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4일 [수난 성지 주일]
거룩한 교환: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시라는 증거
오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우리가 성체를 모시는 일과 같습니다.
종이에 성체가 피로 변해 스며든 카시아의 성체 기적처럼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스며드심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의로움을 입어 에덴동산에서 가죽옷을 입은 아담과 하와처럼 주님 앞에 설 수 있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27)라고 합니다.
마치 야곱이 이사악 앞에서 에사우의 옷을 입고
자신이 에사우라고 우기기만 하면 상속을 받게 된 것과 같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도 무언가 드려야 합니다. 성모님도 하느님을 잉태하시기 위해 신 인성을 드려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예루살렘 주민들이 자기 겉옷을 깐 이유와 같습니다.
겉옷은 그들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도 당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방법은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교부들은 이를 ‘거룩환 교환’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이사야서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5)에도 나와 있고, 신약의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1코린 8,9)에도 잘 표현됩니다.
가장 완전한 거룩한 교환은 성모 마리아에게서 실현되었습니다.
성 아타나시오는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가 하느님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육화론 54,3)라고
표현했고, 성무일도 제1권,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제1, 제2 저녁기도, 후렴 1에도
위 교부들의 신학을 받아들여 “감탄하올 교환이여, 창조주께서 육신을 취하시어 동정녀에게서 나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협력 없이 사람이 되셨으며, 우리를 그 신성에 참여케 하셨도다.”라고 노래합니다.
제가 본당신부를 하고 있을 때 한 청년이 희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을 고비에 있어
병자성사를 간 적이 있습니다.
바이러스 감염 환자의 모습을 처음 본 저는 조금 충격을 받았습니다.
온몸이 노란색이었고 얼굴은 부어 눈도 제대로 깜빡일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눈동자는 거의 흰자만 보였습니다.
그 청년에게 병자 성유를 바르는데 얼핏 바이러스가 저에게 옮기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살이 닿지 않으면 어떻게 성유를 바를 수 있겠습니까? 살이 닿으려면 상대의 바이러스가 내게 옮겨올 수 있음을 감수해야 합니다.
뭔가를 주려면 필연적으로 상대를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 거룩한 하느님께서 신성을 내어주시기 위해 인간의 인성을
받아들이신 것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좋아서 인간의 인성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뒤집어쓰시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께 우리 인성과 죄를 내어드리고 그분의 신성을 받아 하느님 앞에 의로운 모습으로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성당에 앉아 있을 때마다 십자가에서 저에게 푸르고 맑은 물과 같은 것이 들어오는 게 보였습니다.
또 저에게서는 똥과 같이 더러운 것이 예수님께 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것이 신학적으로는 ‘거룩한 교환’이라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거룩한 교환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상황은 부모와 자녀 사이입니다.
자신을 잔인하게 살해한 아들에게 “옷을 갈아입고 도망쳐라.”라고 하신 어머니나, 보험금을 노리고 자신을 교통사고로 죽이려 한 아들의 선처를 바라며 경찰서로 휠체어를 타고 찾아온 어머니를 보십시오.
저도 채변봉투를 재래식 화장실에 빠뜨렸을 때 아버지께서 그냥 아버지라는 이유로 손과 옷에 똥을 묻혀가며 그 봉투를 건져 올려주셨습니다. 저는 어떻게 생각해야겠습니까?
그분이 나의 아버지이심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알아보는 방법은 이 거룩한 교환의 방법밖에 없습니다.
어떤 회사에서 토요타 차량을 리콜하고 있다면 그 회사는 토요타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만든 것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집니다.
이제 십자가를 대하는 자세가 우리 구원을 결정합니다.
노아의 벌거벗은 모습을 비웃은 함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눈물의 겉옷으로 나의 모든 더러움을 짊어지신 분을 덮어드려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월24일 [성지주일]
복음: 마르 15,1-47
이런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목전에 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장면을 한번 보십시오.
그분께서는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갈 때 타고 들어갈 동물을 선택하시는데, 엄청 웃깁니다.
이제 마지막인데, 이왕이면 좀 있어 보이게, 코끼리 정도는 타고 들어가시면 참 좋았을 텐데.
코끼리가 아니라면 키 큰 낙타나 멋진 백마 정도는 괜찮았을텐데...
예수님께서 최종적으로 선택하신 동물은 어린 나귀였습니다.
나귀는 말과에 속하지만 그 모습이 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고 왜소합니다.
생긴 것도 생뚱맞습니다.
어린 나귀! 창조주 하느님의 외아들이요 만왕의 왕으로 오신 그분께서 타시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동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힘과 권세와 능력긍 겸비한 초강력 세속 왕권을 학수고대했던 예루살렘 사람들의
그릇된 기대감에 ‘빅 엿’ 하나를 제대로 먹이신 것입니다.
이처럼 그분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특유의 유머 감각을 마음껏 발휘하셨습니다.
인류 전체의 구원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머릿속에 명료하게 자리 잡고 있던
의식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의 마음을 따뜻이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들 사이로 내려가야 하고, 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대중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특유의 유머 감각을 바탕으로 가시는 곳마다 백성을 웃음의 도가니, 그리고 감동의 도가니로 빠져들게 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한없이 부족한 사람들과 마주 앉아 소주잔을 주고받는 메시아, 한잔 술에 기분이 좋아져 죄인인 인간들과 밤늦도록 어깨동무하고 노래 부르는 메시아,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메시아, 우리와 마주 앉아 썰렁한 아재 개그를 연발하시는 메시아...
우리의 하느님은 이처럼 따뜻하고 친근한 분이십니다.
우리와 멀찍이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라 키작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키를 낮추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낯설어할까 봐,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신 겸손의 메시아이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강론>
(2024. 3. 24.)(마르 11,1-10)
<성지 주일, 성주간>
“그들이 가서 보니, 과연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바깥 길 쪽으로 난 문 곁에 매여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것을 푸는데, 거기에 서 있던 이들 가운데 몇 사람이, ‘왜 그 어린 나귀를 푸는 거요?’ 하고 물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말하였더니
그들이 막지 않았다.
제자들은 그 어린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어 놓았다.
예수님께서 그 위에 올라앉으시자, 많은 이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또 어떤 이들은 들에서 잎이 많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깔았다.
그리고 앞서가는 이들과 뒤따라가는 이들이 외쳤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르 11,4-10)”
1)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그 행렬에 참가한 사람들의 수는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많은 이’ 라는 말이 루카복음에는 ‘제자들의 무리’로 표현되어 있습니다(루카 19,37).
‘제자들의 무리’는 사도들과 신자들을 가리키는데, 신자들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 행렬은 최고의회나 로마 당국에서 주목하지도 않았고, 관심을 갖지도 않았으니, 소규모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재판할 때, 예루살렘 입성 행렬은
전혀 언급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더라도 신앙인들에게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는 그 일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신 뒤에, 이 일이 예수님을 두고 성경에 기록되고 또 사람들이 그분께 그대로 해 드렸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었다(요한 12,16).”
2) 예루살렘 입성 때 예수님의 앞뒤에서 ‘호산나!’를 외쳤던 사람들이 나중에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서 예수님의 재판 때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라고 외친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입성 행렬에 참여한 사람들은 갈릴래아 사람들이고, 재판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한 자들은, 사제들의 부추김을 받은(마르 15,11) 예루살렘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입니다.
<물론 몇 명 정도는 배반자 유다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을 떠나서 박해자들 쪽으로 갔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수난 때의 상황을 보면,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고, 베드로 사도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고(마르 14,66-72), 다른 사도들은 모두 달아나서 숨어버렸고(마르 14,50), 신자들도 흩어져서 숨었거나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런 모습들이, ‘호산나!’를 외치다가 태도를 완전히 바꿔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라고 외친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긴 한데, 겁에 질려서 흩어져서 숨는 것과 배반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루카 22,31-32).”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신자들이 흩어진다는 것을 알고 계셨고, 베드로 사도가 세 번이나 당신을 부인하게 된다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모두 되돌아오게 된다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3) 우리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재현하는 전례를 거행하면서, 예수님 뒤를 잘 따르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성주간 전례를 통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고 재현하고 묵상하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고통과 헌신에 동참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성주간 예식이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는 생각 때문에, 성주간의 의미를 묵상하지 못하고 피곤함만 느끼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4) 예수님 수난의 끝은 죽음이 아니라 부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주간 전례도, 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전 과정도, 부활 신앙을 바탕으로 해서 바라보아야 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마치 예수님의 부활을 모르는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지나치게 감상(感傷)에 빠지는 것도 옳지 않고, 또 부활을 모르는 척 연기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5)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그 길을 그대로 걸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또 신앙생활은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생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 여정이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십자가의 길로만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고통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신앙의 핵심은 ‘부활 신앙’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기쁨의 생활’입니다.
십자가는 부활로 가는 과정이고 방법이기 때문에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도 ‘기쁜 일’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힘들어도 억지로 참는 생활이 아니라,
기쁨이 가득하기 때문에 힘들어도 힘든 줄 모르는 생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덕분에 구원받았다는 믿음, 또는 구원받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희망과 기쁨이 생기고, 그 희망과 기쁨은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갈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