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02
7월30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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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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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0aIUuBTNPiY
(김주헌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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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씁쓸하고 고독한 현실, 그래서 오직 주님에게로만 초점이 맞춰지는 삶!>
주변을 둘러보면 참으로 이해가지 않는 측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악이란 악은 다 저지르며 살아가는 사람들!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잘못한 것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사람들, 법 없이도 살 착한 사람들, 이웃의 고통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발 벗고 나선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겪는 고초가 참혹할 정도입니다. 이토록 공정하지 못한 현실을 신앙인으로서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까?
오직 하느님의 메시지만을 선포하기 위해 노력하는 의인들이 이 세상에서 받고 있는 박해와 십자가 길, 그리고 억울한 죽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죄한 이들과 선인(善人)들의 고통과 시련은 또 어떻습니까?
예레미야 예언자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는 요즘으로 치면 청소년 시절에 예언자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주신 소명은 너무나 가혹했습니다. 유다의 왕과 고관대작들, 당대 권세가들에게 ‘인생 그렇게 살지 말고 제대로 살라!’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외롭고 괴로웠던지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 불행한 이 몸! 어머니,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시비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 빚을 놓은 적도 없고 빚을 얻은 적도 없는데 모두 나를 저주합니다.”(예레미야서 15장 10절)
세례자 요한의 삶과 죽음은 또 어떻습니까? 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처럼 구약시대를 종결짓는 마지막 예언자이자 예언자중의 예언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마지막 대예언자의 죽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하고 덧없는 죽음입니다.
그의 목은 베어져 요부(妖婦) 헤로디아의 쟁반 위에 올려 집니다. 참으로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것이 예언자로서의 삶과 죽음의 본모습인 듯합니다.
어느 정도 쓸쓸하고 아쉽고 드러나지 않는 삶과 죽음, 자신이 아니라 자기 뒤에 오시는 주인공이신 주님을 빛내게 해주는 존재로서의 삶과 죽음이 곧 예언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무척이나 신산하고 을씨년스런 삶, 씁쓸하고 고독한 현실, 그래서 오직 주님에게로만 초점이 맞춰지는 삶 그것이 참 예언자로서의 삶이 분명합니다.
예언자들이 대단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느님으로부터 등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예언자로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너무나 괴로울 때는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하소연했습니다. 항상 하느님과 소통하며 그분의 뜻을 찾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 또 다른 예언자들인 사제들과 수도자들을 바라봅니다. 그들이 보다 가난해지도록, 그들이 좀 고독해지도록 도와줘야겠습니다. 그들이 갖출 것 안 갖출 것 다 갖추고 떵떵거리며 산다면 그것처럼 예언자로서 부끄럽고 비참한 삶이 다시 또 없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예언자로 산다는 것,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쩌면 박해받는 의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메시지를 가감 없이 전달하는 일, 사회 정의와 인권의 소중함을 외치는 일, 남들이 마다하는 선행과 봉사를 실천하는 일, 세상 사람들 눈으로 볼 때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일, 손해 보는듯한 느낌이 드는 일, 그 일을 하고 계신다면 제대로 된 예언자의 삶을 사는 것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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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참으로 주님께서는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이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옛날 중국 제나라의 위왕은 선정을 베풀어 많은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가 하루는 지방의 관리들이 백성들을 잘 다스리고 있는지를 알아본 후에 청렴한 관리들에게 상을 내리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뒤 어느 한 지방의 관리를 궁으로 불러 들였습니다. “경에 대해 온통 나쁜 소문만 들리기에 은밀히 사람을 보내 알아보았더니 관리들은 청렴결백하였고 백성을 아끼고 인심이 후하고 배를 주리는 자가 없다 하니 경은 그 곳을 잘 다스린 것이 분명하오. 그런데도 내 주위의 대신들은 경을 악담하니 이는 경이 그들에게 아첨과 뇌물을 주지 않았다는 증거이니, 이 또한 바른 정치가의 모습이 아니겠소? 그래서 경의 수고를 치하하려 하오.”
왕은 그에게 포상으로 땅을 주었습니다. 다음날 위왕은 또 한 지방의 관리를 불렀습니다.
“경에 대한 칭찬이 들려 오길래 내가 은밀히 알아보았더니 그 고을의 땅은 황폐하고 백성들은 굶주리는 데도 경은 날마다 잔치를 베풀어 먹고 마시니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다는 것이었소. 그런데도 칭찬이 끊이지 않으니 이는 또한 경이 아첨에 능하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위왕은 대단히 노하여 그의 관직을 박탈하고 재산을 몰수한 뒤 귀양을 보냈다고 합니다.
민심은 천심이란 말이 있습니다. 어떤 나라들에서는 선거철만 되면 전기세 낮추어주고 물세 낮추어 주어서 집권당을 계속 찍도록 우민정책을 써서 민심이 오염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는 언론을 차단하거나 조작하고 알아야 할 권리를 박탈하는 등의 수단까지 동원될 때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서는 백성들이 누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는지, 아니면 자기들의 사리사욕만 차리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다못해 본당에서도 사제나 수녀님들이 몇몇에게만 사랑을 받고 전체적으로는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그분들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는 사제들과 동료 예언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을 거슬러 예언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하느님의 도시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거슬러 말하는 것은 하느님을 거슬러 말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백성들 앞에 끌어냅니다.
사실 예수님도 똑같은 처지를 당하셨습니다. 안식일 예배를 중요하게 여기던 당시 안식일에 그들의 시선으로는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하셨고, 결정적으로는 하느님의 집인 성전을 허물어버리라고 하면서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다 내어 쫓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대사제들은 예수님을 군중들 있는 가운데서 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알아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리옷 유다를 매수하여 아무도 없는 곳에서 예수님을 잡으려 했던 것입니다.
오늘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판의 아들 아히캄이 고소하는 이들의 손에서 예레미야를 빼내어 백성들에게 넘겨서 결국 죽임을 당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백성들에게까지 미움을 받는 예언자는 없습니다. 백성들은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잃을 것도 없고 그래서 눈이 맑아져 있습니다. 그러나 기득권자들은 잃을 것이 많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까지도 이용하여 자신들의 소유를 지키려고 합니다.
어떤 유명한 목사님이 자신의 재산 많은 것을 정당화하면서 다윗도 부자로 살았다는 성경말씀을 인용하며 설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마 재산이 많은 종교인들은 그 설교에 동의하였을 것이지만, 만약 어떤 이가 종교인들은 예수님처럼 벌거벗겨지고 세상에서 가난한 예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 그를 죽이려 들 것입니다. 그러나 신도들은 알 것입니다. 아무리 그런 설교를 해도 그건 아니라는 느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민심은 천심이란 뜻입니다. 우리 자신들도 기득권자들이 아닌 민중, 혹은 일반 신자들의 요구를 존중할 줄 아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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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선이 잃어버린 두 가지 기술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이 두 가지 기술은 이웃나라인 일본에 전해졌고,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으로 드러났습니다. 첫 번째 기술은 ‘은 제련법’입니다. 연산군 당시에 단천에 은광이 개발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술자들은 납과 섞인 은을 추출하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연산군은 그 방법을 장려하였고, 그렇게 조선은 은을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연산군은 폭정으로 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연산군이 행했던 모든 정책들도 적폐라고 생각하여 없앴습니다. 그렇게 은 제련법은 조선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은 제련법이 일본으로 전해졌습니다. 일본은 그렇게 배운 은 제련법으로 막대한 양의 은을 생산하였고, 그 은으로 신식무기인 조총을 구입하였습니다. 그렇게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은 임진왜란을 일으켰습니다. 조선이 은 제련법을 계속 이어갔다면 역사는 다르게 전개 되었을 거라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도자기 기술입니다. 임진왜란의 결과 일본, 조선, 명나라는 국력이 소진되었습니다. 당시 가장 이익을 본 나라는 따로 있었는데 막 시작한 청나라입니다.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명나라는 도자기를 생산하여 유럽으로 수출하였습니다. 그런데 명나라가 멸망하면서 유럽 사람들은 새로운 도자기 생산지를 찾게 되었습니다. 당시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명나라와 조선이었습니다. 성리학을 정치의 근간으로 삼은 조선은 도공들의 기술을 천시하였습니다. 전쟁과 가뭄으로 화려한 도자기의 생산을 금하였습니다. 도공들은 도자기를 만들이 못해서 궁핍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일본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도공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리고 도공들에게 집을 주고, 돈을 주면서 도자기를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일본으로 넘어간 도공들은 일본에 도자기 기술을 전해 주었고, 그렇게 배운 도자기 기술로 일본은 명나라를 대신해서 유럽에 도자기를 수출하게 되었습니다. 도자기를 팔아서 번 돈으로 일본은 군함을 샀고, 도자기의 제련 기술을 응용하여 제철산업을 일으켰습니다. 군함과 대포로 무장한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고, 아시아를 침략하였습니다. 조선이 도공을 잘 대우하고, 도자기를 만들어 유럽에 수출했다면 역사는 또 다르게 변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두 가지의 흐름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마치 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는 생각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은 허상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대면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동굴 속에서 보이는 희미한 빛은 진리가 보여주는 여명일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동굴 밖에는 놀라운 세상이 펼쳐지듯이, 우리의 삶은 진리를 향한 여정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기에 시련과 아픔, 좌절과 고통은 이겨낼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렇게 신화, 종교, 철학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분명한 법칙과 질서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소리, 영적인 세상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수학, 과학, 경제는 이런 사고의 틀에서 발전하였습니다. 세상은 특정한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원자들은 일정한 법칙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법칙과 질서를 알면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인간이 세상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의 세상은 인간 중심의 세상이고, 인간이 만든 자본주의가 세상을 움직이는 것 같이 보입니다. 수치화된 디지털의 세상에서는 인격과 도덕, 사랑과 우정이 자리할 틈이 별로 없습니다. 이윤의 창출 앞에는 환경의 파괴도, 전쟁도, 폭력도 용인되는 상황입니다.
공자께서는 성숙한 인간의 나이테를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지학, 이립, 불혹, 지천명, 이순, 종심’의 나이테를 말하였습니다. 학문을 배우고, 뜻을 세우고, 의혹이 없으며, 하늘의 뜻을 따르고, 세상의 이치를 알아, 어떤 일을 해도 그르침이 없는 삶입니다. 제 나이가 60이 되었는데, 아직은 세상이 이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유혹이라는 바람 앞에 늘 흔들리고 있습니다. 권력을 가졌지만, 많은 것을 소유했지만 헤로데는 하늘의 뜻을 몰랐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던 세례자 요한을 죽게 하였습니다.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지만 세례자 요한은 하늘의 뜻을 알았습니다. 인류의 역사에 커다란 나이테를 남겨 주었습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새로운 삶에로 나가야 한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마치 여명의 눈동자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예언자 예레미야를 살려준 사판의 아들 요아킴처럼 우리들도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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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4,1-12 : 헤로데가 요한의 목을 베어 오게 하였다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기가 목 베어 죽인 세례자 요한이 더 큰 권능을 가지고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부활했다고 믿었다. 그는 요한이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들추어내며 비난을 퍼부을까 불안했다. 세례자 요한은 기적을 행한 일이 없는데 요한의 힘이 예수님께로 들어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헤로데는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취하지 말라고 간하였다. 헤로데의 동생 필리포스는 헤로디아와 결혼을 했으나, 처남과 다투는 바람에 장인은 딸을 데려갔고, 형인 헤로데가 그 여자와 결혼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율법에 따라 이방민족들처럼 되지 말고 불신앙에 물들지 말라고 경고하였는데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살아있는 형제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요한은 도덕적 훈계를 함으로써 헤로데를 자극하였다.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4절)라고 말함으로써 요한은 즉시 곤경에 빠지게 된다. 사악한 사람을 훈계한다는 것은 상대에게 해를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요한은 율법이 말하는 것, 구원에 합당한 것, 사랑에 합당한 것을 이야기 했지만, 그 대가는 감옥에 갇히는 것이며 죽음만이 남아 있다. 인간의 마음을 바로잡고 죄가 되는 행실을 물리치게 하는 힘을 주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뿐이다. 요한이 얼마나 강직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헤로데의 생일 날,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고 있다. 사람들은 그 춤에 빠져들었다. 관능적 쾌락이 매우 잔인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은 죄와 세상의 쾌락에 빠져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팔아버렸다. 딸은 제 어머니의 부추김으로 율법의 영광을 상징하는 요한의 머리를 가져다 달라고 한다. 그리하여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담겨 소녀에게 주어졌다(11절 참조). 잔치는 살인 현장이 되고 생일은 장례 날이 되었으며 그 식탁은 원형경기장이 되었다.
헤로데는 괴로워했다고 하지만, 괴로워하는 척 했을 뿐이다. 그는 교활한 사기꾼이며, 능숙한 암살자이기 때문에 속마음은 기쁘면서도 괴로워하는 척 했던 것이다. 헤로데는 참으로 잔인하고 분별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괜한 맹세를 하여 소녀에게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빠진다. 그래서 괴로워했다고 하는데, 그는 이미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 무엇을 괴로워했던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하여 불법이라고 말한 요한을 죽이려고 했던 헤로데였다.
이렇게 하여 헤로데는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우선은 동생의 부인인 헤로디아를 유혹함으로써 불길한 길에 들어섰고, 그 여인에 의해 세례자 요한은 죽음을 당했으며, 또 얼마 안 가서 평판이 나빠져 자신의 왕위도 빼앗기고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봉사직은 우리로 하여금 나 자신 뿐 아니라, 모두가 함께 성장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참된 권위는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진리를 전하는데 굴함이 없어야 함은 물론이고, 또한 참된 봉사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권능이 다른 사람들 앞에 더욱 드러날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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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인호 루카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허망하고 충격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마태 11,11 참조)이라고 하신 이의 죽음에서 어떠한 영웅적인 모습이 보이지도, 하느님의 극적인 개입이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그저 ‘힘 있는 자들’이 벌인 잔치의 ‘눈요깃감’에 지나지 않는 허무한 죽음으로 지상에서 요한의 삶은 끝이 납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을 따르는 이들의 죽음에서 불사불멸까지는 아니더라도 특별한 모습이 드러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우리에게 충격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적어도 세상 권력과의 거창한 투쟁 끝에 장렬한 죽음을 맞기를 기대하는 우리에게 그러나 수많은 순교자와 예언자,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에서조차 우리가 찾는 특별함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날 정의와 진실을 부르짖는 이들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목숨은 오히려 세상을 지배하고, 세상의 구원자로 자처하는 이들이 어쩌면 가장 없애 버리고 싶은 목숨, 가장 하찮게 여기는 목숨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복음의 핵심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과 그에 따르는 비통함이 아닙니다. 악이 하느님의 사람을 죽이지만, 악의 힘으로는 하느님의 사람도, 하느님의 나라도 결코 끝낼 수 없다는 희망을 선포하는 데에 있습니다. 악에 의해서 결코 끝나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우리의 일상에서부터 체험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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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하화식 베드로 신부님]
참여정부 시대에 들어서면서 민중의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물론 바람직하고 좋은 일이며, 삶의 많은 부분이 정화될 수 있는 좋은 통로이기도 하다. 그래서 현대 사람들은 민중의 소리에, 다시 말해 민원의 소리에 예민해졌고 또 두려움과 새로운 힘을 느끼면서 살아가게 되었다.
헤로데는 바로 이런 군중의 소리에 예민해지면서 자신의 이기적 야심의 뜻을 쉽게 이루지 못하고 있었으며 또 그런 소리를 양심의 소리로 들었기 때문에 더욱 편치 않은 마음에서 자신의 행동을 지켜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마음에는 항상 또 다른 약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기대하지도 않았던 엄청난 일이 벌어지면서 오늘날 정치인들의 뇌물의 흐름을 새롭게 조명하게 된다.
자신의 영위를 위해서는 타협을 해나가고 또 자신의 약속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고 쉽게 이루어 나가는 검은 손이 주변의 상황을 더욱 어둡게 만들어 가고 있다.
한편 그렇게도 위대한 세례자 요한의 생명이 허무하게 빼앗기는 현실을 목격하면서 하느님의 뜻은 참으로 알아듣기 어려운 많은 현실의 복잡한 미로에 숨겨져 있다는 점도 발견하게 된다.
터무니없는 말로 터무니없는 일을 저지르는 한 인간의 모습은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다시 그려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누리고 자기만을 생각하면서 살아갈 때 이런 유혹의 손길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엄청난 현실을 만든다는 깊은 뜻을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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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차룡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일찍이 여자 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이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다고 극찬한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 예수님이 오실 길을 미리 닦아놓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요, 신약의 시대를 열어 놓은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은 진리를 위해 몸을 바친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 안티파스가 예수님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 예수님을 두고 요한이 되살아난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는데 헤로데도 그 소문을 믿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종교계의 지도자뿐만 아니라 정치 집권자에게도 두려움을 안겨주었던 것입니다. 당시 왕의 불의에 대하여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입을 다물고 있었을 때 요한 홀로 그것을 거듭 거듭 충고하였기 때문에 왕의 미움을 사서 결국 죽임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지요.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 왕에게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데리고 사 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거듭거듭 간하였기에 헤로디아는 호시탐탐 눈에 가시 같은 요한을 죽일 기회를 엿보며 가슴에 비수를 품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들에게 내린 옳은 충고를 비판과 저주로 받아들여 하느님의 사람인 요한을 죽일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중에 참으로 좋은 기회가 왔고, 그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요한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소녀는 제 어미가 시키는 대 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마태 14, 8) 결국 헤로데 왕은 마음이 괴로웠지만 이미 맹세한 바도 있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어서 백성들이 예언자로 여기고 있는 요한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것이 불의를 자행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였던 것입니다.
아무리 옳은 충고라 할지라도 그 순간에는 나를 비판하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는 않습니다. 하지만 나의 태도를 고치기보다 그 사람에 대한 증오와 저주를 마음에 담아둔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어 옳은 충고를 받아들였다면 진리를 전하는 예언자 와 하느님을 박해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하느님의 법을 용기있게 외 쳤기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의 이름은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세상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고 있습니다. 영원한 삶을 선택하였기에 현세의 부귀영화와 세상이 가져다주는 모든 것을 거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평신도의 대부로 서 영국의 대법관이며 수상으로 살았던 토마스 모어 성인은 헨리 8세 왕의 이혼 문제로 교회법의 혼인의 불가해소성을 주장하여 왕과 의견이 엇갈리자 왕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 부인이 면회를 왔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를 썼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여보, 내 가 왕의 말을 들어 혼인의 불가해소성을 무시하고 그 결혼을 인정하여 내가 살 수 있다면 이 지상에서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소? 한 20년, 30년 ? 일시적인 생명을 얻기 위해 영원한 생명을 포기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오, 나는 하늘의 영원한 생명 을 얻기 위해 내 신앙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오.”
예수님께서는“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 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마태 5,10 - 12)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의 밑거름은 순교자들이 흘린 피의 신앙입니다. 순교자들의 피의 대가로 값진 신앙과 교회의 유산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들의 박해와 순교의 원인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고 세상의 권력에 손잡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인간의 뜻에 순종하기보다 하느님의 뜻에 먼저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이 세상의 편안한 삶을 위해 진리를 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진리를 위해 몸을 바침으로써 영원한 진리이신 예수님 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불의에 항거하며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세례자 요한과 토마스 모어와 같은 진리의 증인이 많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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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이인주 베드로 신부님]
<하느님을 왜 믿어야 하는가?>
하느님도 인간 세상은 어떻게 못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역사에 등장하는 폭군들의 모습을 보면 ‘하느님은 왜 저런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두셨는가?’ 하고는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래도 하느님이 계시니 이만하겠지 싶다.
필리핀의 가난한 가정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여러 아이들을 둔 엄마가 생계를 위해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가정부로 취직해서 먼 곳으로 떠났다. 아이들은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고, 아버지는 아이들의 등살에 꼼짝도 못하니 당연히 일을 할 수가 없다. 남편은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먼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돌아올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아내는 그곳의 삶이 좋은지 못 오겠다며 버텼다.
그러자 남편은 애들을 다 죽이고 자신도 끝장을 내겠다고 했다. 설마하지만 결국 남편은 피비린내를 내고 말았다. 누구의 잘못인가? 구조적인 잘못이다. 나라·사회·개인 등 잘못된 구조에서 비롯된 깊은 상처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회를 건전하게 만들어야 하고 늘 하느님께 여쭤가며 우리의 삶을 좋게 만들어 가야 한다.(탐 오골만 신부의 이야기 기록)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의 최후도 끔찍하기는 마찬가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이것이 그 시대의 현실이었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는가를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최고 권력자에게 정면 도전을 했으니 그 뒷일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연회장에서 예언자의 목을 벨 줄이야`…. 그들이 요한만 그렇게 죽였을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은 다 그런 식으로 죽였을 것이다.
하느님은 왜 악한 사람들은 두고 애꿎은 사람들만 죽게 하실까? 그러나 기도하며 그분을 만나다 보면 답이 나온다. 착한 사람은 먼저 하늘나라에 간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연옥도 안 거치고 바로 천국에 가기도 하겠지만, 이 더럽고 지저분한 세상을 빨리 하직하게끔 배려하는 것이라면 좀 위로가 되려나.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그러기에 우린 이런 세상이 되지 않도록 미리 미리 하느님 나라에 접근해 가는 사람들이 많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이 땅도 바로 하느님 나라에 가깝기에 밝고 맑고 아름다운 세상이 되도록 배려해 주지 않겠는가. 이런 차원에서 나는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사람들이여, 하느님을 온전히 믿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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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마지막 한걸음>
마태오 14,1-12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시종들에게,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붙잡아 묶어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헤로데가 생일을 맞이하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 그래서 헤로데는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마지막 한걸음>
삶을 마감할
마지막 한걸음이
있을 겁니다
그 한걸음에
온 삶을 닮아내야 할
더는 없는 마지막이라면
한걸음 더 딛고자
어떻게든 마지막을
미루고 싶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나를 나답게 마무리할
마지막 한걸음이라면
한걸음 더 한걸음 더
유혹하는 검은 손짓
거침없이 뿌리치고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게도
더렵혀지지 않도록
부끄럽지 않게
흐트러짐 없이
내딛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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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 앞에서 당당하라>
한 사기꾼이 사회적으로 내로라하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선택하여 전화를 하였습니다. “내가 당신의 잘못을 알고 있으니 이 계좌로 돈을 송금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사회에 공개하겠습니다.” 그랬더니 거액의 돈을 보낸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답니다. 그래서 그는 수차례 같은 방법으로 못된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돈을 보낸 사람들은 억울함을 호소할 수가 없었습니다. 드러낼 수 없는 과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잘못을 범하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마음이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마음, 양심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 난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일잔치에 흥을 돋구어준 헤로디아의 딸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헛된 약속을 하였고, 소녀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올 것”을 청했습니다. 헤로데는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라 그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고 말았습니다. 왕으로서의 위신과 체면을 유지하려고 큰 잘못을 저질러 놓고는 평생 마음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마음은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허영심에 함부로 내뱉은 말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은 분입니다. 자기보다 더 훌륭한 분이 오시는 데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마르1,7).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자기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주님을 앞세웠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래서 왕인 헤로데에게도 할 말을 다했습니다.
사실,“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진리를 뜯어 고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며 진리에 봉사하는 일입니다.”(막시 밀리안 콜베)
그러므로 참으로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불의하게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을 생각하는 양심 때문에 그 괴로움을 참아 내면 그것이 바로 은총입니다"(1베드2,19).
자기를 포장하는 허세를 부려 위신, 체면을 지키려 한다면 결국은 그것뿐 아니라 마음의 자유를 잃게 되고 근심, 걱정, 불안의 나날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실 것이며 여러분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위로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회개한 죄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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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린아이가 부모를 따라 미사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을 보았는지 소리 내 웃는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 입을 막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성당에서는 웃는 것 아니야.”
지난 부활 대축일 미사 때였습니다. 미사에 오신 신자들을 향해 밝게 웃으며, “예수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라고 인사했습니다. 신자들 역시 “축하합니다.”라면서 인사했지만, 표정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신부가 인사하니 마지못해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가톨릭 신앙의 핵심인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큰 슬픔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그분이 다시 살아나서 내 앞에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깜짝 놀람과 동시에 큰 기쁨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부활에 큰 기쁨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부활을 실감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성당에서는 웃는 것이 아니라는 암묵적 암시에 걸려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남 눈치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남 눈치를 보면서 웃어야 할 때도 웃지 못하고, 울어야 할 때도 울지 못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신앙인은 세상 눈치를 보며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보다 주님의 뜻을 살피면서 그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헤로데 영주가 헤로디아의 농간에 농락되어 세례자 요한의 목을 자릅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두기는 했지만, 의인으로 생각하면서 함부로 하지는 못했지요. 그러나 자기 생일잔치에 헤로데의 고관들과 갈릴래아의 내노라는 인사들이 초청된 자리에서 기분이 너무 좋아 헛된 맹세를 합니다. 어떤 청이든 다 들어주겠다는 맹세였습니다. 이때의 청이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군주가 손님들을 초청해서 화려한 잔치를 벌이는 것은 그들에게 자기 권세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허세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예수님의 소문에 죽은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난 것이라고 하면서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자신이 나바테아 왕녀를 소박한 것이 빌미가 되어 나바테아 왕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게 되었고, 전쟁 패배로 인해 로마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귀양을 가서 죽게 됩니다.
세상의 눈치 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를 살피면서 그 뜻에 맞게 열심히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눈치는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다줄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따르면 영원한 생명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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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의인義人의 삶>
-더불어(together), 반듯하고 한결같은 삶-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2)
하느님 중심의 삶, 더불어(together), 반듯하고 한결같은 삶,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예언자들의 삶이, 의인들의 삶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언자 세례자 요한이, 제1독서의 예언자 예레미야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혼탁한 세상,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좋은 가르침을 줍니다.
특히 강조할바,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삶입니다. 사람은 섬같은 존재가 아니라 더불어의 존재입니다. 혼자의 구원이 아니라 더불어의 구원입니다. 이점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늘 강조하는 진리입니다. 엊그제 소개했던 교황님 강론의 마지막 말씀도 기억할 것입니다.
-“젊은이들이여 노인들이여, 조부모들과 손주들이여, 모두 함께 합시다. 우리 함께 앞으로 나아갑시다. 그리고 함께 우리 꿈꾸도록 합시다(Young and old, grandparents and grandchildren, all together. Let us move forward together, and together; Let us dream)”-
무려 ‘더불어(together)’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베네딕도 규칙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상적인 형제공동체를 위한 헌장과 같은 72장 11-12절 말씀도 생각납니다.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여기서 역시 강조되는바, ‘우리를 다 함께’입니다. 천국입장은 개인입장이 아니라 단체입장이라는 말이 다시 생각납니다. 어느 한결같이 정의로운 삶을 추구하는 검사의 인터뷰 기사중 깨우침이 되는, 메모해둔 부분을 소개합니다.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관심을 받지 못하는 내부 고발자들은 잘려 나간다. 내가 정말 다행인 건 내부 고발자로서 관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방어막이 되어주었다. 내가 조금만 말해도 돌아봐주고 들여다 봐주었다. 나는 정말 행복한 내부 고발자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어느 한 출신들이 요직에 배치되고 있다.
“이카루스의 날개는 태양 가까이 다가가면 다 녹는다. 날개에 붙어 있던 깃털이 열기에 녹아서 밑바닥이 드러나면 국민들이 냉정하게 판단하시겠지. 길게 보려고 한다. 태양은 곧 정점 아닌가. 담담하게 일몰日沒을 준비할 거다.”
새삼 참으로 더불어의 삶이, 하느님 두려운 줄 알고, 하느님 부끄러운 줄 아는 하느님 중심의 겸허한 삶이 얼마나 본질적이고 기본적인지 깨닫습니다. 엊그제 어느 딱한 분의 사정을 전해 듣고 혼자 결정할 수 없는 사안이기에 공동체 원장에게 자초지종 그 사연을 전했고 흔쾌하게 즉시 금전적 도움을 줬습니다. 새삼 공동체가, 공동체 원장의 지혜롭고 정의로운 결단에 감사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분별의 잣대이자 정의와 지혜의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뒤 이어 그 형제가 힘든 사정을 전했습니다. 진정성 가득한 장문의 도움을 청하는 편지글이었습니다. 업친 대 덥친 격으로 가난한 이들은 병도 많습니다. 눈이 안좋아 황반병주사를 맞아야 실명失明하지 않는데 부득이 도움을 청하는 참 딱한 사연에 원장에게 역시 사연을 전했고 그 답변이 참 고마웠습니다.
“내일 아침 임원간담회에서 논의할 생각입니다.”
이래서 혼자는 못삽니다. 개인은 약해도 공동체는, 의로운 이들의 공동체는 강합니다. 교회 공동체에 뿌리내려야 영원한 생명의 구원입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혼자 해결하려 할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겸손히, 정직하게 알려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더불어 삶의 렌즈로 오늘 말씀을 보면 그 이해가 확연해집니다.
복음의 예언자 세례자 요한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두 부류의 인간군상으로 확연이 구분됩니다. 세례자 요한과 헤로데 일당, 얼핏보면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습니다. 한결같이 반듯한 하느님 중심의 정의의 삶을 살다가 삶의 중심이 없는 헤로데와 같은 부류의 악인들에게 희생된 세례자 요한이 외관상 참 외롭고 실패인생처럼 보입니다만 깊이 들여다 보면 그게 아니었습니다.
단기적 안목으로 보며 헤로데의 승리같지만 장기적 긴 하느님 안목으로 보면 세례자 요한의 승리요 지금까지 의인으로 회자되어 영원히 기억되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순교의 죽음으로 끝난 듯 하지만, 그의 영성은 그의 제자공동체를 통해, 또 예수님과 그분의 공동체를 통해 계승되고 살아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요한은 혼자가 아니라 그의 제자공동체에 뿌리 내리고 있었고, 또 예수님 공동체에 유대관계에 있었으니 결국은 세례자 요한의 승리, 예수님의 승리, 궁극에는 하느님의 승리로 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의 한결같이 정의로운 하느님 중심의 삶이 빛납니다. 사면초가, 고립무원의 처지에서도 한결같이 정의롭고 당당합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길과 행실을 고치고, 주 여러분의 하느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거두실 것입니다. 이 내몸이야 여러분 손에 있으니 여러분이 보기에 좋을 대로 바르게 나를 처리하십시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참으로 주님께서는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의 귀에 대고 이 말씀을 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뜻은 공동체에 전달됐고 대신들과 백성들은 전적으로 예레미야 편에 서서 그를 도왔고 마침내 사판의 아들 아히캄의 도움으로 구사일생 살아나니 결국은 의인 예레미야의 승리이자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마지막 해핀엔딩으로 끝나는 대목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이 사람은 사형당할 만한 죄목이 없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주 우리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사판의 아들 아히캄의 도움으로, 백성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지는 않게 되었다.-
새삼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임을 깨닫습니다. 민심을 이기는 권력자들은 세상에 없습니다. 민심이 바다라면 위정자들은 바다위에 떠있는 배같습니다. 배를 띄우는 것도 바다이지만 배를 뒤엎는 것도 바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민심의 바다를, 하느님 바다를 두려워합니다. 성무일도중 제 좋아하는 계응송이 생각납니다.
“주님은 온유한 자 의義를 따라 걷게 하시고 겸손한 자 당신 도道를 배우게 하시나이다.”(구 성무일도서 736쪽)
도의道義가, 도덕道德이 사라져 가는 현실이 개탄스럽습니다. 지록위마指鹿爲馬(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부른다는 뜻으로, 남을 속이려고 옳고 그름을 바꾸는 것을 비유하는 표현)의 간신같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흡사 점차 의인들의 아름드리 거목巨木들의 숲은 사라지고 잡목雜木 우거진 왜소矮小해진, 세속화世俗化된 고만고만한 작은 평균인平均人들이 야산野山을 이룬 것 같다는 느낌도 듭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더불어 반듯하고 한결같은 삶을 사는 의로운 이들은 이처럼 예수성심의 사랑을 닮아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최민순 신부님의 시편 화답송 후렴이 참 좋습니다.
“주여, 은혜로운 때에 당신께 비오니, 그 넓으신 자비, 진실된 사랑으로 나를 도우소서.”(시편69,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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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마태14,2)
<고난의 길인 예언자의 길!>
오늘 복음(마태14,1-12)은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기 시종들에게 한 말과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과 동일시 합니다. 그는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을 자신이 죽인 세례자 요한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마태 14,2)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이 얼마나 자기에게 주어진 선구자 소명에 충실했는지를 말해주는 헤로데의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모든 것을 예시합니다. 그의 출생과 삶과 죽음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완전한 드러남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하는 예언자의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이 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 등장하는 눈물의 예언자인 예레미야 예언자를 두고 이스라엘의 사제들과 예언자들이 대신들과 온 백성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귀로 들으신 것처럼 이 사람은 이 도성을 거슬러 예언하였으니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예레 26,11)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마태 14,8)
그리고 모든 예언자들이 향해 있었던 예수님을 죽이라고 유다인들이 외칩니다. "그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루카 23,21)
'지금, 나는 아무 고통도 시련도 아픔도 없는 평화 안에 머물러 있다.'고 말한다면, 과연 그것이 참예언자의 모습일까???
만약 예수님의 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고통과 시련과 힘듦이 함께한다면, 그것이 예언자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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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22RNWxDW1D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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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요한이 헤로데에게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마태 14, 4)
올바른 삶은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가져다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견디고
지켜나가는 이들의
삶이 가장 아름다운
삶의 열매가 된다.
어중간한 삶을
아프게 반성한다.
문제의식은
너무 무디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너무 너그럽다.
명백한 과오를 통해
삶을 교정하고 과거의
악순환을 멈추는 것이
신앙인의 참된 도리이다.
진리는 아무래도
숨겨지지 않는다.
요한 세례자가
등장한다.
그는 진리로
삶을
이야기한다.
양심을 깨우고
정의의
목마름을 외치고
이기(利己)와 무지를
꾸짖는다.
우리 시대를
바로 보는 것이
예수님을 바로 보는
신앙인의 사명이다.
새로운 삶은
이와같이
어디서 한순간
불어오는 바람이
아니고 각오와 결심
실천을 통하여
일으켜 지는 것이다.
일으켜 지는 정신이
우리모두를
건강한 삶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올바른 삶은
작은 길도
선명한 모습으로
드러나게 만든다.
진정한 회개를
다시 품게 하는
요즈음이다.
진리이신 주님과
가까워지는 삶인지를
자문하여 본다.
환상적인 만남이
아니라 진실한
만남이 중요하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이 달라도
결코 변할 수 없는
가치는 우리 자신의
진실한 회개이다.
진실한 회개가
우리 시대의
참된 좌우명이 됨을
믿는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순간이
회개의 순간이며
회개의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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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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