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7일 [사순 제5주일]
요한 12,20-33
인생은 어차피 목숨을 담보로 한 투자임을 알면 인생이 단순해진다
‘한국 교회사 열전’에 따르면, 정 쁘로다시오는 개성의 명문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와 함께 서울로 내려와 신분을 감추고 새끼 꼬는 일을 하면서 미천하게 살았습니다.
30세경에 입교하여 부인과 함께 홍살문 근처에서 성사를 보기 위해 서울로 모여드는 교우들을 돌보았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타인의 밀고로 부인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배교를
강요하는 혹독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형벌과 형관의 감언이설로 배교하여 석방되었지만, 바로 후회하고 뉘우치며 다시 형조에 달려가 배교를 취소하고 죽기를 청합니다.
형조의 문지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굽히지 않고 형조판서가 다니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계속 조르는 바람에 결국 41세의 나이로 순교합니다.
가끔 이런 순교자들 이야기를 들으면 마치 죽고 싶어서, 죽기 위해 나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주식 시장에서 수익에 확실한 때에 돈을 빌려 가면서까지 투자하려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예수님도 비슷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예수님은 밀알 하나로 상징되는 당신 목숨을 더 많은 생명을 얻기 위해 투자하셨습니다.
그 투자처는 아버지였습니다.
투자 방식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는 인간이 어쩔 수 없는 끊임없는 투자자임을 증명합니다.
유튜브에서 보니 자기가 키운 하마에게 물려 죽은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하마를 자신이 키웠으니 하마가 자기를 물지는 않으리라고 믿었습니다.
또 다른 것에서 보니 개가 호랑이 새끼들을 젖 먹여 키웠는데 그 호랑이들이 커서 어미 개를
지켜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개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개가 되었습니다.
자기 주위에 호랑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투자하지 않고 가만히 두면 어떨까요? 썩습니다. 결국 인간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습니다.
그냥 놔두는 것도 일종의 투자입니다.
영화 ‘인투 더 와일드’(2007)는 맥캔들리스라는
실제 인물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무엇이든 잘해야 한다는 부모의 기대에 지쳐있었습니다.
사실 그는 아버지의 외도로 생기게 된 아들입니다.
그는 대학까지 졸업해 주고 가진 돈 모두를 기부하고 자유를 찾아 미국을 횡단하여 알래스카까지 갑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그의 목적지는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은 그에게 자유였습니다.
그러나 알래스카에 갇혀 “행복은 함께 나눌 때만 현실이 된다.” 라는 글을 남기고 버스 안에서 외로이 생을 마감합니다.
맥캔들리스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냥 자유로워지고 싶었습니다.
그래도 자유는 없었습니다.
외롭기만 했고 관계를 위해서는 일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인간은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투자해야 하는 운명에 놓여있습니다.
이것을 알면 인생이 쉬워집니다.
나의 밀알을 사랑이라는 땅에 묻어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투자는 언제나 손실이 날까 두렵게 합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액을 한꺼번에 투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당신을 위해 버린 것의 100배를 받고 죽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먼저 주일학교 교사를 하며, 청년 레지오를 하며 봉사하지 않았다면 사랑에서 오는 생명력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제가 되고 온전히 생을 봉헌하기를 결심하기까지 우리는 충분히 시험해 볼 기회가 있습니다.
어차피 인생은 투자라고 생각하고 내가 투자하는 생명에 가장 많은 열매가 맺히게 하는 대상에 투자합시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투자합니다.
투자법을 압니다.
어른이 되었다면 어디에 투자해야 할까요? 역시 아버지가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은 아드님이 당신을 위해 투자하게 함으로써 그 열매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를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제 우리 결단만 남았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17일 [사순 제5주일]
복음: 요한 12,20-33
예수님의 운명은 곧 우리들의 운명입니다!
유다인들의 대축제이자 큰 명절이었던 과월절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3년여 에 걸친 공적 활동을
마무리 지으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수난-죽음-영광의 때’가 이르렀음을 아신 예수님의 머릿속은 백 가지 생각이 교차되며, 무척이나 산란했을 것입니다.
오래전부터 당신만을 위해 기획되고 준비된, 끔찍하고 처절한 수난과 죽음의 독무대 위로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마음이 괴로웠을까요?
그러나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세상과 인류의 구원이라는 큰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단 한 발자국도 회피하거나 물러설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을 또한 잘 알고 있으셨으니, 얼마나 마음이 심란했을까요?
뿐만아니라 아직도 갈 길이 먼 제자단과 당신의 사랑하는 양떼를 남겨두고 떠나셔야 한다는 생각에, 얼마나 걱정이 앞섰을까요?
참으로 두렵고 찹찹한 마음을 달랠 길 없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애써 부정적인 감정들을 떨치십니다.
호의적이지 않은 모든 상황들을 모두 아버지께 맡겨드리며, 일반 군중들을 위한 마지막 강연을 펼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이제 지상에서의 과제를 120펴센트 완수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앞에 남아 있는 마지막 관문인
수난과 죽음의 길을 떠나시면서, 우리에게 남기시는 말씀의 핵심 키워드는 ‘밀알 하나’였습니다.
내어놓음이나 희생, 변화나 쇄신, 결국 죽음을 거부하는 밀알은 언제까지나 그저 한 알 밀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기꺼이 자아를 포기하고 길을 떠날 때,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의 성장과 변화, 열매와 발전을 희망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이비 교주들이나 이단자들이 크게 강조하는 바가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고통을 건너뛰는 행복입니다.
희생이나 헌신없는 성공입니다. 말도 안되는 기적의 연출입니다.
십자가 길 대신 꽃길 보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광의 길에 참여하기 위해 수난과 죽음은 필수라고 강조하십니다.
두렵고 떨렸지만, 점점 다가오는 죽음을 용감하게 수용하십니다.
내적인 갈등이 커질 때마다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께 의탁하며, 언젠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드러날 아버지의 영광을 꿈꾸며, 얼마 남아있지 않은 당신의 여정을 힘차게 걸어가십니다.
제자인 우리들 역시, 스승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열심히 따라 걸어가야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한 배에 승선한 운명 공동체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운명은 곧 우리들의 운명입니다.
우리도 두려움을 떨치고 그분께서 선택하신 수난과 죽음의 길, 그러나 영광의 길을 기꺼이 선택해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5주일 강론>
(2024. 3. 17.)(요한 12,20-33)
<‘십자가’가 아니라 ‘부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24-26).”
‘밀알 하나를 땅에 심는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뜻하고, ‘많은 열매’는 ‘많은 사람들의 구원’을 뜻합니다.
<구원에 대해서 관심이 없거나 복음을 안 믿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일은 많은 열매를 얻으려고 밀알 하나를 심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밀알을 땅에 심는 일’은 그 밀알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만 죽은 것처럼 보일 뿐이고,
밀알은 땅 속에서도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는 밀알에서만 싹이 나오는 법입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만 죽음으로 보이는 일이었을 뿐이고, 실제로는 부활로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사도 2,23-24).”
“(다윗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견하며 ‘그분은 저승에 버려지지 않으시고, 그분의 육신은 죽음의 나라를 보지 않았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사도 2,31-32).”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아침에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을 때, 천사들은 그들에게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루카 24,5-6).”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허망하게 돌아가신 그 예수님이 아니라, 그렇게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 또 부활하셔서 늘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뵙고 싶다면 십자가를 바라보면 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우리는 우리 안에서, 또는 우리 삶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특히 이웃 안에서, 또 이웃과 나누는 사랑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신앙생활의 목적지가 아닙니다.
부활, 생명, 구원이 신앙생활의 목적지이고,
십자가는 그 목적지까지 가는 방법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십자가에서 비롯된 신앙이 아니라 부활에서 비롯된 신앙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우리를 살리려고(구원하려고) 당신 자신이 하나의 밀알이 되신 일이기 때문에, 그 일은 분명히 ‘희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살려고(구원받으려고) 스스로 밀알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희생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희생이란 남을 위한 일입니다.
나의 십자가는 내가 살자고 나 자신이 스스로 지는 것이기 때문에 희생이 아니고, 살고 싶다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이고 허무한 것들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려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그런 것들을 버리는 일은 희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누구나 해야 하는 노력입니다.
<운동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싶어서
열심히 운동하는 것을 희생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1코린 9,25).”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애타게
기다린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2티모 4,7-8).”
바오로 사도처럼 ‘나는 달릴 길을 다 달렸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신앙인은 복된 사람입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라는 말씀은,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가지려고 욕심을 부렸던 그것들과 함께 허무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은 “누구든지 내가 주는 구원을 얻으려면”이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한다.”입니다.
예수님을 섬긴다는 말은 예수님만을 주님으로 섬긴다는 뜻이고, 예수님만을 주님으로 섬긴다는 말은 예수님의 가르침만을 진리로 믿고 받아들여서 실천하는 인생을 산다는 뜻입니다.
‘내가 있는 곳’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여기서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그를 영예롭게 해 주실 것이다.”, 즉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고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해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