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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구층탑(皇龍寺 九層塔)
신라 제 27대 선덕왕 즉위 5년(636)에 지장법사(慈藏法師)가 당나라에 구법(求法) 유학(遊學)가서 오대산(五臺山)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이 꿈에 현신하여 수기(授記)하고
"너희 국왕은 바로 천축의 크사트리아(刹帝利)종으로 이미 불기(佛記)를 받았기 때문에 따로 인연이 있어 동이(東夷)의 오랑캐의 종족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山川이 험한 탓으로 삶의 성질이 추하고 사나워서 사견(邪見)을 많이 믿는다.
그래서 대때로 천신(天神)이 화를 내리기도 하지만 훌륭한 비구가 나라안에 있기 때문에 군신(君臣)이 편안하고 만 백성이 화평하다." 고 말을 마치더니 이내 보이지 않았다.
자장은 이것이 대성(大聖)의 변화인 줄 알고 슬피 울면서 물러갔다.
지장이 따라 태화지(太和地)가를 지나는데 갑자기 신인(神人)이 나와서 묻는다.
"그내는 어찌하여 이곳에 오셨소."
지장법사가 대답하기를
"보리를 구하려 하는 것이외다."
신인이 그에게 절하고 나서 또 묻는다.
"그대의 나라에 무슨 어려운 일이 있소."
"우리나라는 북으로 말갈에 연하고 남으로는 왜국과 이어져 있으며, 고구리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국경을 침범하는 등 이웃의 침략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백성들의 근심 걱정입니다."
"지금 그대의 나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았으니 덕이 있어도 위엄이 없소. 그러한 까닭에 이웃 나라에서 침략을 도모하는 것이니 그대는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시오."
"고국에 돌아가면 어떻게 이익 되는 일을 해야 합니까?"
신인이 말한다.
"황룡사의 호법룡(護法龍)은 바로 나의 맏아들이오. 법왕(法王)의 명을 받아 그 절에 와서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거든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시오.
그러면 이웃나라들은 항복할 것이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여 왕업이 길이 편안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는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죄인을 용서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요.
또한 나를 위해 경기(京畿) 남쪽 언덕에 절한 채를 지어 함께 내 복을 빌어 주면 나도 도한 그 은덕을 보답하겠소." 하는 말을 하고 옥을 바친후 이내 없어졌다.
선덕여왕 12년(643) 계묘에 자장은 당 황제가 주는 불경 불상 가사 폐백 등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선덕여왕께 탑 건립을 주청했다.
국왕은 이에 찬성하여 이찬 용춘(龍春)에 총감독을 맡겼다. 도대목으로는 이 어려운 9층탑을 건립할 명장에 백제인 아비지(阿非知)를 초빙하여 대목 200명을 지휘하여 목재와 석재 철제 찰주를 장만하여 역사적인 거창한 건축 공사를 시작했다.
탐의 중심 기둥을 세우던 날 아비지는 꿈에 조국 백제가 멸망하는 모양을 보았다.
그래서 마음이 아파 일을 멈추니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며 깜깜 어두워지더니 그 속에서 한 로승(老僧)과 장사한 사람이 금전문(金殿門)에서 나와 그 거대한 기둥을 세우고는 중과 장사는 사라졌다.
아비지는 이를 후회하고 지성껏 일하여 9층 목탑을 완성시켰다. 탑의 높이는 철반 이상의 높이 42자 철반 이하 183자였다.
자장이 오대산에서 받아가지고 귀국한 사리(舍利) 100알을 탑 기둥 속과 통도사 계단과 대화사(太和寺)등에 나누어 모셨다.
9층 중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4층은 탁라(탐라), 5층은 응유(백제), 6층은 말갈, 7층은 글단, 8층은 여진, 9층은 예백(고구리)을 진압한다는 호국의 대 서원으로 건립하여 일통삼한(一統三韓)을 이루었으니 이 탑의 영험을 알겠도다.
워낙 높고 상륜부는 쇠로 만들었기에 낙뢰를 자주 맞아 그때마다 중창하니 그 부담이 컸다.
중창 기록을 보면
① 효조왕 7년(698) 6월 벼락 맞다.
성덕왕 9년(7100 - 중건
② 경문왕 8년(868) 6월 벼락. 진동
경문왕 - 중수
③ 고려 광종 5년(953) 10월 벼락
현종 2년(1021) - 중수
④ 정종 2년(1035) - 벼락
문종 18년 (1064) - 중수
⑤ 헌종 1년(1095) - 벼락
숙종 1년(1096) - 중수
⑥ 고종 25년(1238) 몽골 난에 전소
이 탑은 고종시 몽골의 침략으로 절과 함께 불탔다.
『삼국유사』 권 제3, 塔像 제4, 皇龍寺 九層塔
慶州의 神話傳說集成 (文景鉉 崔宰榮 공저)에서
황룡사(皇龍寺) 장육불(丈六佛)
황룡사는 진흥왕(眞興王) 14년(553) 계유년에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지을 때 황룡이 나타나서 궁전을 절로 삼았고 이름을 황룡사(皇龍寺)라 했다. 황(皇)은 황(黃)을 의미한다.
절을 창건하고 얼마 후에 남쪽 바다에 큰 배 한척이 나타나서 하곡현(河谷縣) 실포[絲浦; 지금 울산 실포(谷浦)]에 다았다. 이 배에 올라 검사해 보니 공문(公文)이 나왔다.
그 공문에 적혀 있기를 서 천축(天竺) 아소카왕(阿育王)이 구리 57,000근과 황금 30,000푼을 모아 장차 서가여래(釋迦如來) 존상 3존상을 주조하다가 실패하여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빌기를 부디 인연있는 국토로 가서 장륙존상(丈六尊像)을 이루어 주기 바란다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불상 1구와 협시 보살상 두 구의 모형도 함께 실려 있었다.
이를 발견한 하곡현의 관리가 문서를 갖추어서 국왕께 올려 보고했다.
이에 진흥왕은 사자를 시켜 그 골을 성 동쪽의 높고 깨끗한 땅을 골라서 동축사(東竺寺)를 세우고 세 삼존불을 모시게 했다.
그리고 그 황금과 구리는 서울로 보내서 진흥왕 35년 갑오(574) 3월에 장륙불상을 주조했다. 서가여래상은 무게 35,007근 황금 198품이 들었다.
두 협시보살상은 쇠 12,000근 황금 10,136푼이 들었다.
이는 신라 3보(寶)에 드는 신라 최고의 국보 3의 하나였다.
완성한지 이듬해 즉 황룡사 금당(金堂)에 장륙불상을 안치한 1년 만에 이 장륙 3존 불상에서 눈물이 발꿈치까지 흘러내려 땅이 한자나 젖은 이변이 나타났다.
이 것은 진흥왕이 붕하실 징조였다, 왕은 왕37(576)년 45살에 승하하셨다.
아소카왕(阿育王)이 배에 실어 띄운 삼존불 모형과 재료 및 사연을 적은 공문에 남염부제(南閻浮提)의 16개 대국과 500중국 1,000의 소국 80,000의 촌작을 두루 돌아 가장 부처와 인연 있는 신라에 기착했다.
그래서 진흥왕은 문잉림(文仍林)에서 이 재료를 부어 삼존불상을 구조했다. 그리고 동축사(東竺寺)에 3존불도 황룡사로 옮겨 안치했다.
『삼국유사』 권 제3, 塔像 제1, 皇龍寺 丈六
慶州의 神話傳說集成 (文景鉉 崔宰榮 공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