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야 여러군데의 문학지에서 추천이란 형태로 작가나시인들이 배출이 되고 등용문이 한결 넓어졌지만 60년대 당시에는 일간 신문사의 신춘문예나 몇군데 안되는 문예지를 통해서 등단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문학을 문학가와 독자로 분리해놓고 작가가 되는 것에 엄격한 기준을 설정해 놓았던 시절이었다.신춘문예, 그것도 중앙의 5대 일간지에 당선이 되어서 문단에 나오는 것을 가문으 영광뿐만이 아니라 중소도시 같으면 그 도시에 천재가 나왔다고 잔치를 벌이는 것도 그리 새삼스런 일이 아닐때 김학섭 작가는 그의 고향인 강릉에서 약관의 20대로 한국일보 신춘문예 관문을 당당히 뚫고 소설가로서릐 장래가 보장이 되는 첫발을 띠었던 것이다.김작가는 한국 단편소설의 개척자인 황순원문하에서 가장 총애를 받는 예비작가로서 습작생활을 할때였다. 그는 늘 우리민족의 분단의 아픔과 전쟁의 참혹함을 전 세계 양심적인 사람들에게 알려 이 땅에서 영원히 전쟁이란 가장 추악한 야만행위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고 그것을 열심히 작품화했던 것이다.그가 신춘문예에 당선을 하자 강릉에서는 일대 잔치를 벌여서 고향의 천재적인 작가를 축하해주었다.그러나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천재적인 작가 김학섭도 이에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여러군데의 잡지에 몸을을 담고 작품을 썼다.그가 쓴 모든 작품의 내용은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사랑과같은 휴매니즘 계통이었다.엄청난 독서력을 갖고 있고 해박한 지식과 예리한 안목으로 그는 역사에 회자되는 글을 쓰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을 했다.그러나 출판사나 독자들은 그의 올곧은 작가정신을 외면하기 일쑤였다.끔찍한 범죄 현장이나 찰라적인 쾌감을 만족시키는 글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좌절 오랜기간 동안 붓을 꺾고 긴 절필생활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 어언 70고래희(古來稀)란 나이가 되었다.그러나 지금도 그는 젊은 시절에 가졌던 작가정신을 잃지 않고 최근에 다시 붓을 단단히 잡았다.분단의 역사와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에게 알릴 평화의 메시지가 담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인생의 말년이라할 지금 소설을 써서 무엇하느냐고 묻지만 그의 답은 단호하다.세상을살가간 흔적과 함께 후세들에게 작가로서의 직무유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대기만성형의 작가로서의 면목이 여실하게 드러난다.그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한번도 경찰서나 법원같은 가고싶지 않은 곳을 드나든적이 없는 한국에서도 유일한 작가이기도 하다.대부분의글쟁이들이 당시 통행금지가 있을때 술을마시다가 통금위반에 걸려 벌금이나 구류를 살았는데 김작가는 이런 흐트러진 일을 해본적이 없다.필자 역시 여러번 벌금을 낸 전과가 있었다. 그것은 그의 성격이 이를 입증한다.열명이서 좋다고 할때 김작가는 소수의견을 내놓아서 그 열명에게 가끔씩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이를테면 남이 사업을 벌이는데 그는 너무 걱정이 되어서 "그거 잘못하면 망한다든가" 하는 말로 경각심을 주는 것이 그렇다.그만큼 그는 조심스럼게 인생을 법률을 철저히 지키면서 살았다.
그가 나가는 대형교회에서 그는 집사일을 하고 있는데 필자가 그를 예우하느라고 장로님이라고 호칭을 했다가 혼줄이 난적도 있었다.그 교회에서 장로란 말이 들어가면 내 입장이 뭐가 되느냐고 화를 냈을뿐 아니라 며칠밤을 분해서 잠을 못잤다고했다.그래서 그 말을 한 친구는 찾아가서 다시는 그런 방정맞은 말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필자는 주위에 오래동안 함께 살아온 분들에게 호칭을 힌등급씩 높여주는 친절을 베푸는데 이분은 그 친절이 오히려 화를 내게 만드는꼴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그를 호칭하려고 이렇게 말한다. 차인태 아나운서(옛날 유명아나운서)옆에서 헌금위원을 하고 있는 헌금특수집사라고...아무튼 이제 그는 인생일대의 역작을 조만간 내 보일것이다. 생이 짧아진 이상 더 이상 미룰수가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한국전쟁과 민족의 나갈길"이란 거창한 작품인데 아마도 이 작품은 그가 오래동안 생각했던 노벨문학상을 겨냥해서 쓴 것이리라.
지잔 해 12월에 예쁜 손녀를 보았다. 칠순에 본 귀한 손녀인 것이다. 손녀의 이름을 짓기 위해서 김작가는 여간 고심을 하지 않았는데 역술인에게 돈을 주고 작명을 하려고 했을 정도이다. 예수믿는 사람이 운수를 믿으면 안되는데 하고 안타깝게 생각하다가 그럼 이양우 시인에게 부탁하라고 권고를 했다. 그래서 이양우선생이 지은 이름이 "현서"이다.얼마나 듣기 좋고 쓰기 좋은 이름인가.아무튼 짧아진 여생을 위해 그는 자신의 문학과 함께 후진들의 문학적 성공을 기도해주는 선비로 충분한 역할을 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