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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지지 못한 약속/신차균(공군 학사장교 64기 회장/ 국민대 명예교수)
내가 법해(法海) 최수모를 만난 것은 공군학사장교 제64기 후보생으로서 공군기술교육단 항공병학교에 입교해서였다. 법해와 나는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엄격한 선발시험을 거쳐서 항공병학교 후보생대대 사관중대 제1구대에 배속되었다. 우리 둘은 내무반은 서로 달랐지만 같은 구대원으로서 훈련 5개월 동안을 고락을 함께했다.
법해도 나처럼 남 앞에 나서기 좋아하는 활달한 성품은 아니었고 조용하면서도 내면의 깊이를 추구하는 듯한, 그래서 항상 정돈된 느낌을 주는 단정한 친구였다. 후보생 시절 법해는 나만큼,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마른 체격이었지만 피부가 유난히 흰 것이 인상적이었다.
군대 훈련소는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기획된 특수한 공간이다. 가정과 사회에서 자유분방하게 생활하면서 20여 년 동안 굳어진 온갖 습관들을 깎아내고 다듬어서, 공군 장교라는 제복의 틀 속에 맞추어 넣기 위해서 만들어진 일종의 용광로인 것이다. 거기서는 여러 가지 극한상황이 의도적으로 연출되어 훈련생들이 지닌 기존의 사고와 행동의 틀을 깨트리고 새롭게 단련시킨다. 이와 같은 극한의 상황에 내몰리게 되면 인간이 가진 원초적 욕구와 이기심, 나약함, 게으름, 탐욕, 과시욕 등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 점에서 볼 때 법해는 항상 절제되고 정돈된 모습을 잃지 않아서 단연 눈에 띄는 친구였다.
법해를 생각하면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하나 있다. 그것은 구대장근무후보생에 관한 기억이다. 학급의 반장격인 구대장근무후보생은 담임선생님 격인 구대장과 교과담당 교사격인 교관의 지시를 후보생(구대원)들에게 전달하고 구대원을 통솔하며 내무반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들을 구대장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군대생활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아는 일이지만, 훈련소 시절에 남 앞에 나선다는 것은 곧 얻어맞을 빌미가 되는 일이기 때문에 모두가 구대장근무후보생이 되는 것을 꺼려했다. 더군다나 전임 구대장근무후보생인 L 후보생이 날마다 구대장으로부터 얻어터지는 것을 지겹도록 보아온 터라 더욱 그랬다. 그런데 우리 내무반에 차례가 돌아온 것이다. 당연히 아무도 나서지 않아서 결국 마음 약한 내가 자임하고 나섰다. 마음속으로는 ‘그래, 기왕에 군대에 왔으니 이참에 내게 부족한 통솔력을 길러볼 기회로 삼자’는 나름대로 기특한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참혹했다. 학창 시절에 그 흔한 학급 반장 한번 해본 경험이 없고 수줍음 많고 행동이 굼뜬 나에게 구대장근무후보생 자리는 너무나 벅찼다. 아침저녁 구대장실에 가서 근무 지시를 받고 결과 보고를 하는 일이 마치 소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일처럼 느껴졌다. 매사에 어리버리하고 상황 파악에 민첩하지 못한 나는 구대장근무후보생 역할을 오로지 내 얄팍한 가슴팍으로써 때워야 했다.
당시에도 군대에서 명목상으로는 구타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훈육관(구대장과 교관)들이 후보생들의 잘못을 지적할 때는 손바닥으로 가슴팍을 떠미는 것(이것을 pushing이라 했는데, 말로는 떠미는 것이지만 실제는 온 체중을 실어서 때리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K 사범대학 체육교육과 출신으로 다부진 근육질 체격이었던 J 구대장님의 손때는 왜 그렇게 매웠던지, 한방 맞으면 뒤로 벌렁 넘어질 지경이었다.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얻어터지다 보니 내 가슴팍은 시퍼런 빛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지옥 같은 구대장근무후보생 자리를 내게서 물려받은 사람이 바로 법해였다. 모르긴 해도 법해도 같은 내무반원들이 서로 맡지 않으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희생하는 마음으로 맡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법해가 구대장근무후보생이 된 뒤로는 근무를 잘하지 못한다고 구대장으로부터 얻어맞는 장면을 볼 수가 없었다. 나 모르게 어디선가 얻어맞았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내 눈앞에서는 그런 장면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룻밤 사이에 J 구대장이 환골탈태하여 새사람이라도 되었단 말인가! 아마도 그것은 법해의 뛰어난 통솔력과 민첩한 상황판단능력이 J 구대장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게는 그 단서에 해당하는 기억 하나가 또렷이 남아있다.
구대장 근무후보생은 매일매일 근무일지를 써서 구대장에게 보고하고 결재를 받는데, 거기에는 그날그날의 일과와 내무반 운영계획, 평가와 반성 등등을 쓰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똑같이 반복되는 훈련 생활에 별다른 내무반 운영계획이 뭐가 있겠는가? 그러니 근무일지의 빈칸을 채우는 것도 고역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법해가 쓴 근무일지를 보았더니 내무반 운영계획 란에 “창틀의 먼지까지 깨끗이 닦게 한다”, “군화를 바닥과 구두 혀까지 깨끗이 닦게 한다”라고 씌여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J 구대장님으로부터 왜 그렇게 얻어맞았는지, 그리고 법해는 왜 맞지 않았는지를 똑똑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쓴 일지라면 “창문을 닦게 한다”, “점호 청소를 깨끗이 하게 한다”라고 썼을 것이고, 거기에는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깨끗이 할 것인지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이 없는데 비해 법해의 일지에는 그것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후보생 시절을 생각할 때면 먼저 떠오르는 얼굴들 중의 하나가 법해이다. 그의 통솔력과 민첩한 상황판단 능력은 내게는 큰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그의 안온한 성품은 언제라도 흉금을 터놓고 얘기하고 어깨를 기대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5개월간의 고된 훈련과정이 끝나고 임관을 하면서 우리는 각자의 배속지로 서로 헤어졌다.
법해를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거의 40여 년이 지난 후의 ‘공군 학사장교 64기 동기생 모임’에서였다. 하얀 피부와 둥그스름하고 포근해 보이는 얼굴 윤곽은 40여 년 전의 법해에 틀림이 없었지만, 그의 체격은 내 머릿속에 있던 날씬하고 다소 가냘프게 보이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나의 체중은 그때나 지금이나 60kg 초반에 머무르고 있으나, 나보다도 더 날씬해 보였던 법해는 90kg을 넘어 보이는 우람한 체구로 변해 있었다. 오죽했으면 공군 친구들이 거대한 항공모함 같다고 해서 ‘항모’라는 별호를 붙였을까!
오랜만의 재회로 그가 영등포 쪽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전체 모임의 어수선한 분위기에 휩싸여 깊이 있는 대화는 나누지 못한 채, 끝났다. 그 후로도 몇 차례 스쳐 가는 듯한 만남의 기회가 있었지만 둘만의 오붓한 대화의 시간은 갖지 못했고, 그의 근황은 주변 친구들의 전언을 통하여 듣는 편이었다. 그런 소식들에 의하면 법해는 당산역 주변에서 친구들과의 술자리를 자주 갖는다는 것이다. 그가 특별히 술을 좋아해서라기보다는 친구들과의 인연과 대화의 자리를 소중히 여기는 그의 관후한 성품이 친구들을 그리로 불러 모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굳이 만나려면 만사제폐하고 당산역으로 달려가기만 하면 될 일이었으나 태생적으로 술을 잘하지 못하는 나는 멀리 살고 있다는 핑계로 한 번도 찾아가지를 않았다.
근년에 와서는 접하게 된 소식은 그가 64기 청산회의 등산모임에 열심히 참가하고 있으며, 불경 공부에 심취해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것이었던가? 후보생 시절부터 그에게서 풍기던 무언가 모르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그 매력은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추구하는 구도자적 불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던가? 그를 아는 주변 친구들이 모두 인정하듯이 그는 맑은 물처럼 고요하고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는 관후한 심성의 소유자였다.
지난해 늦여름 어느 저녁 무렵, 걸려온 전화를 받으니 법해였다. 친구와 둘이 한잔하는 중에 내 생각이 나서 전화했단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내가 늘 마음속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친구인데, 그도 나를 생각하고 있었다니! 마치 남몰래 홀로 사모하던 여인으로부터 사랑 고백을 듣는 것같이 황홀한 기분이었다. 누구와 마시고 있냐고 했더니 공군 친구는 아닌데 나도 아는 친구라고 하면서 전화를 바꿔주었다. 석영(昔影) 박인기 교수였다.
석영과 나는 사범대학 동기동창생이다. 그러나 학창 시절에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 나는 교육학과이고 그는 국어교육과여서 같은 교양과목을 수강하지 않으면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시절 나는 하루하루 먹을 것과 잠자리를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어서 수업이 끝나면 아르바이트하러 달려가곤 했으므로 이웃 학과 친구들과 사귈 수 있는 써클 활동이나 술자리 등은 꿈도 꾸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석영 박인기라는 인물에 대해서 어렴풋하게나마 인식하게 된 것은 공군에 입대한 후의 일로, 지금은 고인이 된 송건수 동기를 통해서였다. 교육훈련이 끝나고 공군소위로 임관한 후 나와 송건수는 공군기술고등학교 교관으로 부임했으며, 대전시 선화동에 하숙집을 구하여 2년 동안을 룸메이트로 함께 지냈다. 김천고등학교와 경북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한 송건수는 고등학교 동기동창인 석영을 몹시 그리워하여 틈만 나면 석영 이야기를 했다. 그는 석영과 같은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각각 서울과 대구로 헤어지게 된 것을 못내 아쉬워했었다. 그를 통하여 석영이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김천고등학교의 수재였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제대 후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석영과 나는 시기는 서로 다르지만 한국교육개발원이라는 같은 직장을 거쳐서 서로 다른 대학에 각각 자리를 잡았고, 한국교육개발원을 거쳐 간 사범대학 동기생들 모임을 통하여 다소간의 교분을 갖게 되었다.
대학에서 문학교육을 가르쳤던 석영은 고등학교 동기생으로 절친인 법해가 근래에 와서 글쓰기에 관심을 쏟게 되자, 자주 만나서 그와 함께 글쓰기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두 사람은 글쓰기로 자아를 되돌아보고, 삶의 경험과 사유를 어딘가 문자 언어로 기록하는 일이 의미 있다고 생각한 듯했다. 법해는 이렇게 글쓰기 내공을 쌓는 일이 그의 불교 공부 내지는 불교 포교에 잘 연결될 수 있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날도 글쓰기 작업을 끝내고 둘이 한잔하다가 내게 전화한 것이었다. 법해의 전화가 반가웠음은 이미 말했거니와, 석영과의 통화는 옛 친구 송건수와의 추억을 떠올리게 해서 반가웠다. 석영과 나와의 통화를 곁에서 듣고 있던 법해가 다시 전화를 바꾸어서 말했다.
“우리 셋이 이렇게 잘 통하니 언제 셋이 함께 한잔하자. 내가 자리를 한 번 만들께.” 물론 석영과 나는 흔쾌히 동의했다. 마음이 서로 통하는 친구 셋이 함께하는 술자리는 얼마나 화기가 넘치겠는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법해가 청산회 친구들과 북한산을 등산하던 도중에 급서했다는 믿어지지 않는 소식을 들었다.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마음 맞는 친구 셋이 함께 한잔하자고 약속한 것이 불과 얼마 전인데, 그 약속은 영영 지켜질 수 없는 약속이 되고 말았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그 해맑은 모습, 언제라도 흉금을 털어놓고 기대고 싶던 그 푸근한 모습을 영영 볼 수 없게 되었다니!
세월이 유수와 같아 법해가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난 지 벌써 한 해가 다 되어간다. 법해의 타계로 누구보다도 큰 충격을 받았을 석영이 법해의 유고를 모아서 문집을 낸다고 하니 그 우정이 눈물겹다. 셋이 한잔하자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지만, 글 속에 깃들어 있는 법해의 마음은 책을 통해 수시로 접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법해도 틀림없이 기뻐할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석영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법해의 명복을 빈다!
첫댓글 법해의 공군 학사장교 64기생 동기회장에게 법해를 기리는 글을 받으려고 연락을 했더니 그가 마침 아는 분이었습니다. 나와는 대학 동기생인 신차균교수이었습니다. 그의 글을 받아서 읽어보니 고 송건수 친구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대전에서 같이 하숙을 했다고 하는군요. 인연의 순환이 이렇듯 겹치고 겹쳐 흘러갑니다. 고 송건수는 고등학교 이후 변함없는 나의 절친이었습니다. 나는 그가 나에게 준 우정을 받기만 하고 나는 제대로 주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법해의 공군 친구 신차균 교수의 글을 여기에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