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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1
#낙원
내 생각에, 신자가 죽은 후부터 그리스도의 재림 전까지는, 신자의 영혼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는 아직 완전하지 않으나 그 의지는 완전히 하나님의 선을 행하고자 한다. 즉, 악을 행할 수 없는 자유의지가 된다. 그러나 육체와 분리되어 있으므로 선한 의지는 가지고 있으나 행할 수는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완전히 영화로워지는 부활의 때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것이다.
#20210821
#신명기 #Deuteronomy 29:10
10 오늘 너희 곧 너희의 수령과 너희의 지파와 너희의 장로들과 너희의 지도자와 이스라엘 모든 남자와
이스라엘의 수령과 지파와 장로들과 지도자들은 이스라엘 전체를 앞장서서 이끌어 나가는 권세자들로서, 이들에게는 다른 누구보다도 여호와의 언약과 율법에 대한 막중한 권한과 책임이 부여되었다. 그들에게 율법에 대한 권한이 부여되었다는 것은 영적으로는 모세와 아론과 여호수아처럼 여호와께서 직접 부르시고 세우시고 지정하시며 신령한 하늘의 교제를 할 수 있는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며 이는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스스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세움받았다는 증표였다. 그래서 그런 신령한 증표를 받은 지도자들을 거역하는 것은 그들을 세우신 여호와를 거역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처럼 일말의 긍휼함이나 용서함 없는 가차없는 신적인 멸망의 심판을 받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사사들 중에서는 특별히 드보라, 기드온, 삼손, 사무엘 등이 여호와께로부터 그러한 신적인 권세를 부여받았었고, 왕들 중에서는 사울, 다윗, 솔로몬이 그러하였으며, 선지자들 중에서는 엘리야와 엘리사를 비롯하여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학개, 스가랴, 스바냐, 말라기, 세례 요한 등이 그러하였다. 제사장 중에서는 아론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이 된 엘르아살이 그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성령께서 비둘기의 형상으로 예수님께 임하심으로써 사람들 앞에서 메시야로서 하나님의 공인을 받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셔서 영원전부터 본래 계셨던 하나님 우편으로 복귀하신 후에는 사도들을 비롯한 여러 제자들이 성령 세례를 통해서 교회의 지도자로 세워졌었다. 사도 바울은 비록 뒤늦게 합류하였어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통해서 사도로서의 인증을 받았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에 의한 이러한 신령하고 신적인 권세는 복음이 퍼져나감에 따라 점차적으로 교회의 제도와 직분으로 위임되었기 때문에 복음이 정착한 시대나 지역에서는 더이상 그러한 신비적인 방식이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한편 백성의 지도자들은 그러한 신적인 증표 외에도 통상적으로 사람에게 부여된 지성이나 감성이나 덕성 등에 대해서도 남들보다 더 탁월한 수준을 가지게 마련인데 이 또한 여호와께서 비록 눈에 보이는 신적인 방식이 아니더라도 본성적이고 은밀하게 그 지도자들의 자라온 삶의 환경을 통해서 부여하신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 타당하다. 사사들 중에는 옷니엘, 에훗, 입다 등이 남들보다 인간적으로 탁월한 능력으로써 이스라엘을 이방 족속의 압제에서 구원하였었다. 왕들 중에는 분열 된 유다 왕국의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 등의 몇몇 선한 왕들이 모든 백성들 중에서 탁월한 덕성과 신앙으로써 백성들을 인도하였었다. 제사장 중에서는 사울에게서 도망하던 다윗을 위해 물린 진설병과 골리앗의 칼을 내어주고 사울에게 학살 당한 아히멜렉, 사독, 불법으로 왕위를 찬탈한 왕후 아달랴를 폐위 및 처형시키고 요아스를 옹위한 여호야다와 그의 아들 스가랴가 그러하였다. 선지자들 중에서는 총독 느헤미야와 학사 에스라가 그러하였다. 여기에 특별히 다윗의 용사이자 호위대장이며 솔로몬의 군대장관을 역임하였던 브나야는 그 효용한 무예와 더불어 여호와 신앙에 기반한 충정이 다른 어느 장수들보다 지극히 탁월하였다. 사도들의 시대에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어느 내시는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절기를 지킬 정도로 신실하였고 수레를 타고 가는 중에 이사야의 글을 읽을 정도로 말씀을 사모하였으며 초라한 외양의 빌립에게서 복음을 가르침 받기를 꺼리지 않을 정도로 덕성이 탁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성령께서는 빌립을 통해서 그에게 복음을 가르쳐주시고 세례를 받게 하심으로써 그를 자기 나라의 교회의 수장을 삼으셨던 것이다. 바나바는 사람들을 권면하며 위로하는데 탁월한 은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의 반열로 취급되고 한동안 사도 바울과 동행하며 복음 사역을 할 수 있게 되었었다. 아볼로는 단지 세례 요한의 가르침 까지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으나 구약성경에 대한 남들보다 해박하고 탁월한 해석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세주이심을 증명할 수 있었던데다가 자기보다 성경 지식이나 구변이 낮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에게서 복음의 진리를 가르침 받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정도로 겸손하였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에서 사도 바울과 방불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다. 한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복음에 대한 사모함과 사도 바울에 대한 헌신이 남들보다 탁월하였기 때문에 자기들보다 성경 지식과 언변이 탁월한 아볼로를 가르칠 수 있는 특혜를 얻었었다. 사도들은 교회를 지도하는 감독과 장로와 집사들의 필수요건으로서 탁월한 인품과 도덕성을 강조하였다. 오늘날 교회의 목사와 장로와 집사들은 성경에 대한 지혜와 지식, 인격과 도덕성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높은 수준으로 탁월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필수요소들에 지리멸렬하여도 어느 정도의 부귀영화만 있으면 마구잡이로 이런 직분을 얻을 수 있다보니 더이상 한국 교회에는 복음의 진리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세상 사람들보다도 못한 몰상식과 파렴치와 미개함만을 갖추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아담을 지으시고 그에게 직접 명령을 주셨고 아담은 아내 하와에게 자기가 직접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명령의 말씀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하와는 아담에게서 들은 말씀이 과연 그러하다고 믿고 순종하기보다는 과연 그러한가 하면서 교만함으로 의심하게 되었고 이를 파고 든 뱀의 유혹에 스스로 빠져 범죄하였으며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자기 남편인 아담에게 금지된 열매를 건네주며 시험함으로써 그도 마찬가지로 범죄하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이로 인해 여호와께서는 하와를 비롯한 모든 여자들에게 당신의 언약과 율법의 권세와 책임을 매우 제한하셨고 남자들에게 철저히 의존하게 하셨다. 여자들은 할례와 제사와 절기의 의무에서 배제되었던만큼 순종의 책임에서 우러나는 신앙의 유익에 대해서도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반면에 이스라엘 남자들은 육체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할례와 까다로운 절차를 수반하는 제사와 일정 기간 생계를 내려놓아야 하는 3대 절기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던만큼 체험하는 신앙과 여자를 다스리는 권세의 유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사도들도 마찬가지로 아무리 예수님께서 율법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을지라도 교회에서의 남자의 책임과 권세가 여자들에 의해 침해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공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거나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여자 목사가 아니라 반드시 남자 목사이어야 하고, 가정에서 복음을 가르칠 수 있는 권세는 아내가 아니라 반드시 남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어느 가정에서 아내가 남편보다 성경 지식이 우월하다고 해서 아내더러 성경을 가르치게 한다면 남편 스스로 하나님과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가정에서의 복음에 대한 권세와 책임을 저버리고 아내에게 내어주는 죄를 짓는 것인데, 이는 에서가 고작 음식 한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야곱에게 넘겨주는 망령된 짓과도 같은 것이다. 남편이 아내보다 성경을 잘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남편은 가정에서 복음을 가르치기를 소홀히 해서는 안되며 도리어 자기가 잘 가르칠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마땅하다. 아울러 남편보다 성경을 더 잘 알고 있는 아내는 자기가 직접 가정에서 성경을 가르치려 나서지 말고 남편에게 넘겨주어야 하며 남편의 성경 지식이 높아질 수 있도록 내조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에 아내가 성경에 모르는 것이 있을 때에는 남자는 아내가 스스로 목사를 찾아가 해답을 찾을 수 있게 하기보다는 그 질문내용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자기가 목사에게 물어 답을 배운 후에 아내를 가르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남자는 창조질서를 따라 여호와께로부터 언약과 명령과 율법과 복음 등에 대한 막중한 권세를 받은만큼, 그에 마땅한 의무도 이행해야 하는데 이는 특별히 여자에 대해서 그러하다. 잘못된 방법이긴 했지만 자기 혼자 동산에 남아 살기를 거부하고 차라리 하와와 함께 죽기를 선택한 아담, 불임인 아내를 내치거나 버리거나 자기 뜻대로 첩을 들이거나 하지 않고 오로지 그 한 여자만을 아내로 삼았던 아브라함과 사가랴,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버지가 배우자감으로 고른 여인을 군말없이 아내로 맞아들이고 평생을 함께한 이삭, 자기는 오직 라헬 한 여자만을 지극히 사랑하였으나 외삼촌 라반의 계략으로 세 명의 아내가 더 생기는 바람에 자매간 암투가 벌어졌어도 그들에게까지 남편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은 야곱, 이방인이었던데다가 심지어 수많은 남자들에게 더럽혀져 더이상 여자로서의 삶을 기대할 수 없는 천하고 천한 창녀였던 라합을 단지 그녀의 신앙이 어떠한지만을 바라보고서 주위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아내로 맞아들인 살몬, 그러한 살몬과 라합의 아들답게 국적이나 나이나 결혼유무를 따져보지 않고 시어머니 나오미를 지극정성으로 순종하고 섬기며 참된 신앙을 드러낸 룻을 아내로 맞아들인 보아스, 비록 여호와의 명령으로 삶 자체가 음행인 여인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여 자기와의 사이에서 낳지도 않은 세 자녀를 자기 자녀처럼 키우고 결혼 후에도 외간 남자를 찾아 가출한 아내를 다시 데려오며 지극 정성으로 사랑을 베푼 호세아, 음행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약혼녀의 혼전임신 소식을 듣고도 자기의 절망과 분노를 억제하고 가급적 조용히 파혼하고자 하였으며 비록 천사가 전하는 이야기를 듣고 약혼녀를 데려왔어도 최선을 다해 아내를 사랑하고 실제로 자기의 피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아이를 친아들처럼 지극정성으로 양육한 요셉이 남자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본받아야 할 위인들이다.
남자로서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여자의 외도인데, 호세아와 요셉의 예시를 통해서 남자 그리스도인들은 설령 여자가 외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남편으로서 가장으로서 하나님과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의무에 순종하여 이혼을 택하여서는 안되고 반드시 외도하는 아내를 그리스도께서 범죄하는 교회를 여전히 사랑하시듯이 끝까지 사랑해야만 한다. 호세아와 요셉은 자기의 친자녀가 아닌 아이들도 친자녀처럼 사랑하고 양육하였는데, 마찬가지로 남자 그리스도인들은 친자녀건 입양아건 상관없이 아버지로서의 자녀에 대한 역할과 의무를 그리스도 앞에서 성실히 이행해야만 한다. 남자가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견디기 어려운 자괴감을 느낄 때는 아내와 자녀들이 가장으로서 아무런 존중을 해주지 않고 무시하며 그저 돈벌어다 주는 사람 정도로만 취급하는 것이다. 남편이자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가족들을 부양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기 때문에 하루의 많은 시간을 집을 떠나서 일을 해야만 한다. 때문에 집안 일이나 자녀 교육 등에 많은 관심을 쏟기가 어렵고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가족 구성원에서 홀로 멀어져 가게 된다. 자기가 힘들게 벌어다 주는 돈으로 아내와 자녀들이 부족함 없이 생계를 꾸려나감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벌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시시때때로 적다고 바가지를 긁으며 자녀들은 용돈이 충분하지 않으면 짜증을 부리며 아빠 대접을 해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남자는 자기의 가장으로서의 처지를 이해하려하지 않는 아내와 자녀에게 억울함이나 아쉬움이나 원망이나 하소연이나 분노 등을 쏟아내어서는 안된다. 그래봤자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은 존경과 순종이 아니라 경멸과 비웃음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내와 자녀에게서 당하는 수모와 굴욕조차도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서 져야만 하는 좁고 협착한 고난의 십자가의 길임을 알고 속으로 신앙으로 묵묵히 감내하며 견고히 인내하는 것이 남자 그리스도인의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인 것이다. 자녀 교육을 빌미로 해외유학을 시키는 경우 아내는 자녀를 돌보기 위해 자녀와 같이 외국으로 가고 여기에는 남자가 홀로 남아서 소위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며 외국에 있는 아내와 자녀의 생활비와 학비를 조달하는 역할을 전담하게 된다. 이런 기러기 아빠는 결혼으로 이뤄진 가정을 파탄내는 부작용이 만만치 않은데, 남자는 결혼 전보다도 못한 삶을 보내야 하고 행여나 외국에 있는 아내가 외도를 저지르지는 않을까 자녀가 오랜동안 떨어져 있어서 자기를 아빠로 취급하지 않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마련이며, 실제로 이런 사례가 적지 않게 발생하기도 한다. 이런 일을 당하는 기러기 아빠는 그야말로 눈물없이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지만, 만약에 남자 그리스도인이 기러기 아빠로서 아내의 외도와 자녀의 외면을 받더라도 죽음보다도 강한 질투의 분노에 휩싸여서 갑작스럽게 이혼을 한다거나 생활비와 교육비를 끊는다거나 현지로 날아가서 잔인한 사적 보복을 취한다거나 해서는 안되고, 그런 상황마저도 자기의 신앙을 정금과 같이 연단하는 고난의 과정으로 여기고 묵묵히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이행해 나아가야만 한다.
#20190821
#매일성경 #에스겔 26:1-21
두로라는 도시는 당시에 해상무역의 중심도시였던 것 같다. 두로를 중심으로 해서 많은 나라들의 배가 오고가며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각 나라의 물품들과 문화들과 재물들이 활기차게 오가는 활력있는 도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활발하게 다양한 민족들과 문화들이 뒤섞이게 되면 그만큼 어두운 면도 깊어지게 마련이다. 무역과 상업이 중심인 도시이므로 다른 어느 지역보다 돈이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았을 것이다. 옛적에 고대 동양에서는 사농공상이라 해서 상인을 가장 천시하였으며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유명한 재상인 관중은 상인은 절대로 관직에 세워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상인들은 돈을 위해서라면 도덕이나 인륜도 저버리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인들의 철두철미한 배금주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였기 때문에 두로 또한 이에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성의 타락을 가장 부추기는 것이 바로 황금만능주의, 배금주의인 것이다.
그런 두로조차도 다윗과 솔로몬이 다스리던 이스라엘에 대해서만큼은 어떻게 자기들의 우월함을 내세울 수가 없었다. 도리어 다윗과 솔로몬에게 스스로 자발적으로 많은 조공을 바쳤으며 다윗과 솔로몬의 인격에 감탄했으며 심지어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때 재목들과 일꾼들을 보내어 돕기도 했었다. 부유함이라면 어느 나라도 부러울 것이 없었던 두로가 무엇 하나 내세울 것이 없었던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그렇게 숭앙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다윗과 솔로몬이 그저 인간적으로 훌륭한 왕이었기 때문에 그러했을까. 돈을 따지는 자들은 철저하게 자기의 이해득실에 따라 인맥을 형성하게 마련이다. 도움이 된다 싶으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살랑거리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싶으면 가차없이 관계를 끊어버린다. 그런 두로의 왕이 외적으로는 아무런 유익도 없어보이는 이스라엘과 우호관계를 맺고자 한 것은 아무리 다윗과 솔로몬이 훌륭하다 한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두로의 부유한 교만함마저 누그러뜨릴 수 있었던 것은 이방 나라마저도 다윗과 솔로몬이 다스리는 저 이스라엘은 비록 겉보기에는 초라하지만 절대신인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들을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신다는 것이 명백하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자기네 부유함으로도 구할 수 없는 신령한 아우라였기 때문에 두로는 상인 특유의 이해득실에 대한 예민한 촉으로 이스라엘과 잘 지내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 이후에 이스라엘이 분열되고 점점 하나님을 배역하여 쇠퇴하게 되자 두로는 더이상 이스라엘과 우호적으로 지내지 않고 호시탐탐 이스라엘을 어떻게든 이용해먹으려고 하였다. 인간의 기준으로 본다면 이런 두로의 행보는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무슨 혈연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을 위해 맺은 국가간 관계일 뿐인데, 더이상 자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손절할 것이 당연하다. 또 그렇게 무시를 당하게 된 것 또한 두로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이스라엘이 자초한 것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해서 두로가 자국의 이익에 큰 도움을 주는 호재로 보는 태도를 정죄하시고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신다. 두로는 다윗과 솔로몬을 보면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까지는 인정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더라도 다시 회복시키실 것 까지는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어떤 언약을 맺으시고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는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해서도 그 이면의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만약 두로가 이를 알았더라면 비록 이스라엘이 지금은 멸망 당할 것처럼 보여도 그들을 불쌍히 여겨 자비를 베풀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고 자비를 베푼 두로에 복을 내리셨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두로는 영적인 부유함에 대한 안목이 없었으므로 다른 주변국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멸망을 기뻐하였고, 이로 인해 멸망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다운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빛을 내지도, 맛을 내지도 못하는 것 때문에 많은 비난을 듣는 것이 사실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만 믿고 아무렇게나 범죄하였듯이 오늘날 교회가 그리스도를 모신다는 표면적인 이유만으로 세상의 상식보다 못하게 수준낮은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뻔뻔하게 보이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이런 교회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징계하시건 심판하시건 이를 당하는 것은 범죄한 교회가 마땅히 받아야 할 보응이다.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을 때 이를 두고 손뼉치며 즐거워하거나 교회나 세상이나 별반 차이 없다고 무시하거나 교회의 몰락을 새로운 이익을 위한 호재로 보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이방 족속을 심판하신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두로를 포함한 이방 족속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족속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예언을 듣고도 개무시 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듣지 않을 것임을 아시고도 굳이 먼저 심판을 예언하심으로써 당신의 자비하심을 드러내시고 그들이 변명하지 못할 증거를 세우신다. 오늘날 교회를 조롱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복음도 그리스도도 모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를 얼마나 아끼시고 사랑하시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교회가 당하는 재앙에 비웃음을 보내며 즐거워할 뿐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조롱하는 것은 바로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것이다. 교회를 칭찬하시건 혼내시건 그 주권은 오직 그리스도께 있는 것이므로 교회에 속하지 않은 자들이 이를 두고 가타부타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교회는 자기를 조롱하는 세상이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교회로서의 사명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고 세상으로부터 그리스도가 욕을 먹게 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아울러 교회는 자기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교회를 조롱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그리스도의 심판을 당하도록 유발한 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세상이 당하게 될 심판은 교회의 범죄 때문에 야기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의 본문에서 과연 심판받는 범죄한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들은 어디까지 적용할 수 있을까 고민이었다. 내가 다니는 교회의 담임목사는 과연 범죄한 이스라엘인지, 나는 이방 나라인지. 잠시 경각심이 들긴 했으나 이는 적절한 대비는 아닌 것 같았다. 도리어 교회에 해를 끼치고 뒤흔든 담임목사는 시드기야와 같았다. 아무리 예레미야 등의 선지자를 통해서 옳은 말을 전해도 꿈쩍하지 않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시드기야처럼, 담임목사 또한 주변의 어느 유익한 충고도 듣지 않고 멸시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바르게 이끌어 갈 책임이 있음에도 이에 불성실하였다 때문에 나로서는 더이상 이 부적격 담임목사에게 회개와 회복의 은혜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 판단할 수 밖에 없다. 나 또한 내 분노의 근거는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담임목사가 망한다 한들, 심판을 받는다 한들 내게 좋을 것이 무엇인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내가 화를 내는 것은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교회적 차원이었다. 내 신앙의 고향이자 가정과 같은 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그런 부적격자가 10년도 안되는 기간 동안에 거의 회복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헤집어 놓았다는 점에 분노하는 것이었다. 물론 내 인성의 크기가 간장종지만해서 정당한 비판을 넘어서 인격적 비난도 일삼는 것은 나의 부덕함의 소치이다. 그래서 이를 두고 기도하게 된다. 하나님의 공의로 분노하게 하시고, 나의 분노가 정당하거든 그를 심판하셔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시고 정당하지 않거든 내 입술을 막아달라고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