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 문정남씨 10.000산 등정 기념산행.
2014년 6월 16일.(충북 청원 낭성면 단제산.452m) 1.842회 산행.
( 7.5km/2시간 30분)
오늘로서 8100산을 등정하신 문정남 선배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자식을 제아무리 잘 키워도 부모는 프로가 될수는 없는것처럼 산꾼에게도 영원한 프로는 없는것입니다.
순간 실수가 사고로 연계될수있는 가능성은 언제던지 있는 것이기에 한시도 방심할수없는 어려움과 같이하는 선배님.
부디 안전에 유의 하셔서 9.000산, 10,000산을 등정하는 그날까지 건강한 모습으로 항상 우리와 같이하기를 기원합니다.(2013년 1월 8일.경북 군위 부계봉/방태산에서)
고디미 단재. 신채호 사당앞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다시 차를타고 내려와 개념도상 붉은 선을따라 산행을 시작.
10시도착 단체사진 찍을 준비에 바쁘다.
단체사진을 찍고 다시 승차.
다시 귀래리 마을 입구로 내려와 산행을 시작한다.
오늘은 산행이 목적이 아니고 문정남 선생님 10.000산 등정 기념행사및 축하 산행이다.
입구에는 뚜렷한 길이 없어 적당한곳으로 치고 오른다.
마루금에 도착하니 산길이 뚜렷하고 상태도 괜찮은 편이었다.
20여분 오르니 새로난 임도가 있어 가로질러 오른다.
밤꽃이 한창이고 부근의 산은 벌목을 많이 한 상태이다.
오늘은 산행거리가 짧아 바쁘게 운행하는 사람이 없었다.
미원 310(452m)삼각점이 있는 이곳을 단재산으로 부르기로했다.
글자식별이 불가능한 삼각점.
김신원대장님과 민들레님.
오늘의 공주님들,왼쪽부터 하문자, 정경자. 윤인순, 허총무(청산수산악회)
박수웅 선배님께서 훈시를 하는 모습 같아요.
신산경표저자 박성태님이십니다.
문정남 선생님 10.000산 등정 기념(단재산)
하문자. 문정남, 심용보님.
약초재배지라며 출입을 통제하였지만 넘어갔습니다.
처음 만났던 임도가 이곳을 통과합니다.
무덤앞에 피어있는 참나리꽃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산행도 다 되어가는데 마침 의자가 있어 물도 마시고 모두들 쉬어갑니다.
문정남 선배님 10.000산등정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금년 75세)
심용보님(77세)과 김영오님.
단재 신채호 묘소.
아래 너와집.
깨끗하게 관리되어 보기 좋았다.
영정을 모신곳.
안내판.
정기문(正氣門)
안내글이 없어 알수는 없었지만 신채호 선생님과 그의 부인이시겠죠?
단재기념관.
맞은편 화단의 해당화.
고드미마을 유래.
몇집 안되는 마을,
사당과 주차장의 전체모습.
전체 산행시간 3시간 후 식당으로 이동.
이곳은 바로 금남호남정맥이기도 한 충북 청원군 낭성면 머구미 고개였다.
낭성 유황오리전문집에서 오리불고기로 점심식사.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계속 산과의 인연 즐기시기 바랍니다.
만산 회장님께서 축하패 전달,
제자로부터 화환도 받았지만 청산수산악회장님으로부터 기념패 전달도 있었지만 사진을 찍지 못했다.
김은님씨의 사회로 건배.
김은남선생님 진행하시면서 수고 많았습니다.
식당뒤 조각 전시장.(야한 작품도 많았지만 다 올리진 못함)
식당앞 노란 나리꽃.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1.7~1936.2.21)선생은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림마을 (현, 대전 중구 어남동 233번지)에서 유생인 고령 신씨(高靈 申氏) 광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은 이곳에서 8세까지 어린시절을 보냈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충북 청원으로 이사를 했다.
선생은 일제 시대에 역사가, 언론인,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으며 26세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을 버리고 황성신문의 기자가 되었다.
1905년 황성신문이 폐간되고 그 다음해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초빙되어 민중을 계몽하고 정부를 편달하였다.
1910년 4얼 망명길에 올라 블라디보스톡에서 신민회 회원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1919년 3월 1일 직후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선생은 이승만 대통령의 위침통치에 반대를 한다.
신채호선생 생가에 있는 선생의 동상.
1923년 의열단의 이념과 운동방향을 천명한 조선혁명선언'은 항일민족운동 사상 가장 정교하게 독립운동의 이론과 방향을 제시한 문서이다.
'조선혁명선언'의 첫 구절은 아래와 같이 시작된다.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여
온간 만행을 거침 없이 자행하는 강도정치가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함과 동시에
혁명으로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하는것이
조선민족의 정당한 수단이다. 』
선생은 1926년 대만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염출하는 행동에 나섰으나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여순 감옥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르다 1936년 11월 7일 사망한다.
한(韓)나라 생각
나는 네 사랑 너는 내 사랑
두 사람 사이 칼로 썩 베면
고우나 고운 핏덩이가
줄 줄 줄 흘러 내려오리니
한 주먹 덥썩 그 피를 쥐어
한나라 땅에 골고루 뿌리리
떨어지는 곳마다 꽃이 피어서 봄맞이 하리
-1910년 압록강을 건널때 단재 선생이 읊은 시-
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