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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大邱廣域市, Daegu Metropolitan City]
경상북도 남쪽 중앙에 있는 도시.
북쪽으로 경상북도 칠곡군·군위군 및 영천시, 동쪽으로 경상북도 경산시·청도군, 남쪽으로 경상북도 청도군과 경상남도 창녕군, 서쪽으로 경상북도 고령군·성주군과 접한다. 영남지방의 중앙에서 서쪽으로 치우친 대구분지의 중앙부, 낙동강(洛東江)과 금호강(琴湖江)의 합류지점 동쪽 금호강 연안에 있다.
위치는 동경 126°38'∼127°00', 북위 35°03'∼35°15'이다. 면적은 883.5㎢이고, 인구는 248만 7829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7개 구[남구(南區), 달서구(達西區), 동구(東區), 북구(北區), 서구(西區), 수성구(壽城區), 중구(中區)], 1개 군(달성군), 3개 읍, 6개 면, 130개 행정동(195개 법정동), 255개 행정리(95개 법정리)가 있다. 시청은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에 있다.
1938년 115.65㎢, 1957년 463.19㎢로 확장되었다. 그러다가 1963년 공산면·가창면·성서면·월배면이 경상북도 달성군으로 환원되면서 다시 181.72㎢로 줄어들었다. 1981년 직할시로 승격하면서 445.03㎢로 다시 늘어났고, 1995년 광역시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경상북도 달성군이 편입되어 883.5㎢가 되었다.
급격한 인구증가가 있었던 시기는 8·15광복 이후로 이때 해외에서 귀환한 동포들과 북에서 월남한 피난민들이 대거 정착하였다. 또 1960년대 이후 대구지역의 산업이 급격히 발달하자 농촌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대거 몰려들었다. 이후로도 인구는 꾸준히 증가추세를 보여 2000년에는 전년도에 비해 0.8% 증가하였다.
1. 자연환경
지형은 분지(盆地)적 지형으로서 남부 산지, 북부 산지, 중앙부와 서남부 저지(低地)로 이뤄져 있다. 북부 산지는 거대한 팔공산괴(八公山塊)로서 중생대 백악기 말에 경상누층군이 퇴적된 후에 이를 뚫고 관입한 불국사화강암(佛國寺花崗岩)으로 형성된 산괴이다.
팔공산괴는 안심(安心)의 동북쪽 초례봉(礁禮峯, 636m)에서 시작해 북쪽으로 환성산(環城山, 808m)·능성(能城)고개(310m), 갓바위로 유명한 관봉(冠峯, 852m)·노족봉(老足峰, 887m)·동봉(東峯, 1,156m) 등으로 이어지고, 여기서 서쪽으로 팔공산 주봉(主峯, 1,193m)· 서봉(西峯)을 거쳐 가산(架山, 901m)에 이르는 동서 방향의 장축 약 24㎞에 달하는 산지이다.
남부 산지는 백악기 말에 화산 분출로 생성된 안산암·안산반암·안산암질 각력암 등의 화산암으로 형성된 비슬산괴(琵瑟山塊)와 용지산괴(龍池山塊)로 이뤄져 있다. 비슬산괴는 달성군 유가면과 가창면 사이에 위치한 비슬산의 최고봉인 대견봉(大見峯, 1,084m)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청룡산(靑龍山, 794m)·산성산(山城山, 653m)·앞산(660m), 남쪽으로는 조화봉(照華峯, 1,058m)·비티재(310m), 동쪽으로는 헐티재(500m)·최정산(最頂山, 886m)·우미산(牛尾山, 636m)·삼성산(三聖山, 663m)·팔조령(八助嶺, 360m) 등으로 이어지는 산이다. 용지산괴는 수성구 범물동 남쪽의 용지봉(628m)에서 남쪽 방향으로 병풍산(屛風山, 523m)·동학산(動鶴山, 570m)·상원산(上院山, 670m)으로 연결되는 산지이다.
남부와 북부의 산지 사이에 해당하는 동서 방향으로 넓은 중앙부와 낙동강(洛東江) 연변의 서남부는 거의 대부분이 평야이고, 곳곳에 구릉성 산지가 분포하고 있다. 즉, 낙동강과 그 지류인 금호강(琴湖江) 및 이에 유입되는 신천(新川)과 팔거천(八渠川) 주변에는 범람원(氾濫原) 성격의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해 있다.
중앙부의 일부 지대는 준평원상의 침식평야와 두리봉(斗里峰, 215m)·모봉(母峰, 151m)·형제봉(兄弟峰, 195m) 등의 구릉성 산지로 형성되어 있다. 서쪽의 일부 지대도 준평원상의 침식평야와 두류산(131m)·와룡산(臥龍山, 300m)·궁산(弓山, 253m) 등의 구릉성 산지로 형성되어 있다.
대구는 북동부와 남부는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서부가 상대적으로 개방되어 있는 분지형 지형으로, 겨울에는 춥고 여름은 무더운 내륙분지형 기후의 특성을 가진다. 2008년 연평균 기온은 15.0℃로, 월평균기온은 8월이 27.6℃로 가장 높고, 1월이 3.3℃로서 가장 낮다. 대구지역의 지난 30년 간(1973년~2002년) 강수량은 1,035.8㎜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과우지역이다. 1년 중 6~9월에 비가 가장 많이 내리며, 2008년 총 강수량은 973.9㎜이며, 월강수량은 가장 많은 달은 8월로 198㎜이다. 반면에 1월 강수량은 30㎜에 지나지 않는다.
2. 역사
대구 지역에 최초로 인간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5천 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는 북구 서변동과 수성구 상동지역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로 알 수 있다. 그 후 청동기시대에 접어들면서 금호강과 그 지류에 자연발생의 취락이 형성되었고, 인구의 증가와 생활무대에 확대됨에 따라 사회공동체가 이루어졌으리라 본다. 청동기시대 유물로 중구 대봉동 지역에서 간돌검·붉은간토기 등이 출토되었고, 민무늬토기와 홈자귀·반달형돌칼 등의 유물이 북구 침산(砧山)·연암산(燕巖山)의 구릉지대에 흩어져 있다.
대구사회의 발전상황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무덤유적을 통해 볼 때, 지석묘축조시대·석관묘축조시대·석곽묘축조시대·석실분축조시대를 거치면서 통합운동이 일어나 하나의 소국(小國: 城邑國家)을 형성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소국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변진 24국 가운데 하나로 비정할 수 있을 것이며, 사로국이 성장해 연맹체를 형성하면서 거기에 복속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261년(점해이사금 15)에 달벌성을 쌓고 나마(奈麻) 극종(克宗)을 성주로 삼았다는 기록에서 보면, 3세기 중엽에 신라에 복속된 것으로 되어 있으며, 늦어도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 무렵까지는 신라의 완전한 지배하에 들어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 군현체제하의 대구는 위화군(喟 火郡)과 달구화현(達句火縣)으로 나누어져 통치되었으며, 757년(경덕왕 16)위화군이 수창군(壽昌郡)으로, 달구화현이 대구현(大丘縣)으로 개명되었다. 신라시대에 대구가 정치적 요지로 기능했던 사실은, 신라 5악 가운데 부악(父嶽: 八公山)이 포함되어 있는 점이나, 689년(신문왕 9)달구벌로 도읍을 옮기려 했던 것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대구지역은 후삼국의 쟁패기에도 신라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요충지로 인식되어 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러나 고려의 재통일 이후 정치의 중심무대가 개경으로 옮겨지면서 신라시대와는 달리 그 비중이 점차 낮아져갔다.
고려 초기의 대구지역은 수성군(壽城郡)·대구현·해안현(解顔縣)으로 나누어져, 수성군이 대구현을 영속하고 있었고, 해안현은 장산군(獐山郡)의 영현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1018년(현종 9)의 전국적인 군현 개편과정에서 수성군과 해안현은 동경(東京)의 속군·속현이 되었고, 대구현은 경산부(京山府)의 14속현의 하나로 편입되었다.
그 뒤 약 1세기가 지난 1143년(인종 21)대구현이 현령관으로 승격되어 점차 그 지위를 다시 인정받게 되었다. 12세기에 무신의 난이 일어난 뒤 대구 부근의 청도·밀양·경주 등지에서 민란이 빈발하자, 대구는 이를 진압하기 위한 군사활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몽골침입기에는 팔공산 부인사(符仁寺)가 대장경판과 더불어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으며, 몽고의 제5차 침입 때는 대구지역 주민들이 공산성(公山城)에 입보(入保)해 끝까지 저항하는 항몽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고려 말 왜구의 약탈이 자행되면서 낙동강·금호강으로 바다와 연결된 대구도 두세 차례의 약탈 피해를 입었다.
조선 건국 후 비옥한 평야지대를 끼고 있는 대구는 농업의 중심지로서 가구수가 증가하고 점차 거읍(巨邑)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1394년(태조 3)대구현이 수성현과 해안현을 영속하게 되었고, 1419년(세종 1)대구군으로 승격되었으며, 1466년(세조 12) 마침내 도호부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그 뒤 영남 내륙교통의 요지로서, 또 진관체제(鎭管體制) 하의 용양위(龍驤衛)의 중부가 설치된 군사적 중심지로서 중요성을 지니게 된 대구는 서거정(徐居正)과 같은 문장가와 정치가를 배출했으며, 많은 학자·문인이 나와 영남학파의 일원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이 곳 출신 사림이 주축이 되어 의병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601년(선조 34) 경상도감영이 설치되면서 대구는 명실상부한 영남지방의 중심지가 되었고, 대구부는 해안현·하양현(河陽縣)·경산현(慶山縣)·수성현·화원현(花園縣)·하빈현(河濱縣)을 포괄하는 거읍이 되었다.
수세기 동안 경상도감영 소재지로서 영남의 중심지 위치를 누려왔던 대구는
-1895년에 시행된 지방관제의 개혁에 따라 변화를 맞게 되었다. 경상도가 4부(대구부·안동부·진주부·동래부)로 분할되자, 대구지역도 대구군으로 개편되어 부청 소재지가 되었고, 대구부의 관할구역도 23군으로 축소되었다.
-그 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시가지 일대를 포괄해 대구부로 독립하고, 나머지 지역은 달성군으로 편제되었다.
개화의 물결이 밀려들면서 1899년 달성학교(達城學校)를 효시로 다수의 초등교육기관이 생겨났고, 1906년 계성학교(啓聖學校)가 설립되어 이듬 해 개교한 신명학교(信明學校)와 더불어 근대적 중등교육기관으로서 많은 인재를 양성하게 되어 교육·문화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일제의 침입이 시작되면서 대구는 항일저항운동의 근거지로서 한몫을 하였다. 근대적 교육을 통한 민족실력양성운동이 전개되었고, 1907년 서상돈(徐相敦)·김광제(金光濟) 등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해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또한, 1915년 서상일 등은 영남지역의 독립투사들과 함께 조선국권회복단중앙총부(朝鮮國權恢復團中央總府)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이 단체는 3·1만세운동에서 대구지역의 시위를 주도했고,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에 깊이 관여하기도 했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대구지회가 조직되어 항일투쟁을 지속했으며, 1930년대 이후 학생들의 비밀결사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민족항쟁의 본거지로서 그 모습을 뚜렷이 나타내었다.
1945년 광복 이후 대구는 해외귀환동포의 정착과 월남 피난민들의 유입으로 급격한 인구증가가 있었고, 이에 따라 많은 사회적인 문제가 야기되었다. 미군정이 지속되던 1946.10.1 좌익의 교묘한 선동에 의해 이른바 10·1폭동사건이 일어나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낸 뒤 진압되었다.
-이러한 좌익에 의한 혼란을 극복하면서 1949년 대구시로 개칭되었다.
1950년 6·25전쟁 과정에서는 낙동강방어작전의 군사적 중심도로서 커다란 구실을 하였다. 1960년 이승만(李承晩) 정권의 독재가 노골화되어갈 때 대구지역의 고등학생들은 2·28학생의거를 일으켜 반독재투쟁을 전개했고, 그것은 그 뒤 4·19의거로 연결되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정착에 하나의 커다란 분수령을 이루게 되었다.
-1981년 달성군의 월배읍·성서읍·공산면, 칠곡군의 칠곡읍, 경산군의 안심읍 등을 편입해 직할시로 승격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8.1.1에는 달서구가 설치되는 등 많은 행정구역이 변동되거나 조정되었다.
-1995.1.1 광역시로 개칭되고,
-1995.3.1에는 달성군 전역이 대구광역시에 편입하면서 시역이 크게 늘어나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3. 유물과 유적
대구의 선사유적으로는 북구 서변동과 수성구 상동지역에서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었으며, 청동기시대 이후의 유물과 유적은 대구지역에 산재되어 있다. 금호강과 신천 유역에 있는 북구 침산동·산격동·검산동의 낮은 언덕에 청동기시대의 표식유물인 민무늬토기와 각종 마제석기가 산포하는 유적이 있다. 또 중구 대봉동, 수성구 상동, 동구 율암동·동내동, 수성구 월성동, 달서구 진천동 등지의 낮은 지대에는 당시 묘제인 지석묘군이 분포한다.
초기 철기문화 단계였던 원삼국시대의 것으로는 수성구 만촌동, 동구 신천동, 서구 평리동에 청동기일괄유물출토유적이 있다. 그리고 중구 달성동, 북구 팔달동, 동구의 안심동에는 이 시대의 표식토기가 되는 와질토기와 김해식토기 포함층 유적이 있다. 삼국시대의 것으로는 대구 불로동 고분군(사적 제262호)과 수성구의 사월동 지석묘군(대구광역시 기념물 제9호)이 있다.
산성으로는 삼국시대 초기에 이미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중구 달성동의 대구달성(사적 제62호), 동구 봉무동의 봉무토성(대구광역시 기념물 제4호) 등과 검단토성을 비롯해 삼국시대 전성기의 도동 용암산성(대구광역시 기념물 제5호), 남구 대명동의 대덕산성(대구광역시 기념물 제7호), 북구 노곡동의 팔거산성(대구광역시 기념물 제6호)과 고산토성 등이 있다.
조선시대의 대구부성과 관련해 수성구 만촌동의 대구부 수성비(大邱府修城碑,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호)·영영 축성비(嶺營築城碑,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호)가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동화사(桐華寺)·파계사(把溪寺)·북지장사(北地藏寺) 등이 유명하다. 동구 도학동 동화사에는 동화사 마애여래좌상(보물 제243호)·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244호)·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보물 제247호)·동화사 금당암 동·서삼층석탑(보물 제248호)·동화사 당간지주(보물 제254호)·동화사 대웅전(보물 제1563호)·동화사 극락전(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호)·동화사 부도군(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2호)·동화사 수마제전(桐華寺須摩提殿,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6호)·동화사 염불암 청석탑(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9호)·동화사 염불암 마애여래좌상 및 보살좌상(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이 있다.
도학동에는 북지장사 지장전(보물 제805호)·북지장사 삼층석탑(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호)·북지장사 석조지장보살좌상(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5호)·팔공산 마애약사여래좌상(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호)·사명당대장진영(보물 제1505호)·부도암 부도(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4호) 등이 있다.
동구 중대동 파계사에는 대구 파계사 건칠관음보살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제992호)·파계사 원통전(보물 제1850호)·파계사 설선당(把溪寺說禪堂,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파계사 산령각(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파계사 적묵당(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9호)·파계사 진동루(把溪寺鎭洞樓,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0호)·파계사 기영각(把溪寺祈永閣,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1호)이 있다.
또한 용수동의 팔공산 동봉 석조약사여래입상(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 신무동 삼성암지 마애약사여래입상(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1호), 송정동 석불입상(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2호) 등이 있다.
경북대학교 구내에는 2기의 산격동 연화 운룡장식 승탑(보물 제135호, 보물 제258호)와 백지은니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권10(보물 제271호)·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335호)·봉화 북지리 석반가상(보물 제997호) 등이 있다.
그 밖에 도학동의 대구 도학동 승탑(보물 제601호), 남구 봉덕동의 법장사 삼층석탑(法藏寺三層石塔,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호), 동구 신무동의 부인사 서탑(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7호)·부인사 부도(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8호)·부인사지(대구광역시 기념물 제3호)·부인사 일명암지 석등(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2호)과 신무동 마애불좌상(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8호)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중구 남산동의 대구향교와 대구향교 대성전(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 동산동의 구암서원 숭현사(龜巖書院崇賢祠,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호), 북구 읍내동의 칠곡향교와 칠곡향교 대성전(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6호), 동구 봉무동의 독암서당(獨巖書堂,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2호), 수성구 성동의 고산서당(孤山書堂,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5호) 등이 있다. 그 밖에 동구 도동의 문창공 영당(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0호)·문창공 영정(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5호), 중구 미대동의 성재서당(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9호) 등이 있다.
또한 누정으로는 중구 포정동의 선화당(宣化堂,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징청각(澄淸閣,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 동구 봉무동의 봉무정(鳳舞亭,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호), 중구 달성동의 관풍루(觀風樓,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호), 동구 평광동의 첨백당(瞻柏堂,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3호), 수성구 만촌동의 독무재(獨茂齋,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7호)·하효자 정려각(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8호), 상동의 야수정(倻搜亭,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4호), 동구의 둔산동경주최씨 종가 및 보본당사당(중요민속문화재 제261호) 등이 있다.
분청사기 상감연화문 편병(보물 제268호)을 비롯해, 기타 유적으로는 신라시대 제방축조와 관련된 대구 무술명 오작비(大邱戊戌銘塢作碑, 보물 제516호) 등이 있다. 동구 지묘동의 신숭겸장군 유적(申崇謙將軍遺跡,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호)이 있고, 달서구 상인동에는 월곡 우배선 임진왜란창의유록 및 관련문서(보물 제1334호)가 있다.
서울 명동성당과 동일한 형태의 대구 계산동성당(사적 제290호), 중구 동산동의 선교사 스윗즈 주택(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선교사 챔리스 주택(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5호)·선교사 블레어 주택(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6호), 남산동의 성유스티노 신학교(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3호)·샬트르성바오르 수녀원 코미넷관(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4호)·성모당(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9호), 남성로에는 대구 제일교회(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0호) 등이 있다.
대봉동의 건들바위(대구광역시 기념물 제2호), 달서구 신당동 석장승(대구광역시 민속문화재 제2호) 등이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동구 도동에 대구 도동 측백나무 숲(천연기념물 제1호)이 있고, 내곡동의 내곡 모감주나무 군락(대구광역시 기념물 제8호), 북구의 국우동 탱자나무(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0호)가 있다.
무형문화재로는 고산농악(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호)과 날뫼북춤(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2호)·욱수농악(旭水農樂,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제 3호)·천왕메기(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4호)·가곡(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5호)·영제시조(嶺制時調,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6호)·공산농요(公山農謠,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7호)·판소리(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살풀이춤(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9호)·대고장(大鼓匠,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2호)이 전승되고 있다.
4. 교육과 문화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향교와 서원이 있다. 현존하는 대구향교는 1398년(태조 7) 부동2리(지금의 동성로)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599년(선조 32) 달성공원 남각에 재현하였다. 그 뒤 1605년 부동(지금의 교동)으로 이전한 뒤 1932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최초의 서원은 연경동의 연경서원으로 1563년(명종 18)에 세워졌다. 그 밖에 1824년(순조 24)에 세워진 서산서원(西山書院)이 있다.
근대 교육기관의 시조로는 1899년에 세워진 사립 달성학교가 있으며, 처음에는 대구의 준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었으나 뒤에는 일본인 거류민 자녀의 교육기관이 되었다. 최초의 사립초등학교로는 1900년 대구희도심상학교(大邱喜道尋常小學校), 관립으로는 1905년 대구공립심상소학교가 설립되었다. 또한 최초의 중등학교로는 1906년 계성중학교, 1907년 신명여자중학교가 설립되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은 초등학교 221개교, 중학교 124개교, 고등학교 92개교, 전문대학 7개교, 교육대학 1개교, 대학교 3개교, 특수학교 8개교, 기타학교 5개교 등이 있다.
문화공간으로는 공공공연장, 민간공연장, 영화상영관의 공연시설과 화랑의 전시실, 시민회관과 구민회관, 청소년회관 등 지역문화 복지시설이 있으며, 기타시설로 각 구마다 문화원이 있다. 그리고 중앙도서관을 비롯한 공공도서관이 있으며, 국립대구박물관, 경북대학교박물관, 계명대학교박물관, 영남대학교박물관, 대구교육대학교박물관 등이 있다. 지방문화예술 진흥과 향토 문화예술의 발전을 목표로 1990년 개관한 대구문화예술회관은 대·소극장, 13개의 전시장, 국제회의장 등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며, 대구시립예술단이 상주하고 있다. 특히 칠성2가에 위치하고 있는 대구오페라하우스는 단일 공연장으로 국내 최초 오페라전용극장이며, 전국에서 처음으로 시정 산하기관으로 2003년 개관하였다.
'대구국제오페라축제'는 대구의 대표적인 축제 중 하나로 대구오페라하우스의 개관을 계기로 하여 매년 9~10월경에 열리며, 지역의 풍부한 음악적 역량을 활용하고 문화콘텐츠 개발을 통하여 타 도시와 차별화된 축제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대구광역시가 개최하고 있다. 1978년 고사, 농악놀이 등의 간단한 행사로 시작되었던 약령시축제는 1999년 달구벌축제에서 독립하여 단일축제로 매년 5월 특별한 테마를 중심으로 개최되어 왔고, 2006년 축제는 전국유일의 한방특구로 지정된 약령시를 대표하기 위한 행사로 구성되었다.
2000년 이후 매년 9월에 열리는 '팔공고려문화제전'은 팔공의 역사, 겨레의 용틀임이란 기치아래 전국에서 유일하게 후삼국시대에 고려가 민족통일의 과업을 이루어 가는 역사적 과정과 향토문화유산을 접목시킨 대표적인 향토문화축제로, 2001년 정부로부터 지방의 특색 있는 4대 향토축제로 선정되었다. 이밖에도 젊은이들의 거리로 인식되는 동성로에서 시민정서 함양 및 문화예술의 대중화를 목표로 열리는 동성로축제, 대구 유일의 문화거리인 봉산문화거리를 중심으로 1993년 이후 매년 10월 중순 열리는 봉산미술제와 남산인쇄거리축제 등이 있다.
5. 민속
세시풍속으로 행해지는 대표적인 민속놀이로는 정월대보름의 지신밟기·줄다리기·횃불싸움을 들 수 있고, 시절에 관계없이 행해지는 놀이로는 투계(鬪鷄)·투우를 들 수 있다.
지신밟기는 지신을 위로하는 놀이로 마을 청장년이 모여 사대부·팔대부(八大夫)·포수로 꾸며 행렬에 앞장서게 하고, 농악대·주민들이 뒤따르며 집집마다 다니며 지신을 밟는다. “주인 주인 문여소, 나그네손님 들어가오.”라고 소리치고, 지신밟기패가 문 안으로 들어가 농악을 울리면서 춤추고 논다. 이 때 주인은 술과 음식을 내오고 곡식이나 돈을 주는데 이것은 마을의 여러 가지 공동경비로 사용된다.
줄다리기는 신천에서 자주 열렸는데, 출전한 청장년 외 온 마을사람이 주위를 둘러싸고 농악을 울리며 응원한다. 이긴 편 마을에 그 해 풍년이 든다고 믿었고 이긴 편 줄을 썰어 논에 거름으로 쓰기도 했다.
청소년들은 저녁에 횃불싸움을 하는데, 시작 며칠 전부터 홰를 만든다. 대보름달이 뜨면 마주 서 있던 양편은 서로 약을 올리고 농악대는 농악을 울려 자기편의 사기를 돋운다. 한바탕 농악이 끝나면 함성과 함께 동시에 내달아 횃불을 휘두르며 혼전을 벌이는데, 횃불을 빼앗기거나 힘에 부쳐 달아나는 쪽이 지는 것이다.
투계는 길들인 수탉을 싸움시켜 구경거리를 삼는 것이다. 싸움닭은 목이 길고 행동이 민첩해 주둥이로 쪼고 발로 차면서 싸우는데, 주저앉거나 주둥이가 땅에 닿으면 지는 놀이이다.
투우는 소끼리 싸움장에서 싸우게 하는 것이다. 소와 소 사이를 가린 포장을 걷어 올리면 싸움이 시작되는데 무릎을 꿇거나 넘어지는 소가 지는 것으로, 심할 때는 소가 크게 다치거나 죽는 일까지도 있다.
이 지역의 동제는 마을의 수호신인 산신에게 제사하는 산제를 말한다. 현재는 거의 소멸되고 외곽지대의 일부 자연촌락에서만 볼 수 있다.
산제는 마을 진산(鎭山)에 단을 쌓거나 집을 지어 정월대보름을 전후한 길일에 지낸다. 제주는 부정이 없어야 하고 목욕재계를 하며 마음가짐도 선량해야 한다. 제주집에는 설날 미리 농기(農旗)를 세워둔다.
제를 지낼 때까지는 모든 주민이 부정을 멀리하고 근신해야 하며, 외부인의 출입과 도살은 금지된다. 제사에 사용될 우물 둘레에는 황토를 깔아 악귀나 마음 더러운 사람의 출입을 막고, 우물은 멍석을 덮어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 제사에 쓰는 음식은 제주집에서 장만한다.
제일에는 농기를 앞세우고 농악대와 주민이 뒤따라 제장으로 가서 자정이 지나 첫닭이 울면 산제를 올린다. 축관(祝官)의 독축(讀祝)이 끝나면 집집마다 호주가 나와 소지(燒紙)를 올리면서 소원을 빈다.
6. 설화와 민요
이 고장은 옛날 왕건과 견훤의 싸움터였으므로 이에 관련된 설화가 많이 남아 있으며, 효자설화·지명유래담·자연물관련설화 및 유운룡(柳雲龍)·이황(李滉) 등 역사적 인물에 관한 설화가 널리 전한다.
왕건과 견훤의 싸움은 많은 유적지설화로 남아 있다. 927년 후백제 견훤이 신라를 침범해오자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이 신라를 도우러 경주로 오던 중 동수(桐藪: 지금의 지묘동)에서 싸움이 일어났다. 왕건군은 먼 길을 온데다가 견훤군의 동태를 잘 몰랐기 때문에 포위당해 마침내 왕건의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다.
이 때 왕건의 심복장수인 신숭겸이 왕건의 투구와 갑옷으로 위장하고 달아나자, 견훤군이 신숭겸을 쫓아 몰려가는 바람에 군졸로 변복한 왕건은 무사히 위기를 모면하였다. 왕건은 그 뒤 자신을 대신해 전사한 신숭겸을 위해 지묘사(智妙寺)를 지어 위로했으나, 지금은 후손들이 쌓은 표충단(表忠壇)만 남아 있다.
이 싸움으로 그 일대는 왕건에 얽힌 지명이 많이 남게 되었으니, 왕건의 군사가 패하고 군대를 해산했다는 파군재, 왕건의 탈출로를 비춰주던 새벽달이 빛나던 반야월, 그 밖에 독좌암·해안·안심읍·살내·실왕(지금의 시량)·장군수·은적암 등이 모두 그 싸움에서 유래한 지명들이다.
이 고장을 다스렸던 달성판관의 명판결 이야기가 있다. 서울의 어느 가난한 선비가 달성판관이 되자 관례에 따라 사또를 모시러 갔던 아전들은 스무 살도 못 되는 단구의 곰보소년이 신임사또인 것을 알고 만만하게 보았다.
일행이 문경지방의 장터에 이르렀을 때, 어린 상주가 장사비용을 마련하려고 닭 다섯 마리를 팔러 나왔다가 닭장수에게 빼앗긴 억울한 사정을 얘기하고 문경 본관 사또마저 “네 닭을 어찌 내가 아느냐?”고 꾸짖었을 뿐이었다고 사또에게 호소하였다.
닭장수와 닭을 잡아오게 한 달성판관은 소년과 닭장수에게 “아침에 닭에게 뭘 먹였느냐?”고 물었다. 이어 닭 한 마리를 잡아보니 소년의 말대로 수수쌀이 나와 닭장수에게 닭값을 물게 하고, 문경 본관 사또에게 500냥을 빌려 소년의 장사비를 마련해주었다.
부임 후 한참이 지나도 500냥을 갚지 않자 문경 사또로부터 독촉이 왔다. 달성판관은 심부름꾼에게 “그 돈은 벌써 갚았다.”며 '대전통편'을 보라고 일러주었다. 거기에는 자기 고을에서 생긴 일을 본관 사또가 처리하지 못했을 때 벌금이 500냥이라 되어 있었다. 육방관속들은 혀를 내두르며 어린 사또라고 만만하게 본 것을 뉘우쳤다.
칠성동은 칠성암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경상도 감사 이태영은 7형제를 두었는데 꿈에 하늘에서 일곱 개의 별이 북문 밖에 떨어져 빛을 발하는 것을 보았다. 다음 날 그 곳에 가보니 일곱 개의 바윗덩이가 북두칠성 모양으로 놓여 있어 석공을 불러 7형제의 이름을 차례로 새겨놓았다. 이상하게도 7형제가 성장함에 따라 이름을 새겨놓은 바위와 비슷해졌다.
험상궂게 생긴 바위에 이름을 새긴 세 아들은 훌륭한 무관이 되고, 깨끗하면서 우뚝 솟은 세 개의 바위에 이름을 새긴 세 아들은 모두 문관으로 출세하였다. 평범한 바위에 이름을 새겨놓은 아들은 벼슬도 못하고 평범하게 평생을 마쳤다 한다. 이 후손이 다시 경상감사가 되어 칠성바위 주변에 의북정을 지었으나 남아 있지 않고 칠성동의 이름에만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밖에 산이 날아와 자리를 잡았다는 '날뫼전설', 자식을 낳게 한다는 '건들바위전설', 때 아닌 음식을 구해 부모를 봉양한 강순항(姜順恒)·하광신(夏光臣)의 효행설화, 약전골목에 얽힌 강원도 산삼장수와 욕심 많은 부자 서창규 설화 등 수없이 많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이 고장에 구전되고 있는 민요는 주민의 이입과 도시 확장에 따라 주변의 민요를 수용해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노동현장과 밀착된 근교의 노동요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며, 동북부지역은 상주지방의 가락이나 사설과 비슷하다.
농업노동요 '모찌기소리'·'모내기소리'의 사설은 보편적인 [내용]으로 “이물꼬 저물꼬 다 헐어놓고/ 쥔네양반 어데갔소/ 물애야 대잔북 손에 들구우/ 첩의방에 놀로갔네.”나 “모시적삼 안섶안에/ 분통같은 저젖보소/ 아니보면 병날끼고/ 손톱만침 보고가소.” 등과 같이 연정·상사를 담기도 하고, 때에 맞는 [내용]을 담기도 한다.
'논매기소리'는 애벌·두벌·세벌 논매기노래가 모두 불린다. 나무를 하거나 풀벨 때 부르는 '어사용'도 있는데 “가자가자아 카들갖구우우/ 칠심공산에 풀비러가자 어허……/ 어느시월이 이리가고이가노오/ 갈려구오오 고생많네/ 에에호오야아 가마구야구오……”라고 느리고 구성진 가락으로 부른다.
여성노동요로는 '베틀노래'·'진주낭군' 등 시집살이노래가 불리고, “아르랑아르랑 아라리오/ 화래삼고 구래삼고/ 청도밀양 긴삼가래……/ 삼아홉광지리 다삼아도/ 날찾는이 전혀없네……/ 보고지라 우리엄마/ 원통하고 가련하다……”라고 삼을 많이 삼아도 돌보아주는 이 없는 외로운 처녀의 신세한탄을 담은 '삼삼기노래'도 불린다.
일하면서 부르기도 하고 그냥 부르기도 하는 '여치타령'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가 소변보다가 놀라서 뛰어가는 여치를 잡아 “풀밭에 널 낳아/ 풀천이라고 부르지/ 천아천아 풀천아/ 어히코어하코 웬일로/ 헌출받게도 잘났다/ 허리가 능청한거는 너거아바이를 닮았다……/ 포항고모가 알았이마/ 미역단이나 올낀데……”라고 아들이라 추스리는 노래로, 지역보다는 창자에 따라 불리는 희극적 서사민요이다.
이 밖에도 '노랫가락'·'범벅타령'·'각설이타령' 등 잡가·타령류가 많이 불린다. '각설이타령'에는 “……육자나한자 들고오마/ 육이오사변에 집태오고/ 거지생활로 들어간다/ 칠자나한자 들고오마/ 칠십리밖에 대포소리/ 인천시내 둘러뺀다……” 등과 같이 1950년을 전후한 세태묘사가 많다.
“수건씨고 벌인돈은/ 중잘모자 다까묵고/ 중잘모자 벌인돈은/ 갓씬높은놈이 다까묵고/ 높은놈이 벌인돈은/ 이기빙이 다까묵고/ 이기빙이 벌인돈은/ 이승마이 다까묵고/ 이승마이 벌인돈은/ 호주각씨 다까묵은다.”라는 노래도 세태를 풍자하고 있다.
7. 산업과 교통
대구광역시의 농업은 전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낮다. 농업은 달성군에서 주로 행해지나 동구·북구·달서구·수성구에서도 약간 이뤄지고 있다. 경지면적 129.26㎢ 가운데 논·밭의 비율은 56: 34로 논농사가 우세하다.
주요 농작물로는 쌀이 생산량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보리·콩·감자·고구마 등의 작물도 다소 생산된다. 채소류는 배추·무·양파·토마토·파·수박·오이·마늘·시금치·참외·고추 등의 순으로 많이 재배되며, 특용작물로는 참깨의 생산이 많다. 과실류는 포도·복숭아·감·자두·사과·배 등의 순으로 생산되고 있다. 축산업은 근교농업의 일환으로 비교적 성한 편인데, 돼지·소(한우·젖소)·닭·염소 등이 주로 사육되고 있다.
대구 지역의 광업은 10개 사업체, 43명 종사자로 그 비중이 미약하나, 제조업은 2만 6036개 사업체에 17만 5869명이 종사하고 있다. 제조업체의 대부분이 중소기업이며, 주로 섬유산업과 기계·금속·자동차부품 산업 관련 업체들이다. 지역 내에는 염색공단, 서대구공단, 검단공단, 3공단, 성서1·2·3·4공단, 달성공단, 달성2공단, 현풍공단, 옥포농공단지, 구지농공단지 등 13개 산업 및 농공단지가 조성되어 4,633개의 업체가 입주하여 있다. 대구지역의 제조업은 이들 산업단지를 기반으로 북구·달서구·서구·달성군 등에 거의 대부분(약89%)이 입지해 지역적으로 편중 발달하였다. 이러한 지역에 비해 중구·동구·남구·수성구 등은 상업 및 주거지역이어서 공업이 발달하지 못했다. 그 중에서도 남구에는 60개 사업체가 입지해 가장 취약하다.
대구 지역의 상업은 대구가 조선시대 중엽부터 전국적인 상업의 중심지로서 지속적으로 발달해온 탓에 오늘날에도 중심적인 산업이 되고 있다. 2015년 현재 도소매업은 4만 9,225개 사업체에 13만 326명이 종사하고 있다. 대구의 도매업은 해방 이후 섬유산업의 발달과 대구약령시(大邱藥令市)의 옛 명성 등을 이어받아 서문시장을 중심으로 한 섬유·의류도매업과 약령시의 한약도매업 등이 크게 번창하였다. 그리하여 1971년에는 전국도매업 매출액의 18.2%를 차지할 만큼 서울 다음으로 발달하였다. 특히 당시 섬유·의류도매업은 업체 수에서 전국의 33.7%, 판매액에서 52.6%를 점유해 전국의 1위였다. 이러한 도매업은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으로 1971년 이후 도매상권이 서울로 집중됨에 따라 한동안 크게 쇠퇴하다가 1980년대부터 다시 발전하고 있으나 예전의 지위에는 훨씬 못 미치고 있다.
2015년 현재 대구광역시의 유통업체는 총 175개로, 할인점 18개소, 전문점 4개소, 백화점 7개소, 쇼핑센터 2개소, 시장 121개소, 기타 대규모 점포가 4개소이다. 상설시장은 과거에 인구 증가와 소득 향상에 따라 지속적으로 발전을 거듭하다가 1980년대부터 현대적인 다른 유통기관의 출현과 발달로 쇠퇴하고 있다. 대표적인 상설시장으로는 과거 한때 전국의 3대 시장에 속했던 서문시장과 청과물(특히 사과)시장으로 유명했던 칠성시장이 있다. 이들 시장도 최근의 쇠퇴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대규모 주차장을 건립하는 등 상권 회복에 노력하고 있다.
백화점은 1970년대부터 다수의 현대식 백화점이 설립되어 경쟁을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는데, 대구백화점과 동아백화점, 롯데백화점, 현대백화점이 백화점 상권을 장악하고 있다. 대형점은 1988년부터 개설되었고, 쇼핑센터는 1984년에 동아쇼핑이 설립되었으며, 슈퍼마켓은 1972년부터 연쇄점 형태로 개점이 확대되어왔으며, 편의점은 1992년 미국 회사와 기술제휴한 로손의 출점을 시작으로 급속히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정기시장(5일장)은 가장 오래된 소매기관으로서 1960년대 말까지는 발달해왔으나 1970년대 이후 급격히 쇠퇴해 공설(公設)시장으로는 북구 칠곡에 1개소와 달성군의 6개소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1997년 새로운 소매기관으로서 클럽델타를 필두로 대형할인점이 개점하여 기존의 유통시장 질서를 크게 바꿔놓고 있다.
서비스산업도 상업 못지않게 발달해 있다. 서비스업은 2015년 현재 17만 9904개 사업체에 73만 1012명이 종사하고 있다. 서비스업 중에서 가장 발달한 부문은 소비성 서비스업인 숙박 및 음식업으로서 3만 1506개 사업체에 8만 2268명이 종사해 전체 서비스업의 약 30% 내외를 점유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는 교육서비스업(10,150개 업체에 6만 7009명이 종사)이 발달했는데, 이곳은 예로부터 교육도시이기 때문이다. 그 밖에 금융 및 보험업, 보건 및 사회복지업, 오락·문화 및 운동 관련사업, 공공·사회 및 개인서비스업, 사업관련서비스업, 부동산 및 임대업 등의 부문에도 많이 종사하고 있다. 이 가운데 음식점업은 신흥시가지로 개발된 달서구와 수성구 및 도심지인 중구에 특히 발달해 있다. 교육서비스업은 각 학교가 많이 입지하고 있는 남구와 신흥개발지역인 수성구·달서구·북구지역에서 발달하였다. 그리고 금융 및 보험업은 중구에 가장 발달되어 있고, 수성구와 달서구에도 발달해 있다.
교통은 철도와 도로교통이 매우 발달해 있다. 시내교통은 4개 순환선과 8개 방사선 도로를 축으로 거미줄처럼 가로망이 개설되어 있다.
철도는 경부선이 시가지의 중심부를 동서로 통과하며, 대구∼영천간 대구선이 형성되어 있어 중앙선(청량리∼영천∼경주)과 동해남부선(포항∼경주∼부산)과도 쉽게 연결된다. 또한 경부고속철도가 2004년 4월 1일 개통되어 고속철도인 KTX가 운행되고 있다. 대구 도시철도는 1호선(대곡∼안심간)과 2호선(문양∼영남대간)에 이어 3호선(칠곡경대병원∼용지)이 개통되었다.
대구는 4개의 고속도로 (경부, 광주대구, 중앙, 중부내륙)가 교차하고 있으며 대구·포항간 고속도로, 대구부산고속도로가 완공되어 육로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경부고속도로는 대전·서울 방면에서 경주·부산방면으로 연결되고, 광주대구고속도로는 고령과 합천 해인사를 거쳐 남원·광주방면으로 연결된다. 중부내륙고속도로 구간인 현풍~김천 사이의 구간이 2007년 개통됨으로써 중부내륙고속도로는 경기도 여주에서 경상남도 창원시까지 이어지게 되었으며, 중앙고속도로는 안동·춘천 방면으로 연결된다. 이 밖에 많은 국도와 지방도가 대구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개통되어 있어 광역 도로교통은 매우 편리하다.
항공교통은 도심에서 10여㎞ 떨어진 곳에 대구공항이 있으며 국제선은 중국의 북경, 심양, 상하이(푸동)와 일본 오사카 노선이 운항되고, 국내선은 인천, 제주 등과 연결된다.
8. 관광
주요 관광자원으로는 팔공산·비슬산·앞산과 달성·두류·경상감영 등의 공원, 수성·동촌 등의 유원지, 이월드, 힐크레스트, 서문시장, 약령시장, 동성로, 대구국립박물관, 경북대학교박물관 등을 꼽을 수 있다.
팔공산자연공원은 대구의 북쪽에 위치한 팔공산(1,193m)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이곳에 산재한 많은 불교유적으로 1980년대에 개발된 대구의 대표적인 관광·휴양지이다. 팔공산에는 동화사, 부인사, 파계사, 송림사, 은해사, 북지장사 등 대가람과 50여 개의 암자가 산재해 있으며, 관봉의 석조여래좌상(갓바위)을 비롯하여 6개의 약사불과 석조물 등 수많은 불상, 부도, 탑 등 불교 문화재가 골짜기와 봉우리마다 산재해 있다. 1980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1981년 대구직할시 승격과 더불어 동화, 파계, 갓바위 3개 지구를 국민관광지로 지정 본격 개발하고 있으며, 현재 콘드라 리프트카, 골프장, 관광호텔, 학생야영장 등 각종 위락시설의 설치로 시민은 물론 수많은 외래 관광객이 찾아드는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비슬산자연공원은 대구로 편입된 달성군에 위치한 비슬산 일대에 지정된 공원으로서 수려한 자연경치, 울창한 계곡, 용연사·유가사·대견사지(大見寺址) 등의 고사찰과 유적, 자연휴양림 등을 보유하고 있는데, 앞으로 개발이 기대된다.
앞산공원은 도심에서 4.5㎞이내에 위치하여 시민들의 이용이 쉽고, 자연경관이 수려하며, 심신수련을 위한 각종 체육시설과 케이블카 및 각종 위락시설을 갖춘 대구 최대의 도시자연공원이다. 행정구역상 대구광역시 남구, 수성구, 달서구에 위치하고, 공원 내에는 크고 작은 8개골과 20여개의 약수터 및 수많은 등산로가 있으며, 낙동강 승전 기념관과 충혼탑 및 청소년수련원, 궁도장, 승마장, 남부도서관, 수영장 등이 각 골에 고루 배치되어 있다.
두류공원은 1965년 공원으로 결정된 이후 1977년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된 도시근린공원으로서 문화, 교양, 체육시설 등이 구비되어 있다. 두류산과 금봉산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공원으로 이월드(구 우방타워랜드)가 들어선 곳은 두류산이고, 문화예술회관 뒷산은 금봉산이다. 공원 내에는 대구의 명소인 이월드, 면학장소인 두류도서관, 시민건강증진에 기여하고 있는 각종 체육시설과 시민문화의 전당인 문화예술회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월드는 두류공원 내에 민간기업 우방이 조성한 유럽형 테마공원으로서 대구의 명물 대구타워(높이 312m) 주변지역에 각종 유희시설을 갖추고 있다.
경상감영공원은 도심부에 조선시대 경상도 감영(監營)이 있던 곳에 조성된 개방식 소공원으로서 관찰사 청사였던 선화당과 관사였던 징청각과 같은 옛 건물, 분수, 종각, 산책로 등으로 아담하게 꾸며져 있다.
달성공원은 삼한시대 때 축조된 달구벌 성지(城址)에 조성된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이다. 종합문화관, 동물원, 관풍루(觀風樓), 최제우(崔濟愚)동상, 이상화(李尙火)시비, 어린이헌장비, 넓은 잔디밭과 화단 등의 시설물이 있다.
달서구 대곡동에 소재하고 있는 대구수목원은 대구시에서 운영하는 공립수목원으로, 약초원, 활엽수원, 침엽수원, 야생초화원, 화목원, 방향식물원, 괴석원, 죽림원 등 21개의 주제를 가진 전문수목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식물 종수는 현재 목본류 450종, 초본류 1,300종 등 총 1,750종 35만본의 식물을 전시하고 있다.
서문시장은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큰 종합시장으로 각종 섬유제품(직물·의류)을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 약령시장은 조선시대 때 전국 제일의 한약재시장이었던 대구 약령시의 잔영을 간직하고 있는, 남성로 일대에 형성된 시장으로서 약전골목이라고도 부른다. 동성로는 도심에 형성된 대구 제일의 번화가이자 쇼핑가이고, 또한 보행자 전용도로여서 항상 인파로 붐비는 대구의 상징적 거리로 유명하다.
국립대구박물관과 경북대학교박물관은 각각 선사시대 이래 각종 유물을 보관·전시하고 있는 대구의 대표적인 박물관이다. 특히, 대구·경북지역의 역사적 발자취를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관광코스가 되고 있다. 대구박물관은 3개 전시실에 550여 점, 경북대학교박물관은 야외박물관과 8개 전시실에 1,466점의 각종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