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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충북불교를 사랑하는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이암 전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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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삼가동에는 화운사(華雲寺)라는 예쁜 절이 있다. 화운사는 특히 봄이 예쁜 절이다. 다양한 꽃이 만개할 때는 사진작가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진다.
화운사는 한 때는 비구니 강원이 있었고, 최근까지 글로벌 비구니 인재를 양성하는 국제불교학교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화운사는 그렇다고 유구한 역사를 가진 천년고찰은 아니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 수원에 살던 우암 차재윤 거사가 멱조산 자락에 조그만 법당을 짓고 화운사를 창건했고, 창건 후 지명스님이 선원과 강원을 운영했으며, 1985년 강원이 폐쇄됐지만, 이후 2011년 국제불교학교가 설립되면서 비구니 교육도량으로서의 유구한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사찰이다. 창건 100년이 되지 않은 절이지만 대웅전에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여래(아미타불, 약사여래)가 봉안되어 있어 고찰의 면모를 갖추고 있기도 하다.
용인 화운사 주지 선일스님. 사진=장명확 이곳에 주지로 부임해온 선일(禪壹) 스님은 어릴 적부터 화운사에서 자라며 학교에 다녔다. 타고난 청아한 목청에 명석한 두뇌, 준수한 외모 등으로 일찌감치 화운사를 책임지고 끌어갈 법사의 재목으로 인정받았다. 선일 스님은 학문에 뜻을 두어, 인도로, 스리랑카로 유학을 한 후 20년 만에 박사학위를 두 개나 들고 들어왔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찾아온 병마(암)로 죽을 고비를 넘기는 또 하나의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그러는 사이에 스님을 그렇게 아꼈던 노스님(지명스님)은 입적에 들었고, 가까스로 병마를 이겨낸 후에 화운사로 돌아와 주지소임을 맡았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의 나이가 된 선일 스님은 화운사의 주지 자리가 언젠가 한 번은 짊어져야 할 숙명 같은 것이라고 여겼지만, 막상 소임을 맡으면서 화운사를 명실상부하게 재건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봄이 아름다운 절 화운사에 새로운 봄기운을 들이겠다는 선일 스님의 구상은 역시 교육을 통한 도량의 재건이 뼈대를 이루고 있다. 특히 화운사는 아이들에게는 더 없이 신나는 놀이터로 절 앞에 대학교 운동장만한 마당이 있어 맘껏 떠들며 뛰놀 수 있다. 어린이들에게 화운사는 극락과 같은 곳이다. 어른들에게는 큰소리로 떠들지 말고, 경내를 아무 곳이나 허락 없이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지만 아이들만은 예외다. 이런 아이들에 대한 ‘특혜’는 봄이 예쁜 절에 봄기운을 몰고 올 주인공은 아이들이라는 선일 스님의 소신 덕에 가능했다.
봄기운이 차츰 고개를 내미는 입춘 전전날, 용인의 화운사를 찾았다. 화운사 주지스님이 빠알리어 삼장을 막힘없이 암송하고 강의하는 능력을 가진 대단한 분이라는 명성은 이미 테라와다불교 수행을 하는 분들을 통해 들어왔던 터라 선일 스님을 만나러 가는 길은 내내 설렜다.
이윽고 주지스님과 만나는 시간. 바쁘게 강의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서는 선일 스님의 미소가 봄꽃처럼 해맑았다. 시원시원하게 탁 틘 목청이 인상적이었고, 검은 눈동자는 유난히 밝게 빛났다. 50대 중반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젊고 활기찬, 더구나 오랜 암투병에 시달린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많이 아프셨다고 들었는데, 모습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선일 스님은 화운사의 주지로서 절 운영에 대한 구상도 마련해 놓았다. 그 첫 구상이 절 뒤편에 자리한 삼장원을 초기불교를 공부하는 중심도량으로 활용해 한국불교계에서 테라와다의 봄을 가꿔나가겠다는 원력이다. 또한 지금 국제불교대학 1학년 학승들이 사용하는 학사에는 국제불교대학이 폐교하는대로 불교대학을 개설해 지역불자들에게 올바른 불교교육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화운사는 몇 해 전, 절 앞으로 거대한 송전탑이 지나가는 문제로 언론에 등장한 적이 있었다. 불교계의 강한 반발로 송전탑이 절 앞으로 가까이 지나가는 것은 일단 면했지만, 절 앞의 경관은 흉물스런 철탑으로 인해 예전만 같지 못하다. 그러나 선일 스님은 크게 개의하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문화나 환경적인 면에서도 선진국이 되면 철탑은 언젠가 지하로 들어갈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광활한 마당은 그대로 있고, 절은 지역 주민들의 포근한 안식처요 수행처가 될 것이니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도에서 빠알리어와 산스끄리뜨어를 공부하면서, 불교를 제대로 공부하려면 산스끄리뜨어, 빠알리어, 한문, 일본어 등을 모두 알아야 불교공부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는 선일 스님은 그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언어는 빠알리어라고 강조했다. 인도에서 유학한 후 다시 스리랑카로 간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잘 알다시피 한국에서는 불교용어를 애매하게 사용해요. 담마를 다르마라고 부르는데 왜 그렇게 부르는지, 그 이유도 제대로 모르고 쓰고 있는 것 같아요. 닙빠나도 니르바나라고 부르고 있잖아요. 아마도 산스끄리뜨 식의 발음을 사용하면 왠지 ‘있어 보인다’는 착각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부처님께서는 대중이 알아듣기 쉽도록 그들의 수준에 맞는 언어를 만들어서 사용했다. 산스끄리뜨어로 부처님의 말씀을 사용하자는 제자들을 꾸짖은 일도 있었다. 선일 스님에 따르면, 인도에서는 브라흐마나를 포함해 모든 사상을 총칭해서 다르마라고 표현한다. 부처님의 가르침만을 다르마라고 하지 않는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르마가 아닌 담마라고 표현해야 맞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도 한국의 지식인 불자들은 다르마라고 해야 뭔가 더 있어 보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국대학교에 다르마칼리지라는 것이 있는데 시급히 담마칼리지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 선일 스님의 지적이다.
“불교가 인도에서 망한 후 인도는 다시 스리랑카에서 불교를 역수입했습니다. 붓다고사와 같은 분들이 빠알리어를 산스끄리뜨화했습니다. 대승경전들은 전부 산스끄리뜨어로 씌어졌습니다. 그러나 오리지널 산스끄리뜨어는 아닙니다. 글자는 산스끄리뜨어인데 내용은 빠알리어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빠알리어를 모르면 산스끄리뜨어 경전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도와 스리랑카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선일 스님에게 원치 않는 ‘손님’이 악몽처럼 찾아왔다. 앞서 언급했지만, 암에 걸린 것이다. 이후 선일 스님은 주로 암 요양원에 머물렀다. 처음에는 암 요양원에 가기가 몹시 싫었지만 “기왕 암에 걸렸으니 아픈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분들의 아픔과 생각을 알아보자”는 생각으로 요양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기왕에 이리 된 상황에서 암 박사가 되어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요양원은 서울 근교에 있었는데, 스님은 거기에서 듣기 싫은 원망도 많이 들었다고 토로했다. 요양원에 가서도 승복바지 입기를 고집했던 선일 스님에게 사람들은 ‘중도 암 걸렸네. 중이 왜 암이 걸리나? 고기도 안 먹는데’라며 놀려 댔다. 그 때 스님은 ‘승(僧)은 병에 걸리는 것도 일반인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매주 일요일마다 목사들이 요양원으로 찾아와요. 그래서 불자들도 아무도 불자라고 밝히지 않는 거예요.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주변에 절이 있는지 찾아보았죠. 마침 가까운 곳에 절이 하나 있어서 그곳에 불자 환자들과 함께 다녔어요. 그런 덕에 불자가 아닌 것처럼 보였던 사람들 가운데 불자들이 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 즈음, 중앙승가대 교수인 보각 스님이 화운사에 매달 와서 법문을 하셨는데, 마침 당시 주지 도현스님(현재 도감)이 법문을 들은 것이 선일 스님이 다시 화운사로 돌아오는 계기가 되었다. 보각 스님이 법문에서 “젊은 스님이 참 안 됐다. 외국에 가서 공부도 많이 한 비구니 스님인데, 그만 암에 걸려서 머물 곳도 없이 곤경에 처해 있다”고 소개하며 ‘승려복지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것이다. 이를 들은 도현 스님이 보각 스님에게 “혹시 그 스님이 선일 스님이 아니냐?”고 물었고, 마침내 선일 스님은 어릴 적부터 살았던 화운사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그 때 도현 스님은 화운사에 사시는 어른스님들에게 “선일 스님을 화운사로 불러와야 한다, 바깥에서 죽게 할 수는 없다”고 설득했다. 병 간호에 대한 어른 스님들의 우려가 컸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참 서글펐지요. ‘그렇게 어려서 출가해서 외국 가서 죽어라 공부해서 박사 2개 따오면 뭐하나? 병에 걸려 다 죽게 되었는데…’ 하는 이야기를 심지어 도반들까지 하더라고요.”
스님은 그 당시 절에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어차피 죽을병인데 푹 쉬어보기라도 하자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지리산의 한 빈집으로 들어간 것도 그런 마음 때문이었다. 그동안 쉬지 않고 공부만 했으니 푹 쉬고 싶을 만도 했다. 그러나 암은 점점 악화되었다. 고통은 갈수록 더해갔다. 암 분야 최고의 교수로부터 초급속도로 퍼져 ‘살 수 없다’는 진단까지 받았으니, 지리산으로 찾아들어가는 것 외에 달리 선택할 길도 없었다. 어차피 죽을 거 2개월 동안 잠이나 실컷 자자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암이 점점 악화되면서 고통이 극심해져갔다. 도저히 견디기가 어려웠다. 이리저리 인터넷으로 병원을 알아보다가 가장 예약이 빠르게 잡히는 삼성병원으로 달려갔다. 이미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고통이 심했다. 압박붕대로 가슴부위를 칭칭 묶고 차에 올랐다. 한 발짝도 가지 못할 정도로 아팠는데, 막상 그렇게라도 나서니 가지더라고 스님은 당시의 참담했던 상황을 회고했다.
환부를 본 의사들은 놀랐다. 암이 온몸에 다 퍼져서 다른 방법이 없겠다며 방사선 치료 분야의 최고 권위자였던 최 아무개 교수라는 분에게 가보라고 했다. 선일 스님의 환부를 살펴본 최 교수는 ‘어떻게 고통을 참았느냐?’고 물었다. 초연해 보이는 모습에 통증을 이긴 방법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선일 스님은 극한의 고통을 이기기 위해, 그보다 조금은 덜 고통스러울 것같은 ‘죽염을 환부에 털어놓는 방법’으로 고통을 참았다고 말했다. 스님의 말을 들은 의사는 말문을 잇지 못했다. 어이가 없었던 모양이다. 환부에 죽염을 뿌렸을 때의 살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의 크기를 모를 리 없는 의사로서는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최 교수는 “현재로서는 고통을 줄여드릴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솔직하게 말해주는 이 의사 선생님에게 왠지 믿음이 갔고, 이 분에게 진료를 맡기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 교수는 담당 의사들에게 “이 환자를 당장 바로 검사해서 그 자료를 다 가져와라. 그리고는 바로 방사선 치료 들어가라”고 지시했다.
선일 스님은 병원을 찾아와서 담당의사를 만났지만, 오고 갈 때가 없었다. 막연하게 병원 한 구석에 앉아 있었다. 때마침 아는 스님의 소개로 한 보살을 알게 되어 그분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거여동에 사는 보살님이었는데, 마침 아들이 군대에 가고 없어서 방이 하나 비어있다고 해서 신세를 지기로 한 것이다. 그 보살님은 병원까지 20분 거리이니까 불편하더라도 방사선 치료할 때만이라도 이곳에 있으라며 배려를 해주었다.
스님은 그곳에서도 환부의 드레싱을 직접 했다. 병원에 갔을 때에는 간호사가 드레싱을 해주었는데, 드레싱을 해주던 간호사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드레싱을 하면서 “드라마틱하게 나으셔야 하는데, 드라마틱하게…” 라고 되뇌면서 울음을 삼켰다. 스님은 그 간호사의 모습을 보며 처음으로 눈물이 나왔다. 지금도 가끔씩 그 간호사 생각이 난다고 했다. 그리고는 “드라마틱하게 낳은 모습을 보여주러 가야 하는데…”라며 웃음을 지었다.
선일 스님은 이렇게 수술을 하지 않고 방사선 치료로만 암을 극복해냈다. 재생 가능성이 거의 없었던 탓으로 미국의 신약 실험 대상이었지만, 그 대상자에서도 탈락했을 정도로 ‘죽음’을 눈앞에 둔 환자였던 스님은 방사선 치료를 12번 정도 받고 나니 암세포가 없어졌다는 놀라운 진단을 받았다.
멱조산 화운사 전경 그러던 중 선일 스님은 화운사에서 빠알리어 원전 강의를 하기로 하고, 아오마아카데미의 강의를 접었다. 계속 공부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화운사까지 와서 공부를 이어갔다. 종단의 승가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교육원에서도 선일 스님에게 빠알리어 동영상 강의를 의뢰해왔고, 스님은 기꺼이 응했다. 이른바 ‘이러닝(e-learning) 강좌’인데, 선일 스님의 빠알리어 강의를 듣고 선운사 초기불전대학원으로 공부하러 가는 스님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곳 화운사에는 열 한 분의 어른 스님들이 계십니다. 젊은 스님 3명이 열 한 분의 어른 스님들을 모시고 살고 있지요. 그러다보니 절 살림이 바빠요. 또 주지를 맡다보니까 일주일에 한 번만 빠알리어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부산에서, 대전에서, 전라도에서 빠알리 원전을 공부하러 오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분들이 이렇게 화운사에서 공부를 한 지가 어느덧 2년이 다되어갑니다. 정말 고맙고 대단한 분들이지요.”
화운사 빠알리어 원전 강의는 매월 첫째 주 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삼장원에서 진행된다. 여기에는 누구나 동참이 가능하다. 문법 중심이 아닌, 처음부터 숫따(경전)를 직접 강의하는 선일 스님의 방식은 점차 호응을 얻어가고 있다. 빠알리어 원전을 공부하지만, 그 분량이 너무 많아서 기본적으로 부처님은 무엇이라고 가르치셨나? 라는 주제로 수행에 관련된 경전들만 뽑아서 가르친다. 아나빠나사띠, 사띠빠따나(사념처수행), 까야가따사띠숫따 등의 강의가 대표적인 과목들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의 위빠사나 수행 문제는 주로 자기가 배운 것만 가르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마하시, 쉐우민, 파욱 등의 수행센터에서 수행법을 배운 분들은 그들이 배운 것만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가르치는 곳마다 그 방법도, 내용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러나 선일 스님은 빠알리어 원전에서 말하는 수행법을 그대로 가르치고 있으니 경쟁할 이유도 없다.
화운사 경내 뒷편에 자리한 삼장원 전경 화운사 삼장원에서 진행하는 빠알리 원전 강좌에는 매월 20~30명 정도가 참여하고 있다. 현재는 그 정도만 공부하고 있지만 선일 스님의 꿈은 크다. 삼장을 공부하고, 독송하고, 수행하는 것을 체계화해 교육하기 위해 지금의 삼장원 건물을 최대한 활용할 계획이다. 이 삼장원에 더 많은 분들이 와서 출·재가를 막론하고, 다 같이 메따수따, 라트나숫따도 공부하고, 빠알리어로 몇 십 명씩 모여서 원전을 암송하고, 공부하고, 수행하는 수행공동체를 만들고 싶은 것이 스님의 꿈이자 바람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마음과 현장 속에 있어야지 책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책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때그때 꺼내서 가슴에 담고 수행을 해야 합니다.”
문법이 아닌 운율부터 가르치는 독특한 빠알리어 원전 강좌 프로그램. 이 프로그램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언제든지 주저하지 말고 화운사를 찾아가면 된다. 그곳에는 최고의 빠알리어 원전 강의를 하는 선일 스님이 계시고, ‘특별 부록’으로 조미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싱싱하고 맛난 ‘화운사식 사찰 음식’도 마련되어 있다.
짧지 않은 시간동안 인터뷰를 진행하고 마무리를 하려는 순간, 선일 스님은 예외 없이 오랫동안 불교기자로 일해 온 기자에게 뼈아픈 충고를 내려주신다. 한국불교계에서 글을 쓰는 분들이 부처님의 아주 다양하고 교훈적이며 유익한 이야기들을 글로 쓸 생각들은 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거사 하면 유마경, 보살하면 옥야경만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냐며 답답함을 감추지 못한다.
“기자님, 경전에 보석 같은 부처님 이야기가 아주 많아요. 그런데 그것을 꺼내 사용할 줄을 몰라요. 참 안타까워요. 글을 쓰는 분들이 어째서 남들이 해놓은 이야기만 하시나요. 빠알리어 원전에 무수하게 들어 있는 부처님의 이야기들을 현대어로 바꿔 알리는 작업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제발!”
“중국은 옛날 번역이 잘못된 점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지금 다 고치고 있다”고 소개한 선일 스님은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그 한문경전의 번역을 고집하고 있다”고 개탄한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도 완간된 니까야 번역도 지나치게 속도전으로 추진하다보니까 보완해야 할 점도 많다고 조심스럽게 지적한다.
“오늘날은 인터넷 시대이고 영어시대입니다. 특히 미디어붓다와 같은 인터넷 매체에서 젊은 사람들이 불교를 제대로 잘 알도록 노력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니까야를 읽을 때 어떤 번역이든지 간에 일단 보고, 시쳇말로 ‘필’이 꽂히면 제게 말씀해주세요. 이것이 제대로 번역된 것인지 묻는다면 제가 다 대답해 드릴게요. 그러고 나서 그 내용을 충분히 소화해서 아름답고 쉬운 글로 세상에 내놓는 일이 오랜 경륜을 가진 기자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요?”
스님은 절대로 자료나 정보를 콜렉트(수집)한 것을 적당히 나열하는 식의 글을 쓰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한다. 어떤 것이든지 소화를 해서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벌이 충분한 소화를 한 후에 꿀을 내뱉듯이, 정보를 충분히 다 소화해서 내놓으라는 것이다. 소화해서 내놓아야 표절을 하지 않게 된다는 지적과 함께.
오늘날 한국불교계에 자비라는 명칭을 차용한 수행법 종류가 많이 회자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스님은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 그런 분들에게 ‘자(慈)’는 뭐고 ‘비(悲)’는 뭐냐고 물으면 이런 것이고, 저런 것이라고 장황하게 설명하지만, 막상 그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이냐고 재차 물으면 대개가 멍하니 말문이 막힌다는 것이다. 예컨대 ‘자비라는 것은 <메따수따>(자애경)에 있는 것인데, <메따수따>에는 자비가 어떻게 설명되어 있나요?’ 라고 한 단계 더 물어 들어가면 대개가 답변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들이 정말 맹점이거든요. 자기들이 다 쓰고 있는 것인데도 정작 그 뿌리를 물으면 모르는 것이거든요. 커피를 즐기지만 커피에 대해서 자세히 물으면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허다한 것처럼 불교에도 똑같은 경우가 많아요. 빠알리어 원전에 ‘아꼬~ 아함~ 아쓰미~ 로까스~’라는 것이 있어요. ‘나는 이 세상에서 최고야’라는 뜻이죠. 이것을 한역에서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번역했지요. 저는 이 경전구절을 가지고 아픈 사람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서 최고예요. 당신이 없으면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으니까요’라고요. 이런 분들에게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가르치면 제대로 알아들을까요. 절박한 삶을 살아가는 분들에게는 ‘당신이 최고이고 가장 소중한 존재’라고 알아듣기 쉽게 우리말로 일깨워줘야 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융통성은 원전을 직역할 때나 가능한 일이 아니겠어요?”
봄에 특별히 더 아름다운 절 멱조산 자락의, 아주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화운사에 봄기운을 불어넣고, 또한 삼장원을 중심으로 빠알리어 원전 공부를 통한 테라와다 불교 열풍의 진원지를 만들어가며, 나아가 미래를 책임질 어린이들의 봄 놀이동산으로 도량을 가꿔가고 있는 선일 스님. 유난히 빛나는 눈동자와 잘 어우러진 스님의 미소가 초봄의 파스텔톤 빛깔을 듬뿍 품고 있었다.
*선일(禪壹)스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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