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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9일 한국사학사학사학회에서 발표할 원고를 올립니다. 강호제현의 질정을 앙망합니다.
이승휴의 ‘간장사기’에 대한 사료 해석과 그 사학사적 의의
정구복(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목차
1.머리말
2. 이승휴의 불교 신앙의 배경
3. ‘간장사기’의 사료적 해석
4. ‘간장사기’의 사학사적 의의
5. 맺음말
머리말
이승휴(1224~1300)는 유명한 제왕운기의 찬자이다. 그가 차지하는 한국사학사적 위치는 김부식(1075~1151), 일연(1206~1289)과 더불어 한국 중세의 3대 역사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생애와 사상을 알려주는 주 자료는 그의 문집인 동안거사집과 고려사 열전 자료이다.
그의 열전 자료는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비교적 우호적인 관점으로 서술되었다. 이 열전 자료의 자료적 근원은 주로 그의 문집 자료라고 할 수 있으나 우리가 문집 자료에서 구할 수 없는 기록이 간간 들어 있다. 또한 그의 문집 자료는 열전 자료를 이해함에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의 열전에는 시가문학가로서 이룬 외교적 업적과 유학적 관료로서 제시한 내용과 관직에서 파면되어 삼척으로 은거한 시기의 생활상, 충선왕대의 관료 기사 등이 주로 서술되었으나 주로 왕과의 관계를 주로 서술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섬긴 왕은 네 왕이다. 즉 고종(재위 1214~1259), 원종(재위 1260~ 1274)과, 충렬왕(재위 1275~1308), 충선왕(재위 1309~1313)이다. 이 중 고종대는 그의 청장년기여서 그가 하급 관료였기 때문에 국왕을 직접 만날 수 없었다. 그리고 충선왕의 관계는 충렬왕 24년 1월부터 8개월간 원나라의 지지로 세자(충선왕)가 부왕을 밀어내고 왕위에 올라 야심찬 개혁정치를 시도한 시기이다. 이때 이승휴는 관료로서 특별한 존경을 받았고, 그에게 높고 명예로운 관직이 주어졌다. 그러나 이는 몇 개월만의 일이었고, 그가 충선왕파에 속하는 행동을 적극 자제했다.
그가 실제 관료 생활은 원종, 충렬왕대이다. 원종은 삼별초 난을 계기로 주목되어 원나라 서장관으로 발탁되어 문장력으로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 때 그는 원에 머물고 있던 세자 즉 다음해 왕에 오른 충렬왕을 직접 만났다. 그 다음 해에는 원종의 승하로 이를 알리는 사신단의 서장관으로 임명되어 원에 가서 세자를 모시고 돌아와 즉위하기까지 최측근에서 정치를 도왔다. 충렬왕이 즉위한 후 대간직에 올라 시정 개혁에 여러 차례 의견을 개진했고, 6년 감찰부의 연명 상소문 사건으로 파면되어 관료생활을 단념하고 고향 삼척으로 돌아가 생을 마칠 때까지 20년을 그곳에서 살았다.
그는 삼척에 돌아오자 마자 곧바로 독서당을 짓고, 여기서 불경 읽기에 전념하여 10년 동안에 1천 상자의 불경을 독파한 후에 쓴 글이 바로 ‘간장사기’이다.
‘간장사기’는 충렬왕에게 축원하여 올리는 글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에는 그의 불교신앙의 모습, 불교 이해의 면면과 충렬왕에 대한 충성심이 소상히 실려 있는 자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료에 대한 학계의 관심은 극히 냉냉하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간장사기’는 그의 문집에 세 번째로 실린 1400여자가 넘는 장문의 기록이다. 불교계에서 깊은 연구를 가치가 높은 내용이다.
그 동안에 그는 제왕운기와 내전록을 저술했다. 제왕운기에 대하여는 그 동안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으나 이 당시 그의 불교 신앙과 관련한 연구는 아직 미미한 편이고, 내전록은 불경 관계 저술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이 자료에 대한 정보나 자료 자체는 현재 전혀 전하지 않고 있다.
그의 열전에 불교 관계 서술은 “그가 삼척 고향 구동 옛집으로 은거한 후에 ‘용안당’을 별도로 짓고 불교 서적을 보았으며, 제왕운기와 내전록을 저술했다 고 한 부분과 (충렬왕) 26년에 졸하니 77세이고 성품이 정직하여 세상에 구함이 없었으며, 부도법(불교)를 지나치게 좋아했다”고 한 부분이다.
열전의 이 내용을 이해함에 도움을 주기 위해 내용의 해석과 더불어 이 자료가 가지는 사학사적 의의를 살피고자 한다.
앞으로 역사학 연구는 원전에 대한 깊은 이해 위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원전 자료를 많이 인용하라는 뜻이 아니고 원전 자료에 대한 깊은 연구를 기본으로 하여야한다는 점이다. 역사학은 있는 자료만을 가지고 연구함에는 문제가 있지만 원전 자료에 대한 이해없이 쓰는 논문은 비판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학계의 많은 질정을 바란다.
그의 문집 자료를 연구함에 크게 도움을 받은 것은 진성규 교수가 역주한 동안거사집이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함을 표한다.
2. 이승휴의 불교 신앙
2.1. 이승휴의 불교 접촉
이승휴가 불교를 신앙하게 된 계기는 12살 때였다. 그는 삼척에서 강화도로 가서 원정국사가 주지로 머물고 있는 사찰에서 좌전과 주역을 유학자 신서로부터 공부하였다. 이 때 사찰문화가 그에게 낮설지 않았다. 이는 기록으로 보이는 자료이지만 그가 삼척에서 태어났을 때 뒷산이 불교식 명칭의 두타산이고, 이 산에는 여러 사찰이 있었던 상황은 그에게 불교와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14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는 그를 대고모인 북원군 부인 원씨에게 맡기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술에 취해 미치광이처럼 거리를 헤매였던 개인적 사정이 불교와 쉽게 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원종 14년 원 세조의 황후와 태자의 책봉식에 가는 사절단의 서장관으로 다녀올 때 요동 지역에서 황애봉에 있는 와불을 바라보며 시로 읊거나 중도인 북경에서 호천사라는 사찰의 9층탑을 올라갔던 경험, 그가 사신단의 일원인 정시랑( 정용장군 정인경)이 아버지 의 기신재에 부의하려 따라 갔다가 그 곳 주지가 ‘목암선사어록’을 보여주기에 이에서 ‘산당신흥시’를 찾아 차운시를 지어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가 경흥도호부(강릉)의 판관겸 장서기에 임용되었을 때 두 차례나 상경하여 팔관회, 동지에 국왕과 재상들에게 올리는 글을 지어 바쳤을 때 불교의 국가적 제례를 직접 참관하였고, 오고 가는 중에 절에 들려 시를 읊었음이 불교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가 7년간 식목도감 녹사로 수도(강화)에서 머물 때와 충렬왕 재위 6년간 국왕이 자주 사찰을 찾아 행하는 불교적 국행 행사를 쉽게 볼 수 있었다.
예컨대 대장경 낙성회에 이를 주관하기 위해 상경한 일연스님과 그를 맞이한 수상 이장용과 부수상 유경이 국왕을 대신하여 그를 맞이했다. 그들은 시를 서로 나누었는데 이승휴도 이 시에 차운해 시를 짓기도 했다. 일연스님과 이승휴는 직접 만나지는 않았지만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시의 서문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승휴가 식목도감 녹사로 있을 때 지은 시이다.
여기에 그는 개인적 슬픔이마음 속에 있었다. 그의 아내와 자식을 잃는 일이 일어났다. 비록 기록을 남기지 않았지만 마음속의 충격은 대단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비극을 그는 마음속에서 홀로 이겨내면서 인생이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계기가 될 수 있었다.
그가 충렬왕 6년 3월 전중시사로서 감찰부에서 연명으로 측근 세력의 비리와 국왕의 사냥 등 중지하라는 글을 올렸다가 그 대표자 심양 등은 심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그 상소문의 발의자를 대라고 했지만 끝까지 대지 않았다. 이 때 감찰사 두 사람은 섬으로 유배 명령을 받았으나 곧 문인들이 건의하여 다른 모든 사람은 다음날 사면되었으나 파면조처를 받은 이승휴에게는 복직이 되지 않았다. 이에 그는 짐을 싸서 삼척의 옛 집으로 돌아왔다. 이 때 그를 추천했던 수상 유경은 아픈 몸을 이끌고 그의 집에 와서 위로를 하자 이에 응대한 시가 동인지문오칠과 동문선에 전하고 있다. 이 시는 그의 문집에는 빠져 있다.
경진년(충렬왕 6년:1280) 올린 글로 파면되자 중찬 유경이 아픈 몸을 이끌고 와서 위로해 주자 이에 사례한 시
수상이 그냥 출타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더구나 해 넘도록 병으로 출입 못한 이가
부축을 받고 오시니 이웃이 괴이히 여기네
골치 아픈 말에 선비들 떠들석
어찌 고집 센 성품이 새롭게 평가되랴
마땅히 앞으로 올 어진이 곧은 말 숭상토록
버려진 이 몸 도리어 축하해주시니
공이 친히 위로해주시니 높은 분 수고롭게 했네
이승휴는 삼척에 돌아와 불교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도 충렬왕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었음을 열전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 예가 1287년에 지어 바친 제왕운기의 여러 서문 등에서 확인된다.
보광정기의 끝에 실은 시 (1289년작)
이 산이여!
기이하고도 안온하도다.
여생이 얼마나 남았겠는가.
청렴하게 물러나니 어찌 재미가 없으리.
성덕을 노래하며 영원히 전함이여.
불경을 읽고 읽어 임금님의 장수를 축원하네.
이곳에서 우리 임금을 받듦이여!
굳이 궁궐에 달려 나가야만 하랴
2.2. 불교와 역사학
불교는 모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공통된 문제인 생노병사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모든 존재는 변하지 않는 것이 없고, 한번 생겨나면 머물다가 없어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국가도 생주괴멸한다고 본다. 이를 극복하는 것은 모든 현상이 ‘공’이라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불교는 인간의 현세적 역사를 중시하지 않는 사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불교는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관념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존재는 원인이 있어 결과가 생긴다는 인과론을 중시한다. 이는 역사학에서 추구하는 경향과 맞닿는다.
그리고 불교는 고려의 국교였다. 서양 중세처럼 교권이 정치권을 압도하지는 못했지만 권력의 최고 지위에 있는 국왕도 왕사와 국사 앞에 무릎을 꿇을 정도였고, 국왕은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외적의 침입이나 한발, 홍수, 지진, 태풍 등의 재해를 면하기 위하여 사찰을 찾고, 고승을 초청하여 각종 법회를 열었다. 사찰은 수도와 산곡에 많이 지어졌고, 관료의 자식 중 한 명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고 자신은 불교를 신앙하는 거사불교가 크게 유행하였다.
불교는 무한한 시간관, 넓은 공간관, 자기와 남을 차별하지 않는 평등성을 강조하였다. 이런 불교 신앙은 고려사회가 다양성을 띤 사회로 만듦에 기여했다.
고려시대의 불교는 현실 정치의 이론에는 약했지만 국가적 행사로 매년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팔관회와 연등회가 개최되었고, 고려 태조의 깊은 불교 신앙은 태조의 유훈이 멸망 시까지 지속되었다. 사찰은 단순히 종교적 기능뿐만 아니라 장례와 제사, 의료행위, 사회공동체의 중심기관으로서 여러 가지 역할을 수행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사용하는 용어도 불교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많다. 세계, 법, 스승과 제자, 공부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3. 간장사기의 사료적 해석
3.1. 간장사기의 작성
이승휴는 1280년 3월 전중시사 직에서 파직된 후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읊으면서 6월에 고향 삼척으로 돌아와 은거하면서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 독서당을 짓고 10월부터 삼화사에서 불경을 빌려다가 읽기 시작하여 10년간 1000 상자의 불경을 읽은 전 과정과 그가 이해한 불교 사상이 담겨져 있는 글이 바로 간장사기이다. 이 글은 1294년(충렬왕 20: 지원 31년: 갑오) 10월에 지어졌다. 그가 삼척에 온 지 14년 만이고, 그의 나이 71세 때이다. 간장사는 자신이 불경을 읽기 위해 지은 좁은 독서당을 문학적으로 꾸며 지은 글이 ‘보광정기’이다. 이 글을 이해함에 도움을 주는 자료가 그의 3남 이연종의 동년우인 최해가 1323년에 지은 ‘간장암중창기’가 이승휴의 문집인 “동안거사집” 잡저에 실려 있다. 이 자료는 간장사기를 이해함에 보충 자료가 될 수 있다.
3.2 간장사기의 내용 해석
‘간장사기’의 원문은 무려 1442 글자로 써진 상당히 긴 글이다. 한문이기 때문에 구독점도 없이 전체 문장이 하나로 연결된 형태이다. 원본의 원문에서 글자를 뗀 부분은 왕의 칭호가 나오는 부분만을 높이기 위해서 줄 바꿔 썼을 뿐이다. 그 내용에 따라 구분하려 하는데 긴 내용을 문단이란 용어의 사용하기에는 문제가 있으므로 ‘영역 문단’이란 학계에 없는 생소한 용어를 사용하였다.
3.2.1. ‘간장사기’의 영역 문단 구분
제1 영역 문단: 간장사에 대한 총체적 서술 (원문은 34글자)
제2 영역 문단: 이승휴가 국왕에게 ‘축원하여 올리는 글’(원문은 1071글자)
제3 영역 문단: 간장사의 상황에 대한 기술(원문은 190글자)
제4 영역 문단: 작성연대의 기술(원문은 13글자)
제1 영역 문단은 “간장사는 전 일의 용안당이고 이는 동안거사가 불경을 열람하려고 지은 것이며 이는 ‘보광정기’에 이미 기술하였다.”고 했다.
제2 영역 문단은 그가 축원하여 올리는 글이라고 해서 쓰고 있다. 이 부분이 어디까지인가에 대해 이론이 있을 수 있겠다. 이 글은 ‘공양시’까지라고 필자는 본다. 왜 그렇냐 하면 첫째 축수한 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공양시 앞부분에서 “엎드려 생각하건대()”이라든가 “엎드려 원하건대()”이라는 내용이 공양시 앞 부분에 있다. 그리고 공양시는 마지막으로 축원하여 상소하는 글의 마지막 결론과 같은 양식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축수하여 올리는 글」은 간장사기의 중심내용으로 대단히 긴 내용이다. 축원하여 상소한 글은 따옴표로 표시할 수 없으므로 이를 구분하기 위해 필자가 존칭어로 바꾸어 서술했다.
이를 다시 내용별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가) 불교의 총론, 나) 석가모니 부처의 일대기, 다) 불경의 결집과 불교의 전파, 라). 고려 태조의 불교 정책과 그 계승, 마) 임금님(충렬왕)에 대한 축수 기원, 바) 공양시이다.
가) 불교의 총론:
(원문)
모든 불경은 ‘참된 말()’이고, ‘진실된 말()’이며, 진여()의 말입니다.. 모든 부처가 백백번, 천번 태어나면서 공덕을 쌓아 다진 바이기에 , , 으로 나타났습니다. 거룩합니다. 입이 아프도록 말함에 대자대비의 마음 아님이 없습니다.
나) 석가모니 부처의 일대기:
(원문)
삼가 살피컨대 저 가유국(가필라국)에 정반왕이 있었는데 첫 왕비는 마야이고, 태자 이름은 실달타였습니다. 첫 걸음으로 7보를 걸으면서 ‘천상과 천하에 존귀하니, 삼도의 모든 문제를 다 구제함을 이 몸이 태어난 후나 태어나기 전의 큰 서원으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전륜성왕이 될 지위를 버리고 온 세계의 범부를 불쌍히 여겨 궁궐의 사람들이 깊이 잠든 밤중에 궁성을 넘어 에 이르러 타고 온 말 을 돌려보냈습니다. 온 나라가 슬퍼하여 백방으로 찾았으나 간 곳을 알지 못 했습니다.(중략)
바야흐로 6년 동안 고행을 닦으니 묘한 결과를 하루아침에 증득했습니다.(중략)
보리수 아래에 앉아서 누구를 먼저 건질 가 관조하는데 그때 대범천이 내려와 설법을 청하였고, 이 설법에 교진여 비구의 무리로부터 사리불 장로의 무리까지 1,200인이 함께 참여하여 여러 나라에 49년간 다니며 교화했습니다. 근본 문제를 문답식으로 설법함에 사람과 하늘이 격의 없이 들어 깨닫고 확신함에 피차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첫 번, 두 번, 세 번 설법으로 건진 바가 얼마인지 그 수를 셀 수 없으며,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의 모든 사람이 제각각 자기를 위해 설법해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중략)
이 세상에 오래토록 머무심이 진실로 마땅하나 아아! 우리 부처님의 삶은 끝이 없고, 본래 태어나고 멸함이 없는 것이지만 현세에 출현한 인연이 한계가 있으므로 모름지기 열반을 보여주시니 옆에 있던 두 나무도 슬퍼하고 천지가 울부짖었습니다.
여기서 석가모니의 출생에서부터 열반까지의 일생을 서술했다.
삼도에 빠진 모든 중생을 다 건지겠다는 염원은 실달타 태자가 전륜성왕의 왕위를 버린 근본 원인으로 보았고, 이는 그가 전생에서 수백번 수천번 생사를 거듭하면서 세운 소원이었다고 했다.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건너감은 현재 우리들에게도 피할 수 없는 의 과정이다. 고집멸도의 길을 제시하는 불교는 여섯가지 길 6바라밀을 제시하고 있다. (즉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라고 한다.)
다) 불경의 결집과 불교의 전파
(원문)
이때 마음을 전해 받은 가섭과 항상 곁에서 모시던 아난이 깨달은 사람들을 모아 경전을 결집하였는데 경전의 첫 머리에 ‘이와 같이 들었다()’고 썼으므로 자신들의 말이 아니고 대개가 부처님의 말씀을 전한 것이 분명합니다. 처음과, 중간, 맨 끝이 모두 착하고, 계율, 선정, 지혜가 원만하며, 크고 작은 함이 모두 공하다는 데에 이치와 본성을 끝까지 들어 다 밝혔습니다. 이미 설법한 것과 지금 설법함과 마땅히 설법할 것이 모두 일맥 상통합니다. 용궁으로 하여금 협조케하였고, 혈족을 가호했습니다. 엄호해준 것은 의 여러 장수들이었고, 널리 전파함은 국왕과 대신이 했습니다.
아소카왕은 8만4천의 금으로 장식한 탑을 세웠고, 국다의 으로 십륙오백 섬의 곡식을 여러 나라에 흩터 주었습니다. 만약 자기 나라를 이롭게 하려 한다면 어찌 이 불도를 통하지 않고 되겠는가 해서 이미 5 천축국에서 시작하여 중화에 이르기까지 넘쳐날 정도로 융성했습니다. 한나라 때에 불교를 받아들여 ... 수·당에 이르러 더욱 성했습니다.(중략)
라). 고려 태조의 불교 정책과 그 계승:
(원문)
우리 태조 신성대왕께서 거룩하고 밝은 성품으로 혼란한 세상에 일어나시니 백성들이 큰 가뭄에 비구름과 같은 희망이 되었습니다. 정의를 들고 정벌에 나서 만민을 도탄에서 구해내셔 통일 국가를 물려주셨습니다. 천지가 은하수로 경축해주고, 남녀가 끓는 솥에서 소생했습니다. 태조께서는 순임금과 같은 자연을 다스리는 현명한 자질로 도선 선사의 지리를 살피는 가르침에 따라 주·군을 정하고 교종과 선종의 사찰을 세우게 했습니다. 명승을 뽑아 법회를 주관하게 하시고, 좋은 경전을 받들어 정성을 표했고, 경전을 새겨서 인쇄하고, 또한 금과 은으로 불경을 쓰게 하셨습니다.(중략)...
지금에 이르도록 선대왕들의 부지런함을 이어받아 충심으로 믿어 봉행하여 봄 가을에 정기적인 행사로 받드니 궁전 내에서 받들고, 관청에서 나누어 맡아 새롭게 편찬한 장경을 만드는 날에 구름처럼 몰려와 공양하고 보시하는 인연은 온 조정에 뻗쳤습니다. 부자들은 재물을 독자적으로 희사하고 가난한 자들은 여럿이 힘을 합쳐 경영하여 복을 빌었습니다. 아름다웠습니다. 그 참여자의 수는 쇠털처럼 많았고, 이를 읽음에 마음을 쓰니 하물며, 부처님의 참뜻을 찾고자 함에 있어서야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마) 임금님(충렬왕)에 대한 축수 기원
(원문)
엎드려 생각건대 저는 젊어서 관청에 나갔다가 세자님께서 왕위에 오를 때 인연을 맺어 열국을 모시고 여행했으나 쌓은 공이 없는데도 계단을 뛰어넘어 좋은 자리에 올랐다가 복이 없어 이곳 산골에서 긴긴 쉼을 쉬고 있습니다. 이웃에 한 절이 있는데 대장경 1천 상자가 있습니다. 전일에는 관직에 매여 마음은 있었으나 틈을 낼 수 없었습니다. (중략)
온종일 책상에 앉아 한 가닥 향을 피우고 경진년(1280) 10월부터 기축년(1289)에 이르기까지 10년 동안 다 읽었습니다. 지식이 얕고, 근기가 미약하여 비록 거룩한 뜻을 제대로 받들지 못했으나 일취월장했으니 섭렵한 좋은 인연이 없겠습니까? 책은 깨끗하고 창은 밝으니 기쁨이 깊고 맛이 오래갈 것입니다. (중략)
충성하고자 하는 바는 나라와 임금님 뿐입니다. 마음으로 한 분의 큰 진전을 생각하고 일심으로 한 분을 길이 연모하니 매권마다 만년토록 항상 평안하시옵기 기도드립니다. 만권마다 임금님이 만수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우리 주상 폐하께서는 말씀과 행위가 광대무변하여 온 세상의 땅끝까지 모두 와서 복종함을 앉아서 보고, 은애가 앞에 가득하니 태평성세의 음악을 길이 들으시고 왕비께서는 금슬의 교화를 밝히시고, 세자께서는 자손을 번창하게 두소서. 또 원컨대 불제자들은 생생 이 마음을 물러나지 않게 하여 걷고 걸어 피안에 길이 다다르게 하소서! 세속에 있던 세간을 나가던 달관한 사람과 함께 노닐어 마음에서 마음을 전하여 크게 깨치옵소서! 이 서원을 가지고 빠진 저들을 건지겠습니다!
바) 공양시
이에 최후의 공양하는 절구를 짓습니다.
얕고 푸른 산 모퉁이에 작은 암자를 짓고
창을 밝혀 십 년 동안 천 상자의 불경을 읽었습니다.
토지를 희사해 간장사라 이름하니
길이 선문의 맑고 좋은 가람 될지어다!
제3. 영역 문단: 간장사에 대한 서술
(원문)
지난 갑오년(1294) 봄에 동네의 입구 쪽으로 옮겨 나왔다. 광천 아래 두 내 사이에 버려진 땅을 안집사의 허가를 받아 간장사에 바치니 전후 합하면 세속의 7~8결이 될 것이다. 이를 가지고 상주하면서 의 황제와 본국의 군주와 공주를 위한 재를 올리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절의 경역이 마을과 접하여 그다지 외로이 떨어져 있지 않고 집은 무릎을 펼 정도로 작고 또한 검소하여 꾸밈이 없으니(중략)...
또 옛 성인이 말하기를 “시대가 말세를 당하여서는 반드시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민가 근처에 띠집을 짓고 참선을 편안히 해라” 한 뜻에 맞춘 것이다.
청컨대 모든 고인달사는 이곳에서 머무소서. 또 나의 자손들도 이 뜻을 잊지 말아야겠다. 뒷 사람들이 연유를 알지 못할가 봐 이에 그 사실을 쓴다.
간장사에 대한 서술을 한 제3. 영역 문단에서는 간장사에 대한 사실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다. 불경을 읽기 위해 용계의 서쪽 산 언덕에 지어진 용안당이 갑오년(1294)년에 다시 동네 입구 쪽으로 옮겨 내려왔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간장사의 1차 이전이고 2차 이전은 이승휴가 사망한 후 세 아들이 특히 출가한 담욱선사에 의하여 증축될 때 다시 옮겨졌다고 한다. 이어서 아래에 있는 아직 개간하지 않은 땅을 안집사의 허가를 얻어 간장사에 시납하니 이전에 희사한 토지를 합하면 무려 6~7경에 달한다고 했다. 자기의 독서당을 바쳐 암자로 삼아 간장사라고 한다고 했다. 이 재물은 상주하는 승려의 비용과 원나라 황제, 그리고 고려 국왕을 축원하는 재()를 올리는 비용으로 쓰라고 했다. 이는 개인이 자기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드는 자신의 원당과는 다른 국가적인 사원의 기능을 자임하였으며 이를 관계자와 후손들이 유념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가문을 위한 개인적인 원당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원종 대의 수상 이장용이 자기 집을 희사하여 절로 만든 일반적 원당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 간장사기를 지은 때는 1294년(지원 31년: 갑오: 원 세조 31년, 충렬왕 20년) 가을이라고 기술했다.
제4. 영역 문단: 이 글의 작성 연대
(원문) 시기는 31년(1294 충렬왕 20) 갑오 10월이다.
이는 본 간장사기의 역사적 자료화에 기본이 되는 기록이다.
4.‘간장사기’의 사학사적 의의
‘간장사기’의 내용을 앞에서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이 장문의 ‘축원하여 올리는 글’은 이승휴가 쓴 한편의 불교사 내지는 불교사상사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사학사적 의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승휴는 1251년(고종 38)에 판각한 고려대장경을 10년간 다 읽은 첫 사람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그가 읽은 1천 상자의 불경이 어떤 것인지, 언제 삼화사에 전해져 보관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없다. 고려 대장경의 이야기는 강화도 보문사에 보관된 한 본이 중국 원나라로 옮겨졌다는 기록이 있을 뿐 고려 시대에 그에 대한 이야기는 달리 전하지 않는다.
이들 경전은 책의 형태로 묶여 지지 않고, 축(두루마리)의 형태로 이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만 축’이라는 표현에서 추리할 수 있다.
대장경 조판에 대하여 구체적 서술은 없으나 전 국민이 참여하였음을 밝혀주고 있는 내용은 중요한 내용을 시사해주고 있다. 이는 한국불교사에서 앞으로 연구해야할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둘째, 간장사기에서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기술한 것은 세계사적으로 최초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는 수많은 불경이 있지만 이는 주로 설법집이이어서 그 일대기에 대한 정리는 아직 없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각종 불경을 통해서 일대기를 서술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각 서술의 근거 내용이 어느 불경에서 나왔는가에 대해서는 앞으로 깊이 있게 연구되어야 할 과제이다. 또한 불경 전체에 대한 심오한 이론은 앞으로 불교학 전문가에 의해 깊이 있게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이승휴가 편찬한 저술 중 내전록이 있다고 고려사 열전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 자료는 국내외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이를 언급한 기록조차 전혀 찾을 수 없다. 단지 그 내용이 불교 경전에 대한 기술일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저술한 제왕운기에는 불교사의 자료가 극히 적다고 알려지고 있는 상황에서 ‘간장사기’는 이승휴의 불교신앙과 불교사상을 이해함에 가장 중요하다는 점이다.
이승휴의 불교신앙이 선종적 경향성을 띄었다는 견해가 있다. 당시 고려불교계의 흐름은 조계종 계통의 선종의 추세가 강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둘째 아들의 출가하여 조계종 계통의 승려였던 점을 감안하면 그런 선풍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몽산덕이의 구두선을 권장하는 서신을 받았지만 그에 대한 답서에서 자신은 75세라는 나이를 들은 것은 완곡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쓴 간장사기는 그의 불교신앙이 불경을 통한 교종적 신앙형태였음을 알려준다.
넷째, 간장사기에는 국왕에 대한 적극적인 충성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제왕운기의 여러 곳에서 읽을 수 있는 공통점이다. 국왕은 국가의 상징이다. 특히 이승휴는 충렬왕이 고려왕조를 중흥할 군주로 기대하였음은 여러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 간장사기는 그런 충성심의 발로를 알려주는 가장 대표적 자료라는 점이다.
다섯째, 간장사기는 고려시대 거사불교의 한 예이지만 이는 거사불교 신앙의 참다운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승휴의 간장사를 통한 불교 신앙은 다른 사람의 원찰과는 다르다는 점을 살필 필요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자료를 보고 고려 후기에 성행한 별장()의 일반적 모습과는 다름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다른 별서가 자신의 농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섯째, 이승휴는 원 간섭기에 원과의 통교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관점에서 비자주적 즉 사대적 속성의 역사가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측면보다는 당시 고려 사회가 나아가야할 역사적 추세였다고 보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간장사기의 축수하는 상소문 중에는 고려의 국왕과 왕비, 세자에 대한 축수만이 나오고 있으나 뒷 부분의 기록에서는 고려 국왕만이 아니라 원나라 황제의 축수를 위한 재를 지내라고 한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요컨대 그의 역사사상과 불교사상은 본국의 것이 중요하므로 이를 중심점으로 삼을 수 있으나 당시 세계적인 문화조류를 이해함이 소중함을 간장사기는 입증해주고 있다. 이 점은 제왕운기를 이해함에도 적용되어야할 문제이다.
일곱째, 간장사기는 그의 상소문이 여러 차례 있었다고 그 개요가 언급되고 있으나 온전한 상소문은 현재 한 건도 전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본 간장사기가 비록 시무에 관련된 내용은 아니고 종교적 기원문이지만 상소문 전체가 온전히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자료적 중요성을 살필 수 있다. 이는 문체에서만이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고려 태조의 불교정책에 대한 상세한 서술은 비록 고려사에 전하는 자료와는 다른 점이 있고, 고려 후기까지 태조의 정치와 종교에 대한 깊은 신앙심이 유지되었음을 보여주는 점에서 역사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태조의 불교 정책은 태조가 당시 처한 정치적 상황을 서술하고 백성을 도탄에서 구해냈다고 하면서 불교 신앙을 서술하고 있다. 태조는 도선 국사의 지리설에 따라 주와 군을 제정했다는 사실은 주군 명칭을 고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의 지리설에 따라 교종과 선종의 사찰을 적절하게 짓게 하여 국토의 안정과 민심을 구원했다는 서술은 태조의 훈요십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승휴는 태조가 ‘명승을 뽑아 법회를 주관하게 하시고, 좋은 경전을 받들어 정성을 표했고, 경전을 새겨서 인쇄하고, 또한 금과 은으로 불경을 쓰게 하셨다’. 하여 적극적인 불교 신앙을 서술하고 있다. 특히 태조가 불교 경전을 크게 중시한 불교 신앙을 강조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태조대의 불교신앙의 전통이 계속 이어져 궁궐 안에 불당을 세우기도 하고, 국가의 각 기관이 업무를 나누어 맡아 불경을 새로이 만듦에 많은 사람이 시주하고 전 관료가 보시하는 인연을 가졌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 불경을 새로이 만들었다고 함은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의 조판을 뜻한다고 판단된다.
여덜째, ‘간장사기’는 그의 역사저술인 제왕운기를 이해함에 많은 시사점을 주는 원전자료라고 할 수 있다.
아홉째, 간장사기는 동해시에 있는 삼화사의 불교신앙에 대한 연구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원전 자료라고 할 수 있다.
5. 맺음말
앞에서 다룬 간장사기는 고려시대의 얼마 되지 않는 문집 중 하나인 동안거사집 잡저에 실린 글이다. 이런 원전 자료를 심도 있게 분석해 이해함은 역사학을 발전시키는 하나의 기초적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후일 15세기 세종대의 ‘’에 선행하는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전거론은 국어학자들에 의해 여러 편의 연구업적이 나왔음에 반하여 불교사에서 그 보다 훨씬 중요한 본 ‘간장사기’의 ‘석가모니 부처의 일대기’의 내용은 아직까지 중시되지 않았음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앞으로 불교학자들에 의해 이 중요한 부처님의 일대기에 대한 전거를 밝히는 연구가 나오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 일대기는 석보상절에 앞서는 작품으로 그 내용과 폭에 있어서 훨씬 풍부함을 알 수 있다.
이 간장사기는 이승휴의 공부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이다. 그는 불경을 읽음에 6바라밀의 ‘’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전 재산을 절에 희사한 것은 ‘’를 실천한 신앙태도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기록은 8만대장경을 독파한 최초의 사람이 이승휴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는 그가 중국에 서장관으로 갔다온 기록인 ‘빈왕록’이 사행록으로 우리나라 대중국 사행의 모습을 상세히 남겨 외교사, 문화사. 지리사 등의 연구에 소중한 기록을 남기 점과 짝하여 ‘간장사기’는 한국 불교사에서 부처님의 일대기를 흩어진 불경 자료를 모아 이루었다는 점은 한국사학사만이 아니라 세계 사학사, 불교사에서 존중되어야할 자료이다.
8만대장경을 10년에 걸쳐 모두 다 읽고 최초로 부처님의 일대기를 정리하였으며, 불교의 전파사를 인도와 중국에서의 상황을 파악하고 고려 태조의 불교 신앙으로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의 상황을 기술한 점은 제왕운기에서 중국사와 우리나라의 역사를 함께 다룬 서술 체제와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한국불교사에서 깊이 있게 연구해야 할 대단히 의미 있고 뜻깊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매 권마다 국가와 국왕을 위해 충성하는 뜻으로 국왕, 왕비, 세자의 장수와 건강을 축원했다.
그의 불교 신앙을 선종적 신앙을 강조하는 경향이 현재 학계의 일반적 논리이지만 본 간장사기는 그의 불교 신앙이 교종적 성격을 강하게 띄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불교 신앙은 불경을 통해 지혜를 얻는 정진이었고, 보시를 실천한 점에서 6바라밀 중 중요한 것을 실행했다고 할 수 있다. 실제 국가와 국왕을 위해 기도하는 수행이었다. 이런 신앙적인 불자의 모습은 제왕운기를 써서 바치면서 올린 글과 이를 간행하도록 주선해준 보림각 학사 윤보, 그리고 당시의 왕조의 유지를 위해 대들보 같은 역할을 한 김방경과의 서신 등에서 확인된다.
(부록)
간장사기 원문
看藏寺者。古之容安堂也。容安堂者。動安居士將披覽海藏而結構者也。語在葆光亭記。
其祝上疏曰。三乘十二分之能詮。是眞語實語如語。諸佛百千生之所鍊。形法身報身化身。盛哉苦口丁寧。无奈悲心惻怛。切以彼迦維國。有淨飯王 元妃號曰摩耶 大子名爲悉達。初行七步曰。天上天下獨尊。度盡三途。是身後身前弘誓。因以棄轉輪聖王之位。憫有海凡夫之流。塡宮採女。昏眠夜半。踰城而出。離地華駵。騰躍天來。奉轡而行。往到般山。遣還乾陟。一國悲哀而罔有所措。百重跋涉而莫得其蹤。我乃歷訪古仙。其所道也異矣。但明前境。宜自我以爲之。方修苦行之六年。圓訂妙果於一旦。牧女獻酪而天王奉鉢。獵夫脫身而帝釋進衣。魔軍万仗奔忙。地維六種震動。坐菩提樹。觀何等可先度乎。時大梵天。請法輪於此轉也。遂乃始自僑陳如比丘之輩。至于舍利弗長老之徒。千二百人俱遊。行化於諸國四十九年。說問答明於本源。人天不隔而听聞。悟訂無間於彼此。初轉二轉三轉。所度不知幾何。上根中根下根。皆云獨爲我說。如許隨機而善化。久於住世者誠宜。於戲。且我佛壽量罔邊。本無生滅。然賢劫化緣有限。須示涅槃。雙樹悲涼。十方號哭。于時惟彼傳心之迦葉與吾侍足之阿雜。招集悟流。結成法藏如是。我聞之字必置經頭。明非自說之言。蓋傳佛語。初中後善。戒定慧圓。大空小空畢空。窮理盡性。已說今說當說。異口同音。付囑龍宮。加持血類。擁護者神部諸將。弘楊在國王大臣。故阿育王起八万四千金䊋之塔。時鞠多呪分十六五百粟散諸邦。如以利吾國乎。何莫由斯道也。旣濫觴於五竺。將盈器於中華。夢見金人。漢帝遣蔡愔而西訪經。馱白馬摩騰。屆洛陽以東傳。有馬晉蕭梁也大興。至楊陏李唐而寢盛。琅函玉軸。如雲委於幾藍。鳳磨龍圖。似鼎安於九土。慧日流輝於當宁。慈雲洒澤於含靈。
我大祖神聖大王端以聖明。勃興衰季。係大旱雲霓之望。擧義徂征救万民塗炭之艱。統業垂統。乾坤繞漢。士女蘇湯。以舜帝在衡之明。用詵師相地之訓。可州州可郡郡。定厥民居。宜敎敎宜禪禪。創諸佛寺。選名僧而主法。奉勝典以歸誠。旣刻鏤以印成。亦金銀而筆授。當水脈山鉗之津會。使鎭而安。豈邦基國柞(祚)苽綿。於是乎在。相承至於今日。皆繘追其先王深彈霄晘之勤。中心信奉。輒設春秋之例。內殿宣揚。抑分職委司而造新修曰(日)。雲供陳无虛白。擅緣覃及滿朝。富焉獨自傾財。貧者群而幷力。經營覬福。美哉。數等牛毛。覽閱游心。況欲尋而佛髓。伏念猥將漆桶。幼扣玄關。端逢乾位之龍飛。謬詣晉臣之蛇從。貞靾巡遊列國。幸積微勞。无階直上靑天。獲參華秩。以予薄相得此長長閑。泣辭丹禁之淸嚴。棲寄碧山之荒僻。隣存一寺。藏有千函。昔爲鞍掌之所牽。有心奚暇。今在山林而无事。宜我知時。甘夕死於朝聞。貨寸陰以尺璧。目勝妙難源之言訓。管以擡窺。心微茫何限之蒼溟。蠡而欲測。六時對案。一炷焚香。自庚辰十月。至今己丑十年而畢覽者。識淺根微。縱未承當於。聖意 月將日就。豈无涉獵之善緣。卷淨窓明。歡深味永。旣劾宣尼之折鐵。焉知罔象之獲珠。不亦樂乎。學而習之。所欲忠者。國與主耳心。心念一人之洪造。一心長戀一人。軸軸祈万壽之恒安。万軸皆呈萬壽。伏願
我主上陛下。云爲无外。坐觀普率之來賓。恩愛滿前。長听昇平之奏曲。坤闈闡琴綏之化。震邸凝椒衍之祥。又願弟子生生无退此心。步步長躋彼岸。於世出世。達者同遊。以心傳心。豁然大悟。乘玆誓願。拯彼沈淪尒。
乃作最後供養絶云。淺碧山隈構小庵。明窓十載轉千函。捨田施納名看藏。永作禪門淨勝藍。
越甲午春月。乃於是出洞口。廣川下二水間。聞有若干空閑地棄。因受決於安集使又納之。前後合爲俗言七八結也。以爲常住齋粥之資。用祝上朝 皇帝御位万年。本國 主上陛下坤闈震邸各保千秋者。且是寺也境接村營。而未甚孤絶。屋纔容膝。而又儉无文。其在高人達士雲棲霞遁之志。恐未副焉。然而皎月舒波。寒泉瀉玉。臨池宴坐。亦足怡神。又古聖 有言曰。時當衰季。必於非山非野人家近處。結草安禪。其意有在。請諸高流。許住錫焉。抑吾子孫。無忘幹蠱。恐後來未識根由。於是乎筆之。
時至元三十一年甲午十月日也。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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