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마감은 살짝 버거웠어요. 카카오 강제 콜 정지 때문에 휴가 없이 달린 겁니다. 사도행전을 마감 했고 한숨 돌릴 겨를도 없이 오늘부터 6년 전(2028) 예레미야를 26장부터 시작합니다. 포스트모던이즘을 잔뜩 기대하고 있는데 예도가 하도 공갈 지랄을 해서 니체-하이데거-마르크스-프로이드를 재 소한하려던 차에 느닷없이 '차이'가 튀어 나와 들레즈를 불러들여 트래킹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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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오남리 맛집 중 하나는 '항아리 갈비탕' 집인데 맛집이라기 보단 보양식이 더 적당할 지 모릅니다. 황제 갈비탕을 주문하면 산낙지와 전복이 추가 됩니다(25.0) 산양삼3뿌리의 존재감도 만만치 않아요. 그러고보니 3일 연속 술 먹는다고 흉보거나 무슨 나쁜 일이 있냐고 물어보지 마시라. 낫띵, 노프러브럼입니다. 분명한 건 술도 먹을수록 느는 것 같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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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지 탕탕이-낙지 볶음-낙지 숙회의 차이를 아시나요? 생물, 매운맛, 담백한 맛 아닌가요? 들뢰즈는 서양 철학 전통 중심의 사유 모델을 뒤집고 생성으로서의 차이 개념에 주목합니다. '차이와 반복'은 이러한 철학적 기획의 일환이며 차이 자체, 반복에 대한 통념 비판, 니체의 영원회귀, 그리고 시간의 세 가지 종합 등을 통해 독자적인 형이상학의 기반을 구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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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가 우선 주목하는 것은 '차이'입니다. 역사적으로 철학자들은 동일성만큼이나 차이에 주목해왔어요. 일반적으로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은 항상 어떤 것이 다른 것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 파악하는 것입니다. 즉, 차이는 이미 존재하는 자기동일성을 전제한 후에 덧붙이는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어요. 가령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종차(diaphora)라는 개념을 제시해요. 종차는 어떠한 종이 다른 종과 다르다는 차이를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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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기서의 차이는 유개념과 종개념이라는 동일성을 전제로 하는 차이입니다 들뢰즈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자기동일적인 실체가 아니라 매 순간 변화하며 달라지는 과정으로 바라바요, 이러한 들뢰즈의 차이를 드러내는 사례로 '루앙 대성당'연작이 꼽힙니다. 모네는 2년에 걸쳐 매일 루앙 대성당 앞의 카페에 앉아 반복적으로 성당을 그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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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려진 것은 서로 같지 않은 30여점의 대성당 그림들이었습니다. 들뢰즈는 차이가 기존의 시각처럼 동일성들 사이의 관계로 이해돼서는 안된다고 주장해요. 오히려 차이는 모든 개체, 개념, 사물들의 기저에서 끊임없이 펼쳐지는 창조적인 과정에 가깝다고 봐요. 존재는 어떤 동일성 간 차이를 줄여가며 하나의 점으로 수렴하는 것이 아니며, 끝없이 스스로를 차이화해가며 발산하는 운동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쾅!쾅!
차이가 생성으로서의 과정이라면, 반복은 어떻게 가능할까? 모든 순간은 저마다 독특하고 매 순간과 다릅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인식 체계는 그러한 미세한 차이들을 담아내기에는 한계가 있어요. 언어의 한계처럼 말이에요. 따라서 인간은 각각의 차이나는 것들을 동일한 것으로 여깁니다. 반복은 끊임없이 생성변화하고 예측할 수 없는 세계를 인위적으로 붙잡는 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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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인간의 경우, 세포가 일정 주기마다 죽어 없어지고 새로운 세포로 교체됩니다. 1년이 지나면 몸을 구성하는 모든 세포는 대부분 새로운 것으로 바뀌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같은 이름으로 부르고 동일한 존재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들뢰즈에게 반복은 동일한 사물이나 사건을 재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통상적으로 무엇인가 '반복'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현재의 맥락에서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재구성하고 재연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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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이를 '재청원'(re-petitioning)이라는 표현으로 묘사해요. 이에 대비되는 것이 '옷입은 반복'으로 끊임없는 차이 자체가 되돌아오는 생성의 과정입니다. 들뢰즈에게 전통적인 반복, 즉 헐벗은 반복은, 차이가 새로운 것을 생성하는 과정을 멈췄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부차적인 동일성이라고 했습니다. 흔히 우리는 시간에 대해 과거-현재-미래라는 선형적인 구도로 이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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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들뢰즈는 시간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함께 종합하면서도 서로 분리되어 상호 연관되는 공존으로 보았어요. 들뢰즈는 이러한 시간 속에서 주체가 어떻게 형성되는가 탐구하는 존재론으로 나아가며, 시간의 세 가지 종합 이론을 제시합니다. 비가 내리는 상황을 가정해.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에 세심히 주의를 기울이면, 각각의 빗방울이 가볍게 표면을 두드리는 소리를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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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는 그 고립된 소리를 하나하나 듣는 대신, 연속적이고 일정한 패턴으로 엮어 하나의 빗소리로 인식해요. 빗방울이 떨어지는 작은 순간들을 하나의 끊임없이 흐르는 비라는 연속적인 감각으로 통합하는 것이지요. 시간의 첫 번째 종합은 독립적인 순간들을 하나의 연속적인 흐름으로 수축시켜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들뢰즈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하나로 연관되었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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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현재라는 기본적인 경험은 수축을 통해서 방금 지나간 과거를 유지시키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습관이나 기대를 통해 끌어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지나간 현재-지나가는 현재-도래할 현재라는 일의적인 구도로 종합되며 '살아있는 현재' 혹은 '시간의 정초'로 불립니다. 살아있는 현재는 고정된 시간 단위가 아니며 지속적으로 과거와 미래를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내는 수축의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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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시간의 두 번째 종합은 과거를 중심으로 이뤄져요. 위에서 제시한 비의 예시로 돌아가보면 비가 그친 직후, 우리는 비가 내렸던 경험을 과거에 있었던 일로 기억하고 그것을 회상할 수 있어요. 아마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상상하거나, 연속적인 비의 패턴이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좋아하는 음악을 다시 듣는 과정을 예시로 들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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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는 구간이나 후렴구가 들려올 때, 우리는 과거의 순간을 종합적으로 떠올리게 돼요. 동시에 그 기억을 바탕으로 다음에 나올 부분을 예상하게 됩니다. 시간의 두 번째 종합은 습관이나 기억을 통해 회상할 수 있는 과거와 이전의 경험에서 종합된 기대를 통해 예상되는 미래 모두를 구성하는 방식입니다. 즉, 첫 번째 종합을 통해 즉각적으로 살아있는 현재를 얻는다면, 두 번째 종합은 그 현재의 일부를 과거의 기억이나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투영으로 종합하고 투영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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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세 번째 종합은 항상 다른 두 가지 종합과 공존하며, 어떠한 현재와 구성된 과거/미래도 결코 완전하거나 안정적이지 않아요. 첫 번째 종합의 살아있는 현재, 그로부터 구성되는 두 번째 종합의 과거/미래의 표상들은 결코 완전하게 포착될 수 없는 잠재성 의해 끊임없이 파괴되고 분열되며 재생산됩니다. 다시 한번 음악에 대한 예시를 들어봅시다.좋아하는 음악에 심취해 익숙한 구간이 들려오리라 마음에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 갑자기 전화가 울리거나 전원이 꺼진다고 상상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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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이를 위해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을 가져옵니다. 앞서 언급했듯 들뢰즈의 반복은 동일성이 아닌 차이 자체의 반복이며, 영원회귀에 대해서도 차이 자체의 회귀로 해석합니다. 살아있는 현재→기억의 회상→미래에 대한 예측이라는 안정적이고 선형적인 구도는 세 번째 종합이 가져오는 예측할 수 없는 변이를 통해 파괴되며, 이는 끝없는 역동성을 지닌 채 차이를 발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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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송달송 조금씩 감이 잡혀가지 않나요? 구조주의 사각지대를 탈 구조주의(포스트모던이즘)가 '차이'로 박살 내고 있어요. 들레즈-데리다-푸코는 모두 니체의 새끼들로 '헤겔의 동일성'이 틀렸다고 냅다 까는 것 같아요. 우리가 사물을 보고 대갈통에 입력할 때 낙지는 모두 다 같은 낙지라고 해석(헤겔)하는데, 노,노! 낙지는 절대 똑같은 낙지가 없다는 겁니다(들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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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대로 언어가 먼저 있고 사물이 나중에 있는 것부터 시작해, 언어와 사물의 독자성을 일일이 분리 하는 것 자체가 언어의 한계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고? 사물은 개별성과 고유성이 있다 해서 어쩌라고? 언어의 폭력성을 반성하라는 얘긴가.
2024.7.1.mo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