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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픽처 깨어있는 조직된 힘
2024년 4월 24일 (글 올린날)
935회 사드배치결사반대 김천촛불집회
김종희 사회자 진행 -
날씨가 8시가 되었는데 쌀쌀하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옆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작합시다.
-의례 및 임을위한행진곡 제창 -
- 박태정 공동위원장 여는 발언 -
반갑습니다. 일상에 바쁘실텐데 자리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땅의 평화를 위해 고생많습니다. 지난 4월 12일에 치루어진 총선에 대한 소감은 시원하고 당연한 결과라 생각합니다. 현 정권은 국가의 주인인 국민을 무시하다가 총선을 통해 응당 징벌을 받았습니다. 권력을 잡으면 이상해자나 봅니다. 총선이 1년만 늦게 되었다면 민주주의가 훨씬 더 뒤쳐졌을까 싶었는데 다행입니다. 대한민국은 많은 분들이 이땅의 민주주의를 만들려고 희생했습니다. 우리도 선대가 쟁취한 이 민주주의를 잘 유지하여 후대에 물려주어야 합니다. 다음주 4월 27일 진밭교에서 소성리 범국민평화행동행사가 열립니다. 그날 바쁘시더라고 이 자리에 계신분들 모두 오시리라고 믿습니다. 건강 잘 챙기시고 4월 27일 꼭 만납시다. 이땅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계속 노력 부탁드립니다.
- 소성리 박수규님 발언 -
맹자의 두 번째 이야기는 여민입니다.
어느 날 맹자가 못가에서 경치를 구경하고 있었는데 양나라 혜왕이 슬며시 다가와서 맹자한테 묻습니다.
“선생님 같은 현자도 이런 경치를 즐길 줄 아십니까?”
맹자의 대답이 그렇습니다. 현명한 사람이라야 이런 경치를 즐길 수 있지 이걸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즐길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서 예로 드는 것이 주나라 문왕이 동산을 만들고 연못을 만들 때 이야기를 하거든요.
문왕이 동산을 만들겠다고 하니 백성들이 다 몰려와서 자기 집의 동산을 만들듯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그래요. 문왕이 천천히 하자 천천히 하자 하는데도 백성들이 서로 신이 나가지고 열심히 그 동산을 만들고 저수지를 만들고 그렇게 했었다고. 그게 어떻게 그렇게 됐겠냐고, 그거는 백성들이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되는 것이지 만약에 백성들과 그렇게 소통하고 교통하지 못했으면 문왕은 그런 정치를 즐길 수가 없었을 거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이에 대비되는 폭군의 이야기를 해요. 하은주 고대 왕국 중에 하나라의 마지막 임금 걸왕의 이야기입니다. 그 걸왕과 관련된 이야기가 주지육림의 고사잖아요. 걸왕의 학정이 하도 심해서 백성들이 노래를 불렀던 것이 그겁니다.
“저놈의 해는 언제쯤 질려나 차라리 저놈이 해도 죽고 나도 죽고 다같이 죽었으면 좋겠다.”
백성들이 오죽 힘들면 임금도 죽고 나도 죽고 같이 죽어버리면 좋겠다고 노래를 하겠어요. 그 정도가 돼버리면 임금이든 신하든 백성이든 이런 정치를 즐길 수 없는 법이라는 말이지요.
이건 맹자가 양나라 혜왕한테 전해준 이야기인데, 조금 더 지나가서 양혜왕 하편에 보면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편에는 양나라가 아니고 제나라 선왕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선왕이 맹자한테 묻습니다.
“옛날에 문왕께서는 동산이 사방 70리의 동산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맹자왈 “맞습니다.”
선왕왈 “그렇게 큰 동산을 가지고 있었어요?”
맹자왈 “그렇지만 백성들은 오히려 그 동산이 작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선왕이 좀 의아했어요.
선왕도 동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선왕의 동산은 사방 40리여서 더 작잖아요. 그런데 백성들의 원망이 자자합니다. 이 40리의 동산을 임금이 독차지하고 있어서 참 불편하고 힘들다고 원망을 하거든요.
그렇다고 하니까 맹자의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옛날 문왕이 사방 70리의 동산을 가지고 있었을 때 백성들은 그 동산에 가서 나무를 해서 재목도 하고 땔감도 하고, 필요하면 들어가서 토끼도 잡고 노루도 잡고 그렇게 했는데 내가 이 제나라에 들어오면서 이 나라에 금지되어 있는 게 뭐가 있는가 물어봤더니 수도 한가운데 40리 임금의 공원이 있는데 그 공원에서 사슴을 죽이면 사람을 죽인 것과 똑같은 처벌을 받게 된다. 그래서 그 공원에는 함부로 들어가면 안된다는 금지 사항이 있다고 들었답니다.
주나라 문왕의 공원은 비록 문왕의 공원이라고 하지만 공유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것은 전체가 같이 공유하고 있는 자산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 제선왕의 40리 공원은 혼자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맹자의 표현으로 이것은 사람이 사는 곳 한가운데다가 함정을 만들어 놓은 거하고 뭐가 다르냐는 거지요.
맹자는 그때 이미 나이가 70쯤 되었고 제선왕은 이십대의 젊은 임금이었거든요. 70쯤 됐으니까 별로 무서운 게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임금에게 대놓고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이 그렇게 수도 한가운데 40리 공원을 독점하고 있다는 것은 백성들에게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는 것 아니냐.
이 두 이야기에서 맹자가 결론으로 맺는 것은 그겁니다.
여민동락이라고 백성들과 더불어 즐거움을 같이 하는 게 정치의 본래 도리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거든요.
사용자가 올린 이미지
노무현 대통령 때 관련된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청와대에 부속 건물을 하나 지으면서 그때는 참여정부니까 그 부속 건물의 이름을 여민관이라고 붙였어요.
그 다음에 정권이 바뀌어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면서 그 건물의 이름을 바꿉니다.
뭐라고 바꿀까요? 위민관으로. 비슷하잖아요. 여민관은 백성과 더불어, 위민관은 백성을 위해서.
그런데 여기에 정치 철학의 차이가 있고 이데올로기의 차이가 있습니다.
여민관은 더불어 같이 함께 한다는 겁니다. 동시에 같이 주체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맹자에 그런 이야기가 나와요.
맹자가 이야기를 할 때는 항상 성선에 대해서 사람은 누구나 선하다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때 반드시 예로 드는 것이 요순이었다. 요순은 중국에서는 신처럼 받드는 성인이잖아요.
그러면서 맹자가 하는 이야기가 요순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인데 요순이 행했던 것을 내가 못한다고 말하는 건 변명밖에 되지 않는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임금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고 백성도 사람이고 같이 어울려서 정치를 해나가는 거고 같이 필요한 요구 사항들을 채워나가는 것이 정치의 본령이다. 이것이 여민이다.
위민이라는 말은 후대에 한나라 때에 등장한답니다. 위민, 백성을 위해서. 그러나 이 말은 정치의 주체는 백성은 이미 아니고 백성은 대상이 되는 거죠. 주체는 임금입니다.
여기에서 여민과 위민의 정치 철학의 차이가 나는데, 노무현 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 바뀌면서 여민관이 위민관으로 바뀌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이름을 바꿔요 여민관으로. 그 다음에 윤석열이 들어서면서 다 때려치우고 용산으로 갑니다.
맹자의 여민사상을 최근의 선거 이야기와 관련해서 제 이야기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독선적이고 고집불통의 윤석열정부는 이번 총선에서 폭망했습니다. 심판을 받은 것 맞습니다. 국민들의 승리이고 민중의 승리였다고 봅니다. 그래서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을 비롯한 야권이 192석에 달하는 막강한 세력을 가진 국회를 만들어내었죠. 그런데 여기에서 과연 우리가 원하는 여민의 정치, 우리가 주체로서 참여하는 정치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8년째 외치고 있는 사드철거의 목소리를 이 국회에서 누가 내줄 것인가, 가까운 구미의 옵티칼하이테크, 화재보험금만 타먹고 도망 가버린 니토덴코 먹튀자본에 대해서 마지막 남은 11명 노동자의 고용을 책임지라고 요구하고 대변해줄 그런 정당이 있을 것인가, 그걸 보면서 이 192석이 우리의 정당은 아니다. 우리의 정치를 할 수 있는 공간은 아니다 이것 때문에 저는 참담했어요. 우리의 정치를 할 수 있는, 우리 세력을 만들어낼 수 있는 투표가 진짜 신나게 즐겁게 떳떳하게 할 수 있는 투푠데 그게 아니고 잘못한 것에 대한 심판은 있지만 앞으로의 대안은 없는 투표는 참담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소성리 투쟁에 함께 하는, 이번 27일 소성리 평화행동에도 오실 녹색정의당 동지들, 진보당 동지들, 노동당 동지들, 그리고 많은 민주노총 동지들, 저는 이 분들에게 정말 바라는 것이 이제 3년 남은 대통령 선거, 지금부터 그 프로세스를 좀 만들어가면 좋겠어요. 내가 찍은 사람이 대통령이 안되어도 좋은데 정말 떳떳하게 정말 기대를 가지고 내가 투표장에 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그런 후보 한사람 만들어 내는 게 그렇게 어려울까 몰라. 그런 프로세스를 지금부터 좀 진행시켜주면 좋겠어요.
맹자의 여민사상은 당시의 한계로 군주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요. 군주가 여민사상에 입각해서 정치를 해야한다는 것인데, 지금은 대통령이 야당대표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참여할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여민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요, 그 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부터 열심히 요구하고 주장하고 투쟁해야한다는 생각입니다.
아까 여민의 상징으로서 주나라 문왕의 공원을 이야기 했는데,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가장 큰자리는 광장이잖아요. 집권자들은 어떻게든지 광장을 막으려고 갖은 수를 씁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부여된 아주 작은 틈이지만 그 광장을 차지하기 위해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나갈 것입니다. 우리는 이 김천촛불집회를 사수할 것이고 소성리집회를 지켜낼 것이고 다가오는 27일 범국민평화행동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낼 것입니다. 사드 뽑고 평화 심는 그날까지 멈추지 맙시다. 감사합니다.
- 소성리 조선동님 연주 -
김천촛불과 항상 함께 하시는 소성리 지킴이 거장의 연주 4곡을 연속으로 들을 수 있었다. 연주와 노래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성인의 삶에 대한 고뇌와 깊이가 느껴진다.
박석민 자문위원 발언 -
오늘 노래 좋네요. 구례에 다녀왔어요. 지리산도 가보면 좋겠는데 거기 올라갈 자신은 없고 그래서 그냥 멀리서 지리산 보고 왔다. 눈이 아픈 초록색을 많이 봤다. 박수규 선생님 얘기한 대로 맹자가 그런 풍광을 즐길 줄 알아야 된다 그랬는데 나는 그런 자격은 없나 봐요. 그거 보면서 너무 좋은데 나라 꼬라지가 왜 이러지? 정치에서 민주당이 잘해서 이겼나요? 윤석열 대통령이 선대본부장 역할을 열심히 해줘가지고 어부지리로 된 것이라 생각하는데, 앞으로 우리 나라 정치가 잘 될까요? 이 진보계 세력들은 앞으로 진보 정치 얘기를 할 수 있을까요? 눈이 아픈 초록색 보면서 주로 드는 생각이 이런 생각뿐이더라. 그래서 나는 풍광을 즐길 자격은 없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4월 21일인데 지난번 얘기하다가 오늘 집회 시간이 조금 남을 것 같으니까 419 얘기를 좀 하면 좋겠다 이런 요청이 있어서 하여튼 시간 되는 만큼 얘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4월 21일날 돌아가신 분이 하나 있어요. 오늘 주기철 목사님이라고 하는 분이 옥사를 하셨는데, 신사 참배를 거부한 이유 때문에 굉장히 존경받는 그런 이제 어른인 목사님이시고.
대비되는 목사도 하나 있어요. 한경직 목사라고 우상은 섬기지 말라고 강요하고 신자들한테 절대 저러지 말라고 한 이 양반은 신사 참배 너무 열심히 했어요. 우리나라 교회가 미국식의 성장주의를 받아들인 게 기독교예요. 그래서 크게 짓고 막 이런 게 이제 도가 지나칠 정도가 됩니다. 영락교회도 대표적인 모델입니다.
한경직 목사는 그 교회의 담임 목사를 했는데, 영락교회 신도들이 만든 조직이 서북청년단이에요. 서북청년당 창립 때 한경직이었던 유명한 연설이 있어요.
뭐 다 생략하고 다 때려잡아라 이래서 제주 가서 작살을 낸 거지요.
사실은 60년대 4. 19. 싸움은 고등학생들이 시작했어요.
다 아시는 대로 제일 먼저 시작한 데가 어디일까요? 대구입니다.
당시 동방의 모스크바라고 불렸던 가장 진보적인 도시였고, 실제로 이제 우리나라 혁명운동의 본산이기도 했던 대구에서 2월 28일 날 일요일인데 등교 조치가 떨어져요.
그리고 모든 공장 다 출근시켜요. 그 전날 토요일날은 일찍 다 퇴근시키고 학교도 일찍 파에서 내보냈는데, 토요일 27일날은 자유당 유세가 있었던 날이고 28일은 민주당 유세가 있던 날이었어요.
그래서 28일은 다 등교를 시키는 거예요. 이 민주당 유세에 못 가게 하려고 했는데, 대구에 있는 많은 고등학교가 그래서 뭐 영화 관람을 하거나 대구상고는 시험을 앞당기거나 합니다. 이에 대구고등학교는 학생들이 반발을 하니까 당시 선생이 짝대기라도 들고 나가 토끼라도 잡아라고 해서 대구고등학교 학생들이 대부분 짝대기를 들고 학교를 갔어요. 그리고 바로 거리에 나갔는데, 당시 경찰이 제일 막기 힘들었던 이들이 대구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고 하네요. 곤봉을 딱 들었는데 애들이 뭘 들었냐 하면 곤봉보다 더 큰 짝대기를 들고 나온 거예요.
대구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없었다면 419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대구에서 대구 경북고등학교, 대구고등학교, 대구상고, 대구여상 등 이런 이제 고등학생들이 한 시위가 있었고, 3월 8일은 대전에서, 3월 1일은 충주에서, 3월 14일은 부산에서 한 8천 명이 모여요. 이렇듯 3 15 부정선거에 대한 이승만의 독재에 대해서 고등학생들이 먼저 싸웠습니다.
그런데, 더 위대하고 큰 싸움이 마산 싸움이에요. 3월 15일 날 13일날은 마산에서 어떤 일이 있냐 하면 마산상고 학생 둘이 시험 답안지 뒷면에다가 “100만 학도여 궐기하라! 자유당 정권 때려잡자!” 이런 것을 막 써가지고 경찰서 등에 막 뿌렸습니다. 그러다 체포되고 이랬던 것이 3. 15. 마산 싸움의 이 전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자유당이 저지른 부정선거는 여러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부정선거를 다 동원한 선거예요. 대리투표의 대리는 기본, 그다음에 투표소에 불 끄고 투표함 바꿔치기로 이른바 올빼미 작전을 합니다. 또한 야당 찍은 투표 용지는 인주 묻혀갖고 뭉개버려 무효표를 만들어 버립니다. 이런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부정선거를 이때 저지른 것입니다.
마산 사람들이 괄괄하기로 유명합니다.
“어 이기 선거가 학 문디 시리 뺄라”그래서 민주당 마산 청년시당에서 선거 보이콧을 결정해요. 오전에 선거 안하고, 이건 끝난 선거야라고 하면서 시위를 시작합니다. 마산에 있는 그 유명한 거리에서 경찰들이 시위대를 막으려고 지프차에서 경찰서장이 마이크를 잡고 시위를 중지하라고 얘기했는데 고등학생 한 명이 지프차에 올라타 서장 마이크를 뺏어요. 고등학생이 구호를 외치려고 하는데 서장이 곤봉으로 막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그래서 시위대와 경찰 간 공방이 계속되었고 저녁 늦게까지 이제 멈추질 않아요.
그러다가 저녁에 해가 다 지고 난 다음에, 카빈 소총으로 총구를 겨눠서 마산 시민 12명이 죽습니다. 3월 15일 날 그곳에서 사망한 학생 중 1명이 김용실이라고 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마산 고등학교 1학년 13반 반장이었는데 병원에 급하게 실려왔는데, 그 병원 간호사들이 이 친구를 다 알아 봅니다. 1년 전쯤에 80대 노인이 쓰러져서 피를 철철 흘리는 것을 보고 뭐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용실이라는 학생이 업고 병원에 뛰어왔었기에, 그 병원 간호사들이 용실이는 내 동생이야면서 다 좋아했던 학생이라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그 김용실이 빨갱이가 돼서 총 맞아 어서 온 거예요.
해당 병원에서는 막 울고 불고 난리가 났고, 애를 살리려고 했는데 결국 김용실이 죽습니다. 김영실이 이제 죽어요. 그런데 조금 전 이야기했던 마산상고에서 작성된 그 답안지를 누군가의 사주에 의해 용실이 주머니에다 쳐넣어요. 이것으로 빨갱이라고 이제 매도하는 거예요. 그 종이에는 인민혁명 만세 이런 거를 막 빨간 글씨로 쓰여져 있었죠.
당시 담당 검사가 조사를 해 보니까 글씨체도 다르고 피도 묻어 있고 하니, 정권 하수인들은 김용실을 빨갱이로 만들려고 했었고, 경찰이 병원장 머리에다 총 구겨놓고 협박까지도 했었습니다.
담당 검사가 조사를 해보니 간호사들이 잘 모르겠다고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간호사 어떤 누구도 그런 사실은 없었다고 하는 것이예요. 간호사 모두 피해가는 게 아니고 정면으로 이제 또박또박 얘기한 거죠. 정확하게 검사, 조사하고 보니까 이것은 잡아온 경찰 글씨체인 걸 확인한 거예요.
하여튼 김용이 이제 죽어요. 그때 12명이 죽었는데 죽은 분들 이름이 틀리면 안 돼서요. 그래서 메모해왔어요. 보고 얘기하는 게 맞을 것 같아서.
김용우라고 하는 학생이 죽는데, 그 아버지가 김위슬이라고 하는 분의 심경을 노래한 시도 있어서 같이 공유해 봅니다. 4살 때 개가해버린 어머니의 집에 나와서 생활하며 구두 닦기로 살아가던 나이 스물에 오성원 20살이에요. 구공탄 장수 아버지를 도아 리어카를 밀면서 야간 중학교라도 가겠다며 밝게 웃던 김영호 19세예요. 홀어머니 밑에서 근근히 고악하며 마산고등학교 졸업장을 거머쥔 지 며칠 안 된 김영준 20대예요. 중학교 졸업 후 무능력한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방을 버리고 기계를 잡았던 전유규 18세. 그리고 앞에 말씀드렸던 김용실 18살 이에요. 그리고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눈과 머리에 최루탄이 박혀서 떠오른 우리가 4.19가 얘기했던 김주열. 김주열이 17살이었죠. 김영길은 18살 이었어. 김효덕 19세, 김상웅 19세, 김종술 17세, 김평도 39세, 강윤기 20세. 다 새파란 청춘들이에요. 국가권력이 이들을 빨갱이로 만들기까지 하려고 했던 거죠.
그리고 김용호 죽음에 대해서 경찰서에 가서 도대체 누가 내 아들을 죽였냐고 따지는 엄마한테 쇠고랑을 채워서 감옥에 가요. 이게 이승만 정권이 저질렀던 악행입니다.
고은이 만인보라고 하는 그 시 중에 김영호의 아버지의 김희수 씨의 심경을 노래한 시가 있어요.
“나는 하루 150판을 버는 막일 뿐이올시다. 구공탄 배달하는 막일뿐이올시다.
허위허위 비탈길 오르면 한겨울에도 내 몸에서 하얀 김이 한 소쿠리씩 피어납니다.
나는 구공탄 친구이다. 나는 구공탄스는 언덕배기 가난한 집들 친구올시다.
내 자식놈은 야간학교 고학생이올시다. 김영우올시다.
구공탄 배달 김이슬의 아들 김영호씨다. 마산 남성동 파출소 찾아가 어느 놈이 내 자식 때려 죽였느냐 어느 놈이 내 자식을 죽였냐고 부르짖는 내 마누라마저 수갑 채워 형무소 보낸 경찰이 대한민국 경찰이올시다.
내 자식 총 맞은 뼈 그대로 땅에 묻었습니다. 마누라는 콩밥 먹고 나왔습니다.
정신이 나가버렸습니다. 나는 구공탄 리어카 끌고 오르막길 오르고 내리막길 내려갑니다.
영호야 영호야 영호야 속으로 불러봅니다. 소리 내어 불러봅니다.
오늘 빈 니어카하고 나하고 비탈길 굴러버렸습니다.
엉엉 울었습니다. 나는 자식 잃은 막일꾼 입니다.”
4·19혁명 당시 정부의 총격을 지켜본 초등학생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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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당시 정부의 총격을 지켜본 초등학생의 시
군과 하나가 된 시위대가 계엄군의 탱크에 올라서 환호하고 있다. ⓒ4월혁명회 3.15 대통령선거 포스터. ⓒ국사편찬위원회 마산에서 시위에 나선 학생들. 경찰은 최루탄으로 이를 막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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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이제 고은이 쓴 시인데 419로 이어지죠.
고등학생들이 도대체 형들은 뭐 하냐? 대학생 형들에게 빗발치는 항의가 있었습니다. 원래 대학생들이 4월 21일 연합시를 준비했다 고 합니다. 그런데 4월 18일날 고려대학교가 먼저 치고 나오니다.
고려대가 그때 이제 나와서 썼던 유인물에 보면 이승만 하야가 없어요. 마산 사태 진상규명해라. 그다음에 이런 부도덕한 정권은 용서할 수 없다 이런 요구가 나오는데, 아시는 대로 정권 깡패들한테 두들겨 맞고 이러면서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인 419가 이제 그다음 날 터진 거죠.
그래서 4 19가 터지고 난 다음에 전체 이제 대학생들이 거리에 나와요. 거리에 나와서 1차 저지선 뚫고, 2차 저지선 뚫고, 3차 저지선에 이르르자 이승만 정권 하수인들이 이제 총을 쏘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피 흘리고 죽는데, 그중에 수성초등학교 지금 그때 초등학교였죠. 수성국민학교 전안승이라고 하는 친구가 학교 끝나고 구경하면서 가방 내려놓고 박수 치고 이러다가 해산을 당했다가 다시 나와서 박수 치는데 찍혔나 그래서 머리에 두 발, 20분에 학교 파하고 그리고 거리에 나갔다가 병원에 수도의대병원으로 옮겼는데 5시에 사망을 해요. 419의 최연소 학생이죠.
4월 26일 날 계엄이 떨어지는데 4월 26일 날 아주 큰 싸움이 2개가 발생해요. 전국에 있는 교수들이 거리 행진을 시작하고, 계엄 상황에서 전안승이 다녔던 수송초등학교 아이들이 100명이 시위에 나와요. 이게 419의 여러 사진 중에 가장 유명한 사진 중에 하나죠. 우리 부모 형제에게 총부리를 들이대지 말라 이런 플랜카드를 걸고 여기 나와요.
그 학교 학생이었던 강명이라고 하는 학생이
“아 슬퍼요라고 하는 시로 쭉 시작되는 왜 언니 오빠들은 가방을 메고 점심도 못 먹고 총을 맞아 죽었나요?
근데 우리들은 압니다. 우리는 왜 언니 오빠가 죽었는지 압니다.
언니 오빠들이 썼던 책상 언니 오빠들이 물려줬던 교실에서 우리는 다시 열심히”
노벨상을 받아야 되는 시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볼 때는 그래서 그런 4 19가 일어나서 우리 한국 근현대사에 하나의 물길을 바꾸죠. 혁명이라고 하는 건 세 가지의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의 어떤 권력도 그냥 권력을 내려놓지 않기 때문에 이 혁명 과정에 사람들이 죽게 됩니다.
그냥 되지 않아요. 선거로 세상이 바뀌어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어떻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정권이 바뀌어야 돼요.
마지막으로 정말 혁명으로 불리려면 해당 시기에 이 싸움을 했던 사람들의 요구가 그 사회에 실현이 돼야 됩니다.
그런 것들이 세계적으로는 러시아 혁명, 프랑스 혁명입니다.
이것은 혁명이다 아니다라고 논쟁하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의 419 혁명은 마지막 요건이 안 된 거예요.
사람들도 많이 죽고 정권도 바꿨지만 통일 세상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으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419 혁명은 미완의 혁명이에요.
지금은 정권을 끌어내리는 싸움까지 했던 사람이 죽지 않았지만 전 세계에서 가장 놀라는 촛불 혁명을 우리는 또 우리 국민들의 힘으로 이뤄냈어요. 정권도 바꿨어요.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세상으로 바꾸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그 과정에 있는 거죠.
이번 4월 12일 선거는 우리 박태정 이장님도 얘기하셨지만 그런 과정에 있는 길목에 서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결국 민중들이 우리의 투쟁과 우리들의 요구를 가지고 새로운 세상을 있다고 저는 감히 생각합니다.
그래서 얘기하신 대로 사드를 뽑고 이 땅의 평화를 만드는 이 싸움은 우리 선배들이 이 땅의 역사를 바로 세우고 민중투쟁이 투쟁이 승리로 이끌어왔던 그런 역사만큼 우리 역시 지금 역사의 한복판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서 싸워나가는 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번에 남원 광안루에 가보니 그곳에 인형을 만들어져 있었는데, 월매 앞에서 이몽룡이 춘향을 버리지 않겠다고 하는 각서를 각서를 받는 인형이 전시되어 있더라고요.
이 예비 사위처럼 우리도 각서 하나 쓸까요? 사드 뽑을 때까지 끝까지 간다. 하여튼 사드 뽑을 때까지 끝까지 가는 겁니다.
사드 뽑고 평화 심자!
최현정 부위원장 발언 -
공지사항입니다.
1. 24일 수요일 사드관련 이동욱 위원장님 외 13명재판 항소심 첫 공판일이 있다. 1심 판결과 같이 나올 거 같아 많은 벌금이 나올 것 같습니다.
2. 27일 범국민평화행동이 2시, 30분 전 민주노총 사전집회가 있습니다.
3. 27일 저녁에는 아사히 후원주점이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석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