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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 다잉(well-d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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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이 없는 건강한 삶은 누구나가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인식은 각자의 운명만큼이나 다릅니다. 굳이 이야기해보자면 죽음을 삶의 종말로 느끼는 분이 있는가하면 영혼의 재출발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상에서 죽음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필멸의 존재이지만 불멸의 존재로 삶을 이어갑니다. 그것이 인간의 운명적 삶의 여정이며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존재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끌려가기보다는 현실에서의 앎을 통해 삶을 더 풍요롭게 유지하려는 욕망이 우리 모두의 운명을 규정해왔습니다.
앎이 너무 앞서감으로서 체험으로서의 삶이 천시를 받고 있는 시절이기도 합니다. 미래의 죽음까지고 현실로 끌어들이려는 얄팍하게 앞서가는 앎이 세상의 전면에 나타난 것입니다. 감춰져있던 자연스러운 앎이 햇빛을 보자 갈망하는 욕구도 무한으로 웃자라고 있습니다. 뻥튀기로 양식을 대치하자고 난리치는 꼴입니다. 거기에는 앎으로만 뭉쳐진 지식인들의 선택도 크게 기여합니다. 그러나 앎으로 죽음을 알 수는 없으며 아무도 경험해본 적이 없음에 의해 모두는 기억으로 기억시킬 수도 없습니다. 죽음은 그러한 삶의 연장으로서의 지식적 앎으로 다가갈 수 없는 영역이라 생각합니다. 즉 그 어떤 사회적 수단을 동원해서도 접근이 불가능하기에 우리는 신앙을 가져왔으며 삶에서의 앎을 겸허로서의 윤리로 도입함으로서 죽음을 치장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죽음은 인식할 수 없는 그 자체로 하느님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잘 죽는 방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사는 방식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처럼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조상들에게 죽음은 개념적으로 규정지울 수 없는 자연의 현상이었지 인간의 범주로 여기지를 않았습니다. 일상에서 말하기를 꺼려왔습니다. 중국에 북망산천이 있고 서구에 요단강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삼수갑산이 있었습니다. 모두 죽음을 에둘러 표현한 언어라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웰다잉도 죽음이라는 직접적인 언사를 피하고 거기에 덧붙여서 외국어를 사용해 죽음의 의미를 희석시키려는 영악한 의도가 보여 집니다. 영어 발음을 들으며 우리는 죽음을 정확하게 우리말처럼 인식할 수 없는 인식의 한계를 누구나가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북하고 무언가 영악한 잔머리들의 노력은 그처럼 현상에 대한 접근을 순수 우리말이 아닌 조잡한 조어로서의 영어를 탄생시켜왔습니다. 그처럼 낯선 영어의 억지개념을 일상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이 사용함으로서 어리석은 우월성과 고상함을 가지려는 상업적인 자본의 횡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겠지요. 모든 상품들이 외국어표기에 앞장서온 죄과가 있겠으나 이제는 일상사가 되다시피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처럼 우리의 삶은 표절이 일상이 되어버린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의 만남이라 할 죽음의 신성함까지 자본의 힘으로 그 모든 것을 분석해 돈과의 교환가치로 전락시켜버렸습니다. 일상을 잘 살아가자는 내부적 열망이 아닌 외부적 표절을 도입해 계몽적으로 외치는 메아리 속에 삶뿐만이 아니라 죽음까지도 포함시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에서는 가치를 찾기가 어렵다보니 돈이 되는 영역을 창조해낸 것이 바로 웰다잉입니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치부하기엔 무언가 마음에 찜찜함이 남아 씁쓸하게 느껴집니다. 그것은 안타깝게도 거기에는 노년인구의 증가와 함께 건강에 대한 관심의 증대와 건강한 삶을 유지하고픈 욕구에 호응하는 상업적 정교함이 깔려있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건강과 장수를 담보로 무수한 관련 상품들이 난무했다면 이제는 죽음을 담보로 더욱더 치열한 상품들이 넘쳐나고 있는 시절입니다. 잘 죽자는 목표를 정하고 선전선동을 한다는 것은 일상에서 개인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무화시키는 꼴이며 너머세상을 현실로 도입하는 모양새입니다.
미래를 차입해 현실에서 잘살아보자는 꼴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그런 자연스럽지 못하고 구실을 못하는 몸짓을 보며 꼴값을 떤다고 했다지요. 영악함이 넘칠 때 세상은 만만해보이며 자신이 하는 일이 진리인 것처럼 잘못 인식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항시 넘쳐나서 문제가 되었지 삼가는 것에서 문제가 될 수는 없겠으나 모든 자본과 정치는 넘쳐나게 하려 안달복달할 뿐입니다. 내가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을 부추기는 고통 속의 평준화가 아니라 세상의 삼가로 배려속의 평준화가 가장 자연스러운 사회라 생각됩니다. 사회적 태움은 그처럼 통제가 불가능할 때에 다가옵니다.
인간의 사적인 고유 영역이라 할 죽음까지도 돈으로 재단하고 정의하며 오로지 수단으로 인식하려할 때에 거기에 인간의 존엄성은 물화되어버리겠지요. 어찌 보면 현대의 자본은 죽음을 미끼로 삼아 시민들의 마음속에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보여 지기도 합니다. 수많은 건강검진 요구와 보험과 상조회사들 시골에 들어선 노인요양원에 납골당까지 어느 것 하나 자본이 개입하지 않은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죽음은 정작 무관심의 영역으로 바뀌어가며 주변 가족들에게도 슬픔보다 안도감을 주고 있는 시절입니다. 돈 없는 죽음이 수치가 되는 세상입니다.
그렇다고 그런 삶에서 벗어나려 회피할 수도 없습니다. 사태에 직접 닿는 냉철함으로서의 경험적 판단과 굳건한 의지를 동반해야지만 정상적인 삶이 가능해지는 급변하는 시절과 마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우리의 잘못된 개념교육은 삶을 체험의 현장이 아닌 관념의 세계로 바라보게 함으로써 더욱 힘들게 만들어가고 있는 시절입니다. 체험이 부족한 삶은 온실 속 화초로 어른이 되어갑니다. 삶의 고유성이 외부로부터 위협받을 때에 독립적인 삶의 가치나 내면의 깊이를 키워갈 개별적 고유성으로서의 대응력은 고갈되어가고 스스로는 점점 소외될 수밖에 없겠지요.
세상의 질서를 배움으로 다가가기보다는 내 고유의 땀 흘리는 체험을 통해 보람과 만족으로 일구어나가야겠으나 오직 책으로만 알아가려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어미가 자식에게 지식만을 요구한 결과입니다. 삶을 함께하고 공유하지 못하는 게으름의 핑계는 자식을 편협함으로 내몰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삶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돈으로도 보상이 안 되고 외부의 사탕으로도 안 됩니다. 어려서 어미와 함께하는 몸과 마음의 공유와 체험의 삶에서 스스로 터득해나가는 과정입니다. 스스로 삶에서 마주치는 고통을 헤쳐 나가며 터득해가는 습관이 내면에 자리할 때에 어른으로서의 성장이 가능하다 하겠습니다. 죽음이 세상에서 소외되듯이 나의 삶도 소외되어서는 아니 되겠지요. 사회적 구속을 벗어나 자유로움으로 세상을 유영하기 위해 스스로 가꾸어가는 삶이어야 합니다. 외부의 개념적인 도움으로 삶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는 사회적 진보를 위한 실천적 지식만이 아니라 순수지식에의 추구를 통해 영감을 얻어 삶을 살아가는 방식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돈이 최고인 시절이 되어감에 의해 자신을 찾아가는 순례의 길은 점점 외면당해가고 있는 시절이기도합니다.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풍조를 배부른 투정으로 치부해버립니다. 그것은 물질적 풍요에 경도된 욕망이 정신적 풍요를 멸시하고 구박하는 것입니다. 사회의 이러한 풍조는 지금까지 변함없이 반복되고 있으나 아무도 관심을 제기하지 않음에 의해 삶의 원리가 되었습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우리가 남이가” 같은 따듯한 감정들과 거기에 욕망의 상업성을 기반으로 하는 즉물적 사고까지 승자독식의 사회로 몰아가면서 모두가 빨리빨리 뛰어 경쟁에서 이겨야만 하는 시절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삶의 질을 악화시킬 뿐만 아니라 태움을 안겨주며 살아갑니다.
무한경쟁의 닫힌 사회가 몰고 오는 경직성을 파고들어 가치오류의 부유물로 공동체의 구태의연함을 온정적으로 유인해보려는 영악한 행위라 하겠습니다. 그처럼 경쟁에 지쳐가는 대중에게 위안을 주고 좋은 길로 인도할 수 있다는 신념이 웰다잉이라는 허구적 개념을 유행시킨 원동력이라 생각합니다. 조금은 위협적이고 자극적인 표현으로 죽음의 불안감에 노출된 대중에게 진정성까지 있어 보이기에 충분히 먹혀들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말 그대로 죽음의 세계는 아무도 알 수 없다보니 그 어떤 논리를 도입해 펼쳐도 부정할 근거를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혼이라는 개념까지 덧붙이면 관심은 더욱더 상승할 수밖에 없겠지요.
아무도 자신의 본능적 속박을 벗어날 수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내가 내 삶의 주인공인데 외부의 어쭙잖은 계몽적 서사로 이렇게 살라 저렇게 살라고 지시하고 간여할 수도 없다고 여겨집니다. 사회는 윤리 도덕적이고 계몽적인 서사에서 벗어나 스스로가 실존적인 삶의 주인공이 되어야함을 느끼기 시작한 경험의 시절입니다. 과거로서의 계몽은 의미와 가치를 숭배했던 신념이자 독단이 되었습니다. 죽음을 알 수 있고 미리 조절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뜬구름 잡는 어리석음이자 삶의 현장에서 실천적 고통을 통한 노력의 결실을 외면해버리려는 지식적 차원의 발상입니다. 실천이 아닌 생각으로서의 지식에서 삶을 구하려는 미숙한 게으름이자 우상의 숭배로 여겨집니다. 결국 미욱한 자신을 감추고 포장하려는 의존적 영악함이거나 상업성에 경도된 어리석은 욕망에 다름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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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갈대생각님 꽃샘추위에 건강 잘 돌보시구요
긴 글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