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설...1970년대 긴급조치시대 운동권 학생들이 즐겨 부른 노래 중에 '기다리는 마음'이 있다. 민주주의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부르던 그 노래. 10 26을 불러온 부마항쟁의 시위대가 부른 노래도 그것이었다.
음 악...가곡 '기다리는 마음'.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해 설...일출봉에 해 뜰 때, 월출봉에 달 뜰 때 기다리던 소식... 기다리고 기다려도 오지 않던 소식은 어느 날 문득 전혀 뜻밖의 충격적인 소리로 날아왔다.
효 과...궁정동의 총소리.
해 설...그런 식의 결말을 원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봉덕사에 달 뜰 때, 저 바다에 바람 불 때 기다린 소식... 몇 발의 총소리를 답장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우리 현대사가 너무 애달파서, 그 답장은 차라리 허망했다. 절대권력의 충격적인 소멸. 그것은, 절대권력의 지지자에게도 반대자에게도 너무나 충격이었고, 그래서 오히려 허탈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어쩌면, 타도를 외치던 세력에게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독재자'가 마지막으로 한 방 날린 반격타였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55분경. 그 시간은, 상처 입은 한국현대사의 한 카리스마가 존재의 지도에서 사라진 시간이다. 그리고, 한국현대사의 절대적 카리스마가 쓰러진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가, 그곳은 시월유신의 산실이자 시월유신의 사망지였으며, 피 흘리며 쓰러진 카리스마는 유신 대통령이었고, 살인자는 유신의 수문장인 중앙정보부장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그 날의 그 사건을 두고 우리는, 할 말이 모자라서 차라리 '10 26'이라는 한마디 수식(數式) 만으로 입을 다문다.
음 악...브리지.
해 설...1975년 4월 중순, 중국의 북경을 방문한 북한의 김일성은 자신만만하게 일갈한다. '베트남 방식에 의한 남반부 해방도 염두에 두고 있다. 잃는 것은 국경선이고 얻는 것은 통일이다' 라고. 그러자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 지는 곧바로 논평을 내보낸다. '박정희는 세계에서 가장 운이 좋은 지도자다. 왜냐하면, 그가 국내에서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김일성이 미친 듯이 엉뚱한 짓을 해서, 숨이 끊어질 듯 궁지에 몰린 박정희를 구해내기 때문이다' 라고. 역설적(逆說的)인 논평이지만 결코 부당한 말은 아니었다. 긴급조치 제4호에 대한 세계 여론의 비난과, 신민당의 '선명야당' 선언, 그리고 재야세력의 '민주회복' 선언 등, 긴급조치의 약효가 오히려 유신정부에게 치명적인 약화(藥禍)를 불러오고 있을 때, 김일성이 때맞춰 '무력남침통일'을 시사했던 것이고, 그 한마디로 국내외의 모든 반유신(反維新) 여론은 무색해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보름도 안 지난 4월 30일에 자유베트남이 공산베트맹에게 항복을 하므로써 김일성이 공언한 '베트남식 남반부 해방'의 확률을 구체화시켰으니, 안보 차원의 '한국적 민주주의'를 주창해온 유신정권이 더욱 당당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거짓말쟁이 목동과 늑대의 얘기처럼, 남북분단상황이라는 핑계는 이제 타성이 되어서 국민에게 더 이상의 긴장감을 주지 못했고, 유신정권의 존재기반을 흔드는 사건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10 26사건이 있게 한 근본원인을 알아보자.
정신문화연구원 이완범 교수.
인서트 1...이완범 교수. (취재 13'44".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 1972년 유신 출범부터 긴급조치와 계엄, 재야인사의 구속 등이 계속되었으나 민주화의 방향을 거스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까지만.)
낭 독...(필터) 유신정권의 진짜 심각한 위기는, 지식인 계층의 반대투쟁보다도 노동자 농민의 반대투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노동자를 보자. 경제개발계획을 처음 시작한지 2년만에 수출목표 1억 불을 달성하고, 그로부터 13년만에 10억 불 수출목표를 달성하고, 다시 그로부터 7년만에 백억 불 수출목표를 달성하므로써 '한강의 기적'이라는 세계인의 감탄사를 이끌어낸 그 시대는, 우리의 어린 아들딸들을 '나'의 아들딸처럼 대하지 않고 '남'의 아들딸들로 철저하게 하인하녀 부리듯 부리면서 기업가가 살찐 시대였고, 세계 수출액 순위 십몇 위의 화려한 그늘에서 노동자는 철저하게 소외되던 시절이었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의 공로는 백억 불 수출의 영광 그 어디에도 비쳐지지 않았고, 오히려 이백억 불 삼백억 불을 위한 채찍질만이 가해지고 있었으니, 이미 1970년의 전태일 분신자살에서 예고된 바 있는 노동운동은 서서히 1979년의 YH사건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농민. 한국의 산업사회는 농촌과 농민의 희생을 요구하며 도래했고, 한국 경제개발의 역사는 농민이 유전(流轉)한 내력이라고 할 수 있다. 저농산물가격정책이 이농민을 양산시키고, 이농민은 도시의 노동자나 공장근로자가 되면서 농촌은 비고 도시는 차는데, 사람이 많으면 사람값은 떨어지니 저임금이 형성되고, 저임금으로 국제경쟁력을 가지게 된 수출산업의 뒤안에서 우리 생명의 산업, 농업과 농민이 경제개발의 속도보다도 더 빠르게 자본주의의 물적기반으로 전락을 하게 되는 것이니, 민주화운동의 열풍을 타고 농민운동도 일어나게 된다. 유신정권은 지지계층이자 표밭이던 노동자 농민들로부터도 배척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78년 12월 12일에 있은 제10대 총선의 선거운동 과정에서 신민당은, '신민당 위에 서민 있고 공화당 위에 재벌 있다'는 선거구호로서, 노동자 농민과 유신정권의 벌어진 사이에다 쐐기를 박아놓는다.
해 설...1979년 5월 30일에 있은 신민당 총재 경선에서 김영삼이 당선을 하지 않고 이철승이 당선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때 김대중은 동교동 자택에 연금을 당해서 꼼짝을 할 수 없었고, 김영삼과 이철승이 신민당 총재 경선에 나선 것인데, 박정희는 이철승의 당선을 점치고 있었다.
박정희...김영삼이 신민당 총재가 되는 일은 없을 걸? 김영삼이는 긴급조치 위반사례가 일곱 건이나 돼. 당장 구속을 해도 되지만 전당대회를 앞두고 구속한다면, 야당 탄압이라는 소리를 들을 거잖아. 그래서 두고 보는 건데, 일곱 번이나 긴급조치 위반해놓고 무슨 배짱으로 끝까지 경선에 나서겠어. 두고 봐, 중도포기할 거니까.
해 설...그러나 김영삼은 포기하지 않았고, 2차투표까지 간 총재 경선에서 김대중과 이기택의 지원을 받아 당선한다. 그리고 당선 소감에서 김영삼은, 그 유명한 '새벽 닭' 얘기로서 선명야당의 길을 선언한다.
김영삼...오늘의 결의는, 우리 신민당이 곧 여당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며, 수권 준비태세가 돼 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제 민주주의는 개막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새벽이 돌아왔습니다. 아무리 새벽을 알리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민주주의의 새벽은 오고 있습니다.
해 설...비교적 순탄하게 출범하고 있던 유신 2기가, 유정회 소속 백두진 의원을 국회의장으로 지명한 데서 비롯된 이른바 '백두진 파동'에 이어, 신민당의 '선명야당 선언'으로 일대파란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김영삼의 주장은 거침 없었다. 6월 11일, 총재가 된지 열이틀만에 가진 외신기자클럽 초청 기자회견에서 김영삼은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 되는 새 시대를 연다'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는데, 여기서, 관계당국 외에는 발언하는 것조차 금기가 되고 있는 통일문제를 거론한다.
효 과...취재기자들의 카메라 플레시.
김영삼...나는 수권능력을 가진 야당의 총재로서, 통일을 위해서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북측의 책임 있는 사람과 만날 용의가 있습니다.
기자 1...북측의 책임 있는 사람에 김일성도 포함이 됩니까?
김영삼...물론입니다. 통일을 위해서라면 김일성도 만날 것입니다.
해 설...김일성을 만나고 말고의 일은 박정희만 할 수 있는 것인데, 이제 막 신민당 총재가 된 김영삼이 그 일을 자신이 하겠다고 나선 것이니, 그것은 성역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그러자 공화당과 유정회에서는 즉각 대변인 성명으로 김영삼의 발언을 비난한다. 공화당은 대변인 오유방을 통해서, '김영삼 총재의 연설은 다사다난한 나라 안팎의 현실을 외면한 채 혹세무민의 무책임한 선동을 하고 있다' 고 비난했고, 유정회는 대변인 정재호를 통해서, '김영삼 씨의 시국관은 현실기반을 결여한 환상의 세계에서 방황하고 있다' 고 비난을 한 것이다. 그런데 6월 18일, 뜻하지 않게 북한 부수상 김일이 김영삼의 발언에 화답하는 환영담화를 발표하므로써 사그러들던 이 문제의 불씨에 기름을 끼얹게 된다. 김영삼 김일성 회담을 위하여 신민당과 노동당 간의 예비회담을 갖자는 것이었다. 그랬으니, 6 25전쟁 부상자단체와 반공청년단체가 가만 있을 리 없었다.
괴청년들...(신민당사의 집기를 마구 때려부수고 난동을 부린다. '김일성과 내통하는 김영삼은 물러가라!' '무책임한 선동꾼 김영삼은 국민 앞에 석고대죄하라!')
해 설...소장파 의원 시절부터 그야말로 '간 큰 발언'으로 주목을 받았고, 중견의원이 되면서부터는 박정희를 정면비난하는 것으로서 입지를 구축한 김영삼이었다. 신민당사와 상도동 자택으로 몰려오는 관제데모는 김영삼에게 있어 어쩌면 정치적 보약이었다.
음 악...브리지.
해 설...대 한국정책에 성공하지 못한 미국대통령의 경우에는 한결같이 한국대통령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경향이 있다. 그러면 그 영향이 결국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 한국대통령이, 미국의 애정 없는 간섭을 고깝게 생각한 나머지, 독재를 더욱 굳혀야겠다고 결심할 때 그 피해는 한국민에게로 간다. 독재자의 오기만큼 사나운 것이 없다. 결정적으로 한국 독재자의 오기에 불침을 놓은 미국대통령에는 어떤 사람이 있을까. 아이젠하워는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경무대에서 기다리는 이승만은 외면한 채 주한미군인 아들을 먼저 만나러 갔고, 지미 카터는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청와대에서 기다리는 박정희는 외면한 채 주한미군부대를 먼저 방문했다. 그리고 정상회담이란 것을 할 때도 철저히 일관되게 한국대통령을 무시했던 것인데, 구슬르고 타일러서 바로 잡기에는 한국의 대통령이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한 탓일까. 물론 건강한 치아가 돋보이는 그 특유의 웃음으로 박정희와 다정하게 악수를 한다면 유신정권을 옹호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더 냉정한 자세를 취했을 거라는 이해도 할 수 있고, 유신정권의 독재와 인권탄압이 부끄러운 것이기도 하지만 미국대통령이, 어쨌건간에 한국대통령을, 외교관례상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무시했다는 것도 한국민으로서 유쾌한 일은 아니다. 6월 29일 미국대통령 지미 카터가 방한하여 청와대에서 정상회담을 했을 때의 일이다. 입국할 때부터 자신을 무시한 카터와 마주앉은 박정희는 상대방의 식견 없음을 탓하기나 하듯이, 거의 일방적으로 45분동안이나 한국의 안보와 미국의 이익에 대하여 카터에게 일장연설을 한다.
박정희...한반도의 안보가 어째서 한국만의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반도의 안보는 미국의 안보이기도 한 것입니다, 각하. 한반도의 북쪽에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설명하기 힘든 김일성이 있습니다.
해 설...단단히 벼르고 온 카터를 오히려 훈계한 박정희였고, 화가 난 카터는, 박정희와 비서실장 김계원과 의전수석 최광수의 전송을 받으며 청와대를 떠나는 순간에 차를 세우고 미 국무장관 밴스에게, '회담 준비를 어떻게 했길래 내가 그런 소리를 듣도록 했느냐' 고 호통을 친다. 그리고 카터는 국가정상 외교순방의 관례상 파격적으로 야당 총재 김영삼을 따로 불러서 만난다. 박정희와 만났을 때의 카터 표정과 김영삼을 만났을 때의 카터 표정은 자못 대조적이다. 김영삼을 만났을 때 카터가 지은 표정은, '그동안 얼마나 고약한 꼴을 당했는지 나한테 한번 일러봐라' 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 자리에서 김영삼은 카터에게 말한다.
김영삼...각하께서는 항상 인권을 주장하십니다. 그런데 한국에는 인권이 없습니다. 박정희 씨는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고문하고 감옥에 집어넣고 있는데, 각하께서는 왜 그런 독재자를 돕고 계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해 설...지미 카터의 방한이 유신정권에 도움이 되는 것을 묵과할 수 없는 김영삼이었다. 그리고 7월 23일, 제102회 임시국회에서 김영삼은 대정부질문을 통해서 또한번 박정희에게 정면도전한다.
김영삼...공산주의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가장 강한 무기는 자유의 유보가 아니라 자유의 신장이며, 인권의 탄압이 아니라 인권의 보장이며, 언론의 통제가 아니라 언론자유의 창달이며, 1인체제가 아니라 민주체제라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인식해야 합니다. 나는 평소에 일관되게 주장해 온 권고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하고자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진실로 이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그리고 박대통령 스스로를 위해서 조속한 시일 내에 정권을 평화적으로 이양할 준비를 갖추기 바랍니다.
해 설...김영삼이 공식적으로 박정희를 공격한 마지막 연설이었다. 그리고 김영삼이 국회의원 직을 박탈 당하는 계기가 되는 YH사건이 일어난 것은 8월 9일이었다. YH사건에 대하여 알아보자.
대한매일신문 김삼웅 주필.
인서트 2...김삼웅 주필. (취재 1:32'50". '1979년 하면 우리 한국현대사는 분기점이 돼죠. ~ 신민당 의원들이 농성을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당권을 빼앗긴 구 주류층에서 야당 총재를 상대로 가처분 신청을 했는데, 이것을 법원에서 받아들였어요.' 까지만.)
낭 독...(필터) YH사건은 1970년대 한국의 정치문제 경제문제 사회문제가 일목요연하게 총집합을 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 면목동에 있는 가발 가공수출업체 YH의 여성근로자들은 도급제로 일을 하고 있었다.
반 장...야, 이 기집애들아, 니들 놀더라도 좀 딴 데 가서 놀 수 없냐? 저아래 면목동 뚝방 쪽의 텍사스에서는 아르바이트를 하지 말란 말이다. 술 한 잔 마시려고 가보면 이 집에도 낯익은 애, 저 집에도 낯익은 애니, 내가 챙피해서 낯들고 다니겠냐? 우리 YH 위신 좀 깎지 말어. 알겠어?
여성근로자 1...반장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우리 애들이 텍사스에 가 있는 거는 챙피하고 일감을 주지 않은 건 챙피하지 않으세요? 모두들 가족의 생계와 동생들의 학비 부담을 지고 있는 애들이예요. 그런 데서 아르바이트하는 애가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요, 걔들이 왜 그랬겠어요. 오다를 넉넉하게 따와서 일감만 많이 줘보세요, 연근하고 야근하는 거 불만한 애들 있습디까? 한 달을 꼬박 밤샘하라고 해도 불평할 애들 아닙니다. 도급제기 때문에 일을 많이 해야 돈이 되니까요. 그런데 일감을 안 주잖아요. 가족 생활비도 내놓고 동생들 학비도 내놔야 되는데 일은 없고 도급제라서 수입도 없잖아요. 오죽하면 그런 데서 아르바이트를 하겠어요? 한번 고용을 했으면 책임을 져야지요. 왜 책임을 지지 않습니까? 좋은 일은 회사 몫이고 나쁜 일은 근로자들 몫입니까?
낭 독...(필터) 제조업체에 취직을 할 때부터 기본권은 이미 차압이 되는 상황의 근로자들이었다. 그리고 가발 제조업체 YH의 경우, 사장이 부도를 내고 잠적해버림으로써 일이 있으면 수입이 있고 일이 없으면 수입이 없는 '도급제'의 그 알량한 일당마저도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YH 여성근로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했고, 청계 피복노조 원풍 노조 동일방직 노조 등을 분쇄한 경험이 있는 공권력이 YH 노조를 분쇄하기 위해 투입됐던 것이다. 힘 없는 여성근로자들이 기댈 곳은 결국 정치권의 야당이었다. 8월 9일, 마지막 항쟁의 장소로 선택한 신민당사에까지 공권력이 난입하고 김경숙 양이 2층 난간에서 떨어져 죽는 사태가 일어났을 때, 그것은 이미, 일개 가발 가공수출업체의 일이 아니라 국가의 일이 되어 있었다. 미 국무성이 대변인 성명을 통하여, 한국경찰의 야만적인 진압행위와 야당 당사 유린행위를 비난했고, 유신정권은 신민당 내부의 김영삼 반대파를 움직여서, 법원에 김영삼의 총재직에 대한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하게 한다. 그리고 8월 25일 서울 민사 지방법원 합의 16부는 김영삼의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고, 신민당 총재 직무 대리로 전당대회 의장 정운갑을 선임한다. 총재 직을 뺏긴 김영삼이 '박정희 타도'의 목소리를 드높인 것은 뻔한 이치다. 9월 16일자 '뉴욕타임스' 지는 김영삼과 도오쿄 특파원 스톡스 기자의 회견 기사를 이렇게 쓰고 있다.
뉴욕 타임스 기사 낭독...한국의 야당 지도자 김영삼 씨는,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지난 6월 카터 대통령의 방한은 박대통령의 위신을 높여줌으로써 박대통령으로 하여금 독재의 용기를 드높이게 했다' 고 주장했다. 한국 정부도 김영삼 씨 문제로 골치가 아픈 것 같다. 구속을 하면 김영삼 씨가 대중의 영웅이 될 것이고, 구속을 하지 않으면 박대통령 타도의 목소리를 계속 드높일 것이기 때문이다. 김영삼 씨는, 미국 정부가 보다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박대통령에게 압력을 넣으라' 고 주문했다. 또한 북괴를 이길 수 있는 길은 박대통령이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자유선거를 선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낭 독...(필터) 이 기사를 읽은 유신정권은 발끈하게 된다. 용공적인 이적행위요 사대주의적인 발상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9월 22일, 공화당과 유정회 소속 의원 전원의 이름으로 '김영삼 의원 징계 동의안'이 국회에 제출된다. 미국에게 내정간섭을 요청하므로써 국회의원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는 것이었다. 김영삼이 국회에서 제명 처리되기 전날인 9월 3일 밤 아홉 시 경, 중앙정보부의 장충동 비밀공관에서 김영삼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만난다. 김재규의 요청에 의한 만남이었다.
김재규...총재님, 뉴욕타임스의 회견 기사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만 말씀해 주십시오. 그 한 말씀이면 됩니다.
김영삼...사실인걸 우째 사실이 아니라고 합니까.
김재규...한 발짝만 총재님께서 양보해주십시오. 내일 아침에 국회에 나갈 때 잠깐만 기자실에 들러서, 뉴욕타임스 회견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한마디만 해주시면...
김영삼...나는 몬합니다.
김재규...이대로 가다가는 총재님도 국가도 다 불행해집니다.
김영삼...불행해지다이, 나를 죽일라카는 모양인데, 나보다 박정희 씨가 먼저 죽을 거요. 김부장도 조심하시오.
낭 독...(필터) 한 시간 뒤인 밤 열 시 쯤, 김영삼과 김재규는 헤어진다.
김재규...총재님, 또 뵙겠습니다.
김영삼...김부장을 다시 만날 일은 없을 낍니다.
낭 독...(필터) 나보다 박정희가 먼저 죽을 거라고 한 말, 그리고 김재규를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한 말. 김영삼의 이 말은 불과 23일 뒤에 현실로 나타난다.
해 설...김영삼이 국회에서 제명된 것은 10월 4일이었고, 미국 정부가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을 비난하고 글라이스틴 대사를 소환한 것은 10월 5일이었으며, 신민당 소속 의원 66명과 통일당 소속 의원 3명이 국회의원 직 사퇴서를 국회에 제출한 것은 10월 13일이었다. 그리고 10월 16일, 김영삼을 배출한 고장인 부산에서 '독재타도'와 '김영삼 총재 제명 철회'를 외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난다. '부마민주항쟁'의 시발이었다. 부마민주항쟁에 대하여 알아보자.
대한매일신문 김삼웅 주필.
인서트 3...김삼웅 주필. (취재 1:38'00". '김영삼 총재가 야당 총재직을 박탈 당하자 김영삼 총재를 뽑았던 ~ 군사재판에 회부를 했습니다. 사건이 점차 악화된 거죠. 10월 18일날 박정희 대통령은 부마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까지만.)
해 설...1979년, 그때 박정희는 만62세였고, 육영수 여사가 암살 당한 이후 5년째 홀아비생활을 하고 있었다. 본관에서 근무한 청와대 직원들은 일과 후의 청와대를 '적막강산'이라고 표현했다는데, 그 적막강산을 박정희는 근혜 근영 두 딸, 그리고 애완견 방울이와 함께 지키고 있었다. 뒷날 박근혜가 박정희의 '방울이' 그림을 내보이면서 '귀엽죠?' 한 적이 있거니와, 애완견 방울이의 모습을 그린다거나, 육사 생도로서 청와대를 떠나 있는 아들에게 줄 교훈을 메모한다거나, 죽은 아내에게 바치는 시를 짓는다거나, 밤에 홀로 퉁소를 부는 박정희의 모습도 널리 소개가 되어 있다. 그리고 침실의 머리맡에는 등 가려울 때 긁을 효자손이 놓여 있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은 있었지만 가려울 때 등 긁어줄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가끔 혼자서 중얼거렸다고 한다.
박정희...이 자들이, 나만 이 깊은 감옥에 처넣고 저희들은 마음대로 뛰어다니면서 사사건건 말썽만 부리니...
해 설...영화배우 김희갑이 술자리에서 엿들은 박정희의 중얼거림이 있다.
박정희...이 머저리같은 인간을 대통령으로 앉혀놓고...
해 설...냉혈한이 아닌 보통인간 박정희의 자조적인 중얼거림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텔레비전의 저녁 뉴스 화면을 통해서 박정희의 얼굴을 본 사람이면 한결같이 고개를 갸웃했다.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전에서 치사를 하는 박정희의 얼굴이 평소와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중에야 알게 된다. 그것이 죽음의 그림자였다는 것을. 그 그림자를 몰고온 것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경호실장 차지철, 그리고 부마민주항쟁이었다. 10 26사건의 역학관계를 살펴보자.
정신문화연구원 이완범 교수.
인서트 4...이완범 교수. (취재 25'45". '박정희의 퇴진을 요구한, 정권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던 ~ 전두환 정권이 수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해 설...10월 26일 오전 여덟 시. 박정희와 근혜 근영 세 식구는 청와대 본관 2층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고, 비서실장 김계원은 그 마즌편 비서실장 방에서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찌개와 멸치볶음 등 소박한 아침상으로 식사를 마친 박정희에게 근혜가 족자 한 폭을 가져와서 보였다.
박근혜...(족자 한 폭을 펼쳐보이면서) 문경소학교 아버지 제자라는 분이 족자 한 폭을 선물로 보내왔습니다. 직접 쓴 붓글씨랍니다.
박정희...(족자를 받아 흐뭇하게 펼쳐보면서) 그 사람이 벌써 이 정도 실력이 됐나? 이 벽에다 걸어놓지.
해 설...그 시간 비서실장실에서는 김계원이 민정수석 박승규에게 은근한 당부를 하고 있었다.
김계원...박수석, 각하께 부산지역 계엄상황을 보고드릴 때, 김재규 중정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의 불화를 보고하세요. 특히 차실장의 월권행위에 대해서 말이오.
해 설...여덟 시 사십오 분경, 경호실장 방에서 차지철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차지철...김부장 어제 김실장에게 부탁한 거 있어요?
김재규...(필터) 오늘 행사에 각하와 함께 헬리콥터 1호기를 타고 싶다고 김계원 비서실장한테 말했는데, 안 될까? 차실장이 선처 좀 해주소.
차지철...무슨 소리요. 시국도 불안한데, 각하께서 서울을 비우시면 중앙정보부장은 서울을 지키고 있어야지요.
김재규...(필터) 같이 모시고 가면서 드릴 말씀도 있고...
차지철...(냉정하게) 안됩니다.
해 설...아홉 시 경, 낡아서 헤진 허리띠에, 허리단을 수선한 바지, 어제 입고 벗어두었던 양복을 입고 1층 집무실로 내려가던 박정희는 배웅하는 근혜 근영 두 딸을 돌아보았다.
박정희...나 오늘 삽교천에...
해 설...'다녀오겠다'는 뒷말을 잇지 않고 얼버무리는 아버지에게 두 딸은 공손히 인사했다.
박근혜...안녕히 다녀오세요, 아버지.
해 설...프랑스에 유학을 갔다가 어머니 육영수가 암살 당하자 귀국한 뒤 5년 넘게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는동안 노처녀가 되어 있는 박근혜가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의 생시 모습이었다.
음 악...브리지.
효 과...헬리콥터 내려앉는 소리.
해 설...삽교천 방조제 준공식과 KBS 당진 송신소 준공식을 마치고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박정희를 태운 공군 1호 헬리콥터가 도고호텔 앞마당에 착륙한 것은 열두 시 사십 분이었다. 이때, 마당 한구석 사슴 사육장에 있던 새끼 밴 암사슴이 헬레콥터 소리에 놀라 벽에다 머리를 받고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점심식사 시간에 박정희는 일주일 전에 있은 싱카포르 수상 이광요와의 대화 내용을 소개한다.
박정희...이광요 수상이 그러는데, 공산당과의 싸움에서는 내가 죽든지 적을 죽이든지, 그 두 길 밖에 없다는 거야. 어중간한 방법으로는 안된다는 거지.
해 설...오후 네 시 십 분경,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경호실장 차지철의 전화를 받는다.
차지철...(필터) 오늘 저녁 여섯 시에 각하를 모시고 대행사가 있습니다.
해 설...대통령과 중정부장 경호실장 비서실장이 모이는 만찬을 대행사라고 했다. 차지철의 전화를 받은 김재규는 네 시 사십 분경,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에게 전화를 했다.
김재규...정총장, 오늘 저녁에 바쁜 일 있습니까?
정승화...(필터) 김종수 중장 송별연을 뒷날로 연기했기 때문에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
김재규...그러면 오늘 저녁이나 같이 하죠.
정승화...(필터) 좋습니다.
김재규...궁정동, 전에 한번 오신 일 있죠? 거기서 만납시다.
해 설...다섯 시경, 중앙정보부 제2 차장보 김정섭은 전화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김재규와 통화한다.
김재규...(필터) 저녁 여섯 시 반까지 궁정동으로 오시오.
해 설...전화 통화들을 마친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 본관 2층에 있는 중정부장 침실에서 중요한 일을 시작한다. 금고에 보관중이던 32구경 독일제 소형 권총을 꺼내고, 탄창에 실탄 일곱 발을 장전 점검하고, 한 발은 격발만 하면 발사할 수 있도록 해놓은 뒤에 책장에 숨겨놓는다. 다섯 시 오십 분경, 운명의 장소 궁정동 안가로 떠나기 전에 박정희는 맏딸 근혜의 방으로 인터폰을 한다. 그러나 그때 박근혜는 퍼스트레이디로서 손님을 접견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인터폰을 받지 못한다. 여섯 시쯤, 청와대를 떠나면서 박정희는 부속실 부관 이광형에게 말한다.
박정희...경호실장하고 저녁 먹고 올테니까 서재 문 잠그고, 내가 보던 것들은 위에 올려놓고... 그런데 인터폰하니까 근혜 없던데, 손님 접견하나? 근혜 보고 먼저 밥 먹으라고 하게.
해 설...그리고 박정희를 실은 슈퍼살롱 승용차는 그가 살아서는 돌아오지 못할 청와대를 떠나 궁정동 안가로 향했다.
음 악...브리지.
해 설...박정희가 차지철과 함께 궁정동 안가에 도착한 것은 여섯 시 오 분경이었고, 대기해 있던 김재규와 김계원이 만찬장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만찬장에는 가수 심수봉과 배우 지망생 신재순이 있었다. 만찬장의 대화는 이날 오전에 있은 삽교천 행사 얘기에서 시국 얘기로 옮아갔다.
박정희...신민당 공작은 어떻소?
김재규...공화당이 발표한 것 때문에 다 틀렸습니다. 사표를 내겠다고 한 친구들도 모두 강경으로 돌아섰습니다. 암만해도 당분간은 정운갑 총재대행 출범이 어렵겠습니다.
차지철...새끼들 까불면 신민당이고 학생이고 간에 탱크로 싹 깔아뭉개버리겠습니다.
김재규...(속으로) 짜식, 여전히 저 지랄을...
박정희...부산사태는 신민당이 개입해서 하는 일인데 괜히들 놀래가지고 야단이야. 오늘 삽교천 행사에서 보니까 대다수 국민들은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부산 데모만 하더라도 식당 보이나 똘마니들이 많찮아. 그놈들이 어떻게 국회의원의 사표를 선별수리하느니 뭐니 알아. 신민당이 계획한 일인데 괜히 개각이니 국회의장 사퇴니 하면서... 부마사태는 정보 수집만 철저히 했더라면 사전에 막을 수 있었을 거야. 중앙정보부가 수고 많이 하는 줄은 알지만 더 정확히 정보를 수집해야겠어.
차지철...그렇습니다. 중앙정보부가 좀더 잘해야겠습니다.
김재규...(속으로 이를 간다) 저 자식을...
김계원...(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각하, 오늘 삽교천 행사는 성공적으로 잘 한 것 같습니다. (심수봉에게) 저어, 노래 한 곡 하지.
해 설...심수봉이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할 때 김재규는 자리를 뜬다. 그리고 책장에 숨겨놓은 권총을 챙기고,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 김정섭, 중앙정보부 비서실 의전과장 박선호,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박홍주, 궁정동 식당 경비원 조장 이기주, 식당 행정차량 운전기사 유성옥, 식당 경비원 김태원, 식당 경비원 유석술 등 부하에게 사전에 지시한 거사의 결행을 지시한 뒤 만찬장으로 돌아온다.
박정희...미국의 브라운 장관이 오기 전에 김영삼이를 구속기소하라고 했는데 유혁인이가 말려서 취소했더니 역시 좋지 않아. 국방장관 회의고 뭐고 법대로 하는데 뭐가 잘못이란 말야. 미국에선 범법해도 처벌 안하나?
김재규...김영삼은, 사법조치는 아니지만 이미 국회에서 제명이 된 걸로 처벌된 거나 마찬가집니다.
박정희...중앙정보부가 좀 무서워야지. 야당의원 비행조사서만 움켜쥐고 있으면 뭘해. 딱딱 입건해야지.
김재규...알겠습니다...
차지철...신민당 놈들 국회의원 그만두고 싶은 놈은 하나도 없습니다. 언론을 타고, 반정부적인 놈들이 선동을 하고 해서 그러는 거지, 문제될 게 하나도 없다고 봅니다. 그 자식들, 신민당이고 뭐고 나오면 전차로 싹 깔아뭉개버리겠습니다.
해 설...다시 심수봉의 노래가 시작되고, 김재규는 부하의 연락을 받아 밖으로 나간다. 이 시간, 청와대 본관 지붕 위에 부엉이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커다란 흰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아서 음산하게 울었다. 신재순이 '사랑해 당신을' 이라는 노래를 심수봉의 기타 반주에 맞춰서 부르고 있을 때, 잠시 나갔던 김재규가 돌아왔다. 신재순이 워낙 음치여서 심수봉이 기타 반주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지만 박정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 노래를 따라불러주고 있었다.
박정희...우리 애들이 잘 불러서 나도 이 노래 알아.
해 설...김재규가 행동을 개시한 것은 그 노래가 '예이 예이 예이' 라는 후렴부로 넘어가고 있을 때였다. 김재규는 김계원을 툭 치면서 '각하를 똑바로 모시라'고 충고한 다음 차지철을 노려본다.
김재규...각하, 이따위 버러지같은 자식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 (차지철을 향해 총을 발사한다)
차지철...(손목에 총을 맞고) 김부장, 왜 이래... (화장실로 달아난다) 경호원! 경호원!
박정희...(정좌한 채) 뭣들 하는 거야!
김재규...(박정희에게 총을 쏜다)
박정희...(총을 맞는다)
심수봉 신재순...(비명을 지른다)
해 설...김재규는 다시 박정희에게 두 번째 총을 쏘기 위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불발이었다. 김재규는 황급히 만찬장을 뛰쳐나갔다. 그러자 화장실로 숨었던 차지철이 빼꼼히 화장실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차지철...(화장실에서 빼꼼히 내다보며) 각하, 괜찮습니까.
박정희...(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나는... 괜찮아.
신재순...(박정희의 가슴에서 솟구치는 피를 손으로 막으며) 각하, 정말 괜찮습니까...
박정희...응... 나는... 괜찮아...
해 설...그 시간, 경호원 대기실. 이 방은 만찬장과 마루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곳으로서, 만찬장에서 부르는 심수봉의 노래 '그때 그 사람'을 들을 수 있었던 거리이다. 이 경호원 대기실에는 김재규의 부하인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와, 차지철의 부하인 경호실 경호처장 정인형, 경호부처장 안재송, 이렇게 셋이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김재규의 부하 한 사람과 차지철의 부하 두 사람이 같이 앉아있었던 것인데, 김재규의 부하이자 이날 밤 암살작전의 지휘자인 박선호와, 차지철의 부하인 경호실 경호처장 정인형은 해병 간부후보 동기생으로서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이 둘도 없는 친구 사이에, 죽이고 죽어야 할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만찬장에서 울린 첫 번째 총성이 그 운명의 신호였다.
효 과...만찬장에서 들려오는 첫 번째 총성.
박선호...(권총을 뽑아들고 벌떡 일어선다) 꼼짝 마!
해 설...박선호가 권총을 뽑아들고 일어섰고, 친구인 정인형은 놀라 쳐다보았으며, 국가대표 사격선수 출신의 안재송은 재빨리 권총을 잡았다.
박선호...움직이지 마!
해 설...만찬장에서 두 번째 총성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정인형의 손도 권총으로 향하고 있었다. 박선호가 정인형에게 애원하듯 소리쳤다.
박선호...총 뽑지 마! 움직이면 쏜다! 인형아, 우리 같이 살자...
해 설...정인형은 권총으로 가던 손을 거두었고 안재송이 권총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국가대표 사격선수 출신 경호부처장이 한 발 늦었다. 이미 발사준비가 돼 있는 박선호의 권총이 불을 뿜었고 안재송은 쓰러졌다. 정인형이 권총을 뽑아들고 박선호에게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박선호...(권총 겨눈 채 뒷걸음질치며) 인형아, 움직이지 마... 우리 같이 살자, 인형아... 다가오지 말랬잖아! (절규하듯) 움직이지 마아! (권총 발사한다)
해 설...정인형이 오랜 친구 박선호의 발 아래 쓰러졌다.
효 과...바깥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총격소리.
해 설...바깥에서는 중정 운전기사 유성옥이 쏜 총에 대통령 승용차 운전기사 김용태가 죽고, 궁정동 식당 경비원 조장 이기주가 쏜 총에 대통령 경호원 김용섭이 죽고... 비록 경호원이고 운전기사일망정 끗발 좋은 청와대에서 근무한다는 긍지만은 대단하던 이들이 그 끗발 좋은 직장 때문에 죽어나자빠지고, 식당 경비원이고 식당 운전기사일망정 끗발 있는 궁정동 안가에 근무한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던 이들이 그 끗발 있는 직장 때문에 살인자가 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 40분에서 7시 50분 사이, 그 10분 사이의 어느 1분, 혹은 2분쯤. 그 짧은 시간에 몇몇 개인과 국가의 운명이 바뀌고 있었고, 바로 그 시간에 비상계엄사령관이자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가 그 현장의 지척에 있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장차 12 12사건의 원인이 된다. 한편, 고독한 독재자 박정희는 그 최후의 순간에도 강렬한 카리스마를 잃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현장에 있었던 두 인물의 증언을 들어보자. 먼저, 배우 지망생으로 그 만찬에 참석하여 박정희의 가슴에서 솟는 피를 손으로 막았던 신재순.
신재순...대통령께서는, 뭣들 하는 거야! 라고 큰소리를 치신 뒤에 그 모양을 보지 않으려는 듯 눈을 감고 정좌를 하셨습니다. 위기일발의 상황에서도 미동도 하지 않으신 거예요. 그리고, 총을 맞으시고, 나는 괜찮아, 하실 때 저는, 나는 괜찮으니 너희들은 여기를 빨리 피하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역시 일국의 대통령이셨습니다.
해 설...비서실장 김계원은 말한다.
김계원...각하께서는 그 상황에서도 그 자리에 있는 여자아이들 걱정을 하십디다.
해 설...'나는 괜찮아...' 이 말에 대한 전설이 있다. 대한매일신문 김삼웅 주필의 해석을 들어보자.
인서트 5...김삼웅 주필. (취재 1:42'40" 셋째 줄 중간. '61년 5월 16일날 새벽에 쿠데타를 할 때 한강에서 ~ 괜찮치 않은 용어로 막을 내렸다는 것을 한마디 덧붙이고 싶습니다.')
해 설...그날 밤 궁정동 안가. 상황이 모두 끝난 뒤에 김재규가 김계원에게 말한다.
김재규...나는 한다면 합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보안 유지를 철저히 하십시오.
김계원...뭐라고 하지?
김재규...각하께서 과로로 졸도했다고 하든지 적당히 하십시오.
해 설...박정희가 그 혁명가 생애의 마지막 숨을 거둔 것은 비서실장 김계원의 무릎을 베고 궁정동 안가에서 국군 서울지구 병원으로 옮겨지는 도중의 슈퍼살롱 승용차 안에서였고, 그때 시간은 10월 26일 저녁 7시 55분쯤이었다. 박정희는 일기를 쓴 사람이다. 그가 이승에 남긴 마지막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박정희...(약한 에코) 일부 반체제 인사들은 현체제에 대하여 집요하게 반발을 하지만, 모든 것은 후세의 사가(史家)들이 공정히 평가하기를 바랄 뿐.
해 설...비상국무회의가 국방부 회의실에 소집된 것은 10월 26일 밤 열한 시였고, 정식 국무회의가 열린 시간은 10월 27일 새벽 두 시였다. 그리고 새벽 네 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대통령의 '유고(有故)'가 발표됐다. 계엄령 선포 발표문에서는 최고책임자의 이름을 이렇게 적고 있었다. 대통령 권한대행 최규하. 18년동안 정상에 있던 박정희의 이름이 역사의 깊은 골짜기로 내려가고 있었다.
음 악...<10 26사건> 편을 마치면서.
해 설...다음 주 이 시간에는 <공작명-K, 암호-생일집 초대--12 12사건> 편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음 악...엔딩.
* 원고량이 많을 경우, 10페이지 아홉 째 줄 '낭독'에서부터 11페이지 여덟 째 줄까지 빼세요.
* 그래도 원고량이 많을 경우에는, 7페이지 '브리지 음악' 다음의 '해 설', "대 한국정책에 성공하지..."에서부터 8페이지 열번 째 줄 "무시 했다는 것도 한국민으로서 유쾌한 일은 아니다" 까지를 빼세요.
<등장인물>
해 설.
낭 독.
박정희.
김영삼.
기자 1...남. 30대.
반 장...남. 30대. YH의.
여성근로자 1...여. 21. YH의.
뉴욕 타임스 기사 낭독...남.
김재규.
차지철.
김계원.
박근혜.
정승화.
신재순...여. 20대. 배우 지망생.
박선호...남. 30대. 중정 의전과장.
<예고 멘트>
1979년 10월 26일 저녁 일곱 시 사십 분경, 상처 입은 한국현대사의 한 카리스마가 존재의 지도에서 사라졌습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진압군의 총탄이 빗발치듯 쏟아지는 한강인도교를 꼿꼿이 걸어가면서 "나는 괜찮아" 라고 했던 쿠데타의 보스 박정희가 1979년 10월 26일 저녁 대통령 박정희로서 "나는 괜찮아" 라는 말을 남기고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나는 괜찮아" 라는 말과 함께 한국현대사의 한복판으로 진입했다가 "나는 괜찮아" 라는 말과 함께 한국현대사의 막후로 퇴장한 박정희의 마지막 얘기를 하겠습니다.
오늘 낮 11시 5분, 다큐멘터리 20세기 한국사, <유고(有故)! '근대화 한국'의 특별한 죽음--10 26사건> 편, 많은 청취 바랍니다.
5월 28일 다큐멘터리 20세기 한국사
<공작명-K, 암호-생일집 초대--12 12사건>
극본 김광수 연출 이영노
1979년 12월 12일 밤에 있었던, 합동수사본부가 계엄사령관을 강제연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유혈사태와, 뒤이은 신군부의 행각은 그 이후의 한국역사에서 두고두고 시비꺼리였다.
12 12사건은 박대통령 시해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의 우발적인 사건이었을까, 정권 탈취를 시도하는 과정의 하극상이었을까. 그 사건의 주역들인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모두 권좌에서 물러난 뒤에 김영삼의 문민정부는 12 12사건을 '하극상에 의한 군사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하였고, 경제성장과 북방외교의 공로가 있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정권 탈취범'으로 몰아서 단죄하였다. 그러나 전두환 씨는 말했다. 모든 것은 운명적으로 되어진 것이지 의도적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고, 상황에 휩쓸린 것이지 상황을 조작한 것이 아니라고. 역사는 발언을 하고 있으되 진실은 침묵하고 있다. 진실은 과연 누구의 침묵 속에서 자고 있는가. 12 12사건의 진실에 근접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