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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사이 기온이 10도나 내려갔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기후가 괴물로 변하고 있으니 그런가보다 합니다. 우리 스스로 만들고 있는 작품이 분명합니다. 뿌린 대로 거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겨우 시작 단계일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어떤 현상으로 이어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전히 그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들 있는 듯하여 두려워집니다. 천천히 그러나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눈앞의 사건만 보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내 시대에는 괜찮지 않겠는가, 오는 세대에야 그 때 가서 그 때의 사람들이 알아서 해결하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참으로 무책임하고 무서운 생각 아닙니까? 그런데 하는 꼬라지가 그렇다는 것이지요.
그런가 하면 저쪽 동네 전쟁은 점점 막가고 있는 듯합니다. 그 고통과 아픔은 고스란히 국민들과 주민들이 당하고 있습니다. 누구 때문에 누구를 위한 싸움인지, 왜 힘없는 평민들이 그 짐을 짊어져야 하는지 안타깝습니다. 역시 사람은 어느 곳에 태어나느냐 하는 것이 운명의 반 이상을 가릅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태어나자 굶주림과 싸워야 하는 갓난아기들도 있습니다. 거 참! 뭔 이런 세상이 있는지, 그리고 이따위 세상에 뭐하려 태어나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글쎄 사실 답은 간단합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도 많기에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이 모든 아픔과 슬픔이 끝나는 세상이 오기를 바랍니다. 오기는 할까요? 물론 약속은 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시월에 들어서니 확실하게 달라졌습니다. 가을 맛이 납니다.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지만 일단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 그러니 신나게 헤쳐나가려 합니다. 참으로 멋진 주말입니다. 살아 있으니 행복하세요. *)*
2024년 10월 5일 김종우 목사 드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5 : 43 - 44)
<원 맨>
물론 공식적으로 인정된 직업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단지 실존한다고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직업 아닌 직업으로 알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단순한 ‘암살자’라고 했겠지만 단순한 암살자가 아니라 의뢰를 받아 행합니다. 게다가 그 대가까지 받습니다. 어떤 대의나 개인적인 원한으로 행하는 살인이 아니라 나와는 상관이 없어도 돈을 받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대가를 받는 것이니 단순한 일이나 취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업으로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기괴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을 살해하는 것이 직업이라니 말입니다. 소위 ‘살인청부업’입니다. 그것을 업으로 기업을 차려 운영할 수도 있습니다. 직원은 바로 살인청부업자입니다.
어떠한 이유이든 살인은 사실 범죄입니다. 물론 특수한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 예컨대 우리 독립운동 시 암살을 감행했던 여러 사건들이 있습니다. 그 분들을 우리는 결코 살인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 행한 일이나 그 때의 살인사건은 테러가 아니라 바로 ‘의거’(義擧)입니다. 물론 당사국에서는 다르게 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결코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고 확고하게 믿고 주장합니다. 누구의 사주를 받거나 개인적인 원한을 행사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정체성을 지키고 온 국민의 분노를 담아서 행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무슨 대가를 바란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나선 일입니다.
문제는 그런 일을 행함에 부수적인 희생이 따라올 수 있습니다. 오로지 선한 목적을 위해서 악을 행한다는 논리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소위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말이 좋을 뿐이지 악의가 숨어있기 십상입니다. 그 좋은 예는 바로 공산혁명입니다. 모두가 같이 잘 살자는 목표는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 숙청과 살인을 맘대로 저지르는 일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다 죽이고 혼자서만 잘 살자는 것으로 결론지어질 것입니다. 결국 그래서 소련 공산당이 무너진 것이기도 합니다. 아직도 남은 공산주의국가들은 폭력과 억압으로 백성을 다스립니다. 소수의 배부른 생활을 위해서 말입니다.
사전에서 정보를 찾아보았습니다. 이렇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IRA는 1913년에 설립된 민족주의 군사단체 '아일랜드 자원군'의 승계조직으로 1919년 1월에 창설되었다.’ 수십 년 지내오며 여러 번 변화를 합니다. 그리고 반세기 정도 지나서는 테러조직으로 전락했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그 속에는 그들만의 종교적 갈등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영국의 지배로부터 독립하여 통일공화국을 세우려는 목적을 가지고 시작한 듯합니다. 그러나 대내, 대외적으로 여러 가지 변화와 맞닥뜨리게 되며 자체 안에서도 변화합니다. 해체되었다가도 남은 자들의 활동으로 명맥을 이어갑니다. 결국 커다란 대의보다는 국지적인 문제로 우왕좌왕하며 일개 테러단체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중 한 무리가 중소도시에 침투하여 자기네 활동을 과시하려 테러를 도모합니다. 그 사건으로 뜻하지 않게 어린아이들까지 희생을 당합니다. 신문에 보도가 되고 공개수배도 합니다. 그들의 리더 격인 ‘도이린’과 남동생 ‘커티스’ 그리고 두 명이 도시를 떠나 조그만 시골 커티스의 사돈지간의 친척 집으로 피신합니다. 문제는 커티스가 그 집 어린 딸 ‘모야’를 폭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야와 가깝게 지내는 ‘핀바’가 발견합니다. 그리고 커티스가 이 모녀를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따끔하게 고쳐줄 생각으로 납치하여 외딴 공동묘지로 가서 풀어줍니다. 그런데 칼을 빼어 위협하는 것입니다. 뒤를 따라온 동료‘케빈’이 즉각 사살합니다. 그렇게까지 하려한 것은 아닌데.
동생이 죽은 사실을 알게된 도이린이 화가 극에 달해 살해자를 찾으려 동분서주합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서 발생하는 부수적인 일들에 가감없이 살인과 폭력을 행사합니다. 마지막으로 동네 전체를 박살내고자 합니다. 핀바는 직접 살해는 하지 않았지만 커다란 비극을 막기 위해 협상을 제기합니다. 그 희망을 가지고 동네사람들이 모이는 술집에서 만날 것을 약속합니다. 그 전에 핀바는 케빈의 젊음이 아까워 자기 모은 돈을 주고 멀리 떠날 것을 권합니다. 그런데 그 술집으로 찾아와 오히려 핀바를 구해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요. 도이린이 치근덕거리는 케빈을 쏘아버립니다. 갑자기 총격전이 발생하고 아수라장이 됩니다.
앞서 핀바는 마지막 청부살인에 죽음을 앞둔 자가 마지막으로 남겨준 말에 충격을 받습니다. 자기처럼 그렇게 인생 종치지 말라고 한 말이 못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 케빈에게 넘기고 손 떼려 했습니다. 그런데 모야 모녀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친구처럼 지내던 그곳 경찰관 ‘빈센트’는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통하여 핀바의 정체가 무엇인지 놀랍니다. 일련의 사건이 정리되고 핀바는 빈센트와 그곳 모두에게 작별을 고하고 떠납니다. 정말 조용히 살고자 아무래도 장소를 옮길 필요가 있구나 싶었겠지요. 자신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멀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화 ‘원맨’(In the Land of Saints and Sinners)을 보았습니다. 생각을 요하는 이야기입니다.
성경 왜 읽나요?
세상에서 선교하기가 가장 쉬운 곳이 어디일까요? 우리나라 안에서 전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언어가 다른 타국에서 선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조금 오래 전에 동료 목사님이 인도에 잠시 선교사로 다녀왔었습니다. 그리고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요즘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의 문화이고 사회적 의식이니 말입니다. 참으로 선교하기 쉬운 나라가 인도라는 것입니다. 쉽게, 쉽게 받아들인답니다. 예수 믿으세요. 예, 믿겠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간단한 선교가 어디 있습니까? 알고 보니 그게 아니더라는 것이지요. 그들에게는 수많은 신들이 있답니다. 그 신들을 다 믿는답니다. 예수 하나 더 추가한다고 뭐 달라지는 거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바라고 요구하는 신앙입니까? 아니지요. 세상에 신이 많고 종교가 많지만 우리가 바라고 믿는 것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오, 한 분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종교가 많다고 하지만 제대로 된 종교라면 반드시 경전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신을 소개하고 그 신을 섬기는 예법 등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경전이 없는 종교라면 사실 종교도 아닙니다. 아무튼 경전을 소유하고 있는 종교들은 많은 신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신자들이 과연 자기네 경전을 알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될까요? 우리나라를 예로 보겠습니다. 오랜 전통과 꽤 많은 신자를 보유하고 있는 불교를 생각해봅니다. 불경을 배우고 알고 신앙생활 하는 신자가 몇 %나 될까요? 팔만대장경을 다 배우고 알고 신앙생활 하는 신자는 아마도 유명하다는 스님들 가운데도 드물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걸 다 읽을 생각만 해도 한숨이 나옵니다.
자, 남 이야기할 것 없이 우리 이야기하겠습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우리 하나님은 성경을 팔만대장경 분량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66권 정도로 하여 이렇게 한 권으로 묶어서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이 성경 하나 제대로 알고 신앙생활 하는 성도가 얼마나 될까요? 요즘도 웬만한 교호에서는 1년1독 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줄 압니다. 성도들 입짱은 어떤가요? 벌써 10월인데 어디까지 진도가 나갔습니까? 혹시 출애굽은 하셨나요? 주일 한번 나와서 듣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지요. 수요일까지 나온다 해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인이 아직은 8백 만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는 교회 나온 지 5년, 10년 아니 수십 년이 되었어도 여태 성경 한번 읽지 못한 성도들이 꽤 많을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성경을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 그것은 우리가 성경을 알아야 하는 이유와도 같습니다. 요 5 :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성경을 왜 읽는다고요?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그것이 하나님이 당신 백성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입니다. 그 목적대로 하나님 백성이 성경을 읽고 배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 속에 무슨 길이 있다고요? 영생의 길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잘 먹고 잘 살겠다고요? 그게 아닙니다. 그런 목적이라면 차라리 세상 학원 나가서 세상 지식 배우는 것이 훨씬 빠릅니다. 교회는 잘 먹고 잘 사는 길을 가르쳐주는 곳이 아닙니다. 어떤 길을 가르쳐주는 곳입니까? 영생의 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다고 잘 살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잘 살아서 나쁠 것은 없지요.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이 땅에서 살고 끝나는 인생이 아닙니다.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영생이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하면 죽지 않는 것입니다. 죽고 싶은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죽습니다. 우리가 죽고 싶지 않듯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도 우리가 죽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주고자 하시는 것이 곧 영생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어디에 담아두셨다고요? 성경입니다.
그러면 이 성경을 누가 썼나요? 하나님 말씀이니 하나님이 직접 쓰셨습니까? 그건 아니지요. 하나님이 사람을 시켜서 기록하신 것입니다. 누가 제일 먼저 썼는지 아십니까? 성경 맨 처음 나오는 책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누가 기록하였지요? 예, 모세입니다. 모세는 예수님 오기 약 1,500년 전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처음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BC 1,500년입니다. 그 속의 이야기는 그보다 훨씬 전의 것도 있지만 일단 기록은 주전 천오백 년 시작되었습니다. 모세가 다섯 권을 썼고 그 후 때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 저런 사람 그 때 그 때 불러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의 마지막이 무엇입니까? ‘말라기’ 말라기 선지자가 기록한 것입니다. 주전 약 4백 년의 일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여기저기서 기록한 성경을 모아서 하나로 묶는 작업도 합니다. 그렇게 하여 예수님 오시기까지 구약이 완성됩니다. 그러면 구약성경이 완성되는데 대충 얼마나 걸린 것입니까? 약 천오백 년입니다. 세상에 천오백 년에 걸쳐서 만들어진 책이 있습니까? 얼마나 대단한 책입니까? 신약은 약 백 년에 걸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 한 권이 만들어지는데 얼마나 걸린 것입니까? 약 천육백 년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이 성경을 만드셨습니다. 왜요? 누구 주려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성경을 지금 돈 2-3만 원 가지고 책방에 가면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성경이 흔했습니까, 드물었습니까? 매우 드물었습니다. 더구나 통째로 가지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렇겠지요? 아무나 읽을 수나 있었겠습니까? 성경 구경하기도 힘들고 읽기도 어렵고, 그렇지요? 한 동안 극심한 핍박을 받고 나서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됩니다. 그리고 교황제도가 생기고 이제 사제들이 성경을 독점하게 됩니다. 당시는 라틴어로 번역된 성경이 통용되었습니다. 매우 어려운 문자입니다. 사제들만 배워서 성도들에게 전해줍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면 교회로 사제를 찾아가야만 합니다. 자연히 사제들이 성경을 가지고 성도들의 군왕 노릇을 하게 됩니다.
무엇이든 독점하면 부패하게 됩니다. 교회가 하나님 이름을 팔아서 장사하게 됩니다. 잘 아는 대로 중세의 기독교가 부패합니다. 개혁의 싹이 트기 시작합니다. 바로 종교개혁입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을 믿는다는 기독교가 이 지경으로 부패하게 되었나 보았더니 성경을 교회 사제들이 독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일반 성도들도 볼 수 있게 번역해야 하겠다고 시도합니다. 그러면 기득권을 쥐고 있는 교회와 사제들이 가만있을까요? 절대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 번역 사업을 적극 막습니다. 방해합니다. 번역하려는 자를 잡아 처단합니다. 그러니 성경 번역을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무시무시한 핍박이 전개됩니다.
14세기 영국에 위클리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였지요. 당연히 카톨릭으로부터 이단 정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죽을 때까지 번역을 계속합니다. 당시 인쇄술이 아직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일일이 필사한 것입니다. 값이 꽤나 비쌌지만 신자들은 소지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런데 위클리프 성경을 소지하였다고 해서 많은 신자들이 화형을 당했습니다. 당시 교황 요한 23세는 콘스탄트 공회를 열어서 위클리프 성경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이미 죽어서 무덤에 안치되어 있는 위클리프의 유골을 꺼내서 불사르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그럼에도 현재 170권의 위클리프 성경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정말 얼마나 필사적으로 성경을 필사하고 간직하려고 애썼는지 알 수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키듯 역시 목숨을 걸고 성경을 지킨 것입니다.
영국에 또 윌리엄 틴데일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태어나서 활동을 할 때는 마침 인쇄술이 발명되었던 때입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성경을 연구하며 성경적 진리를 주장하자 카톨릭 사제들이 고소합니다. 독일로 피신합니다. 그곳에서 영문 번역을 해서 성도들에게 보급하려고 합니다. 영국 주교와 사제들이 가만두지 않지요. 쫓아가서 방해하고 인쇄도 하지 못하게 막습니다. 그러나 도망 다니며 성경 번역을 합니다. 1524년 드디어 영어 신약성경을 출간합니다. 짐짝 속에 감추어 영국으로 보냅니다. 영국의 성직자들이 미리 알고 부두에서 찾아내 불사릅니다. 그래도 또 보냅니다. 그 성경을 받아 읽은 성도들이 진리에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성직자들이 틴데일의 신약성경을 금지시키고 결국은 틴데일을 잡아 화형시킵니다. 그의 성경은 나중에 킹 제임스 성경의 기초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성경을 소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앞의 성도들이 이 성경을 가지려고 얼마나 간절하였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 성경이 오늘 우리 손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고 옮기고 번역하고 전달하였는지 생각해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천육백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에 걸쳐서 성경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은 수많은 희생을 거치면서 전달되어 왔습니다. 그리스도가 다녀가심으로 이제 하나님 구원의 역사가 온 세계로 퍼져나갑니다. 그와 더불어 반드시 따라가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이 없으면 무엇으로 하나님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입니까?
요 1 : 1절을 읽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누구라고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우리는 읽고 들을 수가 있습니다. 남편이 해외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고국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합니다. 여보세요! 수화기를 들고 있는 아내는 남편이 보입니까? 요즘에야 스마트폰으로 영상통화를 할 수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도 그냥 전화만 가능했습니다. 전화로는 상대방이 안 보입니다. 목소리만 들립니다. 누구 목소리입니까? 예, 사랑하는 남편의 목소리입니다. 그의 말은 들립니다. 남편에게서 문자가 옵니다. 남편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듣는 것이 그와 같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안 계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 그렇게도 우리에게 말씀하려고 하십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려고? 예, 영생을 주시려고 그러십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을 가볍게, 소홀히 생각하지 마십시오.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피 흘리며 지키고 전해준 책입니다. 처음 기록할 때부터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 예를 보겠습니다. 렘 20 : 7 - 10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 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선지자 예레미야가 당시 처한 어려움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달갑게 여기지 않습니다. 조롱하고 비방하고 핍박하고 고소하려고 합니다. 견딜 수 없어서 이제 하나님 말씀 전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으면 속에서 불 붙는 것 같다고 하지요. 어쩔 수 없이 전합니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이 심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하나님 말씀을 전하려 하면 그 하나님 백성이 듣기를 싫어합니다. 왜요? 옳은 소리 들으면 즐겁습니까, 괴롭습니까? 듣기 싫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순교를 당합니다. 옛날에만 있는 일이 아니지요. 지금도 성경 들고 들어가면 죽이는 곳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어려운 일을 당하면서도 우리에게 성경을 전해주려고 하십니다. 왜요? 영생을 주시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해주려는 그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밥 먹으라고 합니다. 곱게 먹습니까? 그러기를 바랍니다. 나 밥 안 먹어! 그러면 엄마는 그래 먹지 마, 그럽니까? 왜 안 먹는다고 그래? 자 어서 먹어, 착하지 우리 아기 어서 밥 먹어야지. 하면서 쫓아다닙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안 먹으면 누구 손해인데, 왜 안 먹는다고 버팁니까? 그리고 왜 쫓아다니면서 먹이려고 애씁니까? 그게 어미의 심정이고 우리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싫다고, 싫다고 도망 다녀도 쫓아가면서 먹으라고 야단입니다. 안 먹으면 자기 죽는 일인데 하나님이 무슨 상관있습니까? 죽게 내버려두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란 말이지요. 자식은 자기 죽는 줄 모릅니다. 그러나 아비는 압니다. 그래서 쫓아다니며 먹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 어른들이 전도하며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전도를 해도 말 안 듣고 까다롭게 따지니까 하는 말입니다. ‘그냥 덮어놓고 믿어봐.’ 아닙니다. 덮어놓고 믿으면 안 됩니다. 열어놓고 믿어야 합니다. 모르고 믿으면 믿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믿는지도 모르고 믿으면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따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 나가면 자동으로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쉽게 말하려니까 ‘덮어놓고’ 믿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덮어놓고 믿으면 안 됩니다. 내가 무엇을 믿는지, 누구를 믿는지, 왜 믿어야 하는지 알고 믿어야 합니다. 알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을 배워야 하고 들어야 합니다. 답은 하나님 말씀 속에 있습니다. 듣지 않고 읽지 않고 배우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것뿐입니다.
하나님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백성이 왜 망한답니까? 호 4 : 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예수 믿으면 구원이고 영생이라고 합니다. 과연 그런가 보겠습니다. 요 17 :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은 믿는 것? 아는 것? 이제부터라도 듣고 배우며 바로 이런 것들을 고쳐나가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표준은 여태 알고 있는 지식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말씀 곧 성경입니다.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는지 그것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도 주시려고 하는 영생과 구원을 반드시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도 바로 그것입니다. 목자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쳐서 모두가 영생의 길을 제대로 찾아가도록 안내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는 당연히 바르게 배워서 신앙의 목적인 영생의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손에 들려있는 이 성경은 우리 앞에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피를 흘리며 전해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수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피를 담아서 전해주신 너무나 귀한 책입니다. 목적은 하나,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려는 것이지요. 이제 숙제는 가르치는 목자가 바르게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고 성도의 입장에서는 바르게 가르쳐주는 목자를 찾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작 경고하셨습니다. 마 15 : 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우리를 인도하는 목자가 소경인 줄 모르고 따라갔다가는 어찌 됩니까? 같이 구덩이에 빠진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지옥행이란 뜻입니다. 왜요? 잘못된 목자를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냥 무작정 따라가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초림 때 유대인들이 서기관 바리새인들 그리고 제사장들을 좇았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 예수님이 등장했습니다. 사람들이 차츰 예수님께로 가서 말씀을 듣습니다. 그랬더니 기존의 목자들이 좋아했습니까? 결사반대했습니다. 자신이 가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예수님께 가고자 하는 백성들을 한사코 말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꾸짖으셨습니다. 마 23 : 1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이제 생각해봐야 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달랐던 것입니까? 서기관 바리새인들 기존의 목자들이 백성에게 전한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과 예수님이 오셔서 전한 하나님 말씀에 차이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무엇이 달랐지요? 이것을 바르게 깨달아야 지금 우리가 똑같이 당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요 3 : 31 - 32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쉽게 구분한다면 땅을 이야기하는 자와 하늘을 이야기해주는 목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어느 교회를 가든 잘 들어보십시오. 세상 이야기, 땅에서 잘 사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하늘에서 보고들은 천국 이야기, 하늘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는지 분별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세상 이야기 듣자고 교회 옵니까? 아닙니다. 그래서도 안 됩니다. 그거야 집에서 TV나 인터넷 보면 다 나옵니다. 우리가 교회 오는 것은 그 누구도 본 적이 없는 하늘 이야기가 궁금해서 나온 것입니다. 나아가 영생의 길을 알고자 온 것이지요. 그런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하고 세상 복 타령이나 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습니다. 세상 실력으로 목자가 되었을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목자는 아닙니다. 바르게 분별하여 찾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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