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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강추)민들레 63호(최근호)에 실린 조한혜정 교수의 글;"창의적 인재가 사라져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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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적 인재가 사라져간다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이 글은 지난 6월 1일 열린 2008 서울청소년창의성 국제심포지움에서 발표한 내용을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haejoang@gmail.com">haejoang@gmail.com
왜 선진국에서 오히려 창의적 인재가 나오기 어려운가
지난 몇 십 년간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었던 것은 세계 곳곳에서 인재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잘 나가는 다국적 회사 요인들이 창의적 인재를 ‘잡으러’ 분주하게 세상을 누비고 다니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얼마 전 모 일간신문에는 “우리가 키운 어린 인재, 일본이 빼간다”는 타이틀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우수한 한국 인재들 중 바로 일본의 명문대학으로 가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것을 염려하는 내용의 기사였다. 사실상 급변하는 시대에 선진국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가 인력난을 겪고 있고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대학 차원의 인재유치 작전이 펼쳐지고 있다. 나는 최근 한국 사회의 변화를 보면서 이른바 선진국들이 왜 자기들 내부에서 인재를 길러내지 못하고 GNP가 낮은 나라에서 인재들을 수급하려고 하는지 골똘히 생각해보게 되었다. 외국에 나가 활약하는 졸업생 제자들을 보면서 나는 선진국에서 창의적이고 순발력 있으며 스케일이 큰 인재를 그렇게 많이 배출하지 못하는 것은 선진자본주의 체제의 속성과 일정하게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개인이 더 이상 어떤 공동체나 관계 속에 밀착되지 못하는 초경쟁적 상태에서는 창의적인 인재가 나오기 힘들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지난 30년간 대학에서 인재를 길러온 경험에 비추어볼 때 그런 인재들은 모든 것이 잘 짜여진 선진국이나 상류층에서 나오기보다 조금 혼란스러운 중진국이나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간 경험이 있는 계층에서 나올 가능성이 높았다. 완벽하게 짜여진 길을 가면서 계속 성공을 해온 이들 중에도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지만, 혼란의 경험을 해보지 않았거나 서로 돌보면서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감각이 없는 경우, 급변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질문을 던지면서 문제해결을 해가는 유연하고 창의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지는 않았다. 유럽의 최고 경영석학으로 소개된 인시아드 이브 도즈(Insead, Yves Doz) 경영학 교수는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는 한 신문의 인터뷰에서 ‘핵심 역량에만 집중하면 당하기 딱 좋은 시대’라고 말했는데, 단기적으로 핵심 역량을 키우는 데만 집중할 때는 ‘승리의 저주’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급변하는 시대에는 세 가지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는데, 하나는 변화무쌍한 트렌드를 읽어내는 감수성sensitivity, 두 번째는 공통의 목표를 향해 함께 열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집단에 대한 헌신collective commitments, 세 번째는 자원을 필요에 따라 재배치할 수 있는 자원유동성resource fluidity이다. 그런데 변화를 읽어내는 능력, 함께 같은 목표를 향해 일할 수 있는 열정을 가진 사람을 시장경제가 주도하는 고도 경쟁사회에서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물론 부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돈벌이에 열정적으로 매진하는 이들이 적지 않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돈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된 ‘카지노 자본주의’의 파탄을 예고하는 사건은 2008년 금융우기를 비롯하여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인문학자가 말하는 인재가 아니라 경영 쪽에서도 요구하는 인재, 곧 급변하는 시대 변화를 읽어내면서, 자신의 문제의식을 타인들과 소통해내면서 공공의 지혜를 모아낼 수 있고 자원을 적절히 재배치하는 능력까지 갖춘 인재는 어떻게 길러지는 것일까? 돌이켜보면 십 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인재들이 내가 다니는 대학 캠퍼스에는 아주 많았다. 그들은 협력하면서 동시에 경쟁할 줄 아는 창의적이고 실험정신을 가진 청년들이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그런 인재를 찾아보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내가 선진국의 인재양성 바탕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 것은 사실 이런 관찰에서 비롯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학생들은 더욱 많은 것을 알고 더욱 열심히 뭔가를 하는 것 같은데 사유의 폭은 선배들에 비해 턱없이 좁고 포용력과 소통능력이 떨어진다. 나는 90년대 학번 세대와 최근 학번 세대를 관찰하면서 어릴 때부터 경쟁을 철저하게 내면화하게 하는 환경에서는 그런 포용력 있는 인재가 나올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양육이나 교육 영역이 돌봄과 호혜성이 아닌 경쟁주의에 의해 장악되었을 때 더 이상 그런 인재가 나오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최근 전 세계가 글로벌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되면서 모든 영역에서 경쟁이 강화되고 있고 이런 상태로 간다면 인류는 창의적 인재의 고갈로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문제인식이 폭넓게 공유되고 있는 중이다. 오늘날 한국은 어느 사회보다 초고속으로 초경쟁사회를 만들어낸 사례에 속하고, 그 핵심에 교육현장이 놓여 있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라는 충격적 사건을 경험한 이후 급격하게 초경쟁 체제로 돌변한 한국 사회와 교육현장을 창의성이라는 주제와 연결시켜보고자 한다. 학생들이 ‘공공’과 사회적 관계에 대한 감각을 키워갈 수 있었던 80년대와 90년대, 그리고 오로지 ‘성공’이라는 상당히 시장적이고 경쟁적인 목표를 향해 올인하게 되는 2000년대를 비교하면서 교육현장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인지 밝혀보고자 한다. 공공에 대한 감각을 키우지 못한 상태에서, 사다리를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는 성공게임에 길들여지게 되면 주어진 일을 잘 수행하는 ‘중노동자’는 될 수 있지만, 창의성을 발휘하는 인재가 되기는 어렵다는 것이 이 세대 비교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점이다.
사교육시장이 장악하기 이전의 입시교육과 해방구로서의 대학
해방 이후 우리 국민은 ‘기회균등’의 원리가 실현되는 학교제도를 믿었고 그 기회균등이 보장된 ‘평등사회’에 산다는 믿음에 근거하며 온몸을 바쳐 돈을 벌고 자녀들의 교육에 돈과 정성을 투자하였다. 1980년대부터는 입시에 실패하여 자살하는 아이들이 생겨나면서 입시 위주의 교육을 바꾸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었지만, 동시에 여전히 학교의 핵심 기능은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기회균등의 장으로서의 ‘신성한 역할’을 수행해야 하였으므로 대학입시를 최상의 목표로 삼는 학교의 본질은 변화시켜내지 못했다. 모두가 열심히 하면 명문대학에 들어갈 수 있고 그를 통해 팔자를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은 한국의 대중사회를 활기차게 이끌어가는 에너지의 원천이고, 그런 맥락에서 자녀의 중고등학교 학업 성적은 한국인 부모들의 성적이기도 했다. 이 세대의 경우 대학만 가면 그때부터는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들어갈 여지가 있었고, 또한 그럴 의지도 있었다. 또한 가만히 관찰해보면 당시 아이들이 경쟁체제에서만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입시경쟁을 하지만 여전히 학교 안에서는 다양한 문예활동이 가능했고 학예회와 운동회가 기획되고 축제가 이루어지며 수많은 인간관계들과 신화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동시에 이들 세대는 전통적인 확대가족적 유대관계에 싸여 있었던 편이다. 이들 중에는 그 관계가 부담스러워 도망하고 싶어 한 이들도 적지 않지만 어쨌든 ‘덜 자본주의화된’ 교사와 이웃들에 의한 감시, 달리 말하면 관심과 유대와 돌봄의 공간이 존재했다. 특히 1980년대는 군부독재와 항거하는 와중에서 매우 개별화된 학생들도 대학에 입학하면 모두가 일정하게 국가와 공공에 대한 감각을 키워갔다. 이처럼 1980년대까지는 가족을 포함한 다양한 돌봄과 관심의 관계가 붕괴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부담스럽든 존경스럽든 애증관계의 선후배가 있었고 상호신뢰와 기대 관계가 풍성하게 존재했다. 이 점에서 2000년대 신자유주의적 체제에서 자란 학생들과 그 전 대학생들의 삶은 큰 차이를 보인다. 사오 년 전까지만 해도 대학생들은 대학을 해방구로 생각하고 입학을 하자마자 내내 몰려다니면서 술을 마시고 밤새 토론을 하고 2학년이 되면 배낭여행을 떠나거나 밴드 활동을 하거나 농활을 갔다.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적 개체로서 스스로 서기 위한 방황과 실험을 하는 시기를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대학생들은 전공수업을 따라가기 위해 선행학습을 하기 시작하고 이런 것이 별로 놀랍지 않은 일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이런 변화가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다. 1996년 GNP 일만 달러를 기록하게 되고 본격적인 소비자본주의 단계로 진입하면서 대학생들도 선후배 관계나 전통적 가족 관계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방’을 갖게 되었고, 특히 온라인과 휴대폰을 갖게 되면서 선배들과는 다른 관계망을 만들거나 개인화되어갔다. 이들은 개개인인 존중되는 시민사회를 만들어내고 싶어 했으며 동시에 대중문화의 주체로서 자기표현 욕구를 표출하면서 같은 세대 간의 연대를 도모하기도 하였다. 2002년 월드컵 축제나 미군 장갑차에 치어 죽은 두 여고생을 기리는 촛불집회 등 다양한 문화적 저항 행사들은 이런 세대가 적극 참여했던 행사들이며, 다양한 온라인, 오프라인 행사와 참여의 장은 이 세대를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세대로 키워냈다. ‘서태지 세대’라거나 ‘N세대’ 등으로 불리는 이 세대는 한국 역사에서 상당히 창의적인 삶을 살아간 ‘문화 세대’라 할 수 있다. 세계 곳곳을 탐사하고 혼자 여행하는 것이 유행이었던 그 세대 청년들은 이제 30대가 되어서 세계 여러 곳에서 호기심 많은 문화적이고 창의적인 인재로서 실력발휘를 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변화의 이면에서는 다시 경제우선적 질서로의 이행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는 1997년 IMF 구제금융을 받게 되어 국가가 파산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이다.
입시 전쟁의 중고생들 _ 선행학습과 매니저맘
현재 사교육 중심으로 재편된 교육현장은 1997년 일차 경제위기 와중에 극도로 불안해진 어른들, 특히 어머니들과 ‘교육의 상품화에 주력한 시장의 합작품이다. 더 이상 학교에 아이를 맡길 수 없다는 판단, 특히 앞으로 다가올 세상은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세상일 것이고 자녀를 그런 체제에서 살아남게 하는 것이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한 자기주도적이고 현실적인 어머니들이 그런 체제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믿을 것은 나밖에 없다”면서 각개전투로 자녀의 앞길을 위해 발 벗고 나섰고, 자신이 가진 모든 여유분의 돈을 사교육 시장에 지불하면서 자녀의 미래를 위해 ‘투자’하기 시작했다. 성공지향적인 고학력 가정주부 어머니들이 이 새로운 트렌드를 주도했다. 맞벌이 부부들은 직장을 그만두고 싶어도 자녀교육비를 대기 위해 직장을 계속 다녀야 했고 가정주부도 자녀 학원비를 대기 위해 재취업을 시도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로서 입시를 위한 경쟁은 단순히 노력만이 아니라 돈의 게임판이 되었고 불안해진 어머니들은 거대하게 굴러가는 사교육 시장판에 자녀를 맡길 수밖에 없게 되었다. 시장이 맡아 키운 2000년 이후 청소년들은 학교보다 학원에서 더 정을 붙이면서 자란 서비스 산업이 키운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을 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아이들’이라고 부르는데, 그들의 학습체험은 ‘선행학습’과 ‘매니저 엄마’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아이들을 해외에 데리고 나가 교육을 시키는 ‘기러기 가족’ 현상, 갓난아이 때부터 자녀를 ‘성공하는 인재’ 또는 ‘명품인재’로 키우기 위한 ‘매니저 엄마’들의 활약은 한국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현상이기도 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주관하는 국제학력평가(PISA)에서 한국은 57개국 중 1, 2위를 기록하는 한편, 막상 공부에 대한 흥미도와 학습동기 면에서는 평균을 밑돈다는 결과나 2009년 유네스코 조사에서 한국의 청소년들의 행복지수가 가장 낮게 나온 결과는 한국의 교육계의 복잡한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지표일 것이다. 그러면 과외를 받으면서 학습한 학생들의 특수성은 무엇일까? 얼마 전까지 학원에 다니는 것은 대학입시에 실패해서 재수학원에 다니거나, 부족한 과목을 보충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과외를 하는 것은 ‘선행학습’을 하기 위해서 가는 것으로 되었다. 선행학습은 학교 수업을 하기 전에 미리 진도를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체제는 학교교육 자체를 무력화시킬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불공정 게임이 된다. 학교가 가진 공공성의 마지막 보루를 허물어버리는 체제이다. 학원에 가지 않는 학생들은 학원공부를 전제로 한 진도를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과외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체계적으로 방치되고 탈락하게 된다. 이런 상황으로 나간다면 사실상 공교육은 존재할 필요가 없으며, 기회균등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 한국사회에서 공교육이 붕괴하면 국가 자체, 전반적 공공영역 자체가 붕괴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선행학습에 따른 기회균등 신화가 깨지고 있고, 불평등의 재생산 문제가 제기되고 있지만 그보다도 각개전투를 하는 부모들은 이 문제를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일 여유가 없어 보인다. 나는 선행학습으로 야기되는 불평등의 재생산 문제에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는 선행학습을 통한 경쟁이 창의적이고 자기주도적인 학습능력을 퇴화시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선행학습’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은 한발 앞서서 배우는 것을 공부를 늘 ‘진도’가 있는 공부에 국한시키고, 누군가 미리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을 상정한다. 단기적인 효과가 나야 하는 것도 선행학습을 통한 학습의 특징 중 하나이다. 학원이나 과외교사로부터 선행학습을 하면서 성적관리를 해온 학생은 그 체제에서 벗어나는 공부를 하기 힘들어하고 시간 낭비라 생각되는 일에 집중을 하지 못하게 된다. 주어진 교과과정 안에서 얼마나 빨리 문제를 푸는지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스스로 문제를 파악하고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능력은 아예 길러지지 않는다. 이들은 오랜 시간 입시준비와 내신성적 관리를 위한 ‘중노동자’로서, 해답을 찾는 탁월한 기술은 배웠지만 불확실한 상황에 들어서면 속수무책이 되어버린다. 앞서 언급한 이브 도즈 교수의 표현을 빌린다면 ‘핵심역량’에 집중하여 대학입시에는 성공하였을 수는 있지만 다음 단계에서는 실패할 확률이 높다.
취업 경쟁에 놓인 대학생들_스펙과 엄친아
그런데 마침 이들이 들어간 대학은 신자유주의적 전환 속에서 그들이 십 년 동안 해온 선행학습 비슷한 공부를 하는 취업준비의 장으로 변화해가고 있다. 고실업 불안정 고용시대에 대한 불안이 깊어지면서 대학은 취업에 유리한 전공을 공부하는 경쟁의 장이 되고 있고, 선행학습에 길들여진 학생들은 그 취업준비 현장에 매니저 엄마와 학원의 지원을 받으며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대학은 이제 해방구가 아니라 ‘고3’의 연장선에서 고4, 고5학년들이 다니는 치열한 경쟁의 장이 되었다. 이들은 고실업 시대의 불안 속에서 취업을 위한 서류 전형에 필요한 자격을 마련하는 선행학습을 체계적으로 하기 시작한 것이고, 이 일련의 경쟁적 준비과정을 ‘스펙 관리’라고 부른다. ‘스펙’이란 specification의 준말로 ‘전자기기의 성능이나 사양’을 뜻하는 단어이다. 이제는 대학입학이 아니라 취업을 목표로 선행학습에 길들여진 대학생들은 시간표를 빡빡하게 짜고 학점, 영어 성적, 인턴십 경력, 자격증 관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기계발서를 열심히 읽고, 자신이 경쟁사회에서 한 줄로 세울 때 어디쯤 속하는지를 가늠하면서 단계별 목표를 세우고 경쟁체제로 돌입했다. 대학에 들어와서 그간의 입시위주 교육에서 못했던 활동을 하면서 그 시간을 보상하라는 듯 활발한 문화활동과 새로운 경험을 하던 선배세대와는 아주 대조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은 당연히 인생관에서나 태도 면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이 청년세대의 삶을 잘 표현하는 단어 중 하나가 ‘엄친아’인데, ‘엄마친구의 아들’ 줄임말이다. 어머니들이 자녀를 매니징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친구 중 성공한 자녀의 예를 들면서 자기 자녀를 자극하는 행동에서 나온 말인데, 실은 자녀의 기를 죽이는 효과를 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한 어머니들의 기대감은 매우 높아서 자녀가 0.1%의 글로벌 인재가 되기를 바라기도 하고 실제 많은 학원 광고에서는 ‘전 세계를 무대로 재능을 마음껏 펼칠’ ‘0.1%의 글로벌 리더’로 키우라고 부추기기도 한다. 그 0.1%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아이비리그 대학을 나와서 수학의 수재로 인정을 받아 월가 트레이더로 일하면서 높은 연봉을 받는 ‘엄친아’도 있고, 알파걸로서 세계무대를 누비려는 야심찬 엄친딸도 있다. 어떤 면에서 이들은 어릴 때부터 협력의 관계나 공공에 대한 감각을 키울 겨를도 없이 어머니와 과외교사, 또는 학원교사의 선도 아래 학업 경쟁을 해온 이들이다, 어머니와 친밀한 동반자 관계를 맺게 된 대신 친구나 동료들과 동반자적 동료관계를 잘 맺지 않는 편이다. 신자유주의적 경쟁상황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경쟁을 거의 본능적으로 내면화하고 있어서 주어진 상황에는 매우 빠르게 적응하지만, 낯선 상황에서의 수행능력은 아주 약하다. 그리고 이들은 계속 바쁘게 ‘중노동’을 해야 하며, 계속 허겁지겁 해야 할 일을 해치우며 사는 데 익숙하다. 창의적 질문을 던질 시간도 욕구도 없다. 이를 문화정치학적으로 살펴보면, 일단 선행학습을 통한 경쟁은 공평한 게임이 아니다. 결국 우월한 종자들 곧 ‘할아버지의 재력과 엄마의 정보력, 신의 체력’을 갖춘 이들이 이기게 되어 있고, 상대적 지원의 격차에 따라 줄이 세워진다. 대학입시나 고시처럼 어떤 유형의 문제가 나올지 이미 알고 있는 게임에서는 선행학습이 통하지만 인생 전체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진도’를 다 나간 후에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상황에 놓일 가능성이 높다. 선행학습과 근시안적인 스펙 쌓기로 ‘한 줄 서기’ 게임에 몰두한다면 이들은 언젠가는 탈락을 하게 되어 있고 이를 간파한 청년들은 스스로를 ‘찌질이’라고 부르면서 아예 개임을 포기하는 자기 방어를 하기 시작했다. 결국 30세에 정품 인생(정규직)이 되기 위해 극심한 중노동을 하면서 스스로를 단련하는 괴물 같은 존재가 되어가거나, 또는 자신이 0.1%의 명품 인재가 될 조건을 갖추었는지를 따져본 뒤 일찌감치 그 게임을 포기하면서 ‘아무 것도 하기 싫은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세대에게 ‘창의적이 되라’거나 ‘프로젝트를 하라’는 말은 또 하나의 노동이고, 부담일 뿐이다. 이런 구조를 보지 못하는 부모들은 자신들이 전격적으로 투자한 자녀를 포기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이 자신의 마음에 차지 않는 직장에 취업을 한 경우, ‘고시를 하라’고 명하기도 한다. 스폰서인 부모의 힘이 막강해진 것이고, 그의 기대를 낮추기는 쉽지 않다. 반면 그런 스폰서를 갖지 못한 자녀는 상대적 박탈감에, 제대로 스폰서가 되어주지 못하는 부모는 자격지심에 시달리게 된다. 이것은 모두 상대적인 것이므로 사실상 대한민국의 대학생 다수가 자신의 스펙이 모자란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계속 선행학습식 준비를 하는 중이다. 현재 신림동형 라이프스타일로 ‘고시공부 중’에 있거나 뭔가를 준비하며 ‘방살이’를 하고 있는 청년들은 바로 이런 구조가 양산한 청년인구이다. 부모의 재력에 따라 꽤 풍요로운 아파트에서 지내는 이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두세 평 정도의 고시방에서 고립하여 지내고 있다. 어릴 때부터 입시 준비생이었던 이들은 정신없이 바쁘거나, 실질적 효용성이 없어도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 영어공부에 몰두하기도 한다. 영리한 모녀는 취업 준비 대신 취집 준비를 위한 스펙을 쌓아서 결혼에 성공하기도 한다. 과외학원 대신 결혼정보센터에 의존하면서 ‘시집가기 위한 작전’에 들어가는 것이다. 고된 입시와 취업 전쟁을 통해 성공하는 이들도 있지만 다수는 어느 시점에 경쟁게임을 포기하거나 무기력증을 앓고 있고, 대한민국은 점점 ‘고시폐인’과 ‘히키코모리’들의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열심히 경쟁하던 이들도 어느 시점에 자발적 비자발적 히키코모리가 되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남자들은 한두 번의 연애 후에 ‘애인의 기분을 맞추려는 감정노동’이 너무 힘들다면서 ‘연애 태업’에 들어가거나 연애할 시간은 없고 섹스 파트너만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결혼해서 어른들 비위 맞추고 신경 쓸 것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고 결혼 파업을 하기도 한다. 참고로 한국은 지금 OECD 국가 중에서 출산률이 1.13명으로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점은 이런 체제에서 성장한 청소년들은 막상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전망이 불안해지면 자신감을 잃게 되면서 더욱더 부모세대에 의존하게 된다는 점이다.
창의적이고 자기주도적인 아이들을 키워낼 학습생태계
이 체제 이전 세대도 불합리한 입시체제에서 경쟁을 했지만 80학번 학생들은 대가족 안에서 성장하면서, 또한 대학에 들어와서 반독재 투쟁을 하면서 사회와 공공에 대한 감각을 길러갔다. 90학번 학생들 역시 그나마 공평한 입시경쟁을 하면서 인터넷을 통해 새로운 문화공간을 열어가고 개개인이 존중되는 문화시민의 시대를 열어가기 위한 활동에 참여하였다. 그들의 경쟁은 무한경쟁은 아니었고 무엇보다 그 당시는 돌봄이 순환되는 체제였다. 자발적 소통이 있었고, 불만족스러울 때는 대안을 논하는 시공간들이 열려 있었다. 그들이 경쟁에 지친 몸으로 대학에 들어왔을 때 맞아주는 선배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서로 치열하게 몸으로 부딪치면서 서로를 돌보며 협동학습을 하고 사회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외국 어디에 나가서도 당당하게 자기 몫을 하는 인재로 활약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이 글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세대는 그 이후의 세대이다. 어릴 때부터 선행학습을 통해 무한경쟁을 내면화한 신자유주의 세대, 탈락의 공포 속에서 ‘일 중독증 환자’가 된 세대에 대해 생각할 때가 되었다. 본원적으로 승자 패자도 없고 패자부활전도 없는 전쟁터에서 선행학습을 통해 대학을 들어가고 단기적 스팩 전쟁을 치루면서 ‘성공지향적 일중독자’가 된 청년들, 아니면 아무 것도 하기 싫은 ‘떡실신 인재’들을 양산해내는 교육현장을 바꾸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지금의 문제는 돌봄의 총량이 부족한 데 있다. 탈락의 공포감 속에서 어머니들은 이제 더 이상 돌봄의 주체가 아니라 자녀를 도구적으로 매니징하는 매니저가 되어버렸다. 주변의 할머니도 바쁜 세상에서 더 이상 손주를 봐주기 어렵다고 통고하는 개별화된 세상이 되어버렸다. 예전에는 이웃에서 어려움에 처한 동네 아이를 보살폈는데 이제는 아이를 성추행할지 모르는 이웃 아저씨들이 두려워 아이는 동네에서 놀지도 못한다. 이 세대의 교육에 관심을 가진 이들은 이제 아이들에게 최고의 ‘교육적 자극’을 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아이가 안전하고 즐겁게 지낸 환경을 마련해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대안교육에 대해 이야기를 해본다면 그간 대안교육 현장의 교사들은 제도권 학교에서 벗어난 아이들을 잘 키워보려고 마치 매니저 맘처럼 보호하고 기획하면서 키워보려고 했다. 그래서 세 명의 아이를 마치 매니저맘이 하듯 알뜰하게 돌보는 식으로 키우고 싶어 했던 편이다. 그간 대안교육에서 이야기해온 자기주도학습, 협동학습, 인턴십, 정보사회의 디지털 리터러시 등은 여전히 유효한 교육의 방향이고 방법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나는 아이들이 사랑을 주고받는 시공간을 마련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사들은 품 안의 자식을 보호하면서 스펙을 잘 쌓게 도와줄 것이 아니라 먼저 많은 덕을 쌓아야 한다고 본다. 아이들과 함께 상호 돌봄을 주고받는 ‘사회’를 마련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도적이고 기획적인 학습의 장 이전에 아이들에게 필요한 사회관계와 학습망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아이들에게는 절대적인 신뢰에 바탕을 둔 일차적 관계가 필요하고, 서로 관심을 공유하면서 맺어가는 이차관계도 필요하며, 보편적인 가치에 기반한 보다 큰 ‘사회’도 필요하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 세 차원의 사회 안에서 자기를 형성해간다. 이 모델은 개별적 주체와 국가라는 두 개의 개체만을 남기는 ‘근대적 체제’를 넘어서는 것을 말한다. 오히려 자본주의 이전의 마을, 교회, 친족과 같은 모델을 생각할 때 더 쉽게 모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때의 아이는 돌봄을 받는 대상이 아니다. 돌봄을 주고받는 주체이다. 중학생이 되면 그는 주변의 유치원에 가서 동생들과 놀아줄 수 있을 것이며, 동네 독거노인의 말벗이 되어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소통의 능력이고 자신이 무엇인가를 주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공부를 의무이고 경쟁이고 부담이 되어버리고 있는 시대에 공부를 자기를 살려내는 경험으로부터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꽃을 키우고 농작물을 키우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소통하는 마음, 그리고 능력을 갖게 하는 것이 교육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최고의 기획자 교사는 그래서 이 시대에는 오히려 위험하다. 아이들을 무작정 가엾게 여기고 껴안고 있는 교사 역시 위험한 교사이다. 이십 년 전 아이들이 성적을 비관해서 자살했다면 이제는 기댈 곳이 없어진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 이들은 살리는 것은 기댈 곳을 찾아주는 것일까? 돌봄이 파탄이 난 세상에서 그것이 그렇게 쉽게 가능할까? 돌봄의 총량이 턱없이 부족해진 사회에서 교육자가 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상상력을 요구한다. 경쟁을 내면화시킨 우리 자신, 성과주의에 빠진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이 그 시작일 것이다. 목격자도 사건을 구성하는 일부이듯, 우리 자신들 역시 스스로 원했든 그렇지 않든 신자유주의 체제의 일부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편에서는 ‘승자독식 인재’를 만들어가겠다며 엘리트 학교들이 만들어지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체제에서 이탈한 아이들을 돌보는 복지공간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나마 지난 십 년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던 대안교육이라는 단어는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신선할 수 없게 되었다. 제도권 학교와 대안학교의 구분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구분 역시 별로 분명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모든 곳이 경쟁과 시장의 논리에 포섭되어버렸고 돌봄체계가 파탄나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어져 버렸다. 이제 교육은 ‘공포의 정치학’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의 첫 단계는 돌봄의 소통적 관계의 회복일 것이다. 같은 생각을 가진 동료를 갖게 되는 것, 자발적 소통이 가능한 ‘사회적 관계’의 수가 중요하다. 2백여 년 전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표현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도래를 예고했지만, 낸시 풀브레는『보이지 않는 가슴: 돌봄 경제학』이라는 책을 통해 가시적인 세상, 특히 돈의 순환체제만을 보아온 시선의 편협성을 비판하고 있다. 사회의 존속에 필수불가결한 영역들, 그간 미처 고려에 넣지 못했던 호혜적 관계와 돌봄의 영역의 회복이 곧 교육현장을 회복하는 길이다. ‘돈의 순환체계’를 사회 전부라고 생각한 오류, 특히 ‘돌봄의 순환체계’를 간과한 극심한 불균형이 현 인류를 종말적 위기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 다음 세대를 길러가는 것은 시간의 차원을 간과할 수 없는 작업이다. 다양하고 지속적인 관계가 이루어지는 곳, 이런 곳이 곧 학교여야 하고 돌봄의 총량이 부족한 현 단계에서 학교는 상호 돌봄의 능력을 키우는 곳이어야 한다. 창의성의 고갈 역시 돈이 돌봄의 세상을 억압해버린 불균형에서 비롯된다. 창의적인 생각은 공포에 질린 상태에서는 나올 수 없다. 그것은 상호 신뢰하는 소통적 관계성 안에서 터져 나오는 지혜이며, 비약적 문제해결 능력이다. 상호작용 과정이 두려움이 된 사회에서는 창의성이 나올 수가 없다. 청소년들이 창의적인 삶을 살 수 있고, 청년들이 창의적인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내는 도시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돌봄의 순환체계가 제대로 가동되어야 한다. ‘우리’에 대한 감각이 살아나고 상호 애정과 존경을 갖는 관계가 맺어지는 토양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이지만 동시에 이타적이고 공동체적인 지혜를 지닌 존재이다. 함께 상생하는 길을 모색하는 재능을 가졌기에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살아왔다. 이제는 다시 그 능력을 회복해가는 새로운 사이클을 만들어가야 한다. 각자 몸에 맞는 창조적 공공영역, 학습생태계를 찾아내고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생태계는 다양성과 유연성을 바탕으로 진화한다. 현재 한국에서 만들어진 경쟁일변도의 교육판은 모두를 한 줄로 세워 경쟁을 시키면서 다양성을 소멸시켜버리고 있다. 현재 국가는 유일하게 시장과 맞서는 힘을 가진 공동체적 기구이다. 공공에 대한 감각을 키우는 일, ‘돌봄의 순환체계’가 막혀버리지 않고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는 것은 돈의 순환체계를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는 일 못지않게 국가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 시장의 논리로 성과와 효율을 강조하고 전략을 이야기하면서 통계 지표로 교육계를 관리하려 한다면 결국 국가는 존재기반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경쟁적 자본주의의 근대가 이 방향으로 가는 것을 간파한 푸코(1998)는 ‘소수를 살게 하고 다수는 죽게 내버려두는 사태’에 대해 경고한 바 있다. ‘예외를 살게 하고 다수를 죽게 내버려두는 체제’를 바꾸어내는 일, 이것이 교육자들이 앞서서 해야 할 일이다. |
출처 :강남송파강동중등대안학교설립준비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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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준비일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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