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계속 연락이 닿지 않았다. 어제도 통화를 시도하고, 오늘 출발 전에도 전화했지만 신호음이 중간에 끊겼다. 요양보호사 선생님 전화는 오늘도 꺼져 있다. 정말 못 뵐지도 모르겠다. 김민정 씨께 혹시 못 뵙더라도 실망하지 말자고 말씀드렸다. 아버지께서 집에 안 계시면, 우리는 밀양 구경하고 오면 된다고. 심각했던 김민정 씨가 이내 즐거워진다.
아버지께 드릴 반찬부터 샀다. 한우육개장, 소고기마늘쫑볶음, 고추다대기를 샀다. 김민정 씨가 골랐는데 아버지께서 좋아하셨으면 좋겠다.
여행하는 것처럼 휴게소에 들러 간식도 사 먹고, 아버지께 김민정 씨 사진과 지금 가고 있다는 문자도 보냈다. 문자는 꼭 확인하셨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가는 길을 혹시 민정 씨가 기억할까 싶어 여러 번 물었다. 고속도로는 공사를 많이 하고 있어서 낯선 것 같았다. 밀양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지 “오!” 하는 감탄사가 자주 나왔다. 아버지 댁에 가까워지고 있나 보다.
직원이 주차하는 사이, 김민정 씨는 익숙하게 아파트 입구로 가버렸다. 성격이 급하다. 급하게 따라가 보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큰 소리로 웃고 계셨다.
“김민정 씨, 왜 또 저를 버리고 가셨죠?”
“아니야. 히히.”
“아니긴요, 버리고 갔는데…. 재밌어요?”
“네! 히히.”
“그래요, 그럼 됐어요.”
직원이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2층과 10층 버튼을 누른다. “김민정 씨, 아버지 댁은 12층입니다만….” 하고 말하는 직원을 보며 또 ‘히히’ 웃는다. 10 더하기 2 하면 12니까 전혀 맞지 않은 것은 아니다.
12층에 도착해 아버지 댁 앞에서 벨을 눌렀다. 대답이 없다. 초인종을 열 번은 누른 것 같다. 전화부터 시작해서 초인종까지…. 아버지께서 직원을 스토커로 신고하셔도 드릴 말씀이 없다. 분명히 TV 소리가 들리는데….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했다. 김민정 씨 눈치를 살피다가 “일단 열고 들어갑시다!” 했다. 문고리를 돌리니 열려 있다. 김민정 씨께 앞을 양보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아버지께서 TV를 보고 계셨다.
“아빠! 안녕? 안녕?”
“….”
“아버님, 안녕하세요? 벨을 여러 번 눌렀는데 못 들으신 것 같아요. TV 소리를 좀 줄여도 되나요?”
“네.”
아버지께서 눈에 띄게 당황하셨다. 전화를 드렸는데 연락이 안 돼서 일단 그냥 왔노라고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김민정 씨가 아버지를 못 뵌 지 오래되기도 했고, 전담 직원도 바뀌어서 인사도 드리고 싶었다고. 또 모레 있을 김민정 씨 생일도 같이 축하하고 싶었다고…. 아버지는 말없이 김민정 씨를 보고 계셨다. 김민정 씨가 고른 반찬과 오는 길에 마트에서 산 믹스커피도 설명을 드렸는데, 아버지께서는 고기를 즐기지 않는다고 하셨다. 믹스커피 역시 “나는 당뇨가 있어서 먹지도 못하는데 무슨….”이라고 하셨다. 김민정 씨는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아버지께 선물로 드렸구나.
막상 아버지 댁에 도착하니 김민정 씨는 또 말이 없다.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믹스커피를 꺼낼 때만 ‘히히’하고 웃다가 아버지가 앉으라고 말씀하셔도 앉지 않고 계속 서 계셨다.
“김민정 씨, 아버지와 점심식사 하기로 했잖아요.”
“네. 고기.”
“나는 점심 먹었다.”
같이 식사를 하려고 봐 둔 식당이 있었는데, 아버지께서 식사를 하셨다니…. 역시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어색한 공기를 깨고, 아버지께서 전(廛)에 가자고 하셨다. 직원이 잘못 들어 전(煎)을 사러 가자고 하시는 줄 알았다. 아버지께 여쭈어 밀양아리랑시장으로 향했다. 잘못 들었지만 시장(廛)으로 가서 다행이었다.
시장 입구에서 아버지의 발길이 멈춘다.
“민정이 뭐 하나 사라.”
“오! 오!”
생일 선물을 사주고 싶으셨나 보다. 물건을 고르는 김민정 씨의 손길이 다급하다. 앞에 있는 것 중 지갑처럼 생긴 가방을 골랐다.
“이거 안에 메는 끈도 있어서 편해요.”
가게 사장님이 나와서 설명해 주셨다.
“가방 뭐 한다꼬.”
“아니야.”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계산하셨다. 새 가방이 생긴 김민정 씨는 기분이 좋다. 딸에게 가방을 사 주시고, 반찬 가게로 향한다. 코다리조림, 굴무침을 고르셔서 재빨리 김민정 씨가 계산하시도록 권했다. 또 다른 반찬가게에서도 아버지가 드실 추어탕을 김민정 씨가 계산했다. 아버지는 고기보다는 생선을 좋아하시는 것 같다. 다음에는 아버지가 드실 반찬으로 생선을 권해야겠다.
집으로 돌아와 전담 직원의 이름을 ‘김민정’으로 저장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전화 드리면 통화할 수 있는지 여쭈었다. 아버지는 좋다고 하셨다.
“이 번호가 누구 번호라고?”
“제 번호예요. 민정 씨 이름으로 저장해 뒀으니까 혹시 따님과 통화하고 싶으시면 이 번호로 연락주세요.”
“그래, 알았다.”
“아버님, 몇 시쯤 전화 드리면 받기가 편하세요? 민정 씨가 아버지와 자주 통화하고 싶어 해요.”
“아침 먹고 하든가, 점심 먹고 하든가. 언제든 해. 받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아버님.”
‘김민정’으로 저장된 번호를 한참 바라보셨다. 아버지도 딸이 많이 보고 싶으셨을 것이다. 이제 번호도 저장해 뒀으니 연락을 안 받으실 일은 없다.
이번 방문 때는 꼭 아버지가 이용하시는 센터에서 상담을 받고 싶었는데, 요양보호사 선생님과도 연락이 안 되고 집에도 연락처가 없다. 다음을 기약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딸이 다녀갔는데 다녀간 티는 나야지’ 싶어 김민정 씨께 청소를 권했다. 요양보호사 선생님이 여행을 가셔서 오지 않은 지 좀 되었다고 하셨다.
“됐다. 청소는 무슨. 길 막힐라 얼른 가라.”
“아버님, 그래도 딸이 다녀갔는데 티는 나야죠. 김민정 씨 청소 잘해요.”
“네.”
“배가 나와서 청소 하겠나….”
“아니야.”
걸레를 빨아 여기저기 닦았다. 김민정 씨는 조금 하다가 힘든지 멈칫했지만, 그래도 바닥을 다 닦고 나서 아버지 옆에 앉았다.
직원이 걸레를 정리하는 동안 김민정 씨께 아버지와 인사 나누시라고 권했다. 화장실에서 두 분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민정이 배 그거 빼야 된다. 커피 많이 먹지 말고.”
“네, 네.”
“잘해라. 집에 잘 가고.”
“네.”
다음 달에는 장날에 맞춰 오기로 했다. 아버지 좋아하시는 반찬도 사고, 같이 점심도 먹기로 약속했다. 돌아오는 길, 김민정 씨는 지쳤는지 잠이 들었다.
2024년 12월 19일 목요일, 구주영
"민정이 뭐 하나 사라." 이 말씀에 딸에 대한 마음이 다 담긴 것 같습니다. 신아름
연락이 닿지 않아도, 그러니, 아버지 댁에 찾아뵙자 했지요. 당일마저 연락이 닿지 않아 노심초사했을 텐데, 유쾌하게 다녀오니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서 말씀은 늘 좀 투박하게 하셔도 딸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뭐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은 여느 아버지와 같고 한결 같으시네요. 다녀오기 참 잘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댁 청소 아주 인상 깊습니다. 월평
첫댓글 10더하기 2는 12에서 감탄했습니다. 구주영 선생님의 시선은 아주 남다르신 것 같아요. 일지를 읽는 내내 어찌 보면 동행한 사람으로서 실망할 수 있는 상황이 더러 있는데, 그럼에도 당사자의 감정을 세심히 살피고 두 분을 앞세워 돕는 모습에서 깨닫는 바가 큽니다. 김민정 씨는 참 든든한 따님이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