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2광주비엔날레에서 정연두는 춤추는 방을 꾸미고, 실제 그곳에서 춤을 췄다. '심플'한 게 아니라 좀 '맬랑꼬리'한... 꼬리꼬리한 노래들, 복색, 사람들.... 그리고 나는 한장의 사진을 생각한다. 5회 카셀도큐멘타를 맡았건 하랄트 제만이 아마 전시장 주변 바당에 춤을 출 때, 생기는 스텝 발자욱을 만들어놓고, 그가 직접 거기 서서 어색한 춤을 추는 모습이다. 이 글을 읽는 동안 여러분들도 그 정연두 식의 춤을 생각하시길 부탁드린다. 뽕짝 스타일. 바람난 여자가 젊은 춤선생과 함께 추는 춤. 오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는? '태어난 곳도 살아온 것도 묻지 마세요.... 그냥, 이렇게 행복하게 춤을 춰요' 하는 식의 리듬과 가사를...
20세기는 그렇게 그가 춤을 춘 걸까? 그 춤을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존경하거나, 조롱하거나 비웃거나, 타파하려고 할까? 시간이 지나면서 말이다.
무엇이 그분을 그렇게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목하게 했을까? 그의 전시들? 태도? 개념들? 모르겠다. 제만은 많은 사람들이 말을 하지만, 사실 난 그의 텍스트들을 거의 읽어보지 못했다. 얼마 전에 큐레이터들의 작업을 소개한 책에서 제만이 소개된 것 같구... 그리고, 나에게는 그분이 광주에서 했던 말, 행동들이 기억난다.
그리고, 난 적고 싶다. 그분에 대해. 그분의 작업조차 전혀 모르는, 그분의 일생에 광주는 그저 한번의 전시로 스쳐 지나간 '바람'이었겠지만, 또 나는 미술이라고는 순전히 어깨 너머로 훔쳐본 것 밖에 없지만, 챙피를 무릅쓰고 적어보려 한다.몇가지 기억들을...
(최진욱 선생님, 또 관찰자, 어쩌고 저쩌고 호령하시며 옳고 그름에 대해 토론하자, 모노크롬화에 대해 토론하시자고 하면, 저는 그런 모노크롬 잘 알지도 못하고, 옳고 그름도 잘 얘기 못해요. 그냥 말을 붙여보고 싶어서 이렇게 써요)
우리는 그분을 '할배'라고 불렀다. 아주 경망스러운 표현인지 모르겠다. 그것은, 함께 일했던 나의 친구 유에스더가, 내가 그를 부를 때, 자주 한국식으로다가 선생님 선생님 그러니까 보기민망한 그가 이렇게 부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할배...
그분을 이야기 할 때, 나는 에스더가 함께 기억난다. 올해 나보다 한살 아래인 그는, 어려서 아빠를 따라 캐나다로 가 토론토에서 인류학을 전공하고, 그곳 토론토에서의 문화활동과 관련한 연이 있어 이곳 광주로 왔다. 그리고 그는 97광주비엔날레에서 하랄트 제만의 전시 - '속도 speed'전 코디네이터로 일했다.
(그가 광주비엔날레에서 일한 것, 그때 스텝들의 이야기는, 그러니까 그런 것들은 에피소드들인데, 그런 것들은 너무 슬프고, 힘들고, 재밌기도 하다. 암튼 그는 그만 둔 뒤로로 일을 많이 도와줬다. 그리고... 2002 광주비엔날레 도록을 만들 때, 당시 독일의 한 레지던스프로그램에 참여중이던 그의 친구 핼렌(영화를 만드는), 페티걸이라는 노래를 불렀던... 그가 번역은 물론 일정을 미뤄두고 텍스트들을 만들기 위해 직접 광주에 왔고, 나는 그때 사경을 헤메고 있었고, 그리고 헬렌은 할 일이 없어 놀다가 갔고... 이런 거 생각하면 너무 화난다. 독일에서 만사 제쳐두고 여기까지 왔는데, 후한루는 커미셔너니까 모시고 다니고, 헬렌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녀의 동생 셀리도 토론토에서 이메일로 번역을 해줬다. 토론토에서 생태영화제 일을 하는...)
그녀는 영어를 모국어처럼 잘 하지만, 오히려 한국어에는 서툴러 바쁜 와중에도 이 말이 무슨 뜻이냐고 곧잘 물어왔다. 그리고 그는 일상에서 말을 할 때도 어눌한 말투로 한국말을 주로 썼지만, 우리말을 잘 못했기 때문에 영어단어를 섞어 쓰면, 그는 늘 미안한 표정을 짓곤 했다.
암튼 그가 코디네이터가 되었을 때, 97광주비엔날레 스텝들은 정말 열의에 차 있었고, 많은 이야기들을 했고, 격한 말다툼도 많이 했다. 사무실에 야구 방망이를 세워뒀고, 나 안 알아주고 무시한다고 한판 붙자고 화장실로 가지를 않았나, 심지어 나는 일을 오해해 광주비엔날레 현관에 있는 간판격인, 조명을 비춰 곱게 모신 포스터를 떼서 바닥에 패댕이쳐버리기도 했다. '이딴 비엔날레 없애버려야 한다'는 만용어린 말과 함께... (너무 부끄럽다. 그분들에게)
그분이 커미셔너가 된 건, 아마 당시 디렉터역을 맡았던 이영철 선생의 전략, 그리고 각고의 노력 덕분이었지만, 그분이 커미셔너를 수락한 건 쉽지 않았다. 그분을 커미셔너로 모시자고 했을 때, 이미 그분은 5-6개의 그해에 할 다른 크고작은 전시들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갑자기... 아마 그런 분들이 우리를 본다면, 역시 한국은 아침 일찍 일어나 새벽별을 보며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하며 서두른 결과 자본주의화에 성공했고, 아시아의 네마리 용이 되었고, OECD 회원국가가 되었듯이, 미술 일도 이렇게 전광석화처럼 한다고 할 것이다) 부탁했는데, 그분은 거부했다. 그래서 우리는 스위스 베른의 그의 '공장'으로 직접 찾아가 참여를 부탁했다. 그래도 반승낙 정도였다.
그런데, 나는 사정을 잘 모르는데, 후에 함께 일한 어느 분이 그랬다. 에스더의 그 친절한 말투, 진솔함, 펙스가 결정적으로 그분이 우리의 전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그분은 아무리 별 볼 일 없는 광주의 한 아가씨가 전화를 걸어도, 결코 재거나 거들먹거리거나 빈정거리지 않았다. 그분은 그랬다. 그러니까 에스더에게 그분은 할아버지였고, 촌놈인 나에게는 할배였다. 언젠가 그분이 광주에 오셨을 때, 어느 허름한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으며 에스더는 내게 선생이 뭐냐? 할아버지라고 불러라, 그리고 내가 아예 컨츄리스타일로다가 '할배'라고 부르겠다고 하자 그분은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시인이라고 불어줬다. 국밥국물이 그의 긴 수염에 흘러내렸고, 그것을 쓰다듬으며, 그는 손가락을 치켜올려주며 웃으셨다. 68혁명에 대한 미술적 화답이라는 '태도가 형태로 될 때 When Attitudes Become Form'처럼.
(뒤에 또 그분이 광주에 왔을 때, 그분은 나에게 뭘 하느냐고 물어오셔서, 시는 작파했고 미술비평, 미학 관련 책들을 읽는다고 하니까, 시를 열심히 쓰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리고 그런 말은 내가 영어를 잘 못하기 때문에 아주 간단간단하게 말하곤 했다. 아무튼 그분은 나에게 시를 쓰길 권했다. 하지만 난 지금도 10년째 시를 쓰지 못하는, 그래도 한번 시인이면 시인인, 지방의 무명 시인이다)
내가 그분에게 말을 할 수 있는 건, 아무 '무식하게' 대충대중 이런저런 말을 생각 없이, 대범하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할배는 이 단순무식한 '컨츄리보이'(할배가 그랬다. 실제 나는 촌놈이고, 전남대학을 우리는 자조섞인 말로 촌놈 cheonnam 대학교라 한다)에게 소상하게 설명해줬다. 때로는 영어 단어를 알려줘가면서...
광주의 거리를 지나치며 도시공간의 중요성을 말씀하실 때에도, 저런 것을 눈여겨 보라고 하시고, 차를 타고 보길도에 가다가 중간에 노점에서 파는 배를 보고 저게 뭐냐고 사먹어보자고 해서 그 배맛을 보시면서, 영산포과, 홍어와 처녀총각의 사랑과 죽음이 깃든 절벽을 보면서도, 복암리고분을 보면서도, 내가 태어난 시골마을 앞길(강진만)을 지나치면서도... 그분은 이런저런 말씀을 정말 많이 했다. 할매, 그 잉게보르그 뤼셔와 함께 애들처럼 낄낄거리고 웃으면서...
그분은 아마 97광주비엔날레 커며셔너회의를 하면서, 그 회의는 기억에 아마 비용을 아끼려 2박3일간에 '전광석화'처럼 급작스럽게 열었었는데, 그날의 심야회의에서 그분은 회의탁자에 앉은 채, 줄담배를 뻐금거리고, 또 깡소주를 안주도 없이 거푸 두병인가를 병나발을 부셨다.
할배는 정말 열심히, 칠판에 개념들을 메모해가며 정말 열성적으로 말씀하셨다. (진행자료, 도록, 텍스트와 이미지들, 사진들도 찾아봐야겠다. 요셉보이스의 '칠판'도 '작품'이던데...) 그리고 나는 정말 입이 쩍 벌어져, 그리고 또 한편으로 온몸이 굳도록 긴장해 그 회의를 했다. 그때 아마 내가 맡았던 일은, 말들을 노트북으로 옮겨 적는 것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중요한 회의를 나같은 얼치기 미술가가 독수리타법으로 기록했으니까... (우리 일은 항상 그랬다)
거기엔 범생이 같은 LA현대미술관의 리처드 코샬렉, B급 날라리, 섹슈얼에 대해 무지 관심이 많은 파리의 베르나르 마카데, 의욕 많은 한국의 성완경, 뉴욕의 아방가르디스트 박경이 있었지만, 모두들 아마 마음들은 콩밭에 가 있었지 않을까? 할배의 강의같은 말에 대화는 너무 간단 했다. 그 말 없음은 할배로 하여금 깡소주를 마시게 했지 않을까? '과정'이 배제된 욕망들... 그리고 우리는, 그리고 참석했던 모든 분들도 어쩔 수 없이, 돈과, 참여작가들과 공간구성, 일정 등에 관한 '실무적인'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그 민망함이란...
할배가 하시는 일들은 에스더를 정말 편하게 했다. 다른 면에서 그분은 에프엠이었다. 바빴지만, 딱딱 시간에 맞춰 일을 진행해주셨고, 보내오는 펙스들은(그때 우리는 이메일을 사용하지 않고 펙스를 사용했다. 그 이메일만 있었다면... 그러면 에스더가 밤 늦게 전화와 펙스를 기다리며 밤을 세우는 수고를 덜었을텐데...) 너무너무 소상했다. 물건 하나하나가 어떻게 생겼다고 스케치를 해서 보내오셨고, 예를 들어 꼭 그런 재질과 크기의 못이 없다고 하면, 그 못의 사용목적이 뭔데, 그 목적에 맞도록 에스더가 여기 실정에 맞게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미술에 비전공인 나에게는, 또 에스더에게는 당신의 공간구성에 대한 개념들과 하나하나의 작품을 아주 간단간단하게 알기 쉽게 설명해줬고, 여러가지 방식으로 이해를 도와주셨다. 그분은 하나하나씩의 작품에 대해 손수 스케치를 그리고, 또 간단간단한 메모들을 덧붙이는 걸 잊지 않으셨다.
아마 그의 전시장 서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기상현상에 대한 과학자 간은 분석적 형식의 스케치와, 광주의 정원 소쇄원도를 - 그것은 소쇄원도라는 한국화를 복각해 찍어낸 판화였다. 같이 걸어놓은 것이었다. 동서의 비교랄까?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 다빈치의 시점은 하나 뿐이지만, 한국화의 시점은 다빈치 처럼도 보고, 하늘에서도 보고, 옆에서도 보는 것인데, 나는 실제 그것을 봤다. 소쇄원 입구 개울에 놓인 나무다리 위에서 나는 발 밑의 물 위에 비추는 하늘을 봤다는 식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 말들과 보내온 펙스와,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너무 이해가 잘 되게 시처럼 길게 써내려간 그의 텍스트들을 보고, 작품들에 대해 (어설픈, 너무 어설픈) 설명문들을 덧붙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전시는, 할배의 말들은 정말 깊이 다가왔다. 속도에 대한 고찰... 특히 한국에서... 광주비엔날레에서... 하지만, 그분은 이런 우리들의 속도에 대해서도 결코 비웃거나 조롱하지 않았다. 우리의 사정을 십분 이해해줬다. 뭐 뉴욕에서는, 파리에서는 어떻다는 이야기... 카셀은 어떻고 뉴욕은 어떻고, 베를린은 어떤데... 너희 광주는 (너무 후지다)는 식의 말을 할 때, 우리는, 나는 얼마나 깊은 자괴감과 모멸감을 느꼈던가? 할배는 그렇지 않으셔서 정말 좋았다.
그 넓고 깊은 마음... 제만은 말했다. 현대미술에 있어서의 물질과 비물질에 대해, 텅 빈 켄버스와... 그도 좀 좋아하지만, 예술과 사회, 공공미술에 대한... (할배는 결코 어려운 말을 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미술에 문외한이었지만, 얘기를 아주 쉽게 말해줬다. 그런데, 한국의 그 많은 말들을 나는 다 읽을 수도 없으려니와 모노크롬이니, 공공미술이니 하는 문맥들을 따라가다 보면,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독이 안돼는 난수표 같은 말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제발 말들 좀 쉽게 해주시라. 학부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사람도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어느 관객이 알아먹나?)
그래도 그분은 허허허 웃어 넘기셨다. 모든 걸... 그래서 에스더는 더 성실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었다. 볼프강 라이프의 작품에 관한 에피소드다.
라이프는 그때 내가 곁에서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됐다. 뭘 보내오질 않는 거였다. 영문도 모르는 나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리고 오픈 전에 그는 내가 고등학교 도서관에 갈 때 메고다니던, 가벼운 섹 하나를 당랑 메고 들어왔다. 그리고 밀가루 포대처럼 생긴 조그만 봉지를 꺼냈고, 거기 그가 채취했던 민들레꽃가루들이 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라이프는 그 노란 꽃가루를 바닥에 펼쳐놓는 것으로 너무나도 간단하게게 '작업 끝'이었다. 그리고 라이프는 한가하게 군것질을 하며 다른 작가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작업하는 모습들을 구경하고 다녔다. 속도 전시에 참여한 많은 작가들이 그런 식으로, 화산에 흘러내린 제주도의 구멍 숭숭 뚫린 화강암처럼 그렇게, 듬성듬성, 허허실실 했다.
그런데, 그 꽃가루는 수많은 광주의 관람객들, 호기심 많은 학생들에 의해 훼손되기 일쑤였다. 그러면 에스더는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뒤 그 넓은, 꼭 귀신이 나올 것만 같은, 그 무서운 전시장에 홀로 남아 밤새 노란 꽃가루들을 다시 펼쳐놓곤 했다. 그러기를 여러번 반복했다. 그리고 에스더는 그런 말도 잘 않는 타입인데, 그 말은 했다. 자주 그랬다고...
그때 제만의 전시에 초대되었던 작가들은 요셉보이스의 정치나 생태 등에 관한 메모들이 적힌 칠판, 캐나다의 스텐 더글라스, 중국의 펭 맹보, 전세계 유력 미술가들 이름과 연락처와 뭐 온갖 잡다한 것들을 노트북에 넣어갖고 다니던 정말 날라리같은 라이너 가날, 프란츠 게르쉬, 게리 힐, 작고한 이브 클라인, 그리스의 퍼포먼서 가브리엘 코르타스, 독일의 '도사' 볼프강 라이프, 임충섭, 부인 잉게보르그 뤼셔, 수중이미지들이 너무 환상적이었고, 섹시하고, 삽입된 노래도 너무 좋았던 피필로티 리스트, 세르지 스피처, 낙서 같은 작업을 했던 니엘 토로니, 장난꾸러기 벤 보티에, 탑 아티스트 빌 비올라, 스위스 작가연대라는 겁 없는 또라이들이었다.
개막 때 할배가 왔다. 그리고 할배는 이런저런 자리에 주빈격으로 불려다녔다. 그리고 할배는 너무 피곤했다. 일이 피곤해서가 아니라 심신이 피곤했다. 에스더에게 쉬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우린 할배를 보길도의 바닷가로 보냈다. 그 보길도 바닷가는...
'봄날'이라는 소설을 쓴 임철우 형의 작업실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옆 섬에 호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섬에서 작업하던 선배가 있었다. 그렇지만, 할배는 이런 거추장스런 배려조차도 마다 했다. 오픈 후 에스더와 내가 그곳으로 갔었는데, 완도 선착장에서 할배는 우리더러 알아서 노숙을 하든지 민박을 하든지, 밥을 먹든지 죽을 먹든지 알아서 할테니까 그만 돌아가라고 했다. 그리고 우린 돌아와버렸다. 그 보길도는 그렇게 낭만적인 곳이 아니다. 김환기의 안좌도도 마찬가지다. '봄날'의 이야기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테잎이 바뀌었다. '... 바닷가에서... 바닷가에서... 사랑의 여인아...')
그리고, 일주일 쯤 지난 뒤, 할배가 돌아왔다. 환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정말 오랫만에 한가한 시간을 보냈노라고 너무 좋아했다. 그분은 그곳, 예송리 둥근 조각돌들을 깔고앉고, 밟으며, 가을인데도 해수욕을 했다고 했다. 뤼셔, 그녀는 할맨데, 그렇게 애들처럼 장난꾸러기에 속이 없었다. 그 추운데, 해수욕이라니, 그리고 둘이서 밤 바다와 달을 봤다고 했다. 그래서 난 그런 화가가 있다고 했다.
섬에서 바라본 달과, 바다와, 그런 페인팅을 한 화가를 말했고, 그의 그림은 보여주지 못했다. 김환기의 안좌도를 보면... 그가 어뗐을까?
그 섬들은... 그러니까 그곳 예송리 바다 앞에는 한국전쟁 때에는 썩은 시체가 떠다니던 곳이었다. 안좌도도 마찬가지... 그런데... 수화의 그림은 형태가 남았고, 리얼리티는 없애버린 거 아닐까?
그리고 그는 중국으로 가셨다. 그가 한국에 온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중국정부에서 비용을 대 그분을 초청한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베이찡과 상해, 그리고 여러 곳에서 스튜디오들을 찾아갔다고 했다. 그리고 2년 뒤 베니스 비엔날레에 그는 디렉터가 되었고, 그것은 두번이나 했었고(아마 20세기 말과 21세기 초 아니었을까?) 그때, 장영호로 하여금 공간디자인을 하게 했고, 중국작가들을 대거 30명 정도나 초청했다. 할배는 말했다. '늙은 할매 같은 베니스비엔날레를 젊은 처녀 같이 만들겠다고'. '아페르티토' 전시도 그해 80년에 그가 만들었다.
아쉬운 것은, 그가 한국에 오면,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다. 아마 이불, 홍라희 뿐이었을 것이다. 그 많은 미술인들, 뉴욕과 파리에서 열심히 미술을 공부하신 분들, 국립 셔울대학교, 횽익대학교, 절남대학교, 죠선대학교도... 그 누구도 제만을 만나려고도, 초대해 만남을 가지려고도 안했다. 아마 유일하게 월간미술인가에서 인터뷰를 했을 것이다.
너무 아쉽다. 그가 한국에 자주 왔지만, 함께 얘기할 기회를 우리가 갖지 못했다는 것이...
그리고 두해 뒤, 그러니까 2000년 광주비엔날레에 할배가 왔다. 그리고 그 할배의 광주방문은 너무 초라했다. 당시 일했던 디렉터, 전시부장은 2회 때 함께 일한 할배가 마뜩찮았던 모양이다.
나는 당시 전시부원도 아닌, 관리부 총무팀 회계담당 직원이었다. 그리고 할배가 찾아왔는데, 그는 그 수많은 초청인명단에 든 것도 아니고, 스위스에서 광주까지 자비를 들여 찾아왔는데, 하다 못해 팀장이라도 직책 가진 사람은 아무도 만나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제네럴 디렉터에게 대접을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뭐 이런 식이다. 오꾸이 엔워조르도, 로자 마르티네이즈도, 후한루도... 나하고 안 친하니까.
(정말 이런 거 생각하면 눈물 난다)
그때 그는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싶어 했다. 광주에 대한 애정은 정말 많았다. 그랬다. 그분은 서구인이어서 포스트콜로니즘이라든지, 우리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말하는 그런 것은 정말 싫어한 것 같았지만, 우리의 정말 무식한 '저돌적인' 말들을 애정으로 들어주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해줬다. 다독다독... 차분하게... 일해라는...
한국화를 사랑하고, 전통을 사랑하고, 무엇보다 할배는 나주배맛과 영산강과 복암리 고분, 탐진만, 보길도의 자연, 전통, 풍토를 살려나가길 추근대는 애들처럼 입버릇처럼 강조해 말했다.
차를 타고 광주의 거리를 지나치면서... 건물들을 보고, 그리고 아주 가까운 곳에 여전히 보존되고 있는 자연을 보고... 또 할배가 광주에 오셨으면, 섬진강과 서해안의 일몰과 칠산바다, 그리고 옥룡사, 백련사 동백꽃도 보여드리고 백운산 고로쇠물도 드릴 수 있었을텐데...
'... 옛날은 가고,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
이정우님, 소식 전해줘서 고마워요.
이제 테잎을 바꿔요.
'함께 춤을 추어요. 행복한 춤을 추어요...'
가시는 길에, 여기 머문 진달래꽃 깔아드리니, 즈려밟고 가시길...
(다시 그 뽕짝 스타일로 테잎이 바뀌었습니다.)
'고향도, 이름도 묻지마세요... (인생은 보잘 것 없는 것)'
말 없는 춤만 있고, 리듬이 높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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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N, 1933-2005
위대한 시대설정자 하랄트 제만 선생이 지난 2월 17일 스위스 남부 자치주인 티치노에서 71수로 서거했습니다. 알려진 사망 원인은 폐질환입니다. 1933년 베른에서 태어난 그는 미술사와 고고학, 그리고 언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가 기획한 첫 전시는 1957년의 [화가시인 / 시인화가Painters Poets / Poets Painters]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본격적인 경력은 1961년 베른 쿤스트할레의 디렉터로 일하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1965년 [키네틱 아트Kinetic Art]전을 기획했고, 1967년에는 [사이언스-픽션Science-Fiction]전을 기획했습니다. 1968년에는 베른 쿤스트할레에 크리스토를 초청, 건물 전체를 포장하는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전시 기획자/평론가 - '하랄트 제만'의 이름을 미술사에 깊이 아로새긴 것은 그가 1969년에 기획한 전시 [태도가 형태로 될 때When Attitudes Become Form]였습니다. 이 전시는 1968년 학생 혁명에 대한 즉각적인 예술의 화답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세상을 향한 작가 주체의 설정이 예술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따진 이 전시는 예술을 바라보는 방식을 180도 전환시키는 폭발적인 힘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비판에 봉착한 그는, 같은 해 베른 쿤스트할레의 디렉터직을 사임하고 프리랜서로 자유로이 일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성취를 위한 발걸음이었습니다.
1972년의 제5회 카셀 도쿠멘타의 총감독이 된 하랄트 제만은 도쿠멘타를 통해 '오늘의 미술'을 새로이 창출해냈습니다. [도쿠멘타 5]에서 "현실성에 대한 질문 - 오늘의 이미지 세계Befragung der Realität – Bildwelten heute(Questioning of the Reality – Image Worlds Today)"라는 슬로건을 내건 그는, 예술을 예술이 아닌 것과 대질시키며 예술의 본질을 재정의하는 동시에 구태의 예술 경향들을 과거의 시간 속으로 내쫓아버리는 괴력을 발휘했습니다. 고급 예술과 저급 예술 모두를 뮤지엄의 공간에 초대한 그의 전시에서 기존의 관념에 부합하는 '예술 작품'들은 키취와 장난감, 광고, 정신질환자의 그림 등과 함께 전시되었습니다. 해프닝과 실험 영화들이 전통적인 회화 작품들 곁에서 제 모습을 선보였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아상블라쥬를 통해 그는 "평론가의 시선을 통해 예술의 전당에 스스로의 영지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전시 기획 방식은 바로 오늘까지도 많은 후학들에 의해 모방되고 있습니다. (이영철 선생이 1998년에 기획한 [도시와 영상 - 의식주]전은 하랄트 제만식으로 기획된 한국 최초의 전시였을 겁니다.) 그러나 그의 도쿠멘타는 예산을 초과했고, 곧 어설픈 민주주의자들의 혹독한 비난을 받았습니다. "예술을 빙자한 쓰레기에 시민의 돈을 쏟아 부었다"는 것이 비판의 골자였습니다. 하랄트 제만은 자신의 돈으로 초과된 경비 - 3백50십만 마르크를 물어냈다고 합니다. 그는, 이후 한동안 어려운 시기를 맞아 고생을 했지만, 굴하지는 않았습니다.
[도쿠멘타 5]에 이은 크고 작은 전시들 - 1975년의 [독신을 위한 기계Junggesellenmaschinen(Machines for Singles)], 1979년의 [진실의 봉우리Monte Verità] 등 - 로 실험을 지속한 하랄트 제만은, 1980년의 베니스 비엔날레에 젊은 작가들만을 위한 [아페르토Aperto(열림)] 섹션을 개설함으로써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미술에 큰 물꼬를 텄습니다. 그에겐 시대를 꿰뚫는 혜안과 그를 실현해내는 추진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어 1981년, 쮜리히 쿤스트하우스의 초청 큐레이터로 일하기 시작한 그는, 전시의 핵심은 역사적 명작들의 나열이 아닌, 역사적인 "극도의 관념들intense intentions"을 구축해내는 데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전시기획론을 확립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1988년 베를린에서 [시간의 바깥Zeitlos]전을 기획한 이후, 점차 그의 시대도 저물기 시작합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 하랄트 제만은 "미술 권력"으로 비판 받았습니다. 허나 그는 제도적인 인물로 남지 않기 위해 자신의 일정 시간을 "독립 큐레이터"로 활동하는 데 쏟아 붓는 등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쮜리히 쿤스트하우스에서 일하는 것과는 별도로, 자신의 독립적인 활동을 위해 스스로 "공장The Factory"이라고 명명한 독립 에이전시를 운영했습니다. 1999년과 2001년에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베니스 비엔날레의 총감독을 맡았고, 포스트-헬베티카 프로젝트로 주목받았던 스위스 엑스포 2002Expo.02에서는 황금 나뭇잎으로 뒤덮인 전시관을 만들어 세간의 화제가 되었습니다(전시장 내부에는 1분마다 100 프랑 짜리 구권 화폐 두 장을 폐기하는 기계가 설치되어 전시 기간 동안 즉 159일 내내 작동되었습니다).
하랄트 제만은 한국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1997년 제2회 광주비엔날레에 초정되어 소주제전 [속도]를 기획한 그는 전시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한편, 작가들의 작업실을 방문함으로써 또다른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속도]전의 기획에 앞서 작가 이불을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눈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불의 작업실에서 실리콘으로 된 사이보그 작업에 대한 아이디어 스케치를 본 그는 바로 작업의 중요성을 알아보고 작가에게 작품의 전시를 의뢰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광주 비엔날레에 선보일 예정이었던 이불의 사이보그는 제작이 늦어지는 바람에 구겐하임 미술관(휴고 보스 미술상)에서 첫선을 보였습니다... 당시 그는 한국의 정신문화를 맛보기 위해 부인과 함께 보길도를 3박 4일간 여행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하랄트 제만이 오늘의 미술에 끼친 영향을 가늠하려면, 본격적인 회고와 연구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제대로 된 부고 기사하나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작가와 달리 죽어도 돈이 되지 않는 평론가/전시기획자들에게 주어진 냉정한 현실이겠지요. 갑갑한 마음에 부족하지만 제가 알고 있는 단편적인 사항들로 부고기사를 적어봅니다. 급히 써내려 엉성한 글입니다. 널리 양해를 구합니다.
www.artdaily.com - Harald Szeemann, 71, globetrotting Swiss curator who organized Documenta 5 in 1972 and the Venice Biennales of 1999 and 2001, died of a pulmonary illness in the Swiss canton of Ticino on Feb. 17. Szeemann was made director of the Kunsthalle Bern in 1961, and organized the groundbreaking conceptual art show, "When Attitudes Become Form," in 1968. In 1981 he was named independent curator at the Kunsthaus Zurich.
ROME (AP) - Harald Szeemann, a Swiss art critic and exhibit organizer renowned for his works at shows such as the Biennale in Venice and Documenta in Germany, has died, the Biennale said Saturday. He was 71.
Szeemann died in Switzerland, the Biennale press office in Venice, without releasing other details. The ANSA news agency said Szeemann died Thursday night following lung problems.
"It's a very grave loss for the world of art," Biennale President Davide Croff told ANSA. Croff described Szeemann as a talented and avant-garde critic and organizer.
Born in Bern, Szeemann made his name in the 1960s, when he served as director of the Kunsthalle in Bern. He organized scores of exhibit, turning the Swiss institution into an obligatory stopping-off place for new generations of European and American artists.
In 1972, he was appointed curator of Documenta, the world's biggest contemporary art show, which is held every five years in the western German town of Kassel. Szeemann revolutionized the show, inviting artists to present not only paintings and sculptures but also performances and other events.
In 1980, Szeemann worked at Biennale, creating the section "Aperto" ("Open"), which presented the work of young artists. He worked again at the Biennale at 1999 and 2001.
In the 1980s, as he organized scores of exhibits, he started taking over unconventional, often gigantic premises, such as former stables and hospitals. He invited artists to relate their works to the exhibition spaces.
Throughout his career, Szeemann experimented with conceptual art. In 1974 he hosted an exhibit in his apartment, presenting hairdressing equipment that belonged to his grandfather. The exhibit was meant as a "torture chamber in the service of beauty."
첫댓글 삼가 하랄트 제만 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