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미래 말세의 중생이 부처를 배워도 도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무시이래로 자기를 중심으로 삼는 데에서 오는 애증(愛憎) 심리 때문이라고 합니다. “일체종자(一切種子)”란 말에는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ㆍ교만ㆍ의심[貪嗔癡慢疑]이라는 다섯 가지 사혹(思惑)입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이러한 심리상의 병폐를 어떻게 전환 변화시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견혹(見惑)입니다. 견혹은 신견(身見)ㆍ변견(邊見)ㆍ사견(邪見)ㆍ견취견(見取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입니다. 견취견은 자기의 주관적인 선입견입니다. 계금취견은 어떠한 일은 해서는 안 된다며, 하게 되면 도를 이룰 수 없다는 견해입니다. 회교도들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듯이 각 종교마다 서로 다른 규범이 있습니다. 견혹은 관념상의 착오로서 이런 그릇된 관념에 사로잡혀 있어서 해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견사혹은 심리 생각상의 일체의 종성(種性)을 형성하고, 현재의 개성(個性)을 형성합니다. 반드시 견사혹을 전환 변화시켜야 성취할 수 있습니다. 견혹은 도를 보고 명심견성한 뒤에야 끊을 수 있으며 전환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사혹은 도를 본 이후에도 끊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수행에 의지해서 서서히 공부해가야 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내심의 애증의 생각에 깊이 시달리고 있는데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ㆍ교만ㆍ의심은 끊어 없애기 대단히 어렵습니다.
부처님은 왜 이 단락을 말씀하셨을까요? 선지식을 잘 섬긴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제가 늘 학우들에게 하는 말이지만 저는 선지식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들이 설사 선지식이 있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역시 잘 배울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왜 그럴까요? 일반인들이 배울 때에는 모두 자기중심적이어서 어느 사람이 말하는 도리는 자신의 생각에 부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학우들은 제게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말씀하신 생각은 저의 생각하고 같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래, 고맙군!” 하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말하기를, 여러분들은 부처님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간판을 가지고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불경을 주해하고 많은 인사들이 무대에 올라가 홍법(弘法)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불법이 석가모니불의 진정한 원래의 뜻일까요? 몹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선종에는 이런 고사가 하나 있습니다. 오대시대에 혜충(慧忠) 국사에게는 학문이 대단히 좋은 한 제자가 있었는데, 그 제자가 불경을 주해하고 싶어 했습니다. 혜충 국사는 시자더러 물 한 그릇을 떠오라고 하여 그 안에 쌀 일곱 톨을 놓고 그 그릇 위에는 젓가락을 하나 놓았습니다. 그런 다음에 이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제자는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혜충 국사는 말했습니다. “그래! 나의 뜻도 너는 이해하지 못하면서 너는 부처님의 뜻을 이해하느냐?”
그러므로 “자타증애(自他憎愛)”를 없애버리고 일체에 평등하여 남을 자기처럼 사랑할 수 있어야 부처님을 배우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남을 자기처럼 사랑한다는 말은 누구나 다 할 줄 알지만, 이해(利害)관계의 대목에 이르자마자 당연히 나가 제일이지 남이 이 또 어디에 있던가요? 어떤 사람의 수행은 평소에는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해관계의 대목에 부딪쳤을 때에야 진정으로 시험해볼 수 있습니다. 특히 종교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는 심리가 특별히 강합니다. 아! 당신은 기독교인이군요! 하는 그런 분위기가 나오면서 평등하지 못하고 자비롭지 못합니다. 왜 종교를 신앙하면 남을 배제하기 쉬울까요? 자기가 믿는 종교야말로 옳고 남이 믿는 건 틀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견취견과 계금취견의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 이 역시 “자타애증(自他憎愛)”의 심리로서 나에게 맞으면 기뻐하고 나에게 맞지 않으면 싫어한는 것입니다.
“약부유인(若復有人), 관피원가(觀彼怨家),여기부모(如己父母),필무유이(心無有二),즉제제병(即除諸病)”, 어느 불교인이 이 단락의 말대로 할 수 있을까요? 늘 말하지만 저는 불교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는 불교인이 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가령 어떤 사람이 원한이 있는 사람을 보더라도 자기의 부모처럼 여기라고 하는데, 이는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원한이 있는 사람을 자기의 가족처럼 보고 원한이 있는 사람이나 친한 사람에게나 평등해야 부처님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은혜와 원한을 너무 분명하게 가려서는 안 됩니다. 그럼 은혜와 원한을 가리지 않는 게 좋을까요? 그래서도 안 됩니다. 은혜와 원한, 시비선악을 분명하게 가리면서도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즘 많은 젊은이들이 불교를 배우겠다고 찾아옵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묻습니다. “너의 부모님은 어떠시냐?” “나는 그런 일에 상관하지 않아요.” “뭐? 부모도 상관 않해, 효순하지 못한 녀석 같으니라고! 그래도 부처님을 배우러 와? 효순하지도 못하고 사람의 도리도 잘 못하면서 성불하고 싶어?” “아이구! 선생님, 우리 엄마는 성깔이 괴짜여서 함께 지내기 어려워요.” “그래! 부모하고 잘 지내기 어렵고 부부지간에도 잘 지내기 어렵다. 이런 것을 할 수 없으면서도 중생을 제도하겠느냐? 부모는 중생이 아니냐? 남편ㆍ아내ㆍ아들딸은 중생이 아니냐? 남을 속이겠느냐! 하늘을 속이겠느냐!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자기 부모에게도 효도의 마음ㆍ사랑의 마음을 다하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에게나 원한관계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부처님을 배우는 사람은 일체의 중생을 자기의 부모처럼 보고 일체의 중생을 자기 자녀처럼 봐야 한다. 또 자기의 자녀는 일반중생으로 보아야 한다.”
석가모니불이 말씀하신 이 단락을 통해 부처님을 배운다는 것은 사람됨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으면서 정좌하겠다고 하며, 수련법을 닦겠다고 하고, 관정(灌頂)을 받으면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고 하니 관정을 받겠다고 하며, 진언을 하나 외워서 성불할 수 있다고 하니 진언을 외우겠다고 합니다. 보십시오, 이런 탐심이 얼마나 심합니까!
“어제법중(於諸法中), 자타증애(自他憎愛),역부여시(亦復如是)”, 이 도리를 이해하고, 어떻게 수행의 첫걸음을 내디뎌 하는지 알고 난 다음에 일체의 불법을 닦아야 합니다. 불법의 기본 입각점은 자비와 평등에 있습니다. 수행방법 면에서도 역시 평등하여 좋고 나쁨이나 애증이 없습니다. 불교를 믿고 나서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나 혹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을 깔보아서는 안 됩니다. 선종을 배우고 나서는 정토종을 깔보아서는 안 됩니다. 밀종을 배우고 나서는 밀종이야말로 성불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정토종을 배우고 나면 선종은 확실한 공부가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8만4천 가지 법문은 어느 것은 좋고 어느 것은 나쁘다는 게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근기와 상응하여 성실하게 수행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습니다. 능엄경에서 “귀원성무이(歸元性無二), 방편유다문(方便有多門).”이라고 말했습니다.
(남회근 선생의 원각경 강의 중에서)
첫댓글 은혜와 원한을 너무 분명하게 가려서는 안 됩니다. 그럼 은혜와 원한을 가리지 않는 게 좋을까요? 그래서도 안 됩니다. 은혜와 원한, 시비선악을 분명하게 가리면서도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부처님을 배우는 사람은 일체의 중생을 자기의 부모처럼 보고 일체의 중생을 자기 자녀처럼 봐야 한다. 또 자기의 자녀는 일반중생으로 보아야 한다...나무마하반야바라밀
"자기 부모에게도 효도의 마음ㆍ사랑의 마음을 다하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에게나 원한관계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부처님을 배우는 사람은 일체의 중생을 자기의 부모처럼 보고 일체의 중생을 자기 자녀처럼 봐야 한다. 또 자기의 자녀는 일반중생으로 보아야 한다.”
이 말을 새기고 새깁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들을 섬기는 일부터 할 수 있어야만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내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나무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