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류는 쓰러진 아이의 윗옷을 벗겨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응급치료를 했다. 옷을 벗겨보니 예상외로 상처가 크지 않았다. 전생의 자신의 기억에 비춰 볼 때, 다친 아이는 혈소판이 적어 유난히 피가 멈추지 않았다. 혈우병까지는 아니지만 평범한 사람보다 피가 잘 멈추지 않는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약간 베인 상처에도 피가 꽤나 흘렀었다. 아까 당황해서 몰랐지만 아니, 당황이라기 보다 피가 옷을 심하게 적시고 있어 몰랐지만 자세히 보니 얕게 베인 상처가 좀 있을 뿐 손가락이 문질러진 것 외에는 딱히 큰 상흔은 없어보였다.
...그리고 집으로 데려 가기 위해 엎었다.
누가?
휘청
"...윽"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건드렸는지 신음소리가 억눌려 나왔다. 카류는 의외로 나가는 아이의 무게에 후들후들 하다 결국 한 발자국도 못 걸었다.
"...난감하게 된 거 같지?"
자신의 말에 엎힌 아이가 어깨에 얼굴을 묻고 큭큭대고 있지만 하늘을 보며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왜 다 보냈을꼬...
말려도 당장 검술 훈련이다!! 하고 다짐하지만 지금은 정말 난감했다.
"...참을 수 있겠지?"
카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묻자 아이는 보일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난히 작은 카류
나이가 적어 카류보다 조금 작은 아이
카류의 바들거리는 상태로 차마 엎힐 수가 없었던 아이를 위해 생각해 낸 것은 부축해주는 것이었지만 신장 차에 문제가 있었다. 양 손가락이 대부분 으깨진 것 같지만 제대로 서지도 못한 아이의 한쪽 팔을 목에 걸자 참으로 불편해했다. 들려진 어깨에 발은 땅에서 살짝 떠 까치발로 바들바들 떨면서 걸어여 했다.
....어느 세월에 도착할까?
차분하게 아이를 치료하는 하얀 가운을 입은 할아버지를 카류는 묘하게 바라보았다.
필요할수록 발전한다는 건 사실인 듯하다.
궁에 있을 때 아프면 치료사보다는 신관이나 마법사가 있어 금방 치료를 할 수 있다. 그 휴유증으로 면역체계가 악화된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건 극히 미세한 부분이었다. 그래서 한 번 만나본 왕궁 치료사를 보며 이 곳 의료 수준이 상당히 낮다고 짐작을 했었거늘 여기 와서 얼마나 놀랬던지...
기생들이 유혹하는 기술 뿐만 아니라 치료사로써 활동을 했다는 옛말을 이제야 할 것 같았다. 가끔씩 지독한 취미를 가진 귀족들이 아이들을 망가뜨리고 가도 여기 있는 할아버지는 왠만한 상처는 다 치료한다. 외과에 내과, 피부과, 정신과뿐만 아니라 성형외과까지 종합한 듯한 분이셨다. 하지만 그게 다 필요에 의해서 익혀나갔다는 것은 씁쓸하기도 하다.
자신이 전생에 배운 생물 지식으로 세포, 바이러스 등을 익히고 나서는 잘린 팔까지 치료할 수 있다. 완벽히 치료는 하지 못하지만 뼈, 근육, 피하지방, 피부 등 미세하게 따로따로 작업하고 난 뒤 마나를 유통시키면 어느 정도 일상생활에 무리없을 정도인 것이다.
그런 할아버지니 믿을만 하기는 한데...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으아아악. 이 망할 할방탱구가..."
"퍼뜩 안 눕나? 확 손모가지도 문질러뿐다. 퍼뜩 안 앉고 뭐하고 나자빠졌노."
"에라이 이 돌팔이가!!"
"뭬야!! 이 자슥이 마 손모가지 필요없다 이기제."
"할아버지. 상태는 어때요?"
가만히 있으면 될 것을 꼭 몇 마디 하다가 다친 손가락 꾹 눌러서 더 소란스럽게 변한다. 지저분한 이 세계의 다른 의사들과 달리 깔끔한 가운을 입고 청결히 한 불량배같은 할아버지가 아이의 손가락에 붕대를 감고 밖으로 나가자마자 카류가 쫄래쫄래 뒤쫓아와 악착같이 물었다. 물론 치료사인 할아버지는 그런 카류가 귀여운지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아이가 들어 있는 뒷문을 꼭 닫았다. 뭔가 잘못 된 걸까?
심장이 두근 반 세근 반 하며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뭐가 이쁘다고 부축해서 왔노. 니는 안 피곤하나? 보약 한 재 지어주까?"
"제가 한 일이 뭐가 있다구요. 괜찮겠죠?"
"한 동안 곰탱이처럼 디비 누 자드만 어떤 자슥이 쥐어박았다고 팔딱 뛰는 기다. 안정도 취하지 말고 마 그냥 부리뿌라. 일에 치이살면 아픈 건 안 잊겠나."
말은 저렇게 해도 자신의 손.자.가 다쳐서 와서 기분이 안 좋은 지 수술용 메스를 들고 쥐었다 폈다 하는게 범인이 잡히면 그대로 인체 해부용으로 배를 따볼 생각이신 것 같다. 일 시켜라는 것을 보면 딱히 나쁜 곳은 없는 것 같아 일단 안심이었다.
"손가락은요?"
"하이고 마. 그 자식은 강철 아이가. 그 녀석 부축해 온다고 니 허리 뿌아졌을라. 뭐, 날이 지금같이 개같은 날에 다 늙은 할마탱구같이 저리저리 하겠지만 확 잘린 것보다야 낫겠제."
아마 휴유증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뜻에 카류는 새삼스레 증오심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멀쩡히 지나가던 사람을 패기는 왜 패냔 말이다.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우수한 치료사의 손자를... 약초에 능해 남창으로 일하던 걸 빼서 입양시키시고 애지중지하시더니(...비록 티격태격할지라도) 속이 많이 불편해 보이셨다.
"...니 여(기) 한 달 정도 문 닫을 기래매?"
얘들이 범인을 잡아오면 어떻게 박살 내야 잘 했다고 소문이 날 지 이리저리 고민을 하고 있었지만 딱히 생각난 것은 없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할아버지가 스쳐지나가듯 물어보았다.
"네. 어머니 묘지 문제도 있고... 이런저런 앞으로 일들을 구성할까 싶었는데..."
"그라믄 말이다. 집에 함 왔다 가그라."
할아버지의 의술이 뛰어난 것을 보고 놀랐다. 실제로 칼로 째고 하는 수술이 이뤄지는 것을 보고 더욱 놀랬다. 심지어 여러가지 약초를 가지고 약을 제조하는 것을 보고 더욱 놀랐다. 그 약의 효과가 전생의 수준과 비슷, 혹은 뛰어넘음을 보고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뭐랄까... 직위가 없으니 돈이다!!라는 인식하에 봉 잡았다랄까?
그래서 할아버지가 원하는대로 좀 더 실력을 쌓을 수 있도록 실험실을 하나 마련해 드렸다. 어차피 이곳 특성상 귀족과의 줄이 장난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가지 약초를 얻어 보여드리고 그걸로 연구할 수 있다. 자신의 전생에서의 생물 지식도 전해 드린 후부터 정말 약을 제조하고 누군가를 수술하는 취미에 푹 빠지셨다. 아예 집을 밀어버리고 간단하게 건물 외장을 지은 뒤 지하를 파내서 실험실을 만드셨다. 정말로 가끔씩 펑!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을 보면 지하를 파낸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가끔 가다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아는 것이 없는대도 불러다 이것저것 질문하고 같이 실험하길 원하셔서 이번에도 그런 것으로 생각하며 그런다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어떤 약효인데요?"
"와 니 전에 말이다 폭력에는 폭력이 장사라제. 이번에 파딱파딱 돌아댕기는 녀석들도 일종의 폭력아이가. 그시키 때문에 지옥 문턱 밟을라 했던 시키들 잡아 족쳐봤다 아이가."
새삼스레 느끼지만 할어버지의 말을 이해하려면 머리를 열심히 회전시켜야만 했다. 아마 독을 독으로 물리칠 수 있다고 했던 것을 저렇게 바꿀 수 있는 것도 능력이다. 거기다 파딱파딱 돌아댕기는 녀석이라는 것은 질병을 얘기하는 것 같다. 지옥 문턱에 갔던 사람들은 그 때 질병에 걸린 환자들을 말하는 것이고... 잡아 족쳤다는 것은 이쪽에서도 의미불명이었다.
거진 한 달을 넘어가고 있는 지금 질병의 확산은 아르윈 전역 뿐만 아니라 카르틴 등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말세라는 말이 나오면서 공포도 장난이 아니어서 자살하는 사람 뿐만 아니라 거의 무법지대가 되다시피 했는데 그것도 잠시였다. 청결을 깨끗이 한 노이탐로프니에서도 외부에 비해 확률적으로는 적지만 앓는 사람이 대거 속출했다. 의식을 잃고 고열에 시달리고 죽지는 않고 견딘 사람이 대다수였다 하더라도 죽는 사람도 끊임없이 속출하고 있었다. 카류는 고작 감기같은 이 질병에 사람들이 죽는 것이 짜증이 났다. 의사가 되지 못한 자신에게...
그래서 백신의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걸로 한 동안 두문불출하시더니 결국엔 만들어 내셨나보다.
"그렇다면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조금 있다 가 볼께요."
"마 준비하고 있는데이."
"하스 얘기, 들었습니다."
세빈은 축축한 습기로 가득찬 바깥과는 달리 아늑하게 환기가 잘 되고 있는 방 안의 양탄자 위에 웅크리고 고양이처럼 자고 있었다. 그 옆에서 넨은 그 많던 서류를 꾸준히 끊임없이 처리하고 있었다. 진 역시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고 신은 어디서 나타났는지 안락의자에 앉아 바느질을 차분히 하고 있었다. 바깥에 눈이 몰아치고 따스한 난로에 불이 켜지면 정말 한 폭의 그림같으리라...
"후우."
나가기 전에 가득 쌓여있던 서류가 거의 처리된 것을 보며 카류는 세빈의 옆에 앉았다. 세빈은 누군지도 모르면서 카류의 무릎에 얼굴을 비비며 약하게 웅얼거렸다. 고양이같기도 하고, 아기같기도 한 세빈을 바라보며 카류는 머리카락을 살살 쓸었다. 예전의 자신처럼 거의 단발형인 세빈의 머리카락은 쓰다듬으면 약간 아쉬운 감이 있다.
"누구냐?"
잠든 세빈을 배려해 나지막하게 물었지만 오히려 그 목소리에 분위기가 축 가라앉았다. 다소 냉기가 느껴지는 카류의 목소리에 신은 뜨개질을 멈추고, 진 역시 가늘게 눈을 뜨고 넨도 서류를 쓰던 손이 멈칫했다. 그들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넨은 자신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어떤 의미의 누구를 뜻하는 것일까?
그 범인이 누구인지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범인이 누군지는 이미 알고 있다고 믿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우리의 눈을 피할 곳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맞으니까..."
카류는 자신의 무릎에 베고 잠들어 있던 세빈이 움찔했다고 느꼈다.
넨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자신을 보며 쩔쩔매는 세빈이 왠지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웃기다고 생각했다.
우리 마스터는 너무 똑똑해서 문제랄까?
"그 환한 대로에서 우리의 눈을 피할 수는 없지."
질병에 대한 두려움과 미래를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절망에 사람들이 점점 구석에 몰아붙여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아마 그런 시점에서 멀쩡하게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돌아다니는 천한 자신들만큼 좋은 먹이는 없으리라...
잠자(는 척하)던 세빈이 벌떡 일어나 왜 자신의 말을 안 들었냐는 식으로 따졌다. 그런 세빈을 보면서 오크가 뒷걸음 치다 고블린 밟은 꼴이라며 비웃는 넨을 보며 카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다들 요점이 틀렸다고.
"모른 척 넘어갈랬는데 궁에 갔다 오는 도중에 길에 떡하게 있으면 티가 너무 나잖아."
"호오... 시간이 문제였군요."
"그렇지."
다음에 일을 벌릴 때는 차라리 일 보는 도중에 그 소식을 듣게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이렇게 어려운 것들을 귀족들은 어떻게 잘 속아넘기는 지 새삼 귀족의 얍삽한 두뇌에 대해 감탄이 일었다.
"둬?"
진의 짤막한 말을 카류는 빙긋이 웃었다. 처음에는 좀 헤맸지만 거진 1년을 함께 살면서 진이 하려는 말을 다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자작극임이 들통나버렸으니 하스를 괴롭혔던 사람들을 그냥 둬야하는 것에 대한 물음일터이다. 물론, 이 쪽에서 벌린 자작극이라 볼 수도 있지만...
"설마."
도발한다고 도발당하는 놈 잘못인 거지. 일단 시비를 누가 걸었든 보여지는 상황에서 피해자는 이 쪽인 것이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시작을 위한 발걸음을 내딛는 상황에서 직원(?) 하나가 크게 다쳤는데 그냥 넘어가면 너무 무르게 보게 되고 하는 족족 여기저기서 태클 걸리게 된다. 결국 초반에는 강압적으로 한 번 나가줘야 하는 셈이랄까?
첫댓글 ㄷㄷ 저 할아버지도 글코 카류도 왤케 무섭냐;; 후덜덜덜~ 다음편도 기대할께요~~
오홍홍홍... 무섭나요? 다음 편 조만간 가지고 올께요~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소녀의 한은 무섭다던데.. 어째 카류의 한은 더한듯 하옵니다?...
카류의 한이 눈 내리지 않는 아르윈에 눈을 내리게 할지도...?
점점 카류에 대한 애정도가 더 깊어져 갑니다!!
쿨럭, 감사해요...>_< 카류 미워하면 이 소설 그냥 끝인거죠....
삭제된 댓글 입니다.
실제로 존재한다면... 당장 달려가 한 팔이 되어주고 싶습니다!! ...지만 이런 세계가 존재할까요? 이런 터무니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