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철님, 여전히 당신 콘서트는 갈 수 없네요"
[기자수첩] 내 방황기의 버팀목 '해철님'의 명복을 빕니다
어린 시절, 일가 친척 중 유일하게 서울에 사는 우리 집에는 늘 사촌 누나와 형으로 붐볐다. 공부를 잘해서 서울로 유학을 오는 사촌 형부터, 방학 때 컴퓨터, 미술 등을 배우러 오는 사촌누나까지. 그래서 늘 집이 사람으로 붐볐다.
하지만 형‧누나가 있는 게 싫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그들이 쓰는 물건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호기심을 끄는 것은 '워크맨'(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 양철 도시락 크기의 워크맨은 주인인 사촌 형이 없을 때면 늘 내 차지였다.
그 무렵 접한 노래가 신해철 2집에 수록된 ‘나에게 쓰는 편지’였다.
~ 전망 좋은 직장과 가족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 계좌의 잔고 액수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가.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을까
나만 혼자 뒤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는 걸까 가끔씩은 불안한 맘도 없진 않지만
걱정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친구여, 우린 결국 같은 곳으로 가고 있는데 ~
당시엔 정확한 뜻도 모르면서 그저 좋아서 노랫말을 외우고 다녔다. 그 노래를 얼마나 들었던지, 결국은 왼쪽 이어폰이 망가졌다. 그래도 남은 한쪽 이어폰으로 주야장천 들었다.
당시 거금 500원을 들여 신해철의 ‘나에게 쓰는 편지’ 악보를 사기도 했다. 그때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그렇게 13살 나이에 난 신해철 ‘빠돌이’가 됐다.
음악가 신해철에서 인간 신해철로
신해철의 앨범, 즉 넥스트(N.EX.T) 앨범이 나오면 꼭 샀다 (신해철은 2집 앨범을 낸 이후, 그룹 넥스트를 결성했다). ‘도시인’을 들으며 ‘회사원은 아침에 늘 우유 한 잔을 마시는구나’ 생각했고, ‘인형의 기사’를 들으며 누군가와 연애를 하다 헤어져도 그 사람을 영원히 사랑하리라 다짐하기도 했다. '아버지'를 들으며 내 아버지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됐고,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해'를 들으며 세상의 편견을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다 신해철이 대마초 혐의로 구속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중학교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토큰판매소 앞에 걸린 스포츠지 1면 기사였다. 다시는 신해철 노래를 들을 수 없게 됐다고 생각했다. 절망이라는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신해철은 내게서 멀어지는 듯했다. 당시만 해도 대마초를 핀 가수는 방송이나 라디오에 나올 수 없었다. 인터넷이나 케이블이 없었던 시대라 신해철의 노래를 들을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형과 MBC 라디오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듣고 있었던 때로 기억한다. 이문세의 오프닝 멘트 뒤에 신해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의심했다.
육교 위의 네모난 상자에서 처음 나와 만난 노란 병아리 얄리는 처음처럼 다시 조그만 상자 속으로 들어가 우리집 앞뜰에 묻혔다. 나는 어린 내 눈에 처음 죽음을 보았던 1974년의 봄을 아직 기억한다.
나 역시 그 노래를 들었던 1994년을 잊지 못한다. 형과 둘이 얼싸 안으며 환호성을 질렀던 기억이 난다. 곧바로 저금통을 털어 넥스트 2집을 사기 위해 온 동네를 돌아다녔다.
당시 발표된 앨범들은 내 척박했던 중‧고등학교 시절, 단비 같은 존재였다.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해’, ‘The Ocean’, ‘The Power’, '일상으로의 초대', 'hope', ‘우리가 만든 세상을 보라'…. 어떤 날은 '껍질의 파괴'를 들으며 종일 홍대 거리를 쏘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신해철 음악에 온전히 기대었던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1990년대 후반에 질풍노도의 청(소)년 기를 보냈던 이들에게 넥스트의 노래는 또 다른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였다.
그랬던 넥스트가 해체했다. IMF로 세상이 시끄러웠던 1997년 겨울이었다. 누구 말마따나 나의 절반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후 신해철은 모노크롬, 비트겐슈타인 등으로 음악 활동을 이어나갔지만, 자연스럽게 그의 음악을 먼발치에서 응원하는 팬으로 남게 되었다.
대신 사회를 향한 그의 발언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MBC <100분 토론>에서 간통죄 형사처벌 반대, 대마초 흡연 비범죄화 등 사회에서 금기시하는 부분을 거침없이 말하는 모습을 보며 새삼 반했다. 당시에는 음악인 신해철보다는 인간 신해철에게 더욱 끌렸던 듯싶다.
팬심이 발동한 신해철과의 인터뷰
이후 언제부터인가 신해철은 대중에게서 멀어졌다. 이렇다 할 사회적 발언도, 음악 활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올해 세상에 다시 나타났다. 7년 만에 새 앨범을 냈다. 반가웠다. 여전히 음악 활동을 하는 그에게 감사했다.
그 마음이 전달된 걸까. 감사하게도 그를 만날 기회가 생겼다. 타 매체 문화부 기자가 신해철을 인터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때 만나지 않으면 언제 만날 수 있으랴’ 하는 생각에 인터뷰에 끼어들었다.
인터뷰가 진행된 2시간 동안 가슴이 두근거렸다. 여전히 거침없이 말했고, 여전히 자신의 음악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다행이라 생각했고, 행복하다 느꼈다.
인터뷰가 끝난 뒤 결국, ‘팬’심을 참지 못하고 그에게 ‘고백’했다. 당신을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고, 당신의 음악이 나를 절망에서 벗어나게 해줬다고, 당신이 대마초를 피고 사라졌을 때는 마음이 아팠다고, 넥스트 해체 때는 내 몸의 절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고, 넥스트 콘서트에 못 간 게 천추의 한이 됐다고, 이런 말을 당신에게 할 수 있어 오늘 매우 행복하다고….
본의 아니게 팬 미팅자리 같은 훈훈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신해철이 고맙다는 말을 내게 전했다. 버벅거리면서도 진심을 담아 말하는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아직 눈에 선하다.
게다가 넥스트 콘서트를 못 간 게 천추의 한이 됐다는 내 말이 그를 미안하게 했나 보다.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서는데, 신해철 매니저가 나를 붙잡았다. 신해철이 다른 스케줄로 급히 사무실을 나가면서 나에게 앞으로 모든 자신의 콘서트 표를 보내주라고 했다는 거였다. 세심한 그의 배려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난 여전히 그의 콘서트를 가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도 갈 수 없다는 현실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늘 내 편이 되어주었던 그의 명복을 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