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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증언하시는 세 가지 증거 요한일서 5:4-12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영상설교: https://www.youtube.com/watch?v=dfxeFeSjGTs(클릭하세요)
동물들은 영역 싸움을 합니다. 힘없는 동물은 강한 동물에게 영토를 빼앗기고 물러나야 합니다. 이런 현상이 우리 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에 풍순이라는 잡종개가 있고 고양이가 다섯 마리 있습니다. 이 아이들도 영역 싸움을 합니다. 개집과 고양이 집을 교회 식당 앞에 마련해줬는데 풍순이가 장악하고 고양이들은 어디서 자는지 모릅니다. 풍순이가 영역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단체 경기를 하면 무조건 이겨야합니다. 군에서는 패배를 용납하지를 않습니다. 전쟁에서 패한다는 것은 생명을 잃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대에서는 경기에서 이긴 팀은 회식을 하지만 진 팀은 단체 기압을 받느라 고생을 합니다.
영적인 세계에도 승자가 있고 패자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싸움에서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세상의 밥이 되고 마귀의 밥이 됩니다.
본문은 승리의 비결을 가르쳐줍니다. 믿음입니다. 4절에 보면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본문 해석의 키는 4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낳으셨다는 말씀에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믿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믿음으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승리하게 하십니다.
믿음에서 중요한 것은 믿음의 대상, 신앙의 대상입니다.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아닌 다른 대상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으면 그 사람은 거듭날 수 없고,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고 멸망할 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나고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예수 그리스도가 믿음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6절부터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증거 세 가지를 말합니다. 성령과 물과 피입니다. 9-12절을 보면 성령과 물과 피는 사람의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이 증거가 중요한 이유는 영원한 생명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물과 피를 통해서 아들을 믿는 자는 내면에 하나님이 주신 증거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습니다. 성령과 물과 피의 증거를 받아드리지 않는 사람은 내면에 하나님이 주신 증거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사망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시는 예수님에 관한 증언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증언은 성령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2:3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예수님을 증거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증거 하시는 분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예수님을 증언하셔서 우리가 믿음을 갖게 하시고 그 믿음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➀신앙생활은 은혜로 하는 것임을 알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분이 오셔서 믿게 하시기 때문에 믿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성령님은 나에게 믿음을 주시고 거듭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은혜입니다. 내가 영적으로 민감하고 머리가 뛰어나서 영적인 진리를 스스로 깨닫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오셔서 증거 해주셔서 믿어진 것입니다.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겸손해야 합니다.
➁늘 성령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신령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엄청난 힘을 발휘했습니다. 사자를 만났을 때는 염소 새끼를 찢듯이 찢었습니다. 나귀턱뼈 하나로 대적 1천 명을 쳐서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힘은 삼손 자신에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믿음으로 살 수 있고 승리생활을 할 수 있지만 성령님을 소멸하면 믿음으로 살 수 없고 승리생활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성령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3대째 신앙의 가정의 장남이 불교신앙을 가진 자매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양가의 반대가 있었지만 자기들이 좋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허락을 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미시간 강에서 보트를 타나가 그만 여자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이 일로 여자 집에서 남자가 고의로 죽인 것이 아니냐며 문제를 삼았습니다. 그러면서 죽은 영혼이라도 처녀 귀신으로 구천에 떠돌게 할 수는 없다며 영혼결혼식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만약 영혼결혼식을 하지 않으면 고소하겠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형제는 영혼결혼식은 하기 싫었지만 할 수 없어서 했습니다. 이런 일은 절대로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입니다.
영혼결혼식을 마친 뒤에 그 형제가 갑자기 귀신들렸습니다. 귀신이 좋아하는 일을 했으니 귀신이 역사한 것이죠. 이 형제가 정신이 돌아서 괴상한 짓을 하니 집안에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가정에서는 부흥사목사님에게 도움을 구했고 목사님은 한주간만 그 가정을 심방해서 기도해주기로 약속했습니다.
목사님이 월요일 밤에 가서보니 그 형제가 히죽 히죽 웃으면서 바보처럼 있더랍니다. 목사님이 형제를 위해서 한참을 기도하는데 갑자기 그 형제가 기도하는 목사님에게 박치기를 팍 해서 목사님이 반짝하는 별을 보고 혓바닥은 이에 물려서 피가 주르륵 흘렀습니다. 목사님이 망신만 당하고 돌아왔습니다.
화요일 밤에는 목사님이 몸무게가 100kg이 넘는 건장한 청년을 데리고 갔습니다. 목사님이 기도할 때 그 청년에게 지켜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목사님이 마음을 놓고 기도하는데 쿵하는 소리가 나더랍니다. 보니까 귀신들린 형제가 건장한 청년을 엎어 쳐서 넘어뜨렸는데 그 청년이 힘을 당할 수 없더랍니다.
수요일 밤이 돌아오는데 목사님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태권도 8단 되는 청년을 설득해서 함께 데리고 갔습니다. 그 형제가 귀신들린 형제를 붙잡고 있다가 5분도 안돼서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파서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도망치듯 가버리더랍니다.
목요일 밤에는 암에 걸렸다가 기도를 통해서 치료받은 믿음이 좋다는 집사님을 데리고 갔습니다. 한참기도를 하는데 집사님이 기도의 문이 막히고 가슴이 울렁거려서 앉아 있을 수 없다고 포기하더랍니다.
금요일에는 목사님이 어떻게 할까 고민이 되었습니다. 포기할까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성령의 감동이 있었습니다. “네가 왜 사람을 의지하면서 주의 일을 하려하느냐? 네가 왜 나를 믿고 내게 기도하지 않느냐?” 목사님은 성령의 음성을 듣고 찔림을 받아서 회개하고 금식하면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밤에 귀신들린 형제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형제가 목사님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쓰러지더랍니다. 목사님이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니 형제가 입에서 거품을 토해내면서 “이 목사 정말 보기 싫어. 이제 더러워서 나간다.”라고 하더랍니다. 그러면서 “그런데 오늘은 억울해서 못 나간다.”라고 악을 쓰더랍니다.
목사님이 교회로 돌아와서 하나님께 엎드려 간절하게 그 형제의 치료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토요일 저녁에 목사님이 형제를 다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에게 들어간 귀신이 “이 질기고 징그러운 목사 보기 싫어서 나는 간다.” 하고는 그 형제를 쓰러뜨리고 나가니. 형제가 치료되어 정상이 되었습니다.
그 사건으로 목사님은 귀신을 이기는 힘은 육신의 힘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능력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 빌려올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오직 기도와 말씀 안에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영적인 싸움은 앞에서 말한 형제처럼 귀신들린 것이 밖으로 드러난 상태에 있는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귀신은 보이게 혹은 보이지 않게 역사해서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립니다. 귀신은 우리의 몸에 붙어서 병을 일으킵니다. 가정이나 사회생활에 고통스러운 문제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마땅히 사랑해야 할 가족들과의 관계를 깨버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우리를 멸망으로 이끌어갑니다. 우리는 영적인 싸움에는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기도에 깨어 있어야 하고 늘 성령 충만을 유지해야 합니다. 늘 성령님을 사모하며 사십시오. 성령의 감동에 순종하며 사십시오. 성령님께서 그런 사람을 승리자로 만드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첫 번째 증언은 성령님이십니다.
2. 하나님의 증언은 물입니다.
요한복음 3:5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합니다. 여기서 물은 거듭남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푸는 것이 합당합니다. 베드로전서 1:23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근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영생을 얻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예수님을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0:31을 봅시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증거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듣고 읽고 묵상하고 고백하고 선포하면 그 말씀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승리생활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 안에서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손에 잡은 볼펜은 강대상 위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손을 떼게 되면 이 볼펜은 넘어지고 맙니다. 신앙생활도 그런 겁니다.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붙들어주시지 않으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믿음으로 서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증언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주님을 알게 되고 믿음 안에서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증언하시는 방법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요즘 테필린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 1189절을 유대인들의 암기 방법으로 암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믿음으로 말씀을 선포하고, 성실하게 암송한다면 그 말씀이 테필린을 하는 사람들을 세울 것입니다. 귀신의 역사가 떠날 것이고, 하나님의 치유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물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복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
3. 하나님의 증언은 피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피 없이는 가질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기록한 성경은 피의 책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빨래를 짜 보라 물이 나온다. 성경을 짜 보라 피가 나온다. 구약을 짜면 짐승의 피, 신약을 짜면 예수의 피가 나온다. 성경은 피의 말씀이다. 기독교의 핵심은 피다. 예수의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 예수님의 보혈의 피를 믿지 않는다면 구원은 없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의 피를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피의 공로를 믿음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➀예수님의 피는 죄사함의 피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죄를 없앨 수 없습니다. 어떤 비누로도 죄를 없앨 수 없고, 어떤 선행으로도 죄를 없앨 수 없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사함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기 위하여 사용하신 것이 예수님의 피입니다. 요한일서 1:7입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➁예수님의 피는 대속의 피입니다.
베드로전서 1:18-19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헬라어로 ‘ajpoluvtrwsi"(아폴뤼트로시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몸값, 속전’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는 속량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속량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몸값을 받고 종의 신분을 풀어 주어 양민이 되게 하던 일’입니다. 노예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를 자유인이 되게 하는 것이 속량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대신해서 자기의 피로 속량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대속이라고 합니다.
1970년대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저는 보지 않았고 관련된 글을 읽었습니다.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아이와 남편을 버려두고 떠났습니다. 남편은 갑자기 혼자 아이를 키워야 되는 입장에 직면했습니다. 처음에는 굉장히 당황하고 허둥지둥했지만 어느 사이에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익숙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떠나갔던 아내가 불쑥 나타나 이혼을 요구하면서 양육권을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 사이에 소송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소송이 남편에게 불리한 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의 변호사가 조언을 했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아이의 양육권을 원하느냐. 집에 가서 종이에 줄을 긋고 한쪽에는 아이를 키우면서 생기는 장점을 써 보고, 다른 쪽에는 단점을 써 봐라. 이 두 가지를 비교해 보고 당신이 정말로 키워야 될 이유가 분명해 지면 이 소송을 계속하자.” 그래서 아버지가 집에 와서 아이를 재운 후에 변호사의 말대로 A4 용지에 줄을 긋고 한쪽에는 장점을, 한쪽에는 단점을 쓰기 시작하는데 장점은 별로 생각나는 게 없고 단점만 떠오릅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직장 생활하는데 제약을 받고, 사생활에 제약을 받고, 아이 봐주는 사람을 구하느라고 늘 신경 써야 되고 등등. 그런데 이 아버지가 갑자기 종이를 내려놓고 자기 아이 방에 가서 잠자는 아이를 꼭 껴안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아빠는 너를 정말 정말 사랑한단다.” 계산은 끝난 것입니다. 사랑 앞에는 어떤 이유도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게 소위 바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저것을 부인해 봤을 때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는 바닥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결론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독생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대속의 피를 흘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대속의 피입니다.
19세기 미국의 전도자였던 D. L 무디가 미국 무신론자협회의 초청을 받아서 강연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무신론자들은 이것이 기독교의 모순을 지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일부러 무디를 초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무디는 강연을 하러 와서 그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성경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정에 대해서 말하고, 자녀에 대해서 말하고, 사랑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냐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리고 강연을 끝내면서 여러분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사람이 있다면 일어나라고 했더니 무신론자 중에 일어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최고봉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대속의 피를 흘려주신 것입니다.
➂예수님의 피는 화목의 피입니다.
욥기 22:21입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조건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덯게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를 의지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과 화목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영국의 찬송가 작가 윌리엄 카우퍼는 여섯 살 때 어머니의 죽음을 체험하고 평생 우울증에 시달리며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으나 매번 실패하고, 결국 33세에 18개월 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 곳에서 그는 성경을 읽다가 로마서 3:25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그는 이 말씀을 읽고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고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후에 그는 그때 일에 대해서 “그 말씀을 읽는 순간 의의 태양이 내게 비춰져 나는 그리스도께서 용서와 의를 위해서 이루신 속죄를 보았다. 기쁨과 감격이 나를 압도했다. 내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고 목이 메어 말을 할 수 없었다. 나는 사랑과 경의에 잠겨 조용한 침묵 속에 하나님을 바라볼 뿐이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날로 그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새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날 그의 인생은 변화되어 정신병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그는 절망의 삶을 딛고 일어나 기쁨과 감격으로 시를 쓰기 시작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258장 “샘물과 같은 보혈은”이라는 찬송가를 그가 지었습니다. 그는 임종 시에 스데반처럼 얼굴이 환하게 빛나면서 “나는 결코 천국에서 쫓겨나지 않는다. 할렐루야!”라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하는 은혜를 받았고, 그 은혜로 자기 자신과도 화목하게 되면서 정신병이 치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화목하게 하는 피입니다.
➃예수님의 피는 승리의 피입니다.
천주교회나 개신교회나 어디를 가든지 십자가가 있습니다. 두 개의 십자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하나는 개신교회에 붙어있는 십자가입니다. 또 하나는 천주교회에 붙어있는 십자가입니다. 차이점이 있습니다. 천주교의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매달려있습니다. 개신교회의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없습니다. 왜 개신교회의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없는 줄 아십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패배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마귀와 죄와 사망과 저주와 질병과 문제를 이기신 승리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흘리신 피는 승리의 피입니다. 예수님이 보혈의 능력으로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면 마귀와 죄와 사망과 저주와 질병과 문제를 이깁니다. 예수님의 피는 승리의 피입니다.
➄예수님의 피는 치료의 피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셔서 피를 흘리신 것이 우리의 치료와 관련이 있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채찍에 맞으셔서 거룩한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 피가 우리를 질병으로부터 치료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치료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육체의 질병만 치료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인간성도 치료해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호주에 가면 ‘딩고’라고 하는 야생 개가 있습니다. 고양이보다는 조금 크고 진돗개보다는 작은데, 4-50마리씩 떼를 지어서 다닙니다. 호주에 있는 과학자들이 이 야생 개를 집에서 키우는 개로 만들어 보려고 시도했어요. 태어나자마자 데려다가 우유를 먹이고 사랑해 주고 쓰다듬어 주고 놀아주었습니다. 이렇게 1년 넘게 사랑해 주었어요. 그런데 1년 6개월이 지나니까 본성이 드러나더랍니다. 딩고개가 사람을 공격하고 물더랍니다. 결국은 야생 개 딩고를 집에서 키우는 개로 만드는 것을 실패했습니다.
죄의 문제에 있어서 인간도 딩고개와 같습니다. 사람은 어렸을 때에는 얼마나 예쁩니까? 방긋방긋 웃을 때는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예쁩니다. 그런데 성장해가면서 미운 짓을 합니다. 옛날에는 미운 일곱 살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미운 다섯 살이랍니다. 조금 더 있으면 미운 세 살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들도 미워하고 시기합니다. 정지욱 형제의 조카는 자기 동생이 태어나서 사람들에게 이쁨을 받으니까 시기심 때문에 사과모양의 양초로 동생을 때려서 기절시켰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죄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많은 교육학자나 심리학자나 윤리학자들이 악한 인간성을 고쳐보려고 학문적으로 연구를 해도 어떤 것으로도 해결이 되지 않는 겁니다. 사람은 변화되는 것 같은데 변화되지 않고 죄성을 그대로 가진 채로 살아갑니다. 어떻게 해야 사람이 새롭게 될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의 피로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내 죄를 씻어준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17에서 사도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교도소에서 간수로 일을 하셨던 박효진 장로님의 간증을 들어보면 주님에게는 못 고칠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아무리 흉악한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면 새로워집니다. 사람을 몇 명씩 죽인 무시무시한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되더랍니다. 보혈의 능력은 인간성도 치료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치료의 능력이 있습니다.
⑥영원한 효력의 피입니다.
히브리서 9:12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의 피의 능력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한 번 구원 받으면 영원한 구원이고 한 번 천국에 들어가면 영원한 천국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기분 나쁘시다고 죄사함을 취소하거나, 영생을 취소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분이 상하셨다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에서 제외시키시거나 천국에서 지옥으로 던져버리시지 않습니다. 결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피의 효력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자신의 내면에 하나님의 증언이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먼저 성령입니다. 나는 성령을 받았는가? 내 안에서 성령님께서 믿음을 주고 계시는가? 두 번째는 물입니다. 나는 물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가? 내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고 있는가? 세 번째는 피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속죄의 피를 믿는가? 그 피가 내 안에서 늘 증거하고 있는가?
성경을 들고 믿음의 고백을 하겠습니다. “나는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믿습니다. 나는 성령님을 사모합니다. 나는 물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남을 믿습니다. 나는 죄를 사하는 예수님의 피를 믿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피로 승리합니다. 나는 영원한 예수님의 피로 치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