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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이 준 선물
전 호 준
“올해는 가을이 오지 않는가 보지”? 무더위 지친 사람들이 이구동성 푸념처럼 내뱉는 가을 타령이다. 흔히들 즐겨 부르는 유행가 가락같이 온다는 기약 없이 떠나보낸 정인을 애타게 기다리는 하소연 같이 들린다.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다는 입추가 벌써 지났는데도 오히려 폭염은 기세를 더해가니, 기다리는 마음은 한결같으리라.
그래도 입추는 말복의 형님이니, 기다리는 동생에 양보 아닌 양보를 한다 는 샘 치더라도 삼복의 막내인 말복이 지나고 땅에서 찬 기운이 올라온다는 처서가 지났는데도 삼십 도를 웃도는 무더위가 이어지니, 가을 이란 계절은 요원할 것 같은 느낌이다.
뜨거운 뙤약볕은 문명이란 이기에 묻혀 자연의 순리에 역행한 인간에게 보내는 경고등의 불빛같이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뚜렷한 사계절에 금수강산이란 삶의 터전을 조상들로 물려받은 우리로선 유례없이 무덥고 긴 여름이 지구 온난화로 인한 이상기후에 가을이 없어진 것 같은 두려움과 착각 속에 빠져들 만도 하다.
이 지겹고 숨 막히던 폭염이 나에겐 뜻밖의 선물을 안겨준 계기가 되었다.
십 칠년이란 제법 긴 세월 동안 나의 발이 되어주고 온갖 짐들을 가리지 않고 날라주던 정들었던 나의 애마를 홀로 버려두고 돌아오는 길은 허전함을 넘어 미안한 생각마저 든다.
막바지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지난 8월 24일 2016형 현대 투산 새 차를 인수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새 차 특유의 페인팅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비록 고급 차는 못되지만 헌 컨테이너 박스 같았던 고물 화물차에 비하면 막 분양받은 새 A.P.T 같은 차내 분위기에 마음이 들뜬다. 난생처음 조작해보는 오토매틱 기어에 복잡 다양해진 조작 환경, 어리둥절 긴장되어 핸들을 잡은 손에 자연 힘이 들어가고 땀이 난다.
복더위가 최고 절정에 이르던 중복 전날이다. 외출했던 아내가 생닭을 세 마리나 사 들고 왔다. “웬! 닭을 그렇게 많이 사 왔냐는?” 나의 의아해하는 물음에 내일 중복인데 삼계탕을 끓어 복달임을 하잔다.
식당에 삼계탕 한 그릇 값이면 우리 두 식구는 물론 고향에 홀로 계시는 아주버님께도 복달임 삼계탕을 대접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지난해 이맘때쯤 형수님이 돌아가시고 아들 둘 다 객지에 나가 살고, 혼자 사시는 게 편하다며 고향 집을 지키고 계신다.
요즘 세상, 이 더위에 어느 며느리가 복달임 음식을 장만해 시아버지를 찾아올까? 아내의 알뜰하고 가상한 마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른 아침 냉장고에 보관해 두었던 삼계탕 재료들을 아이스박스에 옮겨 담았다. 닭은 기본, 인삼, 황기. 녹두, 대추. 찹쌀, 마늘 등 언제 그렇게 준비를 했는지 아내의 준비성 있는 솜씨가 내심 놀랍다.
가능하면 일찍 가서 끓어드리고 날씨가 더 뜨거워지기 전에 빨리 다녀오자는 아내의 독촉이다. 대구에서 형님이 계시는 고향 집까지는 자동차로 약 시간 반 정도 거리다.
아내가 그렇게 독촉하는 것은 구입한지 17년이나 되는 고물 차량 때문이다. 퇴직 후 소일거리를 위해 미리 장만해둔 자그마한 과수원을 부업으로 관리하느라, 농사일에 필수품인 화물 자동차가 필요했다. 그때 장만한 것이 현대 1톤 포터 더블 캡이다.
화물 적재함에 농산물은 물론 필요한 물품들을 싣고도 필요시 일을 도울 품꾼들을 서너 명은 거뜬히 태울 수 있으니, 농촌에서는 안성맞춤 필수품이다.
퇴직 후 이어진 자두 농사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라 잡다한 고장에도 수리를 해가며 운행했지만 4년 전 여름 갑자기 에어컨이 말을 듣지 않는다.
한여름에 일이 집중되는 자두 농사라 에어컨이 안 되면 정말 고역이다.
궁여지책 30여만 원을 들어 수리했는데도 한해 여름을 겨우 넘기더니 또다시 말썽이다. 10여 년을 넘게 탄 노후차량이라 적잖은 돈을 들어 수리를 해본들 돈이 아깝고 차를 바꾸자니 언제 그만둘지도 모르는 농사, 화물차로 바꾸기엔 머 시기하고 당장 없어서도 안 되는 손발이라 그냥 버티기로 하고 한 해를 보냈다.
무엇이든 손안에 들어오면 완전 폐품이 되어 더는 쓸 수가 없을 때까지 버리지 못하는 알뜰함 보담, 손에 익은 물건에 애착하고 변화된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소심하고 내성적인 나의 성격이 한몫했을지도 모르겠다.
힘든 농사일에 무리했는지 무릎이 아프다던 아내가 협착증 진단을 받고 나서 두 해 전 모든 농장과 촌집을 정리하고 대구 집으로 나왔다.
이제 굳이 화물차의 필요성이 없어지고 부려먹을 만큼 부려먹은지라 차를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만만찮은 가격과 완전 백수가 되어버린 나로선 차를 탈 일이 거의 없어졌다.
그래도 고장 난 에어컨을 빼고 나면 운행에는 별 지장이 없다. 한여름 두어 달만 참으면 휴전선 이북을 제외하곤 어디든지 갈 수 있으니, 주위의 권유와 아내의 종용에도 못 들은 척 외고집으로 버티고 있었다.
아내가 정성껏 끓인 삼계탕을 맛있게 잡수시는 형님을 보며 새삼스레 아내에게 고맙다는 생각으로 형님 집을 나셨다.
창문을 전부 열어 두었지만, 뙤약볕에 몇 시간 달구어진 차 안은 가마솥 그 자체다. 차가 달릴 때는 그런대로 견딜 만하지만 1분 안팎의 신호대기 시간도 너무나 길다.
국우터널을 지나 무태 교를 건너 신천 동로에 들어서니, 이 시간에도 예상외로 조금은 길이 정체된다. 해가 중천을 넘어 서쪽으로 조금 더 기울었으니 조수석에 탄 아내의 얼굴에 뜨거운 뙤약볕이 여과 없이 쏟아진다.
아무리 나이든 사람이지만 여자는 여자다. 괴로워하는 아내를 보니 너무 미안하다, 운전대를 잡은 나 자신 말은 안 해도 참기 힘든 고역이다.
집에 도착한 즉시 현대자동차 의성영업소에 근무하는 삼종질에게 전화를 했다. 몇 마디 상담 끝에 잠시 후 휴대폰 문자로 견적을 보내왔다.
구태에 집착하는 소극적인 성격이지만 한번 마음이 정해지면 일사천리 속전속결,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이 또한 나의 이중성이다.
비록 여름의 끝자락에 산 새 차지만 말은 안 해도 바라보는 아내의 표정으로 보아 그 기분을 알 것 같다.
집에 도착 즉시 아내를 태우고 조심조심 앞산 순환도로 드라이브를 해본다.
완전 선팅으로 도배된 차창과 시원한 에어컨 바람, 8인치 네비에 고속도로 하이패스까지 장착했으니, 별 소득도 못 본 지난 농사일과 고물차 때문에 아내와 같이 제대로 된 오붓한 나들이 한번 못했는데 오늘따라 지난 무더위가 오히려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내년 여름이면 보란 듯이 아내와 같이 가고 싶은 곳으로 마음껏 여행을 해볼 생각을 하니, 어린애같이 마음이 들뜬다.
유례없는 올여름의 폭염이 얼음장같이 굳어있던 내 마음을 녹였으니, 폭염이 나에게 준 귀한 선물이란 생각이 든다. 옆자리에 조용히 앉아있는 아내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진작 차를 바꿀 것이지” 좋아하는 아내를 바라보며 과속 페달에 힘을 더해본다. 2016. 8.
첫댓글 새차 구입 축하합니다. 폭염이 준 선물이라기 보다 아내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족간의 사랑이 글 속에 가득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새차 구입 축하합니다. 아내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족간의 사랑이 글 속에 가득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한석기드림
글 속에서 한 가족에 단란함이 묻어납니다. 삼계탕을 끓여 시숙어른께 갖다드리는 정성 요즈음 세상 몇이나 될까요?
형제간의 우애는 안 사람들이 좌우한다는 옛 어르신들의 말씀이 정답입니다. 아무리 남자끼리 친해도 동서끼리 받쳐주지 않으면 우애가 생기지 않는답니다. 시아주버님께서 얼마나 감동하셨을까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집니다.
선량한 아내와 함께 하는 남편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으니 눈밭선생님도 그 중 한사람인 모양입니다. 형제 간의 우애가 두텁습니다. 행복한 부부가 새차를 타고 달리니 폭염인들 기를 펴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팔도강산 많이 유람 하시기를... 페달 밟는 모습이 선 합니다.
새로운 애마 투산은, 폭염속에 시아주버님을 생각하는 사모님의 따듯한 마음씨로 인해 구매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좋은 새차 구입을 축하드리며 즐거운 가을 나들이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투산이 사모님으로 부터 받은 선물로 생각이 됩니다. 사모님께서 간접으로 동기를 만들어 드렸으니까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최상순드림
형제간의 우애와 부부의살뜰한 정을 보았습니다. 지금의 우리시대에 아내의 헌신이 가장큰 복입니다. 신차로 행복한 여행 많이하시기 바랍니다.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