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가요 : 우리 곁에 잠시 머물다 사라져버린 가요계의 원-히트-원더 톱20
새삼스럽게 ‘원-히트 원더(One-Hit-Wonder)’에 대한 설명 자체를 길게 할 생각은 없다. ‘짠’하고 등장해 노래 하나를 히트시키고 사라진 가수. ‘가요톱텐’에서 5주 연속 1위를 했던 노래든, 나이트클럽을 중심으로 ‘밤의 대통령’ 노릇을 했던 노래든, 대중들에게 노래 하나 달랑 남기고 훌쩍 떠난 가수들이다. 그 가수들 가운데 아직도 문득문득 생각나는 이들이 있다. 어떻게 그런 노래를 남기고 그렇게 갑자기 잊혀졌을까, 하는 의문과 지금은 무얼 하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게 하는 가수들 말이다.
‘어떤 가요: 우리 곁에 잠시 머물다 사라져버린 가요계의 원-히트-원더 톱20’는 바로 그런 가수들을 기억하고 추억하기 위한 기획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결코 폄하의 뜻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둔다. 수십 년 동안 나타났다 사라진 수천, 수만의 가수들 가운데 사람들의 기억 속에 단 하나의 노래라도 남기고 추억을 남긴다는 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니까. 결국 이건 음악 듣는 재미를 위한 글이다. 노래들을 추리고 오랜만에 다시 들으면서 나 자신부터 즐거웠고 추억에 잠기기도 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대상은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로 한정했다. 2000년대 이후의 노래들을 배제한 건 우선, 아직까지 활동하고 있는 가수들이 많아 ‘원-히트-원더’란 말을 붙이기에 조심스런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 일은 모른다고, 그들이 어느 날 갑자기 ‘빌보드 핫 100’ 정상에 오르는 ‘초대박’을 터트릴지 누가 알겠는가. 또한, 가요 순위 프로그램의 입지가 약해지면서 ‘히트곡’이란 개념 자체가 전보다 많이 희박해진 이유도 있다. 뜬금없는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그렇기 때문에라도 ‘공신력 있는 차트’의 존재는 꼭 필요하다(장관님의 ‘노래방 선언’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더불어, 리스트 선정은 전적으로 나의 결정으로 이루어졌다. ‘백비트’ 편집위원들과 필자들의 의견을 받기도 했지만 최종적으로 나의 취향과 체감상 느꼈던 인기를 바탕으로 노래를 고르고 순위를 정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음악 듣는 ‘재미를 위해’ 쓴 글이기 때문에 이게 빠졌느니 하는 진지 돋는 항의성 글들은 크게 개의치 않을 생각이다. 그렇게 정색하기보다는 나의 기억엔 이런 노래도 있었다고 댓글로 남겨주는 것이 오히려 더 생산적인 일이 될 것이다. 나머지 10개의 노래들은 다음 주에 공개할 예정이다. 아, 추억 돋네!
20. 박준희 - 눈감아 봐도 (1991)
SK가 선경으로 불리던 1991년에도 미성년 가수들은 존재했었다. 물론 지금처럼 초중고를 가리지 않고 '아이'들에게 허벅지를 드러내거나 엉덩이를 흔들게 하면서 웃고 즐기지는 않았다. 아이돌이란 호칭은 생소했고, 대신에 '고교생 가수'란 표현이 쓰였다. '학사 가수'란 말도 있었으니 고교생 가수란 말이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박준희는 이지연과 김승진, 박혜성의 뒤를 잇는 고교생 가수였다. 예쁘장한 외모와 풋풋한 안무로 꽤 많은 인기를 끌었지만, 2년 뒤 성인이 되어 발표한 2집에선 실패를 맛봤다. 1996년 (지금은 강원래의 아내로 더 유명한) 김송 등과 함께 3인조 댄스 그룹 콜라를 결성하기도 했지만, 그 사이 더 어른이 돼버린 그녀를 주목하는 이들은 얼마 없었다.
19. 김부용 - 풍요 속의 빈곤 (1996)
'풍요 속의 빈곤'은 많은 인기를 얻었지만, 슬프게도 그때나 지금이나 대중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건 맘보걸로 등장했던 이선정과 그녀의 가슴 크기다. 그 다음으로 떠올리는 건 2대 맘보걸인 서유정과 그녀의 가슴 크기다. 노래의 인기를 따라가지 못한 김부용의 존재감 역시 '풍요 속의 빈곤'이었다.
18. 이재영 - 유혹 (1990)
1990년대 초창기는 여가수들의 전성시대였다. 원톱으로 강수지가 있었고, 그 뒤를 이어 양수경, 김혜림, 조갑경, 원준희, 장혜리, 하수빈 등이 있었다. 이재영도 그 시기에 등장해 지금은 '똑순이 주부의 아이콘'이 된 이연경과 함께 잠시 라이벌처럼 얘기되기도 했었다. 이재영은 등장과 함께 빼어난 미모와 늘씬한 몸매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국적이면서 야릇한 분위기의 곡 자체도 많은 인기를 끌었다(특이하게 다섯손가락의 이두헌이 곡을 만들어줬다). 관능적인 창법과 눈빛으로 뭇 남성들을 유혹하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주님의 유혹에 넘어가 CCM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17. B612 - 나만의 그대 모습 (1991)
임재범의 '고해' 이전 이 노래는 대표적인 수컷들의 노래방 작업용 노래였다. 록/메탈 밴드에게 '원 히트 원더'란 말은 모욕적일 수 있지만, B612는 자신들의 상업적 색채를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실제로 매력적인 외모를 갖고 있었고, 상품성이 있었으며, 이런 히트곡까지 만들어냈다. 하지만 록 스타라는 원대한 꿈은 두 번째 앨범의 실패와 함께 물거품이 됐다. 하지만 밴드는 가도 노래는 남듯이, 시대를 착각한 어떤 사내들은 지금도 여전히 여자들 앞에서 이 노래를 부르며 뽐내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잘이라도 불렀으면….
16. 이재민 - 골목길 (1987)
'시대를 앞서간'이란 상투적인 표현만큼 이재민을 잘 표현할 말은 없을 것 같다. 그는 정말 시대를 앞서갔다. 그리고 그 음악이 한국에서 일정부분 받아들여진 것도 놀라운 일이다. 그의 독특한 패션과 퍼포먼스도, 다소 꺼벙해보이는 외모도, 그리고 그가 들려준 신스 팝 음악도, (심지어 이름마저도!) 모두가 신선했다. 그래서 지금 마이너 케이블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어색하게 겉도는 그의 모습이 더 안타깝게 느껴진다. 그는 분명한 선구자였다. 그는 더 존중 받을 필요가 있다. 양동근의 다음 차례는 누군가?
15. 자자 - 버스 안에서 (1996)
그 근엄하던 우리 중대의 선임하사마저 이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었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14. 루머스 - Storm (1999)
주영훈이 만든 최고의 명곡이 아닐까? 비록 가요 순위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 적은 없어도 거리를 지배한 건 바로 이 노래, 'Storm'이었다. 길에서건 상점에서건 이 노래가 흘러 나왔다. 인트로부터 확실하게 치고 들어가는 코러스만으로도 그만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진정한 '후크'란 이런 것이다. 코요테와 나오미의 리메이크는 이 무관의 제왕에게 바치는 헌사다.
13. 이무송 - 사는 게 뭔지 (1992)
살다 보면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 있기 마련이다. 뭐라 장르를 규정할 수 없는 이 독특한 노래에 쏟아진 대중들의 관심과 사랑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무송조차도 이 노래가 그렇게까지 인기를 얻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무송은 이 노래 덕분에 한국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고, 노사연과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할 수 있었다. 결혼 즈음하여 이들은 자신들의 덩치만큼이나 큰 스케일의 발라드 'Above The Sky'를 발표하며 한 방을 노렸지만 뜻대로 되진 않았다.
*'사는 게 뭔지' 원곡은 온라인 서비스 불가 앨범인 점 양해 부탁 드립니다.
12. 성진우 - 포기하지 마 (1994)
혜성처럼 등장했지만 역시 혜성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인기를 다시 잡기엔 역부족이었다. 이후 몇 장의 앨범을 냈지만 '포기하지 마'와 같은 인기를 얻기는 어려웠다. 그건 다리를 찢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 작년 태진아를 등에 업고 그 역시 트로트 가수로 변신했다. 이 행보를 어떻게 봐야 할까? 트로트가 요양원이나 '노인의 집'도 아니고, 왜 나이 들고 인기가 떨어지면 가는 곳은 트로트인가? 왜 '밥벌이의 괴로움'으로 택하는 건 결국 트로트인가? 심수봉의 트로트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강한 유감을 표한다.
11. 미스터 투 - 하얀 겨울 (1993)
특정 시기만 되면 들려오는 노래들이 있다. 덕분에 행복해지는 건 저작권자들이다. 매년 5월 12일이 되면 015B 정석원의 통장 잔고 늘어나는 소리가 들리고, '시월의 마지막 밤'이면 '잊혀진 계절'의 작곡가 이범희가 흐뭇한 웃음을 짓는 장면이 상상된다. '하얀 겨울'은 아예 하루가 아니라 분기로 범위를 잡았다. 담대한 진보였다. 실제로 라디오에선 그해 겨울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이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큰 기대를 모으며 발표한 2집 '텅 빈 객석'은 제목처럼 이들의 객석을 점점 비어가게 만들었다. 솔로로 데뷔한 이민규는 표절이라는 불명예까지 안았다. 문득 박완서의 소설이 다시 읽고 싶어진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글: 김학선 웹진 ‘보다’ 편집장)
어떤 가요 2탄은 금주에 오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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