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 문화재에 관심이 크게 늘고 있어 문화재 현장이 오락프로그램에도 소개가 되는 등 한결 친근해진 이미지이다. 더구나 문화재청이 ‘문화재 프로그램의 품격은 높게, 문턱은 낮게’를 표방하며 문화유산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어 문화유산의 활용은 전국적으로 확산중에 있다.
휴일을 이용하여 나들이겸 문화재탐방을 하려고 계획하다보면 시간과 비용 문제가 발생한다. 그때 내가 살고 있는 주변을 활용해보기를 적극 추천한다.
우리들은 종종 다른 지역의 문화재를 보러 가는 것에는 시간과 비용을 많이 들이면서 내가 살고 있는 곳의 문화재를 소개하면 시시하다고 여기거나, 나중에 보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제부터는 가까이에 있는 것에도 관심을 가져볼까?
특히 수원에는 세계문화유산 화성이 있으니 활용가치가 더 높다. 수원화성이 5.7km의 성이라고 만만하게 여기지 마시길. 곳곳에 있는 시설물들을 보다보면 하루가 짧게 여겨진다. 그리고 수원에 화성만 있는 것이 아니다. 화성을 중심으로 수원 곳곳에 볼거리들이 많이 있다.
바로 지역문화유산!
이번에는 그런 문화재에 관심을 높이기 위해 파장동에 위치한 지지대고개와 괴목정교, 미륵당, 노송지대를 추천한다.
지지대(遲遲臺) 고개
지지대 고개는 수원에서 서울 쪽으로 갈 때 의왕시와 경계가 되는 작은 고개이다.
지금은 1번 국도가 왕복 8차선으로 확장되었으나, 그 옆으로 옛길이 일부 남아 있다.
예전엔 사근현(沙斤峴)이라고 불렀던 것을 미륵 고개라고 불렀으며, 정조때 지지대 고개라고 고쳐 부르게 됐다. 정조는 수원으로 행차를 할 때 한강을 건너 과천을 경유하여 지지대고개를 넘어 행궁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과천 대신 시흥과 안양을 거쳐 지지대로 가는 새로운 길을 냈다. 시흥길은 과천길에 비해 교량이 적고 고개도 낮아 원행에 어려움이 적다는 이유에서였다.
새 길을 내는 논의는 〈정조실록〉 18년(1794) 4월 2일에 보인다.
경기감사 서용보가 과천은 남태령을 넘나드는 고갯길이 험하고 다리도 많아 번거롭지만, 시흥을 거쳐 가는 길은 지대가 평탄하고 길이 평평하며 넓으니 이 길로 정하자고 건의하였다. 이듬해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원행에 나설 때 어머니를 편안히 모시기 위한 정조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고개에 오르면 멀리 화산 쪽에 있는 부친(사도 세자 : 후에 장조로 추존)의 능소가 보이는 데도 능까지 가는 시간이 답답하기 이를데 없어
"왜 이렇게 더딘가(遲遲)?“
고 재촉을 하였으며,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환궁을 할 때는 이 고개의 마루턱에 어가를 멈추어 서게 하고 뒤돌아서서 오랫동안 부친의 묘역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또 어가에 올라서도 화산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을 돌리지 않아 행차가 자꾸 늦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사연 때문에 고개 이름이 더딜 지(遲)자가 들어간 지지대가 되었다고 한다.
공자가 조국인 노나라를 떠나면서 한 말인 ‘지지하도다 나의 발걸음이여!’에서 지지(遲遲)를 따다가 붙였다고 한다.
이 고개 위에는 정조의 효행을 기념하여 순조 때 화성어사 신현의 건의로 지지대비(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24호)를 건립되어 비각에 모셔져 있다.
계단 아래로 내려 오면 하마비가 있다. 하마비와 지지대비에는 총탄 자국이 선연한데, 바로 이곳이 한국전쟁 때의 격전지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고갯길이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승용차나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넘지만 정조의 아쉬운 마음을 헤아리며 가노라니 고갯길임을 알 수 있었다.
작년에 수원지기학교 청소년지킴이 매홀아띠와 띠앗자리 동아리가 이곳에서 모니터링활동과 정화활동을 하였다. 특히 띠앗자리는 하마비 주변의 칡넝쿨을 없애느라 힘을 써야만 했다. 벌레들을 보며 기겁해하면서도 끝까지 정화활동을 한 멋진 지킴이들이다.
지지대고개를 넘으면 의왕시 고촌동에 있는 사근행궁으로 이어진다.
이곳에서부터 수원을 향해 가는 길은 지난해 경기도에서 '삼남길'을 조성해 표지판을 두었다. 다음 기회에는 삼남길을 걸어보리라.
미륵당(彌勒堂)
지지대비각 길 건너편이 바로 옛 길이다. 지지대라는 이름 전에 불린 이름이 미륵고개-미륵뎅이-였다. 고개를 넘어가는 길에 미륵부처님이 있어서 붙은 이름이리라.
길 끝자락에 프랑스참전비가 있고 그 아래에 정조대왕 동상이 있다.
옛 길을 따라 수원방향으로 내려 오다보면 버스 회차장이 있고 그 주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다리인지 구분이 안가는 다리를 만난다. 근처에는 괴목정(槐木亭)이란 정자가 있어서 정자의 이름을 딴 다리가 괴목정교이다. 괴목정교가 세워지기 전 이곳에는 통행세를 받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3명이 이틀에 한번 꼴로 한 냥의 통행세를 받았다고 해서 한냥골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그렇게 받은 돈을 당시 파장동에 살고 있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하니 의적이라고 해야 할까?
당시 이곳에 세워져 있던 괴목정교(槐木亭橋) 표석은 2008년에 개관한 수원역사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그 아래로 미륵당이 있다. 조선 중기에 만든 돌미륵이 모셔져있는데 문은 잠겨있다. 당호는 1960년 당집을 보수하면서 법화당(法華堂)으로 바꾸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임진왜란 때 조선군의 행방을 쫓던 왜군들이 의왕 갈미미륵에게 물어보았다. 미륵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왜군은 다시 조선군의 뒤를 쫓아가면서 법화당의 미륵에게 물어보았다. 법화당의 미륵불이 조선군이 간 곳을 알려준 사실이 알려져서 조선군들은 법화당 미륵의 목을 부러뜨렸다고 한다. 그렇게 방치된 미륵불은 한국전쟁 이후인 1959년에 법화당에 모셔고 몸의 일부는 땅속에 묻혀있는 상태라고 한다. 내가 보기에는 목을 부러뜨린 흔적은 없어 보이는데.....
조선시대 신작로(新作路)와 노송지대
미륵당을 지나 서쪽으로 난 옛길을 걷는다.
정조가 아버지의 무덤을 화산으로 옮긴 이듬해 2월 심었다는 소나무 가로수가 남아 노송지대를 이룬다. 당시에 심은 소나무는 모두 500그루이며, 가로수는 지지대에서 화성까지 이어졌다고 하니 송죽동에 노송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노송지대(경기도 지방기념물 제19호)에 남아 있는 이 옛길은 정조시대 신작로의 현전 실물자료가 된다. 〈승정원일기〉에는 정조 4년(1780)부터 '새로 닦은 길'이라는 신작로(新作路) 기록이 많이 나타나는데, 바로 이곳 노송지대의 옛길을 말한다. 당시 정조가 새로 낸 길의 너비가 24척이었는데, 이를 조선시대 영조척으로 환산하면 대략 7.5m가 되는 길이다.
정조가 송충이를 베어 물은 일화는 유명하다. 어느 해인가 송충이가 크게 창궐하여 소나무가 말라가자 마침 원행을 다녀오던 정조 임금이 솔나방 애벌레를 잡아 씹어 먹었더니 송충이가 모두 사라졌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가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정조의 효성을 표현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잘 지켜지던 소나무는 1942년에 일본인들이 배를 만들기 위해 베어내 많이 사라지게 되었다.
과거의 노송지대는 포도밭 지대였고 포도나무 아래와 주변에 딸기를 심어서 봄이면 딸기, 가을이면 포도를 먹으러 온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어떤 흔적도 찾아보기가 어렵다. 1970년대에 소나무가 2백주였으나 점점 공해에 시들어가고, 영양실조에 걸리는가하면 사람들이 함부로 꺾으면서 해마다 죽어가는 나무가 많았다고 하니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던 시대였다. 지금은 그 옛날의 모습을 증명하듯이 서 있는 듯 보인다.
수원의 북쪽 끝자락인 지지대고개를 넘어서 지지대비와 정조대왕 동상, 괴목정교, 미륵당, 노송지대는 걸어야만 볼 수 있는 문화유산이다. 수원에 그런 곳이 있었구나! 하며 가족과 혹은 친구와 산책하듯 걸어보며 내가 살고 있는 고장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 마음을 다음의 詩에 담아본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