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도사 가는 길
조 성 기
나는 왜 통도를 ‘通道’로 알았을까.
배낭 하나를 어깨에 메고 훌쩍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실직자도 아니면서 연제나 마음만 먹으면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여간 큰 특권이 아닙니다. 내 친구 변호사는 자기도 자유직이라면서, 하루 동안 임의로 사무실에 나가지 않고 「우리는 제네바로 간다」 식으로 술집 아가씨를 고향으로 데려다주고 온 이야기를 진지하게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친구도 하루 이상은 그런 시간을 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사실, 내가 판사나 변호사가 되지 않고 목사가 되지 않고 작가가 된 것은, 이 여행의 자유를 위함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디 여행의 자유뿐이겠습니까.
나는 배낭 속에 세면도구들과 함께 굴원(屈原)⁕의 시집이라 할 수 있는 『초사(楚辭)』* 제1권과 제2권을 넣고 떠났습니다. 명지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온 책으로, 송정희 교수가 번역을 하였더군요. 일전에 태종출판사에셔 하정옥 교수 번역으로 내놓은 굴원 시집은 이미 다 읽었는데, 이번에 또 『초사』를 가지고 간 것은 번역의 차이로 인한 묘미를 느껴보려 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번 시집이 더 많은 분량의 시를 담고 있는 것으로, 아마 굴원이 지었다고 하는 시는 다 실은 모양입니다.
왜 하필 굴원의 시집을 들고 갔느냐구요. 요즈음 내가 굴원의 생애를 소설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내 마음의 상태 때문이라고 해야 되겠지요.
나는 오후에 강남고속버스터미널 매표소로 가서 사천육백 원에 대구행 승차권을 한 장 끊었습니다. 고속버스를 혼자 탈 때마다 경험하는 일이지만 나의 옆자리에 누가 앉을 것인가, 적잖이 신경이 쓰이게 됩니다.
언젠가 한번 내가 아는 청년이 이발용 면도칼로 할복자살을 기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청년의 누나와 함께 고속버스를 타고 급히 청주로 내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병원 병실에서, 다행히 목숨을 건진 그 청년을 만나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네고 나는 혼자 다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차창 너머로는 저녁놀이 갖가지 색깔로 변모해가며 먹빛으로 잦아들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청년이 자살을 기도한 이유에 대해 내 나름대로 추리를 해보면서 인생과 죽음의 의미들을 되씹 어보곤 하였습니다. 나의 평범한 일상에 자살 기도라는 사건을 안고 뛰어들어 내 마음을 무겁게 만든 그 청년이 얄미워지기도 하였습니다. 얄미운 감정이 생긴 것은 그가 죽지 않고 살아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패한 자살 기도는 종종 주위 사람으로 하여금 우롱당한 기분을 느끼게 하기도 하니까요.
이런저런 생각들로 나는 내 옆좌석에 앉은 사람에 대하여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서른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습니다. 그 여자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나도 한마디 건네지 않았습니다. 차체의 진동으로 인하여 약간씩이나마 어깨가 서로 닿을 법도 한데, 창가에 앉은 내가 워낙 차창 쪽으로 몸을 틀고 있었기 때문인지 그런 감촉조차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 여자와 나는 완전한 타인으로 그렇게 청주에서 서울까지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강남터미널에 버스가 도착하여 승객들이 막 일어설 무렵이었습니다. 그 여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에 게 말을 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조용히 일어서서 승강구로 다가가는 승객들 사이에 끼어들었습니다. 나는 잠시 얼떨떨해 있다가 가방을 챙겨 들고 몇 사람 건너 그 여자의 뒤편에서 천천히 승강구로 향해 갔습니다. 말총 모양으로 단아하게 묶은 그 여자의 뒷머리채를 훔쳐보면서, 그 여자가 왜 나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해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버스에서 내리는 그 여자를 뒤따라가서 말을 걸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여자의 처음이자 마지막 말이 그 이후에도 간혹 내 귓가에서 맴돌곤 하였습니다. 도대체 그 여자가 나에게 감사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 이유를 헤아린다는 것은 청년이 자살을 기도한 까닭을 추리해보는 것보다 더 어려운 듯싶었습니다.
이번에는 내 옆좌석에 아무도 앉지 않았습니다. 평일이라 그런지 좌석들이 제법 많이 비어 있었습니다. 서울에서부터 좌석이 빈다면 대구까지 그대로 비어 있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내 옆자리를 흘끗흘끗 비껴보면서 묘한 감정에 젖어들었습니다. 나는 대구까지 비어 있는 자리와 동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비어 있는 자리.
문득 『반야심경』의 구절들이 하얀 나비 떼들처럼 나의 뇌리에서 퍼덕이며 날아올랐습니다. 그 이백육십 자밖에 되지 않는 『반야심경』을 아예 외어버린다고 작정하고 한번 쭉 머릿속에 집어넣은 적이 있는데, 매일 독송을 하지 않으니 자연히 기억이 희미해져 단편적인 문구들만 앞뒤 순서가 뒤바뀐 채 간혹 의식의 표면으로 불현듯 떠올라 오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맨 앞부분과 맨 뒷부분은 제법 순서대로 외고 있지요.
관자재보살 행심 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토일체고액 사리자색불이공 공불이색….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반야심경』의 주제는 알다시피 모든 것이 없다는 것 아닙니까. 물질도 없고 감각도 없고 의식도 없고 의지도 없고 지식도 없고, 눈과 귀와 코와 혀도 없고 몸과 마음도 없고, 형태와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과 법도 없고, 눈으로 보는 영 역에서 의식의 영 역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무명*도 없고 늙음과 죽음도 없고 괴로움도 없고,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고 지혜도 없고 무언가 얻을 것도 없다 이거지요. 얻을 것이 없으니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일체의 두려움이 없어 헛된 망상에서 벗어나 완전한 열반에 이르게 된다는 말이지요.
없을 무(無) 자가 스무 번 이상이나 반복되고 있는 『반야심경』을 매일 마음 써서 독송한다면, ‘있다’라는 환상에서 깨어나게 되는 날이 오고야 말겠지요. 말하자면 공(空)의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어느 날 새벽 세 시경에 일어나 아득한 적막 속에서 『반야심경』을 다시 읽어본 적이 있는데, 그 순간에는 그야말로 한 구절 한 구절이 가슴에 파고들어 침침 한 두 눈이 밝아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없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될 것도 같았습니다. 이런 순간이 좀 더 지속된다면 현장법사와 같이 득도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반야심경』은 도가 없으니 득도할 것도 없다고 말하고 있지요.
내 옆에 비어 있는 자리를 보고 그 빈자리와 대구까지 동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반야심경』의 구절들을 떠올린 것은, 그리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지요. 무엇보다 그 옆자리에 그녀가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내가 여행의 목적지로 삼고 있는 곳으로 인하여 더욱 그런 연상 작용들이 일어났겠지요.
대구로 가는 길에 차창 너머 산야를 바라보니, 벌써 진달래가 피어있는 산기슭도 눈에 띄었습니다. 고속도로변에 심어놓은 개나리들도 노란색을 뒤집어쓰기 시작하더군요. 연둣빛으로 물이 오르는 나무와 풀 들. 온 천지에 거대한 생명의 윤회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와 나의 봄은 이토록 허전한 겨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날 저녁 그녀는 나와 함께 좌석버스를 타고 가면서 봄을 몹시 싫어하는 이유를 말했습니다. 봄이 되면 맨 먼저 학창 시절의 최루탄 가스가 생각난다고 하였습니다. 그 부연 연기 속에서 전경들에게 떼밀려 교정 화단의 붉은 철쭉꽃 더미를 끌어안고 쓰러지며 머리가 거꾸로 처박히곤 했다고 하였습니다. 머리가 터져 흐르는 피, 선홍빛 철쭉, 깨어진 이마뼈 대신에 플라스틱 인조 뼈를 끼워 넣은 학우들.
그리고 그녀는 왜 봄에 역사상 유명한 혁명들이 일어나는지 아느냐고 하면서 봄의 심리학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나는 이번 봄에 그녀와 나의 관계에도 혁명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감하며 두려움에 젖었습니다. 그 혁명은 밝은 혁명이 아니라 어두운 혁명일 것이기 때문이 었습니다.
예감했던 대로 긴 겨울이 지나자 어두운 혁명은 일어났고, 나는 이렇게 홀로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대구 터미널에 내리니 벌써 어스름이 길거리에 깔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근처 식당에서 간단히 저녁 식사를 한 뒤 빨리 자리를 정해 쉬고 싶은 생각에 적당한 여관을 찾아보았습니다. 거기 터미널 근방에는 여관촌이 형성되어 저마다 무슨무슨 장 여관이니 모텔이니 하며 네온사인들을 밝히고 있었지만, 소음에 민감한 내가 선뜻 들어갈만한 여관은 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도로변에 위치하지 않고, 안쪽으로 들어와 있어야 하고 스탠드나 가라오케 같은 것이 주위에 없어야 하는 등, 몇 가지 조건들을 구비한 여관을 찾기 위해 나는 여관촌 골목길을 오르락내리락하였습니다. 얼마 후 제법 조용할 것 같은 여관을 발견하고는 그곳 현관으로 들어섰습니다. 지은 지 몇 달도 되지 않은 듯 바닥의 검은 타일이 번들거렸습니다.
“방 있습니까?”
내가 현관 맞은편의 접객실을 향해 인기척을 내자
“네, 이 층으로 올라가세요.”
아가씨의 목소리가 접객실 창구에서 새어 나왔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니, 혼자잖아.”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떤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튀어나왔습니다.
“혼자 숙박하시게요.”
“네.”
“방이 없어요.”
“방금 방이 있다고 했잖아요?”
내가 의아해하며 어깨에 멘 가방을 추스르자,
“아저씨, 열 시 이후에 오세요.”
아가씨가 목소리를 낮추어 재빠르게 속삭이다시피 일러주었습니다. 아가씨의 어조로 보아, 지금 방이 있긴 있는데 혼자 온 손님에게는 내어주기가 곤란하다는 투였습니다. 나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시곗바늘은 여덟 시 십 분경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열 시이후에 그 여관에서 방을 얻기 위해서는 두 시간 정도를 길거리에서 배회하며 보내야만 했습니다. 이 시대는 여관에 혼자 들어가 숙박하는 것이 송구스러운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몸의 피로를 진하게 느끼고 있었으므로 열 시 이후를 기다리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여관보다는 장사가 덜 될 것 같은 허름한 여관을 목표로 천천히 다가가 조금 쑥스러워하며 현관으로 들어섰습니다. 과연 그곳은 혼자 오는 손님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넓은 온돌방에 가방을 내려놓고 세면실에서 몸을 씻은 후 자리에 누우니 참으로 편안해졌습니다. 모든 현실적인 의무에서 떠나, 가정까지도 떠나 이렇게 객지의 조용한 방에 혼자 누워보는 맛이야말로 여행의 진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난번 일본 속의 한국 문화 탐방을 위해 일본 여행을 하였을 때 마침 나와 한방을 써야 할 짝이 등록까지 해놓고 오지 않는 바람에 주일 내내 객실을 혼자 사용하는 혜택을 누릴 수 있었는데, 그 태평양의 밤바다 물결 소리가 들리는 아타미 해변 객실에서 혼자 있는 행복에 겨워 나도 모르게 좀 감상적인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지요. 혼자 있기를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을 하고 아이들까지 낳았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아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집에서도 내 방에서 혼자 잠을 자야만 숙면을 취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단체에 소속되는 것을 가급적 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겠지요. 내 인생에 몇 가지 가능성들이 있지만 작가로 살기로 고집하는 것도, 혼자 있고 싶은 욕망 때문에 그러할 것입니다. 한동안 단칸 전세방 생활을 하다가 나 혼자 잘 수 있는 내 방을 가지게 되었을 때의 그 행복감이라니. 나는 어떤 때는 내가 죽어 무덤들이 즐비한 공원묘지 같은 데 묻히면 얼마나 불편할까 염려를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여관방에서 혼자 누워 있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흐 아흐 아아 아악.”
윗방에서인지 옆방에서인지 아랫방에서인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방향에서 여자의 신음 소리가 계속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는 무슨 가락처럼 낮게 잦아졌다가 높아지고 높아졌다가 잦아지고 하다가, 드디어는 째지는 단말마*와 같은 부르짖음으로 급상승하였습니다. 그 여자는 오르가슴에 오르는 행운을 오늘 밤 쟁취하였음이 틀림없습니다. 왜 여자들은 오르가슴에 오를 때 소리를 내질러야 하는 걸까요. 「양철북」 영화에 보면 여자가 너무도 세게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여관방 창문이 박살나는 희한한 장면이 나오지요. 마땅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고 제목을 붙였어야 할 「프라하의 봄」 영화에서도 얼마나 여주인공이 세게 소리를 지르는지. 현대에 남아 있는 몇 가지 안 되는 원시의 소리들 중 하나가 바로 저 오르가슴을 선포하는 여자의 소리이지요. 진정 꾸밈없는 싱싱한 생명의 소리. 그리고 죽음의 소리. 나는 극에 달한 여자의 그 교성 속에서 생명과 죽음이 맹렬히 만나는 것을 체험하곤 하지요. 하지만 일생 동안 그런 소리 한 번 힘차게 내지르지 못하고 늙어가는 여자들도 있긴 있지요.
나는 다른 소음들에는 신경이 날카로운 편이지만 여성의 교성에는 비교적 너그러운 편이지요. 그런데 하나의 교성이 찾아들고 나면 다른 방향에서 교성이 일어나고 하여, 이러다가는 오늘 밤 잠을 설치고 말겠구나, 걱정이 되기도 했지요.
그러다가 지극히 자연스럽게 그녀의 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지요. 그녀를 안을 수 있는 기회를 어렵게 마련하긴 하였지만 그녀는 나를 위해 스웨터 하나 벗어주지 않았지요. 나는 그녀의 윗도리 한 장 벗길 수 없는 나 자신에 대해 깊은 절망감만 느꼈지요, 그녀를 안았지만 그녀를 안았다는 그 사실로 인하여 당황하기만 한 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지요. 그때 나는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이 자존심 그 자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그녀의 몸을 생각한다지만 자꾸만 그녀가 입었던 옷들이 함께 뒤엉 켜들어 머릿속이 어지러워지기만 하였지요. 내가 그녀의 몸을 이런 식으로나마 종종 생각한다는 것을 그녀가 안다면 그녀는 얼마나 나를 경멸할까요. 그러나 내 생각을 내가 제어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제어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심술을 부리는걸요. 여자의 교성이 여기저기서 계속 건너오는 이런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지요.
그때 애써 떠올린 『반야심경』의 구절은 이러했지요. 무색성 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특히 나는 ‘무촉(無觸)’ 에 주의하였지요. 촉감이 없다. 감촉이 없다. 감촉 내지는 촉감이란 원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촉했다고 느끼는 것은 허상일 뿐이다. 어떤 감촉으로 인한 미련 역시 미망일 뿐이다. 흔히 사랑이라는 것도 서로를 감촉하려는 허무한 욕망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생각을 전개시키다가 가스통 바슐라르*의 『불의 정신분석학』에서 읽은 어느 장면으로 연결되었지요. 두 나뭇가지가 마찰하여 불이 일어나자마자 그 불은 두 나뭇가지를 태워버리지요. 마지막에는 그 뜨거웠던 불도, 애타게 서로를 감촉하며 마찰했던 나뭇가지들도 없어지고 말지요. 서로를 감촉하지 않았던들, 그리하여 불이 일어나지 않았던들, 두 나뭇가지는 그대로 하나의 개체들로 남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무촉’을 화두로 삼고 있는 내 귓가에서 어느새 여자들의 교성은 밤에 우는 도둑고양이 울음소리들로 변해갔습니다. 내 방의 창문 밑 여기저기서 도둑고양이들이 울고 있었습니다. 우우우 이이잉 아앙아앙 이이잉……
아침에 일어나 어제 저녁 식사를 한 식당에서 조반을 먹고 터미널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동대구역으로 가, 천사백 원을 주고 삼랑진까지 가는 통일호 기차표를 샀습니다.
한 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가니 삼랑진에 도착하였습니다. 경부선열차를 타고 수없이 거쳐 지나간 삼랑진역이지만, 정작 내려서 역사(驛含)의 마당을 밟아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삼랑진역 건물은 몇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는 듯이 여겨지는 전형적인 시골 역사였습니다.
나는 역 앞에 대기하고 있는 택시 운전사에게 다가가, 양산 가는 버스를 타려고 하니,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데려가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택시 운전사는 고개를 저으며,
“여서는 양산 가는 차 없슴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갑니까?”
“다시 기차 타고요, 물금까지 가서 그서 양산 가는 버스 타야 되는 깁니더.”
“물금요?”
나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라 다시금 확인을 해보아야만 하였습니다.
“물금 가는 완행열차가 곧 들어올 낀데 퍼떡 가서 기차표 끊으소. 그 기차 하루에 몇 번밖에 안 오는 기차라요.”
나는 얼른 다시 역사 안으로 들어가 매표소에서 물금 가는 비둘기호 기차표를 백육십 원 주고 한 장 끊었습니다. 서울 전철 일 구간 요금보다 싼 키찻삯이었지요. 기차 통학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이렇게 싼 기차표를 사본 기억이 없지요.
십 분쯤 지난 후 개찰이 시작되었으므로 나는 역사를 도로 통과하여 툭 트인 플랫폼에 서게 되었습니다. 삼랑진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산들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높은 산은 눈에 띄지 않고, 다 고만고만한 산들이 자잘한 나무와 풀들을 조용히 이고 순박한 촌부의 모습처럼 거기 이마들을 맞대고 있었습니다. 저쪽 여러 줄기의 선로 너머 낡은 담벼락 옆에는 시커멓게 마른 담쟁이덩굴이 뒤덮인 사일로* 같은 구조물이 서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것이 자꾸만 내 눈길을 끌었습니다. 썩어 들어가는 양철 ˙지붕을 그대로 이고 있는 그것은 어떻게 보면 버려진 망루와노 같이 여겨졌습니다. 이전에는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용으로 쓰인 듯하였으나 지금은 전혀 사용되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였습니다. 그곳은 어쩌면 들쥐들이나 뱀들이 모여 살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뒤덮고 있는 마른 담쟁이덩굴은 정녕 죽어 있을 것이었습니다. 아니, 어느 날 느닷없이 푸릇푸릇 살아날지도 모를 일입니다.
나는 왠지 그 구조물이 오십 년도 더 넘게 거기 세워져 있었을 거라고 추측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플랫폼 어느 자리에 붙박인 듯 서버리고 말았습니다.
“아.”
나도 모르게 가만히 탄성을 발하였습니다. 나는 삼십 년 전,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십구 년 전, 어머니가 서 있던 자리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머니는 이십구 년 전 그날 부산에서 삼랑진까지 갔다 왔습니다.
그 초겨울날 새벽, 어머니와 나는 부산진역으로 나가 희부연 안개 속에서 수갑에 손목이 채워져 있는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두 사람씩 조를 이루어 각각 한 손에 수갑이 채워져 있는 그 열댓 명의 죄수들은 경남 지역에서 교원노조를 주동했던 교사들로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려 하고 있었습니다. 호송을 맡은 형사들은 가족들이 일정한 지점까지 기차에 동승하는 것을 허락해주었습니다. 그 시절만 해도 형사들에게 이런 인간미와 여유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것은 형사들에게 교사에 대한 존경심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때에 비해 민주화가 무척 진전된 것처럼 떠벌리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친절한 배려인 셈이지요.
나는 학교 수업을 받기 위해 집으로 다시 돌아오고 어머니는 삼랑진까지 아버지를 따라갔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정히 함께 기차 여행을 한 것은 아마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삼랑진까지 가는 동안 무슨 이야기들을 주로 나누었겠습니까. 보나마나 중학 입시를 코앞에 둔 나에 관한 이야기들 아니었겠습니까.
어머니는 기차가 삼랑진역에 닿자 플랫폼으로 내려서서 멀어지는 아버지의 모습을 언제까지고 바라보며 손을 흔들다가 끝내 옷소매로 눈물을 훔쳤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문득 선로들 너머 저쪽의 창고 같은 구조물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담쟁이덩굴이 막 기어오르기 시작하는 그 구조물을 보면서, 어머니는 틀림없이 형무소의 감방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전국 이십만의 교사들 중에서 교원노조 간부 천오백여 명을 용공분자*로 몰아 대량 검속하고,* 그중에서 또 골수분자 오십사 명을 전국에서 추려 군사재판에 회부하기 위해 서대문형무소로 이송하는 그 가운데 아버지가 끼어 있었으니, 감옥살이는 각오해야만 할 판이었습니다.
그때 감옥소로 향하는 남편을 전송하러 삼랑진까지 왔다가 황량한 플랫폼에 내던져진 듯 서 있게 된 어머니의 나이는 갓 서른을 넘기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나이는 어머니보다 꼭 십 년 위이므로 그 무렵 아버지는 마흔을 넘어서고 있었지요. 바로 지금의 내 나이입니다.
나이 마흔으로 넘어서니 벌써 인생 후반기를 바라보며 여러 가지 착잡한 사념들이 오가는데, 아버지는 그 나이에 시대의 한복판에서 머리띠 두르고 치열하게 싸우다 전봉준처럼 서울로 압송되고 있었습니다.
이제 삼십 년이 지나 어머니가 아버지를 전송했던 그 자리에 내가 억겁* 인연처럼 서 있게 되었습니다. 세속적으로 이야기하면, 어머니의 인생은 여기 삼랑진 플랫폼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내 나이보다 열 살이나 어린 어머니가 이 자리에 외롭게 서서 시대와 인생에 대하여 느꼈을 두려움과 불안의 무게. 나는 여기에 와서야 비로소 어머니의 어깨를 짓누른 그 인생의 짐들을 환히 보는 듯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태어나서 사십 년 만에 처음으로 어머니를 진정 만나는 기분이었습니다.
햇빛은 나의 인식처럼 부드럽고 환했습니다. 저기 햇빛 너머로 기차가 달려 왔습니다. 광주에서 부산진으로 가는 비둘기호였습니다. 물금으로 가는 철로변은 그야말로 그윽한 봄기운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오른편으로 밝고 푸른 낙동강이 흐르고 왼편으로는 싱싱한 대나무밭, 진달래, 보얀 복사꽃, 개나리, 매화꽃 들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물이 오르고 있는 부드러운 수양버들, 봉오리를 펼칠 채비를 차리고 있는 목련들도 보였습니다. 산자락 양지에 무심히 자리 잡고 있는 초가집 몇 채는 산에서 자생하는 큰 버섯처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완행열차의 엉성한 객석에 끼어 앉은 단거리 시골 승객들은 들판의 햇살에 그을린 얼굴로 생활고를 언뜻언뜻 내비치기도 하였지만, 건강한 웃음을 잃지 않으며 연신 농담을 주고받았습니다.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해학들. 도시인들보다 그들이 웃을 수 있는 여유를 더욱 지닌 듯이 여겨졌습니다. 봄이 되어 얼었던 마음들이 녹으면서 새싹처럼 웃음들이 비어져 나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배낭 속에만 넣어두고 아직 꺼내지도 않은 굴원의 시집을 읽어볼까 하다가, 온통 시로 변해 있는 자연을 읽기로 하고는 차창 너머의 풍경에서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좋은 봄을 싫어한다는 그녀의 마음을 그 시간에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녀는 봄을 시기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녀만큼 같은 대상에 대하여 좋아하는 감정과 싫어하는 감정이 한데 뒤섞여 있는 여자는 일찍이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그녀에게서는 싫어한다는 말이 좋아한다는 말과 동의어를 이루고 있는 경우가 무척 많아, 그녀의 목소리는 그냥 귀로 들어서는 혼돈을 일으키기 십상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녀의 목소리는, 듣지 않고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을 정도입니다. 또한 그것이 그녀의 기묘한 매력이기도 하였지요.
그런데 지금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영영 보지 못할 지경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혼돈이 일어나도 좋으니 그녀의 목소리를 듣기만이라도 했으면 하고 아쉬워하는 것입니다. 내가 방금, 소리를 보는 관음(觀흡)의 단계에 대해 이야기하였다는 것을 아시겠지요. 사실 내가 그녀를 관음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지 않았던들 벌써, 그녀와 나의 사이는 깨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나마 지난겨울까지 이어져 온 것도 관음의 덕택인 셈이지요. 그러나 나의 관음이라는 것도 한계에 달했는지, 흐트러져 버린 그녀와 나의 관계를 어떻게 수습할 길이 없군요.
나의 결정적인 실수, 아니 실패는 그녀의 목소리를 진정 관음했어야 할 시점에 그만 청음(聽音)을 해버린 것이었지요. 평소에는 관음을 잘하다가 왜 그때는 청음을 해버렸는지.
“나를 안고 싶으세요? 그럼 안아주세요.”
그녀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을 때, 나는 그만 관음하는 것을 까먹고 덜컥 청음을 해버린 것이지요.
물금역에 내려 역사를 빠져나오면서 흘끗 역사 지붕 쪽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거기 한자와 함께 역명 표지가 붙어 있더군요. 물금(勿禁). 말 물. 금할 금. 참으로 희한한 한자의 결합이었습니다. 원래 물금이라는 것은 순 토박이말인데 한자어를 어색하게 차용해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요. 금하지 않는다. 무엇을 금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금하지 않는 대상마저 없으니 좀 과장해서 말하면, 마치 무한한 자유의 공간 속으로 갑자기 내던져진 기분이었지요. 자유의 현기증, 자유로부터의 도피,* 뭐 이런 말들을 사용한 학자가 있기도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약간 어찔해졌지요.
아무것도 금하지 않는 물금의 세계로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두리번거리며 걸어 들어갔지요. 사람들의 표정이 정말 물금의 상태에 있는 듯했지요.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도 바로 이 물금의 상태가 아닐까요. 금지하고 있던 것을 하나씩 하나씩 풀어서 허락해주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 말입니다. 특히 사랑하는 남녀의 관계는 더욱 그렇지요. 처음에는 손을 잡는 것을 금지하다가 허락해주고, 입맞춤을 금지하다가 그것도 일정 기간이 지난 후 허락해 주고, 이런 식으로 나아가다 보면 정신과 육체의 완전한 합일에 이르는 것이지요. 그런데 윤리와 도덕, 기존 질서라는 것이 있어 여간 복잡하지가 않아요. 거기다가 종교적인 기준까지 합세하면 훨씬 착종(錯綜)*을 이루게 되지요.
그녀 역시 나에 대해 물금의 상태에 있는 듯하다가 어느새 기존의 윤리 뒤편으로 숨고, 어떤 때는 종교 뒤편으로까지 숨으며 금지 팻말을 높이 치켜들곤 하였지요. 그래서 꼭 장독대를 사이에 두고 숨바꼭질을 하는 듯했지요. 여자는 어릴 적부터 고무줄뛰기를 하며 고무 금을 사이에 두고 이쪽으로 팔짝 건너왔다, 저쪽으로 폴짝 건너갔다 하는 연습을 되풀이하기 때문인지 어른이 되어서도 금을 잘 건너오고 잘 건너가고 하는 모양이지요. 그런데 남자들은 어릴 적부터 여자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고무줄을 주머니칼로 끊어먹기를 잘하지요. 아
예 금을 없애버리는 데 익숙한 편이지요.
물금은 고즈넉하기 그지없는 평화로운 시골 마을이었지요. 거기 자전거포 옆 공지에는 서커스 천막 같은 것이 쳐져 있기도 했지요 그곳으로 들어가 보니, 마침 백금녀*가 나와서 무슨 약 선전을 하고 있더군요. 사회자는, 백오십 킬로그램의 거구 인기 코미디언 어쩌구 하며 백금녀를 소개하였지만, 내가 보기에는 백금녀 같지가 않았어요. 남자가 백금녀로 분장을 한 것도 같고 덩치 큰 여자가 백금녀 흉내를 내는 것 같기도 했어요. 그러나 사람들은 전혀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백금녀의 만담에 웃음보를 터뜨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한참 구경을 하다가 주위를 살피니 온통 여자들, 그러니까 아주머니 아가씨 할머니들뿐 아니겠어요. 당황한 얼굴로 왼쪽 건너편을 바라보니 글쎄 남자들은 모두 그쪽에 모여 있더군요. 천막을 가로지르는 버팀목에 분명히 ‘남자석’ ‘여자석’이라는 표지가 따로 붙어 있는 것을 그제야 발견하였지요. 약장수가 약 선전을 하는 천막인데도 남자석과 여자석을 엄격히 구별해놓다니. 그런데 물금 사람들은 한 사람도 어김 없이 그 구분을 지키고 있었지요. 부부가 같이 천막에 들어왔다가도 남자석, 여자석으로 따로 떨어져 앉더군요.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여자석 복판으로 들어가 깔개 위에 털썩 앉았을 때 주위 사람들이 얼마나 눈살을 찌푸렸을까.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 남자석으로 옮기면서 사람들의 표정을 훔쳐보았지요. 그러나 그 사람들은 나의 실수를 눈치 채지도 못한 듯하였지요. 자기들은 엄 격히 기준을 지키면서도 기준을 어기는 자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무관심하다는 것인지. 나는 묘한 물금의 역설을 느꼈지요. 그녀의 모순도 바로 이 물금의 역설과 통하는 바 있지요.
물금 버스 정류장에서 백칠십 원의 찻삯을 내고 양산으로 가는 버스를 탔지요. 버스가 띄엄띄엄 다녀서 그런지 시골 길을 달리는 버스인데도 얼마 있지 않아 사람들이 꽉 찼습니다. 어떤 아주머니는 왕골로 만든 돗자리를 삼만이천 원에 샀다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돗자리 자랑을 한참 하더군요. 오른편 양산천 둑 위에는 ‘양산천을 보호하자’는 플래카드가 길게 걸려 있었지요. 이곳 양산천도 근방에 있는 동양시멘트 공장 등으로 인하여 공해 몸살을 앓고 있는 모양이지요. 양산교를 지나니 곧장 버스 종점에 닿았습니다. 드디어 나는 양산에 도착하였습니다. 이제 금방이라도 내가 목적지로 삼고 온 통도사로 달려갈 듯이 거리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런데 양산이 깊은 산중에 자리 잡고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탁 트인 시가지가 나를 얼떨떨하게 하였습니다. 할 수 없이 지나가는 행인에게 통도사로 가는 길을 물었습니다.
“언양으로 가는 버스를 또 타야 합니더.”
나는 언양행 버스에 올라타 양산천을 따라 한참을 또 달려가야만 했습니다. 이제는 확실히 통도사 입구에 내리게 될 것입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경남에 있는 유명한 세 절의 이름을 어른들에게서 자주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 절 이름들은 한결같이 그 절이 위치해 있는 지명과 한덩어리가 되어 불리었습니다. 동래 범어사, 합천 해인사, 양산 통도사, 그 절 이름들과 지명은 아무리 의식적으로 따로 떼어 생각하려 해도 떼려야 뗄 수가 없었지요. 합천, 하면 머릿속에서 그대로 해인사가 떠올랐지요. 합천은 해인사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고, 해인사는 합천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지요. 동래 범어사, 양산 통도사도 말할 필요가 없었지요.
그 세 절은 나에게 절의 삼위일체처럼 여겨졌지요. 세상에 다른 절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어른들로부터 그 절들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듣다 보니, 그 절들은 어른들만이 갈 수 있는 절인 양 생각되더군요. 그래서 그런지 중학교 때까지 부산에 살고 그 이후에도 수시로 경남 지역을 드나들었으면서도 정작 합천 해인사, 동래 범어사를 찾아가 본 것은 나이 서른다섯이 훨씬 넘어서였지요. 이제 양산 통도사는 마흔이 넘어서 찾아가 보게 되는군요.
통도사는 그 이름이 주는 어감 때문인지 세 절 중에서도 가장 큼직한 절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통도, 얼마나 크고 깊은 울림으로 들리는 말입니까.
나는 종종 이런 꿈을 꾸기도 하였지요. 나는 힘들여 언덕을 올라갑니다. 그 언덕만 넘으면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언덕배기로 올라와 보니 엄청나게 큰 문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 문은 거무튀튀한 굵은 나무들로 짜 맞추어진 것으로 차라리 거대한 벽이라고 할 만합니다. 사실 벽이라고 해도 되는 것이, 어디서 어디까지가 문짝에 해당하는지 도통 가늠을 할 길이 없거든요. 비록 문짝 부분을 확인했다 하더라도 워낙 커서 온몸을 다 사용해 밀어도 끄떡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그 문, 아니 벽 앞에서 난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두 그 문 앞에 서 있으면 어느 새 마음이 편안해져 오는데, 그것은 그 문 자체가 하나의 세계요 길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 문은 꿈속에서 종종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인 하동 근방에 서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세워져 있는 듯도 했고, 남한과 북한의 경계인 휴전선 일대에 서 있는 것 같기도 하였습니다. 하여튼 내 의식 속에서 부각되는 갈등과 관련하여 그 문이 서 있는 경계가 그때그때 정해지는 듯싶었습니다.
이번에도 사실 여행길에 오르기 전에 그 문을 꿈속에서 보았습니다. 그 문은 그녀가 누워 있는 방과 내가 누워 있는 방의 경계에 세워져 있는 듯이 여겨졌습니다. 꿈속에서는, 집 같은 것은 보이지 않고 집들을 다 삼킨 듯한 거대한 문만이 서 있었습니다.
그 문이 꿈속에서 나타날 적마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까마득히 높은 문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러면 말입니다. 어김없이 문 꼭대기에 ‘통도사’ 라는 세 글자가 하얀색으로 적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통도, 통―도. 꿈 전체가 ‘통도’라는 기이한 울림으로 가득 메워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전율하게 마련이지요.
그런 꿈을 여러 번 꾸었으면서도 나는 통도사를 선뜻 찾아 나서지 못하였습니다. 어쩌면 그런 꿈을 꾸고 있기 때문에 찾아가는 것을 꺼렸는지도 모릅니다. 왜 이런 꿈을 종종 꾸는 것인가. 나 자신을 분석해보아도 그 이유를 잘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어릴 적 통도사 이름을 들으면서 그 ‘통도’라는 울림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이 아닌가. 삶에서 길이 자주자주 막히는 것을 경험하면서 길을 뚫어나가고 싶은 무의식적인 소원이 통도라는 말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대강 이 정도밖에 생각해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와 나의 사이에 막힌 길을 뚫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져 몹시 낙담한 가운데 있을 때 나는 또 그 꿈을 꾸었고, 꿈에 이끌리듯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통도사를 이제야 찾아 나선 것이었습니다. 임금에게로 나아가는 길을 찾지 못해 애태우는 굴원의 시집을 들고.
신진 마을, 삼감 마을 들을 지나 통도사 입구에 내리니 오후 세 시 경이었습니다. 안내판을 보니 거기서 통도사까지는 2.9킬로미터 였습니다. 꽤 걸어가야 할 거리였으므로 택시를 타고 갈까 어찔까 하면서 그곳 상점들 앞을 서성거리다가, 길 한 모퉁이에 세워져 있는 장거리 공중전화 박스를 발견하였습니다. 갑자기 내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는 서울에서 여러 교통편을 통하여 여기까지 오는 동안, 사실은 그녀에게 전화를 걸고 싶은 충동에 내내 시달리며 왔습니다. 고속버스가 금강휴게소 같은 데 잠시 정차한 때에도 공중전화 박스 근방에서 배회하다가 터덜터덜 버스로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그녀를 만나지 못한 두 달간 얼마나 그녀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던지. 그러나 내 전화를 받는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감히 전화번호판을 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와의 만남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이어지던 기간에도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려면 군대에서 사격 연습을 할 때처럼 일단 호흡을 정지해야만 하였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를 전화기를 통하여 듣기까지 왜 그렇게 온몸이 긴장되는지.
그런데 그녀가 나를 향하여 절교를 선포한 이 마당에 전화를 건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와 통화를 하게 되면 할 말들은 제대로 생각나지 않고 후회스럽게도 엉뚱한 헛소리들만 내 입에서 새어 나오기가 일쑤인데, 싸늘한 침묵으로 대할 그녀의 반응 앞에 내가 어떤 말들을 할 수 있을지 겁이 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나의 전화가 그녀로 하여금 절교의 결심을 더욱 굳히게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그녀와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일정 기간 내가 전화를 걸고 싶은 마음을 자제하고 그녀의 생각들이 차분히 정리되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나 자신에게 타이르고 있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에게 전화를 하고 싶은 충동이 불쑥불쑥 일어나는 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통도사 입구 마을의 한 모퉁이에 홀로 우뚝 서 있는 장거리 공중전화 박스. 나는 어느새 그 전화박스 속으로 들어가 전화를 걸고 있는 자신을 상상합니다. 이 시간쯤이면 그녀 혼자 집에 있을 가능성이 많으므로 십중팔구 그녀가 전화를 받을 것입니다. 내 목소리를 확인한 그녀는 갑자기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 것입니다. 그녀가 한번 침묵하면 그 침묵의 흡인력 이 얼마나 대단한지 나의 머릿속에 어지러이 떠돌던 언어들까지 모조리 빨아들이고 마는 법이므로, 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전에도 그녀와 나는 그렇게 전화기를 사이에 두고 긴 침묵으로 대치한 적이 종종 있었는데, 그러면 나는 그 위압적인 침묵에 압도당하여 그만 두 손을 번쩍 들고 속히 항복을 해버리고 싶기만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그 침묵에 질려버리고 말 것이 뻔한데 내가 어떻게 그녀에게 전화를 걸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나는 그 깊은 침묵의 밑바닥에서 헤어 나와 꼭 한마디 말이나마 그녀에게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여기는 통도사 입구라고.
나는 심호흡을 해가며 전화박스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습니다. 그때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여기까지 먼 길을 달려 내려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녀가 있는 곳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그녀에게 전화를 걸 수 있는 용기가 생길 것이고, 먼 데서 걸려온 나의 전화를 그녀가 매정하게 대하지만은 않으리라는(물론 얼마 동안의 침묵은 각오해야 되겠지만) 소박한 생각들을, 내가 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방금 내가 나의 생각들을 ‘소박한 생각’이라고 표현하였는데 그녀가 들으면 아마 코웃음을 칠 것입니다. 교활하기 짝이 없는 생각들을 소박한 생각이라고 둘러대었다고 말입니다. 멀리 떨어져 와서 전화를 거는 나의 ‘교활한’ 의도마저 꿰뚫어 볼 그녀이기에, 나는 결국 전화박스로 다가가던 걸음을 멈추고 말았습니다.
그녀에게 전화를 거는 일을 끝내 포기하자, 나는 한나절의 여독*까지 겹쳐 그만 온몸의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런 상태로 통도사까지 걸어 들어간다는 것은 무리라고 여겨져 포니*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는 새로 닦아놓은 신작로를 시원하게 달려 나갔습니다. 오른쪽으로 보니 양편에 아름드리 노송들이 우거진 또 하나의 길이 개천을 사이에 두고 신작로와 나란히 뻗어 있었습니다.
“저쪽 길은 사람들이 도보로 통도사까직 가는 길인 모양이지요?”
내가 어림짐작을 하자 택시 운전사가 흘끗 그쪽 길을 한번 쳐다보더니 대답하였습니다.
“그렇슴더. 원래는 이쪽 길이 없었는데 얼마 전에 차량으로 오는 손님을 위해 통도사에서 자동차 전용 도로를 새로 닦았습죠. 중들도 자가용을 손수 운전해서 타고 다니는 세상이니.”
“통도사가 돈이 많은 모양이죠?”
“아무렴요. 입장료에다 시줏돈까지 합치면 어마어마할 검 더.”
나는 오늘만큼은 절간의 축재* 같은 것을 성토하고 싶지가 않았으므로 이 정도에서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택시에서 내려 절의 경내로 다가가는 내 마음은 흥분되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내가 꿈속에서 보곤 했던 그 거대한 거무스레한 문이 내 눈앞에 나타날 것인가.
그러나 어디에도 그러한 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절의 첫 문인 일주문*을 지나고 둘째 문인 천황문을 지나고 셋째 문인 불이문을 지나 탁 트인 경내로 들어섰지만, 내가 보기를 기대했던 문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실망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꿈속의 그 문을 어디에선가 발견할 것만 같은 예감이 자꾸만 나를 경내 깊숙이 끌어들였습니다. 나는 여러 법당들과 석탑들, 샛노란 산수유꽃이 정갈하게 피어 있는 정원들을 둘러보며 점점 대웅전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어 몇 차례의 화재와 중건* 중수*를 거듭한 유서 깊은 절의 경내답게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가득 배어 있었습니다. 천 년 세월의 길이와 백 년도 채 되지 않는 우리 인생의 짧은 연한*들을 무의식적으로 비교하고 있었는지. 싸리비에 말끔하게 쓸린 절간 흙마당이 문득 허무의 광장같이 여겨지기도 하였습니다. 천 년 세월이 지난 후 그녀로 향한 나의 감정들은 저 마당의 한 터럭 흙먼지로나 남을 수 있을지. 그렇지만 지금 나의 내면을 짓누르는 그녀의 무게가 저기 오층석탑의 무게만큼이나 되는 것을 어찌 합니까.
대웅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안내판을 읽어보고 한 바퀴 건물 전체를 둘러보았습니다. 임진왜란 때 완전히 소실되었던 건물을 인조 22년에 중건하였다 하니 삼백오십 년 가까이 되는 법당인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보통 절의 대웅전과는 달리 동서남북 각각에 다른 이름의 현판들이 걸려 있습니다. 동쪽 면에는 대웅전, 서쪽 면에는 대방광전, 남쪽은 금강계단, 북쪽은 적멸보궁, 이런 식으로 어떤 문으로 들어가느냐에 따라 그 건물의 용도가 달라지는 듯이 이름들이 다르게 붙어 있었습니다. 동쪽을 제외한 다른 쪽 문들은 잠겨 있거나 접근이 불가능하여 나는 대응전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동문으로 해서 조심스럽게 법당으로 들어갔습니다. 아, 그곳은 희한하게도 온통 푸르스름한 세계였습니다. 그렇게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게 바래가는 단청은 일찍이 본 적이 없습니다. 붉은색이 먼저 퇴색되어 염염해지고* 푸른색마저 희미해지고 있는 그 단청은, 모든 사라져가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그윽하게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법당 안은, 불단을 향해 열심히 절하고 있는 고동색 바지 차림의 한 아가씨밖에 없어 고요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나는 발끝으로 왼편으로 돌아 아가씨와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 잠시 서 있다가 그만 주저앉듯이 반가부좌* 자세로 내려앉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허공이었습니다. 허공으로 인한 충격이 나를 내려앉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광경에 넋을 잃어버렸습니다.
불단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붉곤 푸른 연화문*으로 정교하게 장식된 삼 층 불단은 그 너머 허공으로 통해 있었습니다. 그 허공은 막연한 형태로가 아니라 가로누운 긴 직사각형으로 반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어떻 보면 단아한 허공이었습니다.
부처는 그 허공으로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반야심경』의 구절대로라면 부처도 없어야 마땅합니다. 나는 얼어붙은 듯 그대로 앉은 채 부처가 사라진 크 『반야심경』의 세계를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머리끝에서부터 서서히 전율이 일어나더니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법열*이라 하는지 모르지만, 설령 법열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심리적이고 짝정적인 법열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런데 법열이라는 것이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요소까지를 포함하는 거라면 나도 법열의 언저리에 앉아 있는 셈이었습니다. 허공을 향해 끝없이 절하고 있는 아가씨, 허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나. 불가사의한 상징의 힘.
한순간, 오층석탑의 무게로 나를 내리누르고 있던 그녀의 존재가, 시선이 머물고 있는 허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자 나마저도 허공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그녀도 없고 나도 없었습니다. 다만 텅 빈 삼랑진역 플랫폼에 어머니만 홀로 서 있었습니다. 허공 속에서도 법당 뒤편 금강계단의 석종부도⁕ 꼭대기가 마치 선덕여왕의 한쪽 유방처럼 봉긋이 떠 있었습니다. 그 유방의 젖을 먹고 자라는 듯 금강계단 너머로는 신선한 녹색의 숲이 우거져 있었습니다. 나는 그 석종부도 속에 모셔져 있다는 섯다르타의 사리마저 허공으.로 사라져버렸기를 바랍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허공도 법당 천장처럼 푸르스름한 단청에 덮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저 이내*가 지나가면 어스름이 오고, 어스름이 지나가면 어둠이 곧 뒤따라올 것입니다.
통도사를 나와 노송이 우거진 도보 길로 들어서니 날이 어둑어둑해졌습니다. 통도사에서 멀어질수록 절 뒤편 영취산이 점점 높아지고 우람하게 보였습니다. 무풍교에 이르렀을 무렵 다시 한 번 영취산을 뒤돌아보았는데, 아, 거기 내가 꿈속에서 보았던 거대한 문이 서 있었습니다. 그 거무스레한 문 꼭대기를 까마득히 올려다보니, 통도사라는 하얀 세 글자가 여전히 걸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통도는 ‘通道’가 아니라 ‘通度’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 다.
『세계의 문학』 56호(1990년 여름); 『통도사 가는 길』 (민음사 2005)
조성기(趙星基)
1951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7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만화경」 이 당선되어 등단한 후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아 초월과 세속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며 기독교적 구원을 탐구한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소설집 『자유의 종』 『왕과 개』 『굴원의 노래』 『통도사 가는 길』 『안티고네의 밤』 『우리는 완전히 만나지 않았다』 『실직자 욥의 묵시록』, 장편소설 『라하트 하헤렙』 『야훼의 밤』 『슬픈 듯이 조금 빠르게』 『천 년 동안의 고독』 『에덴의 불칼』 『너에게 닿고 싶다』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