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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자의 복(시133:1-3)-2025.3.23
본 시편은 매우 짧은 시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강렬한 메시지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연합이 필요할 때 자주 인용하는 시이기도 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지 시편 기자는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연대의식과 유대감을 고취시켜 주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12지파로 구성되어 있어 하나되기가 쉽지 않은 구조입니다. 야곱이 4명의 여인들을 통해 낳은 아들들이 12지파를 이룹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친모를 중심으로 연합하기 쉽고 다른 지파들과는 갈등과 대립이 될 수 있는 취약한 구조를 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자자손손 단일민족을 자랑하고 살아온 민족입니다. 물론 글로벌 시대를 맞아 지금은 그런 분위기가 많이 희석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단일민족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에서도 지역별로 나누어지면 연합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특히 선거철만 되면 동서로 나뉘어지고, 좌우로 쪼개집니다. 그래서 연합은 꿈도 못 꿉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면 매우 심각합니다. 연합과 통일이 어렵다는 말이지요. 물론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나 갈등이나 대립이 있기 마련입니다. 한집에 사는 부부도 하나 되기가 쉽지 않거든요. 하물며 이스라엘의 12지파가 연합하여 유대감을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 시편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을 하나님이 선하고 아름답게 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12지파가 연합하여 동거하기가 가장 쉬울 때가 언제일까요? 공동의 목표와 목적을 가질 때입니다. 그때가 성전에 올라갈 때입니다. 본 시편은 성전에 올라갈 때 부르는 노래입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일 년에 세 번은 의무적으로 성전에 올라와야 했습니다. 유월절과 오순절과 초막절은 성전에 올라가서 절기를 지켜야 했지요. 비록 그들이 어디에 흩어져 살지라도 일 년에 세 번은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와야 했던 것입니다.
평상시는 그들이 흩어져 살고 있는 지역이나 나라에서 그들만의 특색이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에 올라갈 때만큼은 그들의 생각이 하나가 되고, 목적이 하나가 되었던 것이지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거기에 다른 생각이나 사상을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성전에 올라가서 자기 목소리를 내려는 자도 없고, 자기들의 뜻을 관철 시키려는 자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비록 그들이 살고 있던 현장에서 그들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살았을지라도 성전에 올라갈 때만큼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로 결집해야 했던 것이지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말입니다.
12지파에 속한 그들은 언약공동체 안에서 형제였습니다. 연합과 동거가 충분히 가능했던 것이지요. 하나님이 보실 때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상상해 보십시오. 육신의 형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다른 생각이나 사상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부모 앞에서 형제들이 연합하고 동거하는 모습이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지 말입니다. 부모는 그런 모습만 봐도 기쁘고 행복합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던 것이지요. 그들이 연합하고 동거하는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아름다웠다는 말입니다.
시인은 그 아름다운 모습을 두 가지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대제사장의 임직식 때 붓는 기름 부으심을 비유로 설명하고, 다른 하나는 헐몬산의 이슬을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름과 이슬을 형제 연합과 동거함의 비유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름이나 이슬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소재였던 것이지요.
(1) 형제 연합은 보배로운 기름과 같습니다
아론은 초대 대제사장으로 기름 부으심을 받았습니다. 당시 기름 부으심이 필요한 자는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성경에는 기름의 용도나 의미가 몇 가지 있습니다. 기름은 주로 치유와 관유로 사용되었습니다. 상처를 치료하는 것으로 사용되었고(눅10:34,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관유를 만들 때도 사용했습니다. 관유를 만드는 주재료는 올리브유입니다. 올리브유에 몰약과 창포와 육계와 계피를 혼합하여 관유를 만듭니다(출30:22-25). 관유는 대제사장과 성물에 바르는 거룩함의 상징이었습니다. 성화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를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라고 말합니다.
본 시편 기자는 형제 연합과 동거를 아론이 기름 부음을 받는 것을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론이 머리에 보배로운 기름 부으심을 받을 때 아론의 머리를 타고 내려와 수염을 적십니다. 수염을 타고 흐르던 기름이 다시 아론의 가슴으로 흘러 내리겠지요. 당시 대제사장 아론이 입고 있는 에봇 전대에는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흉패가 부착되어 있었거든요. 이는 아론의 보배로운 기름이 이스라엘 12지파를 적신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대제사장의 기름 부으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12지파가 기름 부으심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기름 부으심이 없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이스라엘됨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족속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는 자라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 아론의 기름 부으심으로 이스라엘 12지파가 모두 기름 부으심을 받은 것이지요. 대제사장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4장14절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라고 말입니다.
시편 기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론의 대제사장 직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아론은 사람 가운데 취함을 받은 대제사장입니다(히5:1).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나신 하나님의 대제사장이신 것이지요(히5:10). 그래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형제 연합과 동거의 아름다움을 아론의 대제사장 직분을 통한 기름부으심으로 소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머무르면 안됩니다.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기름 부으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말입니다.
다시 말해 보배로운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는 형제간에 연합하고 동거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불평이나 갈등이 없이 말입니다. 이유는 에베소서4장5절의 말씀처럼,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며, 세례도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하나이시기 때문이지요. 성령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연합하고 동거한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선하고 아름다워서 연합하고 동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부어진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이라는 말이지요.
다시 말해, 기름 부으심으로 말미암아 형제가 연합하고, 동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말이지요. 그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연합은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극단적인 대치 상황도 어느 한편의 양보로 종식되지 않습니다. 솔직히 어느 한편의 승리로 종결될 문제도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성령이 강권적으로 역사하셔야 형제 연합이 가능하고 동거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양 진영의 사상이나 정치적인 논리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니까 꼬이고 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좌는 우를 향하여 극우라고 폄하하고, 우는 좌를 향하여 극좌라고 폄하하는 것입니다. 이 대립은 절대 사람이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정치 지도자가 나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인들은 팬덤을 가지고 정치합니다. 팬덤은 연합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지도자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우리는 성령의 하나됨을 위하여 기도하고, 성령이 하나되게 하심을 좇아 연합해야 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없는 연합은 불완전한 연합이요, 불편한 동거입니다.
(2) 형제 연합은 헐몬산의 이슬과 같습니다
헐몬산은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한 해발 3천 미터에 육박하는 산입니다. 그 정상은 만년설이 쌓여 있습니다. 그런데 만년설이 봄이 되면 녹으면서 산을 타고 갈릴리 호수를 지나 요단강을 타고 내려옵니다. 이스라엘은 비가 별로 오지 않습니다. 헐몬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의 일년 강수량은 1,300mm에서 1,500mm 정도입니다. 그것도 주로 여름철 장마기간에 내립니다. 그런데 헐몬산은 강수량은 적으나 이슬이 풍성합니다. 헐몬산의 이슬이 연간 1,300mm 정도라고 합니다. 헐몬산에 이슬이 많은 것은 지중해로부터 불어오는 해풍이 헐몬산의 만년설의 낮은 기온을 만나 수분이 급격히 냉각되면서 이슬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헐몬산을 타고 이스라엘의 젖줄인 요단강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실제 성지순례를 가서 헐몬산을 먼발치에서 바라보았습니다. 이스라엘과 레바논 국경에 위치하고 있어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았던 것이지요. 정상에 하얀 눈이 쌓여 있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헐몬산의 이슬을 보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신명기33장13절을 통해 하늘의 보물을 이슬이라고 소개합니다. 결국 그 이슬이 이스라엘의 수자원이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신묘막측하신 비밀이고 은혜입니다.
헐몬산에서 흘러내린 이슬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릅니다. 헐몬산의 밑으로 내려가면 바니아스라는 폭포가 있는데 굉장한 물줄기를 자랑하더라구요. 폭포가 아주 힘있고 시원하게 쏱아졌습니다. 헐몬산을 통해 내려오는 이슬이 주는 축복이었던 것이지요. 그 물이 북쪽 헐몬산에서 남쪽 시온산까지 흘러내린다는 것입니다. 시온산은 예루살렘 성벽 밖에 있는 산으로 헐몬산보다는 4배 정도 낮은 산입니다. 해발 700미터의 그리 높지 않는 산입니다. 그러나 그 시온산까지 헐몬산의 이슬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전역을 헐몬산의 이슬로 덮는 것이지요. 이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이스라엘이 연합하고 동거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3) 형제가 연합하고 동거하는 자에게는 영생의 복이 임합니다
하나님은 형제가 연합하고 동거하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 복이 영생의 복입니다. 영생의 복은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시는 복이지요. 영생의 복은 하나님의 자녀만 받을 수 있는 복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기름 부으심이나 헐몬산의 이슬이 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기름 부으심이나 이슬은 모두 다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기름 부으심이 임할 것이요, 이슬 같은 은혜가 공급될 것임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성령은 예수를 증거하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나를 성전 삼고 오셔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함입니다(살전5:10).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살려면 반드시 우리 죄가 속죄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죄가 없어야 주님이 들어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주님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어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속죄하신 것입니다(히9:12). 그리고 그 예수가 왕권을 가지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과 함께 그리스도로, 영으로 오신 것입니다(히9:28). 그 예수가 나를 성전 삼으시고 심령 안에 왕으로, 주인으로, 전부로 들어오셔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여 예수님과 한 생명이 되어 예수님은 머리가 되고 나는 몸이 되어 예수님이 주는 마음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믿는 자는 영생의 복을 받습니다.
본 시편 기자는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3절). 믿는 자가 받을 최고의 복은 영생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영생의 복은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고 아름다우면 그런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시겠습니까? 그러면 단순하게 믿음의 지체들끼리 연합하고 동거하면 영생의 복을 주신다는 말씀일까요? 이른바 믿는 자들끼리 연합하여 동거하면 영생의 복이 주어지냐는 말입니다.
단순히 수평적인 관계에서의 형제 연합이나 동거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 연합이나 동거함의 수직적인 의미도 있거든요. 믿음은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요, 수평적으로는 사람들과의 관계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자들 중에도 수직적인 관계만 치중하는 자가 있고, 수평적 관계만 치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건강한 믿음은 두 가지 측면의 관계를 다 잘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도 좋고, 사람들과의 수평적인 관계도 좋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들 가운데 더러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좋아 보이는데 사람들과의 관계가 엉망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 믿음은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반대로 사람들과의 관계는 좋은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안 좋은 자들도 있습니다. 그런 자는 전혀 믿음이 없는 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나 사람들과의 관계가 다 좋아야 합니다. 그런 차원으로 본 시편을 접근해야 합니다. 단순하게 사람들과의 수평적인 연합이나 동거함만 염두해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를 고려하고 있음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이요, 그분과의 동거입니다. 주님과 연합함으로 생명을 얻고, 그분과 동거함으로 생명을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장자입니다. 때문에 로마서8장29절은 예수님에 대하여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믿는 형제들의 장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연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또한 그분과 동거하지 않으면 생명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요14:6).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만이 구원이요, 그 길만이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5장12절에서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으려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을 해야 합니다. 연합은 하나됨을 의미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지속적인 관계는 동거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동거함은 그분 안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15장은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요15:4). 그래야 열매를 많이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경고하십니다(요15:5). 그분과 연합하지 않는 자, 그분과 동거하지 않는 자는 영생의 복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영생의 복을 얻을 자는 주님과 연합하는 자요,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동거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에게 영생의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는지 여부를 인정하고 인식해야 합니다. 인정함과 인식함은 다릅니다. 인정은 받아들이는 것이고, 인식은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의 복을 받은 자로 인정을 받았을지라도, 우리 스스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인정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가능하지만, 인식은 그리스도와의 동거를 통해 확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고 동거하는 기쁨을 누리며 사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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