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시민모임이 전국 8239개 주유소(SK계열 제외)를 조사한 결과 지난 6일 이후 18일까지 휘발유 값을 L당 100원 다 내린 주유소는 91곳으로 1.1%에 불과한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 1월 14일 이명박 대통령이 "기름 값이 묘하다"고 발언한 이후 정부는 100일 가까이 휘발유 값 인하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는 이렇게 허망한 걸로 나타났다.
대통령 말 한마디에 관료들이 나서 휘발유 값을 강제 인하하려 했을 때부터 "행정력을 동원한 밀어붙이기는 시대를 잘못 읽는 것"이라는 지적이 나왔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금방 값을 내릴 듯이 태스크포스팀을 발족했고, 기획재정부와 공정거래위원회·지식경제부가 총출동해 정유회사들을 압박했다. 정유회사들이 반발하자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은 "내가 회계사 자격증을 갖고 있다. 직접 원가(原價)를 계산해보겠다"고까지 했다. 그러고도 값 인하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찾지 못하자 관료들은 '눈 딱 감고 정부 체면을 살려달라'고 정유업계에 매달리기에 이르렀고, 지난 3일 SK를 시작으로 GS칼텍스·에쓰오일·현대오일뱅크가 L당 100원을 인하하겠다고 발표했었다.
그런데도 값을 내린 곳은 1.1%에 불과하다니 '혹시 더 싼 곳이 있을까' 하며 주유소를 옮겨다녔던 운전자들만 헛고생시킨 셈이다. 이번 조사에서 직영점들조차 값을 내리지 않은 곳이 적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처음 말을 꺼냈던 대통령과 회계사 자격증까지 꺼내 들었던 장관의 체면만 구길 대로 구긴 셈이다. 덩달아 정부의 경제 정책에 대한 신뢰까지 땅에 떨어졌다.
대통령·장관·관료부터 소비자들까지 모두 패자(敗者)가 된 반면, 4대 정유회사들은 올 1분기에도 80~314%까지 순익을 늘려 회사당 3000억 내지 1조원까지 순이익을 냈다고 한다. 이들은 휘발유 값 논쟁이 한창이던 2월에도 정부와 소비자를 비웃듯 임직원들에게 300~600%씩 성과급을 주었다. 사정이 이렇다면 정부가 무능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정부가 휘발유 값을 내려 서민층의 고통을 덜어 주겠다고 작정했다면 공연히 힘에 부친 우격다짐을 벌일 게 아니라 정유사들의 이익 구조와 유류세 등을 면밀하게 종합 검토해야 한다. 그러고서 정부도 양보할 것을 양보하면서 정유사들의 협조를 부탁하는 게 백번 나을 것이다.