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 迷宮
발음
[ 미ː궁 ]
표준국어대사전
고려대한국어대사전
우리말샘
뜻풀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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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1.
들어가면 나올 길을 쉽게 찾을 수 없게 되어 있는 곳.
미궁 속을 헤매다.
2.
사건, 문제 따위가 얽혀서 쉽게 해결하지 못하게 된 상태.
미궁에 빠진 사건.
길상에게서 혐의가 멀어졌고 그 사건 자체가 미궁으로 끝난 지 십여 년….
출처 <<박경리, 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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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파공작원들을 다룬 영화가 있었다. 실미도. '기억'만 하다가 8년을 허송 세월 했다. 진상규명을 해야할 책임자들마져도 오로지 기억만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이 8년간 한발짝도 나가지 못한 것을 보면서 문득 실미도 사건이 오버랩 됐다. 실미도 사건처럼 세월호 참사 또한 미궁에 빠질 수도 있겠구나! 안타까움이 밀물처럼 밀려 왔다.
썰물 때면 영화 실미도의 배경이 됐던 실미도와 무의도는 하나의 섬으로 연결된다. 지금 실미도는 무인도다. 영화 이전에 북파공작원을 훈련 시켰던 비극의 섬.
실미도 사건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실미도 사건을 현실로 인식하지 못한다. 영화를 통해 실미도 사건은 허구가 되고 말았다. 영화 배경이 됐던 장소의 경우 대체로 허구가 실제처럼 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실미도는 그 반대가 된 것이다.
실미도 안내판에도 실제는 없다. 실미도는 그저 영화 <실미도>의 촬영지로만 소개되고 있을 뿐 사건에 대한 설명은 없다. 실미도는 허구일까? 실재일까? 제작자는 영화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드러내려 했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사실을 영화로 오인해버린 듯이 보인다. 이제 고통의 땅은 그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가 됐다. 연인들은 더이상 실미도에서 역사의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영화는 허구라고 믿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풍문으로만 떠돌던 실미도 사건. 사건의 실체는 백동호의 소설<실미도>와 강우석 감독의 영화<실미도>를 통해 세상에 드러났다. 그 이전까지 사건은 그저 하나의 낭설로 치부됐을 뿐이다. 1971년 8월 23일, 인천 실미도에 있던 684부대 북파공작원 24명은 기간병 18명을 살해한 뒤 무기를 들고 탈영했다. 북파공작원들은 8월 23일 낮 12시 20분 인천 독배부리 해안에 상륙한 뒤, 버스를 탈취해 청와대로 향했다.
인천에서 육군과 첫 교전을 벌인 공작원들은 버스가 고장 나자 두 번째 버스를 탈취해 14시15분경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 앞까지 진격했다. 진압군과 교전을 벌이던 북파공작원들은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했다. 20명이 죽고 4명이 잔존했다.
하지만 생존자 4명도 이듬해인 1972년 3월 서둘러 사형 집행됐다. 이런 참혹한 사건이 벌어졌으나 박정희 정권의 통제로 언론에는 단 한 줄도 보도되지 못하고 묻혀버렸다. 정부는 그저 실미도 난동사건으로만 규정하고 30년간이나 철저히 비밀에 붙였는데 소설과 영화를 통해 세상에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사건의 실체는 상당 부분 은폐되어 있다.
북파부대인 684부대가 탄생한 배경은 1968년 벽두에 있었던 이른바 1.21 사태다.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 부대원 31명이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하기 위해 남파됐고 이들은 감시망을 뚫고 청와대 인근인 세검정까지 침투에 성공했다. 하지만 124군 부대원들은 국군에게 제압당해 김신조를 제외한 전원이 살해당했다. 바로 이 1.21 사건에 대한 보복을 목적으로 탄생한 것이 684부대였다.
그래서 부대는 북한의 124군부대원과 같이 31명으로 구성됐으며 평양에 침투해 주석궁의 김일성을 암살하는 것이 목표였다. 684부대는 형식적으로는 공군 소속이었지만 실제로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창설되고 유지됐다. 1968년 4월에 창설되었기에 684부대였다.
일반인, 전과자, 죄수 등 다양한 신분에서 착출된 북파공작원들은 실미도에 마련된 훈련장에서 단 3개월 만에 인간 병기로 거듭났다. 기간병이 1대1로 붙여졌고 훈련은 실전처럼 이루어졌으며 훈련과정에서 7명이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북한 침투 훈련을 마치고서도 부대원들은 침투 명령을 받지 못하고 실미도에서 3년 4개월을 대기 상태로 있어야 했다. 동서 냉전의 벽이 허물어지던 국제정세의 변화 때문이었다.
소위 핑퐁외교로 불리는 1971년 4월 미국 탁구선수단의 중국방문과 뒤이은 키신저와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으로 세계는 화해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런 와중에 북파공작원, 특히 김일성 암살을 위해 만들어진 684부대는 박정희 정권에 부담스런 존재였다. 그래서 정부는 이들 전원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980년대까지도 북파부대가 존재했던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들에 대한 제거 명령은 언뜻 이해되지 않는다. 다른 북파부대에 합류시킬 수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그러지 않았던 것일까. 아무튼 제거명령을 받은 기간병들은 오히려 인간병기가 된 북파부대원들에 의해 살해되었고 소위 실미도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기간병 중에서는 단 6명만 생존했다. 이들의 증언이 소설 <실미도>와 영화 <실미도>의 바탕이 됐다.
1000만 관객이 들었던 영화의 흥행으로 역사 속에 영영 묻힐 뻔했던 실미도 사건은 수면으로 올라왔고 진상규명에 한 발짝 다가가는 듯했다. 2004년 당시 여당이던 열린 우리당에서는 “실미도사건진상조사위원회”를 발족시켰고, 국방부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에서도 실미도 사건을 파고들었다. 2005년 11월에는 벽제 시립묘지에서 부대원들의 유골 일부를 발굴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진척은 없었다. ‘실미도 사건’은 정권의 필요를 위해서는 국민들의 생명마저도 파리 목숨 취급했던 박정희 군사정권의 실체를 보여준 추악한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실미도 사건의 북파부대원들 대부분을 사형수들로 기억한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으니 억울할 게 무어 있냐고 생각하기도 한다.
아무리 사형수일지라도 법에 의하지 않고서는 국가가 함부로 그들의 생사를 좌우 할 권리는 없다. 하물며 684부대원들 대부분이 사형수와는 무관한 죄 없는 민간인이라면 어쩔 것인가. 결국 이들 부대원들 대다수가 민간인이었다는 물증의 일부가 드러나기도 했다. 2004년 초, 1968년 3월 충북 옥천의 한 마을에서 실종된 7명의 청년들 모두가 684부대원이었다는 사실이 국방부에 의해 확인된 것이다.
684부대원 제거 명령은 박정희 정권시절 국가 범죄임이 일부 확인된 것이다. 국민의 안전보장을 존립 목적으로 하는 국가에 의해 자행된 범죄는 개인의 범죄보다 더 엄중히 단죄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실미도 사건의 실체는 여전히 미궁 속이다.
오늘 무의도에서 실미도로 건너는 길은 안개에 쌓여 있다. 실미도 사건처럼 실미도 또한 미궁 속이다. 세월호 참사 또한 8년이 지났지만 진상은 여전히 미궁 속이다. 참혹한 슬픔의 봄 날이다.
“슬픔보다 더 넓은 공간은 없고 피 흘리는 슬픔에 견줄 만한 우주는 없다” (파블로 네루다)
#실미도 #실미도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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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혹한 슾픔의 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