첫째로 가난했습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고 그는 말합니다.
참으로 우리는 가진 것이 없었던 것은 물론, 존재 자체가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없는 나를 있게 하시고
부모를 주시고, 형제를 주시고, 성격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머리를 주시고, 의지를 주시고, 그리고 재물도 주시고, 정말 다 주셨습니다.
뭘 가지고 내 것이라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요한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어서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뿐이다.”
고 얘기합니다.
이는 성자께서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다.”
고 하신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요한이나 우리 또한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파견된 Missionary들이고
하늘의 Missionary인 한 내 좋을 대로 할 수 없고
주어진 Mission을 수행해야 하는 순종의 사람들입니다.
다음으로 요한은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고 얘기합니다.
우리는 종종 사람을 놓고 하느님과 경쟁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자식인데 내 자식으로 만들려 하고
그리스도의 신부인데 내 아내로 만들려 합니다.
아내가 하느님을 자기보다 더 사랑하기에
그것이 싫어서 하느님을 믿지 않는 남편들을 종종 봅니다.
하느님을 시기 질투하는 것이지요.
오늘 요한은 자기한테 오던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을 시기 질투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기뻐하며
주님을 따르는 무리는 더 커져야 하고 자기를 따르는 무리는 작아져야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신랑의 친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친구의 색시를 넘보지 않는 정결함의 본보기입니다.
-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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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복 신부님의 묵상글 *
<사랑이 사랑을 만드는 세상>
2년 전 저를 참으로 사랑하셨고 이 땅의 모든 사제를 위하여 특별한 지향을 가지고 평생을 기도하던 고모 수녀님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연세가 드시고 얻은 폐암으로 1년여 투병 생활을 하다가 하느님께 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헤어짐이나 이별의 고통보다는 아름답고 행복한 선종 안에서 감사의 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선종하시기 일주일 전 마지막으로 조카 신부인 저에게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청하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수녀님께서는 모든 것이 고맙고 감사하다시며,
세상에서 수녀로 사는 동안 그 어떠한 아쉬움도 없이 살게 해주신 예수님께 감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동안에 당신과 함께 생활한 수도회 장상 수녀님들과 동료 수녀님들, 후배 수녀님들에게
모든 공을 돌리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고모 수녀님과 함께해 주셨던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수녀회 모든 수녀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많은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를 희망하고,
후손들한테는 명예롭고 위대한 조상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물론 후손들에게 훌륭한 업적을 남겨 존경받는 위대한 인물로 남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그러한 일을 맡겨주시고 일을 성취할 수 있도록 섭리하신 하느님보다
자신의 이름이 앞서 불려서는 안 될 일입니다.
더욱이 공적으로 교회를 위해 부름을 받고 이에 응답한 교회 봉사자들은
더 많은 하느님의 은총을 부여받은 사람들이기에
하느님 앞에 더 겸손하고 자신을 낮추어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요한 세례자처럼 예수님을 올바로 알아뵙고 예수님의 앞길을 열어드렸듯이,
우리도 우리를 통하여 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뜻을 잘 헤아리며 살아야겠습니다.
오늘따라 참으로 아름답고 겸손하게 한 생을 마무리하신 고모 수녀님,
당신을 기억하기보다 예수님의 사랑을 당신 안에서 기억하게 되기를 바라셨던 아름다운 겸손을 배우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고모 수녀님,
천국에서 지켜봐 주십시오.
- 수원교구 어농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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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그분은 커지셔야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오늘 복음의 주님과 세례자 요한의 관계가 바로 그렇습니다.
욕심이 없어 하늘의 뜻을 알았고
주님과의 관계에서 참 자기를 안 다음 세례자 요한의 말씀은우리 모두 평생 영성 수련의 목표입니다.
아멘.
- 성베네딕도수도회 성요셉수도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