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게 남는 거다. 이 명언을 누가 남겼는지 모르지만 명언 중 명언이다. 사람은 살려고 먹는 것이냐 먹으려고 사는 것이냐는 아주 오래된 질문에 이제는 생존을 위한 음식 섭취 보다는 먹는 재미를 추구하는 음식 문화가 더 중요하다고 답이 나오는 듯하다.
예쁜 집이나 너른 농토보단 텃밭이 더 뿌듯
귀농·귀촌을 한 사람이 뿌듯해 하는 것이 예쁜 집이나 너른 농토보다는 집 앞의 아기자기한 텃밭이라고 한다. 조그맣지만 내가 일구는 텃밭에서 나오는 먹거리를 매일 매일 뽑아다가 해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농사를 전업으로 하는 귀농인도 내다 파는 농산물을 재배하는 농지와 별도로 나와 내 식구가 먹으려고 마련한 텃밭에 쌈 채소니 과일이니 야채를 심어서 가꾼다. 여러 반찬을 만들어 먹어야 하니 심는 작목이 무척 다양하다.
쌀과 보리와 같은 곡식은 빼고 콩, 상추, 깻잎, 감자, 고구마, 오이, 당근, 토마토, 고추, 마늘, 블루베리, 로즈마리 등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거기에 닭, 오리, 돼지, 소와 같은 가축이 있고 닭에서 매일 매일 선물 받는 계란이 있다. 소 키우는 집은 우유는 덤이고 버터와 치즈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요즈음은 커피나무를 심어 원두를 생산해 볶아 먹는 이도 있다.
이런 먹거리를 심어 키우는 일이 도시 사람에게 소일거리로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대단한 노동이고 집중이 필요한 작업이다. 가능하면 농약을 쓰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작물 옆에 한눈팔면 무시무시하게 자라나는 잡초를 일일이 손으로 뽑아야 하고, 맛있는 것은 먼저 아는 온갖 벌레를 쫓다 보면 하루가 짧다.
작물마다 심는 시기가 있고 수확하는 시기가 있어 조금만 때를 놓치면 껍질이 무르고 맛이 떨어지기도 하니 타이밍을 맞추어 물 주고 거름 주고 온도를 맞추느라 무척 바쁘다.
그러나 재미있다. 먹고 놀고 마시는 것만이 재미가 아니다. 작은 씨가 파종하고 자라나고 꽃 피우고 열매를 맺는 과정은 암벽 등반과 비견할 수 있는 진정한 재미를 준다. 농사짓는 모습을 온라인으로 응용한 것이 롤플레잉 게임이고 육성 게임이다. 지금은 온라인 게임이 오프라인으로 확장돼 운영되고 있단다. 모바일로 농사를 짓다가 미션을 완수하면 진짜 농산물이 선물로 주어진다니 흥미롭다.
처음 농사를 지으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마트에서 보는 때깔 좋고 윤기 나는 상추도 막상 키우려면 답답하다. 뭘 알아야지 말이다. 그래서 텃밭이 필요하다. 일종의 실험실인 것이다. 먹을 수 있도록 잘 키우는 것이 실험실의 최종 목표가 아니다. 그것을 잘 조리해서 먹었을 때 연구가 끝나는 것이다. 우리 텃밭의 실험 결과를 살펴보자.
감자가 있다. 우리는 그저 구황작물로만 배웠지만 자주 먹는 재료이다. 햄버거 사 먹을 때 딸려 나오는 게 감자튀김이다. 감자는 여름에 나니까 여름에 먹는 게 좋다. 그런데 솔라닌이라는 게 있어서 중독되면 두통과 설사가 나니까 조심해야 하는데 싹 부분에 많기 때문에 싹을 먹으면 안 된다.
고구마는 신경 안 써도 잘 자라는 기특한 작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답답하면 고구마, 시원하면 사이다라고 한다. 넝쿨을 걷으면 줄줄이 땅속에서 올라오는 고구마를 보면 속이 후련한데, 왜 답답하면 고구마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고구마는 캐서 바로 먹는 것보다는 한 달 정도 지나서 먹는 게 더 맛있다. 그래서 보관이 중요하다. 그래서 그런가 다 좋은데 보관 중에 잘 썩는 게 문제다.
시금치는 이미지가 좋다. 어릴 적 시금치를 많이 먹으면 뽀빠이처럼 힘이 세진다고 해서 많이 먹었다. 이세돌 9단의 고향인 전남 비금도가 시금치로 유명하다. 시금치를 먹으면 힘이 세지고 머리가 좋아지나 보다. 물론 아니다. 재배하기도 쉽고 철분이 우유의 75배라니 쓸모 있는 작물이고 녹색 채소의 왕이라서 꼭 심는다. 조심할 것은 마지막에 꼭 데쳐서 먹어야 한다. 안 그러면 요로결석이 생길 수 있다.
오이는 까칠하다. 여름철 오이 냉국은 별미다. 등산객의 가방에는 꼭 오이가 있다. 수분이 90%라서 물 대신 가져간다. 잘 자란 오이는 손으로 만지면 따가울 정도로 가시가 많다. 까칠하다. 그렇지 않으면 조금 모자란 아이다.
주황색이 아름다운 당근은 뿌리를 먹는다. 시력에 좋다고 해서 많이 먹는다. 토끼하고 말이 참 좋아한다. 당근은 잘 자라는 긍정적인 식물이다. ‘당근이지’라는 말도 긍정의 의미다. 생으로 먹는 것 보다는 익혀 먹는 것이 더 좋단다. 도시에는 케이크 중에서 당근 케이크를 최고로 쳐 준단다. 도전하고 싶지만 나는 솜씨가 없어서 김밥에 넣는다.
배추도사만 있는 게 아니라 부추도사도 있다. 남양주에 부추 명인이 있는데 별명이 부추도사다. 부추도사가 이르길 부추는 1년을 키우고 겨울을 난 후에 이듬해부터 잘라 먹는 것이란다. 그것도 모르고 조금만 올라오면 싹둑싹둑 잘라 먹었다. 어쩐지 부실하더라니. 부추는 벌레를 잘 쫓아주니 다른 작물과 섞어 심는 게 좋다.
감기가 잘 걸리는 것 같아 도라지를 심었다. 도라지는 아리랑 다음에 많이 부른 노래라서 도라지를 좋아한다. 당근과 같은 뿌리채소인지라 가꾸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캔 다음 손질해 놓는 것이 좋다.
1순위 텃밭 작물은 쌈 채소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역시 쌈 채소를 심는다. 한국인은 쌈에 집착한다.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먹을 때 쌈을 싸서 먹고 회를 먹을 때도 쌈을 싸서 먹고 밥만 먹을 때도 쌈 싸 먹는다. 상추, 깻잎, 청경채, 신선초, 치커리, 비트, 겨자잎, 콩잎, 케일, 명이나물이 모두 쌈 채소에 해당한다.
고기와 함께 쌈 채소를 먹는 것은 음양의 조화이고 오케스트라 연주와 같다. 쌈 채소야말로 직접 키워 먹어야 한다. 시중에 나온 반질반질한 쌈 채소는 모두 화학첨가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 생으로 먹는 쌈 채소야말로 텃밭에서 길러야 하는 1순위의 먹거리다.
텃밭을 둘러서 뽕나무, 사과나무, 배나무, 감나무, 블루베리, 포도나무, 커피나무를 심는다. 여름부터 과일이 나오면 따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좋은 것은 잘 보관했다가 명절 차례상에 올린다.
몇 가지만 나열했지만 그 외에 많은 채소와 과일을 심어 볼 수 있다. 다 세어 보면 많아 봐야 20가지 정도다. 하지만 이 식물을 하나의 텃밭에 모두 심으면 자연스럽게 하나의 생태계가 형성된다. 다양한 품종은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자란다. 벌레들도 좋아하는 식물이 있고 싫어하는 식물이 있는지라 많이 날아들지 않는다.
포도 덩굴의 잎은 그늘이 되어 수분 증발을 막아 주어 채소들이 잘 자라게 한다. 허브 식물은 벌레도 쫓지만, 향기가 사람들을 취하게 한다. 단일 재배하는 농토보다 섞어짓기하는 텃밭의 생산량이 더 많다는 사례도 있으니 효과도 좋다.
우리는 원래 이렇게 농사를 지었다. 다양한 농작물을 가까운 땅에다 심고 기르고 먹었다. 제철 따라 심고 기후에 따라 심어 먹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양한 농작물에서 다양한 영양분을 섭취하고 다양한 맛을 즐겼다. 가까운 곳에 있으니 값도 쌌다. 텃밭 농사가 우리의 농사이고 유통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지금 우리는 ‘로컬 푸드’라고 부른다.
로컬 푸드는 내가 사는 곳 반경 50km 이내에 생산되는 먹거리를 말하는데, 서양은 땅이 넓어 100마일(160km) 정도로 한정한다. 로컬 푸드는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 차원에서 캠페인으로 전개되고 있다.
가까운 곳에서 나오는 지역농산물을 소비해야 화석원료 사용이 제한되고, 불필요한 포장과 화학처리에 대한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취지에서다. 대형화한 기업형 농업의 품종 획일화와 고비용, 고가격, 소농 착취와 같은 부작용에 대한 대안이기도 하다.
로컬 푸드, 텃밭 농사의 확장 개념
흔히 로컬 푸드라고 하면 소도시 외곽에 자리 잡은 ‘로컬 푸드 판매장’만 보고 작은 규모의 마트 정도로 생각한다. 알고 보면 예전 우리 농촌의 농사 방법이고 유통 과정이었던 텃밭 농사의 확장 개념이다.
지역의 농산물을 지역 사람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시스템인 로컬 푸드는 텃밭 농사의 중요성을 곱씹게 한다. 텃밭 농사는 소일거리가 아닌 지금의 휘청거리는 농촌 경제를 다시 세우는 작업이라 하겠다.
김성주 슬로우빌리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