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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새기모 - 새로운 기독교를 열어 가는 모임 - 원문보기 글쓴이: 최승현
<낙골교회와 빈민운동 -평생교육 그리고 희망의 인문학-왜 필요한가?>
1. 낙골교회 소개
서울 신림 7동, 관악산 서편 자락에 난곡, 혹은 낙골이라 불리는 골짜기가 있다. 이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울의 대표적인 빈민촌이 있는 곳 중의 하나였다. 1970년대 동부이촌동의 거주민들을 아파트 건설을 하며 몰아내었는데 그들이 이곳 난곡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후 서울 하늘 아래에서 더 이상 밀려날 곳이 없는 사람들이 이 난곡 골짜기로 흘러들었다. 그들은 야트막한 담으로 둘러쳐진, 화장실이나 수도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허름한 지붕 아래 작은 방에서 살기 일쑤였다. 야트막한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산골짜기를 가득 메운 가운데 드문드문 켜진 좁은 길목의 가로등 불빛을 보면… 시인의 시에서나 봄직한, 설운 삶의 냄새가 엉켜 오르는, 하지만 가진 것 없기에 이웃에게 욕심 부리지 않고 서로 의지하는, 따스한 가난의 풍경이 그려지는 곳이 이곳 난곡이었다. 하지만 이런 낭만과는 반대로 이곳에 모여든 사람들은 상처받고 빼앗기는 것에 익숙한, 더 이상 내어놓을 것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낙골교회는 1983년 난곡에 세워졌다. 낙골교회는 교회의 공식 소개 문구처럼 “가난한 이웃들의 벗으로 함께하여 왔다.” 그리고 “시대와 민족 그리고 이웃을 위한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로서 한결같이” 살아왔다. 독재와 개발이 휘몰아치던 70년대, 시대에 저항하며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고자 했던 젊은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난곡에서 활동했고, 80년대에 접어들어 그들이 모체가 되어 낙골교회가 설립되었다. 낙골교회는 난곡 뿐만 아니라 도시산업선교에서 중요한 거점이 되어왔다.
낙골교회는 ‘민중교회’였다. 낙골교회에 모여든 사람들은 난곡의 가난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고자, 다른 것 아닌 자신들이 가진 것을 나누려 했다. 스스로 ‘가난한 민중’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젊은이들이 함께했다. 무료급식이 시작되었고 공부방이 꾸려졌다. 동시에 그들은 시대의 불의에 맞서, 필요하다면 정치적 투쟁도 불사하면서 난곡의 사람들을 가난으로 밀어넣는 세력에 거스르며 변혁을 위해 저항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건강한 삶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땅의 백성들과 함께했던 예수의 삶과 가르침이었다고 굳게 믿으면서.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 재개발이 진행되자 낙골교회는 난곡의 실거주민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재개발은 되었으나 난곡에 살던 가난한 사람들은 그 수가 줄어들지 않았으며 여전히 난곡 이곳저곳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그들이 있기에 낙골교회는 지금도 존재하고 있고 여전히 민중교회로서 그들과 연대하려 한다. 낙골교회는 지금도 여전히 남아있는 가난한 민중과 함께하며 무료급식과 어린이 공부방, 청소년 사랑방, 자활후견센터 등을 운영하고 있다. 난곡지역 단체협의회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지역의 아픔과 고민에 동참하고 있다.
산골 판자집보다는 그래도 아래 마을의 빌라나 다세대주택이 비록 지하 단칸방일지라도 전기, 수도 잘 들어오고 찬바람 덜 불어 들어오고 수세식 화장실 딸려있고 해서 좀 더 살만해진 것은 아닐까? 그러나 낙골교회 이상선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볼 때는 이전에 사시던 것보다 현실적으로 더 어려워졌어요. 생활이라는 것이 단순히 그런 편이시설만 가지고 생활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래도 달동네 사셨을 때에는 집단촌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 나름의 문화가 있었고 심리적으로나 환경적으로 나름의 안정성이 유지되었어요. 그분들의 삶의 자리에서는 나름대로의 안정성이 있었거든요. 서로 격려하고… 서로 차이가 없잖아요. 그런데 아무튼 깨지고 흩어진 이후로는 바로 옆집에 잘 사는 사람이 들어온다고요. 게다가 사람에 대한 관심도가 집단으로 달동네 아드막한 담장 집들에서 살 때와는 다릅니다. 빌라문화, 아파트문화가 그렇잖아요. 집단촌은 열린 문화이기 때문에 진심이든 아니든 서로 확인이 되고 세밀하게 서로 살피게 되는 데 이제는 그렇지 못한 거죠. 우리도 역량이 부족하니까 집단으로 계실 때만큼 그분들을 만나거나 파악하기가 어려워요.”
난곡의 현실은 한국의 엄연한 한 현실이다. 시대가 변하여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상당한 진전을 이룬 듯 보이고 우리 눈에 빈곤한, 억압받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보이지 않게 된 것은 분명한 현상인 것 같다. 하지만 난곡의 경우처럼 가난한 자, 억눌린 자들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문명의 화려함 이면으로 감춰져버린 것이 아닐까.
시대의 아픔이 여전한 상황임에도 90년대 이후 운동세력은 눈에 띄는 쇠퇴를 보였다. 소위 ‘운동’을 하던 이들 중 어떤 이들은 아무리 힘을 모아 저항하여도 더욱 감당할 수 없는 크기와 새로운 형태로 옥죄여오는 자본의 현실에 좌절하여 그저 말 그대로 평범한 소시민의 삶을 선택하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현실세계의 변혁이라는 것이 예전의 방식으로는 어렵다고 여겨 새로운 대안운동을 모색하기도 했다. 물론 일부에는 이제는 승리를 얻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 그렇지 않다며, 여전히 가난한 자들과 억눌린 자들이 있다며 그들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남은 자들도 있었다.
2. 낙골교회 도시빈민운동의 메카, 민중교회로서의 정체성.
“민중교회라고 하는 영역은 사실 기본적으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을 전제하지만 그보다는 사회 현실참여 의식이 더 많이 강조되었던 것이 태동 때부터의 사실이에요. 그런 열정으로 모인 공동체는 사회에 변동이 있으면 함께 변동하게 되죠. 사회의 변동구조에 더 충실하기 위해서, 더 깊은 참여를 하기 위해서거나 형편이 달라지거나 해서 다른 선택을 하게 되지요. 그럴 때 선택에 신앙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해요. 기성교회 분들은 종교적으로 이해할 때 모든 선택의 상황에서 신앙이 중심 힘이 되어 교회를 지키게 되는 데, 민중교회 분들은 그런 것을 중심으로 모였기 때문에 변화가 오면 교회를 그 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키기 위한 모색을 하죠. 나아가 변화에 따라 교회를 이탈하는 분들도 계셔요. 80~90년대 넘어오면서 사회가 많이 변화되었고. 과거에는 소위 말하자면 사회변혁운동이 분야별로 다양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가 할 역할이 많이 있었는 데, 이제는 각 부분 부분이 활성화되었기에 교회의 역할이 그전 같지 못하죠. 각 전문역할에 충실하고자 교회를 떠나는 분들이 있어요. 교회의 신앙이라는 것 때문에 교회에 자리를 잡고 활동하면 그것도 좋겠지만 민중교회의 역사와 흐름이 있기에 그렇게 일부러 사람들을 잡아두고 활동하게 할 구속력이 없죠. 변화 속에서 민중교회도 변화를 같이 겪었죠. 사회적으로 보면 좋은 변화, 활성화되는 변화를 겪었지만 사실 민중교회는 그렇게 되도록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교회 내부적으로는 역량이 떨어지고 열정이 떨어지고 인적자원도 많이 흩어지는 등의 어려움을 많이 겪었던 것이 사실이고 그 여파가 아직도 있어요. 낙골교회도 그런 현상에서 자유롭지 않죠.”
낙골교회도 90년대 이후로 교인의 많은 수가 다른 영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고 한다. 90년대 이전 30명 정도의 교인들이 역동적으
로 교회에 함께하던 것에 비해 지금은 절반 가량이 남아 있다고 한다. 30여명에서 15명 안팎으로. 그다지 큰 변화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보통의 교회와는 달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실질적이고 능동적인 참여자인, 예배만 드리고 간다거나 참여에 소극적인 허수의 교인이 아닌, 민중교회의 교인 한 사람이 차지하는 비중은 일반교회의 그것과는 사뭇 무게감이 다르다. 교인이 절반으로 줄었다는 것은 단순한 예배 인원의 절반으로의 감소, 재정의 절반으로의 감소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더불어 교회가 할 수 있는 지역사회 참여의 일꾼이 절반으로 줄었고, 말 그대로 교회 전체의 역량이 절반으로 감소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교회 교인 한 분하고 민중교회 교인 한 분하고 교회 안에서 갖는 역량의 차이가 크죠. 교회 자체가 작으니까 맡는 역할이 클 수밖에 없고, 민중교회는 교회의 일만 아니라 지역의 일도 해야 하니까 일반교회들 보다는 역할들이 좀 크죠.”
이상선 목사는 개인적으로는 굳이 숫자를 따지자면 교인수가 한 40명 정도로, 물론 허수가 아닌, 늘어났으면 좋겠다고 한다. 적극적으로 지역사회에 관심을 갖고 참여할 교인들로 말이다. ‘일을 할 수 있는 규모’, 이에 대해 교회마다 생각들이 많이 다르겠지만 낙골교회는 이 정도를 생각하는 것 같다. 사회변혁이라는 거창한 목표를 갖고 있지만 그들의 실천은 구체적인 지역을 떠나지 않는다. 최소한 낙골교회가 자리잡은 난곡 지역만이라도 사람들이 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 지역으로 변혁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이어온 교회. 실질적인 활동을 하기 위한 교인 정도만 되면 좋겠다는 소망은 그래서 작은 것 같지만 크다.
“민중교회는 지역사회의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기도회나 예배 이외에 교인들이 참여해야 할 일이 많거든요. 그래서 일정 정도 성장해야 한다고 봐요. 그렇지만 그 성장에 이르는 과정에서 원칙을 잘 세우고 지켜야 하죠. 지역사회의 일의 규모를 감당할 만큼의 규모가 되면 좋죠.”
민중교회가 지켜온 원칙, 그 원칙 위에 낙골교회가 세워졌다. 그 원칙은 세상이 변했다고 사람들이 말할지라도 낙골교회를 지금껏 지탱하고 있는 힘이다. 교회 공동체는 이제 예전과 달리 다양화된 사회를 온전히 품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나의 질문에 이상선 전도사는 이러게 대답했다.
“교회에는 원칙이 있어야 해요. 그 원칙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그 교회를 선택해야죠. 너희가 진정으로 신앙을 가지려면 다 팔아라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 하신 예수의 이야기는 쇄신을 요구하는 거잖아요.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 재산이잖아요, 자본주의니까. 팔아라. 사회를 이끌고 변혁해 나가야할 주체가 아무리 사회가 그렇다고 해도 사회를 그대로 반영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교회는 원칙을 정해야 한다고 봐요. 정말로 교회가 사회의 축소판이라면 거기서 멋진 모습을 만들고 보일 때 사회가 충격을 받겠죠. 교회가 사회에 휩쓸려 가는 것은 본질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생각해요.”
3. 낙골교회가 지향하는 세상,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위하여.
스스로를 대안세력이 아니라 변혁세력이라고 생각하는 민중교회는 지금 이 자리에서 삶의 건강성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대안공동체를 별도로 만드는 시도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시도 못지 않게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자리를 건강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민중교회에, 낙골교회에 남아있다. ‘이 자리’를 끈기있게 지키고 있는 원동력이 궁금하여 물었다.
“신앙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곧게 가는 것이겠죠. 그렇게 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신앙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요.”
민중교회는 고통의 근본원인은 평등하지 않은 것에 있다고 본다. 그리고 삶의 아름다움이 있는 공동체를 꿈꾼다.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꿈꾼다.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그 세상을 완성하시리라는 종말의 믿음을 갖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민중교회는 민중교회가 현실적으로 완벽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큰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믿는다.
“민중교회만이 희망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실런지 모르지만. 지금의 민중교회만이 희망이냐면 그건 아니고 민중교회만이 희망을 완성시킬 수 있는 그런 구조다라고 생각해요. 사회의 축소판이지만 희망을 갖고 평등을 이뤄가며 사회에 충격을 주는 그런 공동체로 가야하는 데 민중교회만이 그 길을 갈 수 있다고 봐요. 일반교회는 이미 내적구조가 자본화되었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형편이 된 것은 아닌가 생각되거든요. 그나마 민중교회가 삶의 아름다움이 있는 공동체를 실천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닌가 합니다.”
삶의 아름다움이 있는 공동체. 다른 곳 다른 시간이 아닌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인간다운 아름다움으로 서로를 대하며 가난한 자 억눌린 자가 하나도 없는 공동체. 그런 공동체를 우리 현실에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이상선 목사는 인터뷰 말미에 이런 말을 했다.
“멀든 가깝든 그렇게 되기 위해서 사는 것 아니겠어요?”
4. 낙골교회 연락처
낙골교회
최준도 전도사: 010 - 5037 - 1330
5. -평생교육 그리고 희망의 인문학-
경제적 소외보다 무서운 것은 ‘희망을 상상할 수 있는 지성’을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체념하게 만들고, 가난은 나라님도 극복하지 못하는 천재지변쯤으로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잘 살아보자고 열심히 한나라당 투표하러 가는 노인들을 보면 ... 참담한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저야 빨갱이니까 사회주의국가를 이루는 것이 목적입니다. 제 현실이라고 해봤자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저의 현실입니다. 저도 제 나라 대한민국을 사랑하지만, 국익과 빈민들의 행복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사실은 적대적인 경우가 더 많을 겁니다.
재개발해서 대한민국 깨끗하고 좋은 나라 만든다고 빈민주거지 싹 쓸어버리면, 누구 편을 들어야 할까요? 무작정 헐어버리면서 코딱지만한 보상금 주고 알아서 살라고 하면 철거민들은 어디에 가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죽을까요? 아니면 코딱지만한 보상금을 국가에서 주었으니 코딱지로 집을 지어서 새로 삶을 꾸리면 되는 걸까요?
코딱지로 집을 짓느니 하는 소리는 정말 말 같지도 않은 소리입니다. 그러나 국가는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말 같지도 않은 짓을 서슴없이 자행합니다. 내 나라 내 민족이 싫어서 계급을 떠드는 게 아닙니다. 잘못된 일을 바로잡기 위해서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서로 이념이나 사상이나 가치관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다양성의 범주 내에서 용납될 수준에 있어야 합니다. 용인될 수준이라는 것은 서로의 선택에 자유가 주어주되 책임을 질 수 있는 선택입니다. 다양성이라고 해서 자유와 방종을 구분 못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양성의 범주 내에서 너와 나의 차이와 내 입장을 정리해서 주장할 수 있는 능력, 인문학적 교양에서 출발합니다. 인간의 지성은 영어교육이나 자기계발서적에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문화교양에서 시작됩니다.
기장교단의 향린교회들과 복음교회의 낙골교회는 어느 빈민운동의 대부가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 분이 바로 허병섭 목사님이고 그 분이 하셨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스스로 말하게 하라.”
함석헌 선생님도 비슷한 말을 하셨습니다. “깨어있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깨어있을 수 있고,(지각있는/성찰하는) 스스로 말할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무엇이 똥이고 된장인지 구분할 수 있는 교양지식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빨갱이는 나쁜 놈이라고 하시는 분들 중에서 <자본론>이나 <공산당선언> 읽어보신 분 몇 분이나 될까요? 러시아혁명사가 어찌 이루어졌는지 알까요? 마그나 카르타가 뭔지, 프랑스대혁명은 왜 발생되었는지, 68학생혁명은 왜 생겼는지? 인권선언의 사회적배경이 뭐고 무슨 내용이 들어있는지, 유엔인권헌장은 왜 만들어졌는지? 리비아 민주화 혁명은 왜 이루어진 건지? 제대로 숙지하고 그러고 나서도 저는 우파고 자유주의자입니다. 이런 분 몇이나 계실까요?
조금 심한 분들은 서양사나 나라밖 사정은 그렇다 치더라도 제주도4.3항쟁이 뭔지도 모르는 분들 많습니다. 그러니 박정희/전두환 전 대통령은 카리스마있는 리더고, 대통령 중에서 제주도민에게 최초로 사과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저 새끼 잘 죽었다.”고 박수치는 겁니다.
이건 정말 빨갱이는 나쁜 놈들이라고 떠들면서 뭐가 빨간색이고 뭐가 파란색인지도 구분 못하고 있는 겁니다. 심하게 이야기하면 빨갱이만도 못한 겁니다.
뭘 좀 알고나서 우파고 자유주의자입니다, 그러면 상관이 없습니다. 전혀 엉뚱한 소리는 안할테고 그분들 선택이니까요. 남의 가치관과 선택에, 그리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거나 사회적으로 악한 것으로 규정되는 것도 아닌 것에, 타인이 자기기준으로 감 내놔라 배 내놔라 이러는 것도 우스운 것 아닙니까?
그런데 뭣도 모르면서 말하는 것은 위험한 행동입니다. 그러면 그분들은 자기 스스로 선택한 생각을 머릿속에 지닌 분들이 아닙니다. 내가 사고하고 결론을 낸 내 답이 아니라, 남들이 떠들고 매체에서 주입된 누구 것인지도 모르는 근본없는 생각을 내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게 뭐냐? 세뇌입니다.
빈민운동의 근간은 물론 가난한 학생들, 저소득층, 차상위계층을 위한,
<무상급식>이나 <무료공부방>도 포함합니다. 이 빈민운동 시스템은 허병섭 목사님이 최초로 고안하고 그 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방식입니다. 물론 여기에 지역주민들을 위한 직업교육도 당연히 포함이 될 겁니다. 그러나 중심은 따로 있습니다. 평생교육의 관점에서 인문학을 제시합니다.
인문학적 소양이 인간의 밥이 될 수는 없지만,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반찬도 먹어야 밥맛이 날 거 아닙니까? 인문학적 소양은 인간의 삶을 정신적으로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기름진 반찬입니다. 게다가 가격도 쌉니다. 책 사서 공부하면 되고, 독서하는 습관을 가지면 되기 때문입니다. 빈민운동의 근간은 지역주민들에게 사회과학적인 시각을 일깨워줘서 국가에게 내가 필요한 것을 요구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러면 왜 가난한 사람에게 더더욱 인문학이 필요할까요?
아프리카 어느 동네에 가면 진짜로 이런 팻말이 있답니다.
“여자는 당신의 친구입니다. 때리지 마세요.”
우리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아버지들이 어머니 막 두들겨 패고, 밥상 집어던져버리고, 일상적인 풍경이었습니다. 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부잣집에서 남자아이 못 낳았다고 친정으로 쫓겨 온 여인네들 부지기수였습니다.
지금에 와서 어느 남자가 열 받는다고 자기 아내를 막 두들겨 패면 어찌 되나요? 은팔찌 차고 감옥으로 여행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그런 모습을 보면서 열 받으면 여자를 좀 두들겨 팰 수도 있지, 북어하고 여자는 패야 제 맛, 아무도 그런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생각을 입 밖에 뱉어냈다가는 주변에 여자들이 아무도 그 사람을 사람취급 안 해줄 겁니다. 왜 그럴까요?
시대가 다르기 때문도 있지만 전반적인 문화교양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진정한 의미의 평생교육은 꽃꽂이를 배우거나, 바둑을 배우거나, 기타를 배우거나 취미활동도 포함하지만 죽는 날까지 공부하고 사고하는 인문학적 토대에서 제대로 의미부여가 된다고 봅니다.
뭘 좀 놀아도 아가씨들 있는 노래방 가서 아가씨들 엉덩이 주무르면서 놀거나, 만나면 허구언날 술판이나 벌리거나, 피씨방에서 매일매일 서너시간씩(꾼들은 피씨방이 아니라 게임장이라 부르며 열 몇 시간 상주도 익숙한 일상입니다.) 리니지나 와우에 인생투자하지 말고,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도록 <혼자서 생각하는 자기만의 시간>이나 <독서>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건강한 자존감의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 사는 게 친구랑 만나서 놀고, 술도 마시고 물론 ‘그 재미’도 있는 거고, ‘그 재미’도 때로 있어야 하지만, ‘그 재미’만 있는 건 아닙니다. ‘다른 재미’도 있습니다. 저는 빈민운동이 ‘다른 재미’를 일깨워주는 첫 출발, 발상의 전환이 된다고 믿습니다.
6. 무엇이 현실적 사고인가?
저보고 일요일에 성서공부와 예배 및 친교나눔에만 목회자로 활동하고, 평일에는 내 알아서 직업 구해서 먹고 살며, 목회사례비는 교회운영과 빈민운동선교비로 전액 포기하겠다 했더니, 저보고 불가능한 꿈을 어리석은 이상주의자로 평가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당신 얼마나 가난하고 게다가 무능력한데 ...(제가 기분은 나빠해도 차마 부정은 못하겠습니다.) 도대체 어느 세월에 목사안수 받고 돈 모아서 지역아동센터 차리고 평생교육원 차릴 거냐? 그런 현실적 충고해주시는 분들이 꽤 계시는데 ... 되든 안되든 어찌되든 저는 제 길 가고, 제 인생을 살 겁니다.
제가 도라이버라서 목회자 사례비 포기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원래 민중교회는 '뽕끼'가 없어서 헌금도 잘 안들어오고, 어른 성도들이 50명 유지되면 ... 일반교회들이 성도수 1만명 돌파하는 것과 비슷한 규모의 대박인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미친놈이 아니죠. 민중교회에 돈 있는 사람들이 몇 사람이나 올 것이며, 걷어봤자 그 돈이 얼마나 될 것이며, 그리고 교회에 사람은 저만 있나요?
따로 능력있고 리더쉽 있는 실무자들을 뽑아서 각 시스템의 감독 겸 교육자로 세우면 되는 거죠.
가뜩이나 민중교회는 돈도 없어서 운영도 안되고 죄다 픽픽 망하고 없어지는데 ... 좋은 일을 한다면서 내 밥 줄을 거기다 걸면, 어떻게 시스템이 운영이 되나요?
저는 제 이상론에 맞게끔 지극히 현실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지 도라이버 아닙니다.
제가 당신 능력 없어 ... 이건 받아들일 수 있어요.
하도 실패하고 망하고 말아먹으니까,
진보기독교판이고 안티기독교판이고 저 능력 없는 거 이바닥 사람들 다 알아요.
저도 이제는 자기변호하고 변명하고 싶지도 않아요. 사실이니까.
그래도 그런 소리 들으면 사실이라도 기분은 나빠요.
하지만 저는 도라이버가 아닙니다.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성도들 지갑이나 털어먹는 다른 놈들이 도라이버인 것입니다.
<무엇무엇 답게>라는 말이 있습니다.
경찰관은 경찰관 답게~
소방관은 소방관 답게~
그리고 종교지도자는 종교지도자 답게~
사람이 오늘 하루만 살고 내일부터는 죽을 거 아니기 때문에,
현실이나 밥그릇 ... 내 삶을 불안에 떨게 하지 않을 만큼의 안정적인 가난의 확보는 아주 중요한 겁니다.
중요하되 ... 종교지도자가 해당 종교의 권위로 자기자신의 배만 불린다면,
이쪽이 엉뚱하고 엄한 사람이 아니라 그쪽 분들이 엉덩이가 뚱뚱한 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