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된 어멍(엄마) 그 이름, 海女
生死를 다투는 '숨비소리' 숨 한껏 참았다 내뿜는 갈매기의 비명같은 소리…
때론 거칠게, 때론 잔잔하게 그녀들을 키운건 바다의 母性
독하지 않으면 자맥질 못해
넓고 깊고 무거운 바다… 독하다고 안 무서운건 아냐
그래도 가족 생명줄이니까 애 낳기 직전까지 바다로 간다
"해녀도 늙고 약해지면 똥군이라고 불러… 세상 사는게 다 그렇지"
수백년 내려온 부락 공동체… 한명이 아파 못나오면 품앗이로 해산물 모아줘
나이 든 해녀 먹고 살라고 얕은 물가는 건들지 않아
운에 맡기고 사는 인생, 거북이 장례 꼭 치러준다
전설속 바다의 神이니까… 묻어주며 술 따라주지, 우리들 만수무강 빌면서
2만3000명→4600명… 그나마 절반이 70세 넘어 매년 130명 돌아가시고
신입 해녀는 15명 안팎… 20년 후면 사라질 그녀들
- 사진작가 준초이는 해녀의 얼굴에 핀 검버섯에서 바다, 그리고 바람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의 앵글에 담긴‘할망 해녀’의 얼굴엔 평생을 물질하며 살아온 한 여자의 강함과 약함, 기쁨과 고단함이 뒤섞여 있다. 지난 8일 제주 동쪽 섬 우도에서 만난 여든여섯 살 해녀 고일량씨. 그는 이날 준초이에게 “아들들 몰래 나왔으니 나 봤다고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 사진작가 준초이
어려서부터 바다에 나가 물질을 익힌 복순이는 스무 살 무렵 여수·통영 같은 다른 해안 도시로 나가 물질을 해 돈을 벌어왔다. 몇 달씩 뭍에 나갔다가 오는 '출가(出家) 물질'은 당시 해녀들이 빠르게 큰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었다. 출가 물질이 끝나고 전주(錢主)가 해녀들에게 돈을 푸는 날이면 제주도에서 아버지가 올라와 그 돈을 홀라당 가져갔다. 아버지는 한량이었다. 딸이 물질한 돈으로 하나 둘 밭뙈기를 사 모으고 아들들을 학교에 보냈다. 보리밥도 먹기 어렵던 시절, 물질한 돈이 들어오는 날이면 밥상에 '반지기밥(보리와 쌀을 반반 섞은 밥)'이 올라왔다. 큰딸 복순이가 시집가던 날 아버지는 맘이 상해 종일 술만 들이켰다.
- 제주 우도에서 지난 7일 해녀를 촬영하던 중 한 해녀가 던져준 문어를 들고 환하게 웃는 사진작가 준초이. 그는 9년 전 해녀들이 지닌 모성(母性)에 홀려 때때로 제주를 오가다가, 지난해 봄엔 해녀 촬영을 위해 아예 제주로 사는 곳을 옮겼다. / 우도(제주)=김신영 기자
제주의 동쪽 섬 우도에서 지난 7일 만난 일흔여덟 살 해녀 양복순씨는 옛이야기를 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이놈의 할아방이 혼내(한 해)라도 더 벌어 먹을라구 한 거지, 하하. 똘을 놈(딸을 남) 주기가 그렇게 아까와!" 그는 이날도 바다에서 물질을 하고 왔다고 했다. 바다에서 칠십년, 양복순씨는 숨 참아가며 번 돈으로 남편 뒷바라지를 하고 딸 하나를 대학 공부시켜 서울로 시집 보냈다. 남편도 한량이었다. 그에게는 아버지, 남편, 딸이 똑같았다. 모두 목숨 걸고 거두어 먹여야 할 식솔이었다. 양복순씨는 말했다. "제주엔 애기를 남 주어버리는 사람이 없지. 우리가 물질을 허기 때문에…. 아무리 신랑이 십원짜리 하나 안 벌어줘도 여자가 다 애기들을 먹여 살리고, 공부시키고 그러지."
제주 해녀들의 이런 원초적 모성(母性)에 9년 전 한 사진작가가 매혹됐다. '한국에서 가장 비싼 광고사진작가'라 불려온 준초이(62·최명준)였다. 그는 2005년 광고 촬영을 위해 제주를 찾았다가 우연히 해녀를 만났고, 즉각적으로 빠져들었다. 그는 당시 바다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이한 소리에 먼저 홀렸다. '휘이이익! 휘이이익!' 하는, 갈매기의 비명 같은 소리는 원시적이면서 절박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한 제주주민이 그 소리는 해녀들이 바다에서 숨을 참았다 내뿜을 때 내는 '숨비소리'라고 설명했다.
"숨이 넘어갈 적에, 너무 힘이 들어 도저히 못 버틸 적에 나오는 소리였지요. 그 소리에서 나는 어머니만이 가질 수 있는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에너지를 떠올렸습니다. 담당 직원에게 '해녀를 만나게 해달라'고 졸라 여덟 명의 해녀 사진을 찍고, 서울로 돌아갔죠."
일본 도쿄에서 유학하고 미국 뉴욕에서 젊은 시절 사진을 배운 준초이는 인물 사진에 강한 감성의 작가로 꼽힌다. 그는 "아마 어린 시절 내가 겪은 어머니의 부재(不在)가 그 원인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젖 떼자마자 큰집에 양자로 들어가 자랐다. 강하고 따스한 어머니에 대한 갈망은 그의 작품을 이끌어간 큰 동력이었다. 그렇게 막연하게 동경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그는 해녀에게서 보았다. 틈틈이 제주에 내려가 해녀를 찍다가 지난해 3월 아예 제주 우도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사이 9년 전 찍었던 해녀 8명 중 6명은 세상을 떴다.
준초이가 해녀 촬영에 전념키로 결정한 것과 거의 동시에 세상이 잊고 있던 해녀가 갑자기 이슈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지난해 일본 정부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일본의 해녀인 '아마(海女)'를 올리려고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한국 해녀의 가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지난해 말 문화재청은 제주 해녀를 유네스코 문화유산 신청 종목으로 선정했다.
왜 지금 해녀일까. 9년 동안 제주의 해녀를 좇아온 준초이는 말했다.
"머리로만 사는 얄팍한 시대에 우리가 지친 것 아닐까요. 몸으로, 세포로 터득한 해녀의 지혜를 글로 배운 지식으론 절대 이길 수가 없으니까…."
◇"해녀가 죽는 건 태반이 욕심 때문"
- 준초이는 바다로 나가기 위해 고무 옷을 입고 뽕돌(잠수를 위해 허리에 차는 돌)을 찬 해녀의 당찬 뒷모습에서 전사를 연상한다고 했다. 지난해 말 제주 성산의 해녀 고송환(69)씨가 바다를 보고 서 있는 모습. / 사진작가 준초이
할망 해녀는 길 한쪽 검은 돌 울타리 아래로 가 쑥을 한 움큼 뜯었다.
"풀쑥이랑 치약으로 문지르면 수경에 김이 얼릉얼릉하지를 않거든, 으헤헤!"
고무 옷, 오리발, 뽕돌을 차려입은 해녀들은 옷 갈아입고 잡담을 하는가 싶더니 금세 바다로 '희어(헤엄쳐)' 들어간다.
해녀들의 잡담이 그들만 해독(解讀)할 수 있는 가락으로 변해 파도 소리와 섞였다. "아아아해! 아아아해! 아아아! 아아아해!"
해녀들은 현무암 해안을 토끼처럼 가볍게 걸어 바다 속으로 들어가 금세 너울너울 멀어진다. 10분이 채 지났을까 싶은데 어느새 까마득 잘 보이지 않는다. 도저히 수영으로 갈 수 있는 속도가 아니다. 50년 넘게 해녀로 살아온 윤복자(66)씨는 "물을 타고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썰물 때 물 타고 나갔다가 물이 들어오면 같이 따라 들어오는 거지. 시계는 없어도 바다에서는 물이 돌아서는 때를 몸으로 다 알 수가 있지. 매일 하니까."
넓고 깊고 무거운 바다는 인간에게 미지(未知) 그 자체다. 지식만으로 덤비려 하면 당한다. 준초이는 "해녀들은 지성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 본능으로 산다. 생(生)과 사(死)를 다툴 때 지성으로는 생으로 못 가지만 지혜로는 갈 수 있지 않겠나"라고 했다. 해녀의 지혜는 과학으로는 설명이 잘 안 된다. 돌고래가 나타나면 다음 날 물질을 해선 안 된다거나 일본 쪽에서 오는 '샛바람'이 불면 수면은 잔잔해도 물속이 혼탁하고, 큰 파도는 네 번 이어 오지 않는다는 식이다.
'지난겨울 해녀 두 명이 폭풍에 떠내려가 이틀 밤낮을 소라를 깨 먹다 간신히 구조됐다' '덩치 좋은 한 해녀는 아침에 삭힌 홍어 한 점을 먹고 들어갔다가 급체해 바다 아래서 숨이 멎어 죽었다'…. 해녀들 사이에 죽음 이야기도 흔하다.
제주 성산의 해녀 고송환(69)씨는 "해녀가 죽는 건 태반이 욕심 때문"이라고 말했다. "요기도 있고, 요기도 있으면 요거 두 개만 가지고 나오면 되는디, 고개 들었을 때 저쪽에 또 뭐가 보이는 거지예. 욕심 있는 사람은 고개를 들었다가 그걸 주우려고 또 내려가. 숨이 차 있는 상태에서 한 번 더 내려가는 것은 굉장히 차이가 있어. '내가 저거야 못하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다 잘못되는 거지야…."
◇"운으로다 사는 인생이다"
- 사진작가 준초이가 우도에서 만난 어린 해녀 박수아(15)양. 중학생인 박양은 아직 돈을 벌기 위한 물질을 하진 않지만 훗날 해녀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선배 해녀들을 따라 물질을 배우고 있다. / 사진작가 준초이
우도의 해녀 김은희(52)씨는 '곰식이'(돌고래)와 멀미가 무섭다고 했다.
"아휴… 곰식이가 해치지는 않는데 쉭쉭쉭쉭쉭쉭 소리를 내요. 걔를 보면 그렇게 무서워! '배알로오… 배알로오…'하고 달래 보내지. 우리 해치지 말고 배(船) 아래로 지나가라는 뱃사람들 말이에요."
또 다른 해녀는 물에 떠다니는 고무장갑을 보고 충격을 받아 그 후로는 깊은 바다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다.
"바다 안에선 아무 소리도 안 나고 고요하죠. 그러다 고무장갑이랑 딱 마주치면 얼마나 무서운 줄 알아요? 이렇게 손이 쫙 펼쳐져 있으면, 어휴…."
바닷속 엄청난 수압에 수십년 시달리다 보면 귀먹는 일도 다반사다. 귀에서, 코에서 피가 나도 "이래야 뻥 뚫린다"며 오히려 통쾌해한다. 해녀들은 바다에 들어가기 전 소화가 안 된다며 아침을 잘 먹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두통약·멀미약 따위를 습관적으로 털어 넣는다. 처방을 받은 약인 경우도 있지만 종종 그저 대충 '자가 처방'해 산 약들이다. 당연히 몸이 상한다.
해녀들은 죽음과 고통에 대한 공포를 "머정으로다 하는 인생"이란 말로 달랜다. '운에 맡기고 사는 삶'이라는 뜻이다. 김은희씨는 "그래서 우리는 거북이 시체를 꼭 장례를 치러준다"고 말했다. "용왕이잖아. 전설에 바다의 신이라잖아. 술 한잔 따라주며 해녀들 만수무강하라고 안전을 비는 거지."
◇하군·중군·상군…그리고 똥군
"아구! 이게 안 가야! 아이이구우우…."
7일 오후 2시 우도의 해안. 허리가 굽은 할머니 해녀 한 명이 첨벙첨벙 오리발을 차며 뭍으로 올라온다. 별로 든 것도 없는데 망태기가 무거운지 걸음이 버겁다. 준초이는 카메라를 잠시 돌 위에 내려놓고 망태기를 덥석 받더니 반갑게 인사를 한다. "어머, 운자씨 엄마시구나?" '운자 엄마'는 바닷물에 젖은 눈을 비비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뿌왁꽉! 나 어떻게 알아봄꽈? 우리 운자 알아쑤쿠꽈? 나 우리 아들들 몰르게 왔어. 나이 들어버링까 사고난다고 못 가게 해. 나 못 본 거야. 나 그냥 때 밀우러 바당(바다)에 온 거야! 알았지? 우리 아들들한테 말 허지 말라구!" '운자씨 어머니'는 여든여섯 살. 사람들은 한때 상군이었던 그를 '똥군'이라 부른다.
해녀의 삶은 크게 네 단계다. 처음 시작하는 하군 혹은 똥군, 물질이 몸에 익으면 중군, 멀고 깊은 바다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베테랑은 상군이다. 실력을 쌓아가다 늙고 약해지면 다시 실력 없는 해녀로 돌아간다. 다시 '똥군'이다.
해녀 김은희씨는 "세상 사는 게 다 그렇지… 나이 먹는 거랑 똑같다"고 말했다. "자기 실력이 있는 거지 어떡해. 한 똥군 언니는 오리발도 안 신어요. 두렁박에 끈 묶어서 끌고 다니고 걸어만 다니면서 보이는 것만 주워요, 하하하. 그 할망들 하는 바당에 우리 상군들은 안 가지. 바다는 넓으니까, 후회가 없게 차근차근 나누어 해먹자는 얘기지. 내도 똥군이 되면 그 바당에서 해먹어야 할 것이니이…."
젊은 해녀들은 똥군들을 위해 '할망 바당'이라 부르는 얕은 바다의 '물건'(해산물)은 건드리지 않는다.
해녀들에겐 수백년 넘게 이어온 질서가 있다. 그것을 지탱하는 것이 부락 문화, 해녀들의 공동체 문화다. 해녀 공동체가 모여 정하는 자치규약은 제주에서 절대적이다. 엄격한 공동체 문화에는 '너나 나나 모두 늙고 약해진다'는 암시가 깔렸다. 물질을 나갈 건지, 얼마나 먼 바다까지 갈 건지 매일 아침 마을별로 해녀들이 모여 다수결로 결정을 한다. 얼마나 멀리 갈지를 결정할 때는 실력이 낮은 해녀의 의견에 맞춰주려고 한다. 해녀가 아파서 물질을 못 나오면 다른 해녀들이 물건을 모아 준다. 동료 해녀가 건진 게 너무 없으면 몇 개씩 물건을 나누어주기도 한다. 이른바 '수눌음'(품앗이) 문화다.
고송환씨는 말했다. "어중간하게 파도가 짤 때(거칠 때) 분명 상군들은 할 수 있어. 가고 싶지. 그런데 하군들이 못하잖아. 잘하는 사람이 다섯이면, 못하는 사람은 이십명도 더 되거든. 그럼 모두 할 수 있게끔 상군들도 밑에 사람들을 위해서 안 가는 거지. 상군들이 다 해버리면 하군, 똥군은 먹을 게 없잖아요."
◇"아기 낳기 직전까지 바다에 들어갔다"
8일 우도의 바다는 물질을 못 나갈 만큼 파도가 높았다. 해녀들은 바닷가 '해녀의 집'에 둘러앉아 땅콩을 볶았다. 한 봉지에 1만원씩 하는 꽤 비싼 우도산(産) 땅콩은 해녀들의 부수입원이다. 해녀들은 쉬지 않는다. 물에 안 가면 밭에 가서 일하고, 밭에도 안 가면 땅콩이라도 볶는다. 프라이팬 옆에 둘러앉은 해녀들에게 직업을 대물림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해녀 윤복자(66)씨는 "절대 안 시킨다"고 말했다. 이유는 간략했다. "점심을 못 먹기 때문에. 물에 가면 네 시간, 다섯 시간 살아야 하니까. 바다 깊은 데 가려면 숨이 차니까."
못 먹던 시절 엄마 따라 설렁설렁 물질을 하던 젊은 해녀들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나면 본격적으로 물질을 시작했다. 윤복자씨는 "지금은 먹고살기 좋아졌지만 예전엔 먹을 것이 없었다"고 했다. "물질은 내 생명줄이고 아이들 생명줄이었으니까. 그냥 물질하는 거지, 다른 생각 할 필요가 아예 없었어." 해녀들은 종종 아기를 낳기 직전까지 바다에 들어갔다. 그러고는 열흘쯤 쉬고 물로 나와 전보다 훨씬 가열차게 소라·전복·성게를 땄다. "아이들을 살려야 하니까!"
1960년대 2만3000명이 넘었던 제주 해녀는 이제 46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그나마 절반 정도가 70세 이상이다. 생활이 절박하지 않은 세월이 오자 해녀들은 자식들에게 '너만은 안 된다'며 물질을 가르치지 않았다. 해녀들에게 해녀계장이라 불리는 제주도청 자원 담당 양희범 사무관은 "매년 130분 정도가 돌아가시는데 새로 해녀가 되는 사람은 15명 안팎이다. 앞으로 20년 후면 제주의 해녀는 거의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요돈 벌엉 어느 형제간 공부시킬 건가"
여자들이 너무 강해서일까. 제주에서 만난 해녀들에게 '남편은 무슨 일을 하시느냐'고 물으면 태반이 '한량'이라고 답했다. 한 70대 해녀는 남편이 한량인데 '둘째 마누라'를 얻어 아들을 낳았다고 했다. 이 해녀는 평생 남편에게 용돈을 쥐여주면서도 이 아들까지 거두어 대학을 보내고 결혼까지 시켰다. 해녀 고송환씨는 "우리 남편은 상고까지 나와 너무 똑똑해서 한량이 됐다"며 웃었다. "내가 물질해서 아이들을 다 길렀지. 그래도 우리 아들은 기아자동차 다니고, 공부 잘하는 우리 똘(딸)은 연세대 대학원을 나왔고, 사위는 서울대 공대 나온 애야. 참 이런 세상이 와서 아이들 다 잘 크고예! 너무 뿌듯해요, 하하."
80년 넘게 해녀를 하고 이제는 은퇴한 김태삼(91) 할머니는 말했다. "젊을 땐 고무 옷이 없어서 물에 들면 추워가꼬 영영영영영영 막 털었거든(떨었거든). 그래도 물에 들어가 막 이리도 엎어지고, 저리도 엎어지고 소라 고것을 막 포구포구 엎어서 캐왔지개, 그걸로 번 것으로 우리 서 아이 공부시켰지. 우리 아들들은 다 수고(성산수산고등학교) 나오고 그중 하나는 제주대까지 나왔지게, 헤헤."
이렇듯 가족에게 삶을 내준 제주 해녀들은 물질을 나갈 때 입 모아 이런 노래를 부른다. 가사는 이렇다.
'이여싸 이어 이여싸/ 앵돌아진 섬에 삼시 굶엉 요물질 하영 요돈 벌엉 어느 형제간 대학이나 시킬 건가/ 이어도사나 이어싸 이여차이 저어라차/ 넘어야 가긴 잘 넘어가도 돌아오긴 만무하다/ 이여싸 이여싸 저어라 저어라차아….'
첫댓글 절박하고 애절한 해녀들의 이야기...환경에 순응하며 자신이 아닌 가족의 삶을 살기 위해 목숨을 거는 ...서글퍼지네요...어찌보면 위대하기도 하지만
해녀의 모습에서 모성과 전사를 느꼈다는 사진작가의 말이 공감되네요.
우도에서 만난 소녀해녀의 모습은 참으로 청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